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키보드를 돌려줘요

“그러니까 이제…… 나를 만나러 와 줘야지.” 친구의 추천과 몹쓸 호기심으로 수명 절감 노가다 게임을 시작한 주이온. 10레벨 만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게임을 삭제하려다, 갑작스러운 정전과 함께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하필이면 이 더럽게 재미없는 게임에 빙의하다니? 키보드와 마우스로 할 때도 중노동이던 게임의 퀘스트를 직접 하려니 더더욱 앞날이 캄캄하다. 키보드를 돌려 달라고 외치며 고통받던 중, 우연히 만렙의 플레이어 서윤희를 발견하고 버스를 탈 생각에 눈을 빛내는데……. *** “네?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오빠가 부탁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대사 선택지가 나타났다. ▶뭘 도와주면 될까요?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지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저걸 고르면 내 평판이 박살 날 것이다. 파르르 떨며 첫 번째를 골랐다. “손님 접대에 쓸 벌집이 필요해요! 바깥의 벌꿀 채취장에서 벌집을 여덟 개만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벌집 따기는 네가 더 잘하는 거 아니냐? 속으로 욕을 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벌들이 붕붕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퀘스트는 머리 방어구를 양봉용 모자로 바꾸면 피 닳을 일 없이 끝나지만,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 막 시작한 모험가의 초라한 피라도 꿀벌의 공격은 타격이 크지 않았고, 두 번 정도 물약을 먹으면 된다. 중간중간 공격도 하면 꿀벌이 잠시 물러나니 양봉 모자를 만드느라 고생하는 게 바보짓이었다. 벌집 여덟 개. 나는 심호흡을 하며 꿀벌 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악!” 들어갔다가 곧바로 뛰쳐나왔다. ‘씨발! 씨발!’ 그래픽 꿀벌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실제 꿀벌은 엄청났다. 톡톡 쏘일 때마다 끝이 뾰족한 장도리로 얻어맞는 것 같았다. 결국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와야 했다. 다행히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자 따라오진 않았다. 양봉용 모자가 따로 있는 이유를 알겠다. 아닌가. 양봉 모자는 누가 봐도 재미로 넣은 아이템이다. 그러니까 탱커도 아니고 원거리 딜러 체력으로 맞으면서 끝낼 수 있지. 기획자가 장난으로 던진 모자에 내가 맞은 것이다. 설마 모자를 넣은 놈도 사람이 게임에 끌려와서 미친 꿀벌을 상대해야 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누군가가 질문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퍼뜩 생각났다. [마이마이] 양봉 모자 재료 어디서 구해요? 제곧내 └[맛있는크록스] 그걸왜구함? └[마이마이] 만들고 싶어서요 └[맛있는크록스] 시간존1나많아요? └[마이마이] 네 └[맛있는크록스] 아껴쓰세요; └[마이마이] 님이 무슨상관이에요 알려줄거 아니면 꺼지세요 └[맛있는크록스] 맡겨놨나 씨1발아 밀랍은 라바리 초원 가면 단단한 꿀벌이라고 있음 걔 치면 나옴 고급실은 만들어야됨 지푸라기 5개 물풀 2개 초원에서 위로 쭉 가면 초가집마을 나옴 거기 초가집 문 하나씩 열어보면 랜덤으로 지푸라기 나오고 물풀은 상점에서 사 재료합성하면 고급실 되니까 이거 다섯개 만들어라 그거 다 가지고 재봉사 찾아가면 500골드 받고 만들어줌 염색약은 니도 알겠지 └[tilltill] 형 정말 착하다 └[No95] 복받으실듯 여기 좋은 옥장판이 있는데요 └[마이마이] 헐...감사합니다 근데 님은 이거 어떻게 알았어요? └[맛있는크록스] 어떻게 알았겠냐? └[호도대장] ㅋㅋㅋㅋㅋ해봤나봐 시간 좀 아껴쓰세요ㅋㅋㅋㅋㅋㅋㅋ └[마이마이] 감사합니다ㅠㅠ └[법사일짱] 호구가 또 └[맛있는크록스] 지1랄마 이딴 망겜하는 니도 존ㄴr게 호구새1끼거든 순간 나의 기억력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게시판을 직접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응? ‘응?’ 읽고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눈앞에 게시판이 떠올라 있었다. 게임의 인터페이스만큼 뚜렷하진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흐리지만 읽히는 건 제대로 읽혔다. 헉. 질문 게시판에 혹시 게임에 갇힌 사람이 없는지 글을 써 보면 답이 달리지 않을까? 기대에 가득 차서 게시판을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지만 만질 수는 없었다. 물에 비친 것처럼 손으로 휘저을 때마다 흐려지고 갈라졌다. 시험 삼아 스킬을 쓸 때처럼 머릿속으로 ‘게임 갇히면’, ‘게임이 현실’, ‘게임에서 못 나가는데’, ‘게임 로그아웃’, ‘게임 속에 들어왔는데’ 따위를 열심히 생각해 보았지만 양봉 모자 만드는 법밖에 읽을 수 없었다. 참 나, 기가 막혀서…….

회차
연재목록
별점
날짜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