3화
벽 곳곳에 걸려있는 명화는 모두 지고하신 별의 힘을 품고 있다. 하지만 같은 힘을 품고 있더라도 담고 있는 크기가 다를 것이다.
역시나 어렵지 않게 별님께서 부탁한 ‘A급 성물’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곧장 힘이 느껴지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누나.”
“응?”
“누나는 왜 그러케 거비 업서요?”
꼬마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명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키에에엑!!
명화 안에서 입만이 있는 얼굴이 튀어나왔다. 나는 단숨에 그 얼굴을 그림에서 찢어내며 말했다.
“누나가 원래 겁대가리가 없어.”
명화 속에서, 아니, 성물에서 튀어나온 괴물 때문인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같은 그림이 잔뜩 걸려있던 벽이 사라지고 전시회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00:43:17】
흘러가던 시간이 멈춘 것을 보며 나는 아이를 내려주었다.
[의뢰인, ‘별이 빛나는 밤에’의 A급 성물, ‘별이 빛나는 밤’을 획득하셨습니다.]
[성좌, ‘별이 빛나는 밤에’가 당신께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어휴, 감사 인사는 됐고 보상이나 주세요. 어디에 써먹겠나 싶지만 언제인가 쓸데는 있겠지.
“누나.”
“왜, 또.”
“누나는 천사에요?”
“쿨럭!”
소란이 가득한 전시장 내부에서 애가 웬 헛소리를 하나 싶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말했다.
“천사님이 들으시면 욕할걸.”
“삼쵼이 누나 가튼 사라믄 천사라고 해써요.”
“삼촌이 이상한 걸 가르쳐 줬네.”
저 멀리서 아이를 찾는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꼬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엄마야?”
“웅!”
“엄마한테 가봐.”
“웅!! 천사 누나 고마버요!!”
와, 칭호 ‘천사’를 획득했습니다. 빠밤.
꼬마는 그대로 짧은 다리를 움직여 달려 나갔다. 멈춰있던 타이머가 사라진 게 보였다.
[A급 성물 ‘눈썹 없는 여인의 초상화’가 창고에 보관되었습니다.]
[의뢰가 종료되었습니다.]
[칭호, ‘신살자(神殺者)’의 모든 권능에 제한이 가해집니다.]
수월하게 의뢰 하나를 끝냈다.
* * *
수월하게 의뢰를 끝냈다.
그건 도하운의 착각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도하운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느긋하게 옮길 수밖에 없었다.
포털 좀 열어달라는 길드장의 말을 모두가 무시했기 때문이다. 귀환의 길드원들이 길드장의 말을 무시하는 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길드가 창설됐을 때부터 그랬다.
도하운은 난데없이 길드장이 됐을 때 언제, 어디서, 우리가 왜 만나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며 한데 모이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신살자(길드장)| : ???
|신살자(길드장)| : 왜 아무도 없음?
|9서클대마법사| : 일하느라 바쁘죠!!
|용사| : 나도 일하느라 바쁘단다.
|북부대공| : 야자여~!
|무림제일고수| : 아이 원츄 프리덤!!
|정령사| : 굳이 만나야 될까요――^^?
|마왕| : 네 녀석이 짐이 있는 곳으로 오거라.
|신살자(길드장)| : ㅅㅂ
|9서클대마법사| : (૭ ᐕ)૭?
참고로 도하운이 만나자고 정했던 날은 주말 오후였고 장소는 남들 눈이 닿지 않을 한적한 공원이었다.
아직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가 붙은 길드원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지만, 도하운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다.
그야, 지금도 드래곤 슬레이어는 도하운의 메시지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하운은 길드가 만들어진 지 5년이 넘어가는 데도 길드원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내 팔자야…….”
어차피 의뢰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변장’이라는 기능이 활성화되었으니 누가 도하운을 알아보고 붙잡을 일도 없다.
도하운은 그렇게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게 실수였다.
“빈 씨! 괜찮아? 다친 곳 없어?”
“다친 곳이라니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적합자’인 내가 심사에 휘말렸을 리도 없거니와 이 몸을 다치게 할 녀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 뭐, 그렇지.”
후드 티를 뒤집어쓴 남자의 시선은 전시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도하운의 뒤를 향해있었다.
【STATUS 파악 불가】
“…각성자가 아니었나.”
“응? 누구를 보고 하는 소리야?”
남자는 묻는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도하운에게 스킬을 걸었다.
【HIDDEN STATUS OPEN】
그 순간 붉은 시스템 창이 남자의 시야에 어지럽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Main]: 신살자(봉인)
[Sub]: 글로리아의 귀환자(Ex), 회귀자(봉인), 성녀(봉인), 검성(봉인), 살인귀(봉인), 전장의 승리자(봉인), 전장의 학살자(봉인), 전장의 배신자(봉인), 절대 선(善)의 지배자(봉인), 절대 악(惡)의 지배자(봉인), 종말의 구도자(봉인), 종말의 인도자(봉인), 글로리아의 배신자(Ex)
남자가 펼쳐진 창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빈 씨? 안색이 창백한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빈 씨? 빈 씨!!”
