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황제에게 버림받은 후궁 중 몇몇이 몸을 던졌다 하여 귀신 나오는 흉소로 낙인찍힌 북궁 호숫가. 이경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이 비밀 장소를 수왕(?)에게 들켜 버리고 만다. 지독히도 운이 없어 수왕에게 약점까지 잡힌 이경은 벗 운운하는 그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한데 이틀 전에 입었던 옷이구나?” 뒷짐을 진 채 이경의 주위를 한 바퀴 돈 수왕이 불쑥 말을 던졌다. 이경은 빠르게 전환되는 화제를 어렵게 따라잡았다. “…빨았습니다.” 어제 빨아 햇볕에 잘 말린 옷이었다. 냄새가 날 리 없는데…. 이경은 수왕의 지적에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아니, 아니.” 수왕이 손을 내저었다. 뭔가에 틀어진 심기를 애써 차분히 가라앉히는 기색이었다. “네게서 냄새가 난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내 말뜻은…, 옷이 그것밖에 없나?” “아닙니다. 여벌의 옷이 있습니다.” “있어? 하면 무슨 저의로 굳이 그 옷을 입고 나온 것이냐?”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었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수왕이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인 건 이미 눈치챘다. 하나 갑자기 저의 운운하며 불쾌해하니 이경으로선 도통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한편 북궁의 궁인인 라진(수)에게 흥미를 갖게 된 진혜운은 황제의 신분을 감춘 채로 그와의 만남을 이어가는데…. 맙소사. 옷을 기워 입었다. 뭐, 좋다. 가난은 황제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란 걸 진혜운도 알고 있었다. 건국 이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는 제국이지만, 빈민가엔 여전히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존재했다. 하나 황궁의 궁인은 다르다. 솔직히 이 황궁에서 비단옷도 아니고 무명옷을 기워 입는 궁인이 있다니, 진혜운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혹 그날 옷을 찢은 것에 대해 항의하려고 이리 기워 입고 나타난 것이냐고 돌려 물었다. 하나 라진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진혜운은 꾸미지도 않고 나타난 라진의 모습에 신선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존심이 상했다. 진혜운은 황제임을 떠나 본인이 얼마나 매력 있고, 이 얼굴이 타인에게 어떤 마음을 불러일으키는지 너무 잘 알았다. 해서 라진의 반응을 기대하며 나름 차려입고 나왔는데, 그는 진혜운과 달리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차림새였다. 아주 궁상이 철철 넘쳤다. 좋다고 매달리는 건 질색이지만, 진혜운에게 저리 무심한 사람도 처음이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다른 걸 다 떠나서 이건 성의 문제였다. 진혜운은 라진을 어이없이 보다가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일러 주었다. “옷을 꿰맸어.” “찢어졌기 때문에 꿰맸습니다만….” 한데 라진은 여전히 속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 내가 찢었지.” 이쯤 되니 처음의 당혹감은 사라지고 이 상황이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별 뜻 없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 계속 의미를 부여하며 물고 늘어지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그리 마음을 가라앉히다 보니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건 네가 직접 바느질한 것이냐?” “북궁에 유폐된 한낱 궁인의 신분으로, 어찌 시중드는 이를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본인이 손수 바느질했다는 건데, 진혜운은 무신경한 라진이 한 땀 한 땀 정성껏 바느질하는 모습이 영 상상이 안 되었다. 하면 친히 보는 방법도 있지. 살짝 무릎을 굽힌 진혜운은 땅바닥에 늘어진 장포 앞자락을 발로 밟았다. 그런 다음 단번에 무릎을 폈더니, 쫘악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찢겨 나갔다. “이런, 옷이 찢어졌구나.” “…….” “좀 꿰매 주련?” -잠시 후 진혜운은 라진이 옷을 꿰매 입고 나타난 것 이상의 충격을 또다시 경험한다. “…하.” 경첩이 떨어져 나가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 북궁 정문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아무리 황궁 안에 있어도 그렇지, 다 쓰러져 가는 이 폐가에 궁이란 이름을 붙이는 게 과연 합당한가 생각 중인데, 라진이 먼저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녹슨 경첩에선 삐걱, 하고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 계시지 말고 들어오십시오.” “정말 그럴까?” 진혜운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옷을 찢는 수고까지 해 가며 고양이의 본거지까지 왔다. 고작 이 정도에 물러설 순 없었다. 또 저 고양이가 바느질하는 묘기도 꼭 두 눈으로 보고 말 테다. “…….” 안의 사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잡초가 무성한 후원과 썩은 연못, 그리고 해가 들지 않는 음침한 전각이 진혜운을 반겼다. 슬쩍 라진을 돌아보았다. 보통 행색이나 사는 꼬락서니가 형편없으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것도 없었다. 보수로도 해결될 거 같지 않은 저 낡고 음침한 전각이 무슨 금으로 지어진 듯 당당했다. “반짇고리를 가지고 나올 터이니 저쪽 석탁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전각보단 바깥이 더 밝고 쾌적합니다.” “상관없다.” “귀하신 존체에 해가 될까 두려워 그렇습니다.” “내 지병이 있긴 하나 평소엔 멀쩡하다. 예서 잠시 머무른다고 무슨 병이라도 날까?” “하오나….” “아니면, 안에 내가 보면 안 될 거라도 숨겨 둔 것이냐?” 괜한 오해를 사기 싫은지 라진이 그제야 순순히 물러선다. “…아닙니다. 들어오시지요.” 황제에게 버림받거나 죄를 지은 후궁들이 북궁에 유폐된다더니, 이곳은 궁이란 이름을 붙인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전각을 응달에 지어 놓아 햇볕이 짱짱하게 내리쬐는 낮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음습했다. 라진의 우려가 빈말이 아닌 게 이런 곳에서 사흘만 지내도 폐병에 걸릴 것 같았다. 어제 그를 상대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고작 몇 합 만에 쉬이 호흡이 달리는 게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이곳에서 사 년을 지낸 여파로 폐가 나빠진 모양이었다. “흠.” 들어가 살피니 세간이 따로 놀았다. 미적으로도 균형이 맞지 않았고 중구난방이었다. 어떤 물건은 북궁과 어울리지 않게 사치스러웠지만 이가 나갔거나 문짝이 비틀어지거나 하는 식으로 망가져 있었고, 또 어떤 물건은 거지한테 적선해도 벌컥 화를 낼 만큼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북궁이라도 최소한의 의식주는 지원될 텐데, 아무래도 궁내부에서 운영비를 착복하는 것 같다. 한번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진 쪽을 보니 자개함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문짝이 비틀어진 장롱을 열어 보았다. 진혜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너무 자신을 의식하지 않아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는데, 장롱을 열고서야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었다는 라진의 말을 이해했다. 확실히 여벌이 있긴 한데 죄다 같은 흑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