남자는 도하운을 붙잡기 위해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도하운은 이미 전시장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건물을 빠져나가는 검은 세단이 보인다. 그것도 잠시, 돌발성 적합자 심사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은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혀를 차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글로리아.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되새기면서 말이다.
* * *
“네가 미쳤지?!!”
오우, 시끄러. 나는 두 귀를 틀어막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카페 갔다던 애가 왜 거기서 나와! 왜!!”
저렇게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분은 나의 쌍둥이 남동생인 ‘도하인’ 되시겠다. 그럼 너야말로 던전 공략하고 나온 애가 반 고흐 전시회는 왜 온 건데.
“돌발 심사 열렸다고 해서 와봤더니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고!!”
아하, 심사 때문에 왔었구나.
돌발성 적합자 심사는 악명이 높은 만큼 강한 각성자가 탄생할 확률이 꽤 높았다.
센터가 데리고 가기 전에 눈도장 찍으러 왔었나 보다.
“도하운!! 대답 안 해?!”
“아! 무슨 대답!!”
끼익―!
도로를 매끄럽게 내달리던 검은 세단이 돌연 날 선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나는 안전띠를 붙잡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미친 새끼가! 나는 지금 너와 달리 일반인!! 까닥하면 죽는 물몸이라고!!
“너 오빠한테 다 말해!!”
“너나 말해! 유급 떠서 정신머리 가출했냐? 반 고흐 전시회에서 뭐 하고 있었어? 아니, 어떻게 간 건지부터 말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하운.”
“내가… 반 고흐의 오랜 팬이거든.”
“개소리 집어치우고.”
젠장.
이렇게 도하인 새끼를 마주치는 건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인데.
이렇게 예상 밖의 상황을 마주치면 참 곤란했다. 내가 차원을 이동했다가 돌아온 ‘귀환자’라는 것과 나와 같은 귀환자들이 모여있는 길드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밝힐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밝힐 생각이 없었다.
별님들의 의뢰가 언제까지 길드로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가족들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도하운’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나는 도하인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다.
망할.
암만 굴려도 적당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적당히 말을 꾸며내고 싶어도 눈치 빠른 도하인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아차릴 거다.
도하인을 망할 하인 놈이라 부르며 놀려대고는 하지만 이 새끼는 오빠가 이끌고 있는 길드, ‘하운(夏雲)’의 2인자 되는 놈이다.
‘하운’이 그저 그런 길드라면 모르겠지만, 하운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유명한 길드였다.
인기는 또 어떻고.
게이트가 터지면 즉시 인력을 파견하여 인명을 구조하고 그 피해를 수습하는 데 힘을 보탠다.
선의의 길드, 선망의 길드. 그게 바로 하운이었다.
매스컴에서 내 이름이 나올 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오빠는 나를 잊지 않으려고 길드를 그렇게 세운 거라고 하지만…….
“길드 이름 바꿔주면 말해줄게.”
“그러니까 개소리 집어치우라니까?”
역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 도하인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나는 두 귀를 틀어막으며 딴청을 피우기로 했다.
* * *
“…이런.”
“무슨 일 있습니까, 보스?”
“하운이가 돌발 심사가 열린 전시장에 있었다나 봐.”
하운의 주인, 1인자 ‘도하준’의 말에 그의 비서인 은율이 미간을 좁혔다.
“무사하답니까?”
“전시장 들어가기 직전에 심사가 열려서 휘말리지는 않았대.”
“혹시 모르니 힐러를 보낼까요?”
“하운이가 거절할걸. 그리고 하인이가 이미 살펴봤대. 괜찮다고 하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율은 그 얼굴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걱정되시면 그래도 보내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한강 대교 쪽도 아직 수습 안 됐는데 인력 돌리면 말 나올 거야.”
“한강 대교는 수습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율의 말에 도하준은 애매한 웃음을 보였다. 그의 말대로 오전에 열렸던 2급 게이트는 하준이 도착하기도 전에 닫혔다.
즉, 피해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게이트가 닫혔다는 말이다.
그래서 문제였다.
2급 게이트는 최악의 경우 ‘군’ 단위의 지차체가 사라져야만 닫히는 게이트였다.
그런 재앙이 소리 소문도 없이 닫혀버리다니.
하준은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어쨌든 하운이는 이상하면 내가 살펴볼 테니까 괜찮아.”
율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데 계속 권유를 하는 것도 그랬다.
도하준의 쌍둥이 동생들은 그와는 아홉 살 차이 나는 어리다면 어린 동생들이었다.
‘반오십이 뭐가 어릴까 싶지마는.’
하지만 하준에게 동생들은 어리기만 한 아이들이었다. 특히 여동생인 ‘도하운’은 하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