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72화
2부 외전 15화 태량붕탁(3)
태평성대를 이룩한 조선은 나날이 대외 영향력을 넓혀갔다.
지나치게 먼 거리라 서양의 상인들이 조선까지 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외부의 영토인 여송과 호주, 그리고 미주를 통해 교류하는 일이 잦았다.
1606년 왕위에 오른 이준(浚)은 집권 초창기의 실수, 서애 유성룡의 사례를 만회하겠다는 듯 젊은 관료를 대거 파견하며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준이 말년에 얻은 인재가 바로 송시열이었다.
“송시열 자네는 젊은 나이에 빼어난 학식과 근골을 겸비하고 있으니 어디에 두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이러한 젊은 관료에게 세상을 견문시키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닐 것 같군.”
“전하의 하해와 같은 뜻을 온몸을 다 하여 수행하겠나이다.”
조선의 관료는 참하관(參下官: 정6품 관료)으로 승진하려면 외방에 부임해야 하는 법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이준은 이 제도를 개량하여 젊은 관료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이들을 정기적으로 세상에 보내 각종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재주가 부족하면 외방에 부임하며, 재주가 평범한 자는 인도나 솔로몬 같은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다녀오지만, 송시열과 같이 재주가 빼어난 자는 조선을 제외하면 가장 발달한 서양으로 향하였다.
송시열은 프랑스 왕국에 방문하여 법률과 학문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한 법률가는 송시열에게 크나큰 가르침을 주었다.
“자네는 법률가라면서 산학(算學)의 재주가 너무나 뛰어나군. 내가 법을 알아보러 왔지 산학을 알아보러 온 사람이 아닌데. 그나저나 산식의 최댓값을 알 수 있다? 내 머리가 아파오는군.”
“머리가 아픈 수준에서 끝나니 자네의 재주가 뛰어난 것일세. 수학을 좀 안다는 사람 백 명에게 물어보아도 두어 명 정도만이 자네와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법률가로서 송시열을 만난 피에르 드 페르마는 평소 습관대로 송시열에게 수없이 많은 문제를 내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수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이를 차근차근 풀어나갔지만 결국 최초의 미분을 완전히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새로운 수학, 불완전한 미분을 완벽히 이해할 방법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은 것만 하여도 대단한 일이었다.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 패도(플랭크)자세를 취한 송시열을 일으킨 페르마는 손을 맞잡으며 말하였다.
“자네가 조선의 달력으로 1607년 말에 출생한 사람이니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사람이라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자네처럼 뛰어난 사람이 별로 없으니 붕우(朋友)가 되지 않겠는가.”
“붕우가 되자 하였는가? 내 벗의 체격이 이렇게 부족하니 효심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뿐일세. 내가 머무르는 동안 자네는 나에게 산학을 가르치고 나는 자네에게 효도를 가르쳐주겠네.”
송시열의 두뇌가 수학으로 고통을 겪는 것과 정비례하여 페르마의 근육이 입신체비로 고통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 우정의 교환을 견디다 못한 페르마는 수많은 사람들을 소개해주어 조금이라도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려 하였다.
마침 조선의 신진 관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긴 철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페르마의 요청에 응하였다.
페르마의 입신체비를 잠시 내버려 둔 송시열은 한 학자가 가져온 서적을 읽으며 거듭 감탄하다 말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은 자신의 성찰이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말입니까?”
“단번에 핵심을 짚으니 참으로 대단하군요. 그 말을 덮어놓고 저서에 썼다가 수많은 언쟁이 벌어지고 제가 계속 저서를 저술하며 이를 계속 설명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철학입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는 사람의 성찰은 그가 속한 국가와 지역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므로 스스로의 생각이 온전한 물건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오호, 순수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기반 위에 성립된 자아(自我)이기에 온전하지 않다. 그 또한 합리적인 말이 아니겠습니까?”
원숙한 철학가 르네 데카르트와의 철학 면담을 시작으로 송시열과 조선 사절단 일행은 매일같이 이야기의 꽃을 피워 나갔다.
이미 조선의 관료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들이 제법 존재하였기에 교의(敎義)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우리의 앞에는 크나큰 어둠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발전을 저해하고 모두가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대의(代議)를 저해하는 어둠이군요.”
“어둠에 무엇이 속하는지 알 것 같군요. 이를테면 편견이나 전통이라 치부된 폐습이 아닙니까? 당장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서를 불태운 교황청 같은 사례 아닙니까?”
“그러한 사례는 어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한 권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닌 특권,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부정, 각종 인습과 편견,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시열이 열변을 토하자 다른 철학자들과 조선의 관료들조차 박수를 치며 이에 호응하였다.
송시열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일그러진 조선에서 교조화가 진행되는 세태에 순응하였을 뿐 본래 개방적이고 선구적인 사람이었다.
붕괴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일반 백성들과 여성의 교육을 중요시하였으며 제도를 개선하여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려 하였다. 물론 타협이 없는 성품 덕분에 정적(政敵)에게 매서운 자였지만.
이런 성격은 변화한 역사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저 우암 송시열은 이러한 어둠을 몰아내는 힘을 계몽(啓蒙)이라 하겠습니다. 불란서의 말로는 뤼미에르(Lumières)라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지만 당장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잘못하면 계몽이 아닌 폐습을 철폐한다는 명목으로 사회를 붕괴시키고 왕의 권위를 실추시킬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젊은 송시열이기에 르네 데카르트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사상이 부족함을 알아차렸다. 멋대로 계몽을 논하다가는 세상을 파괴하는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모두가 침묵하자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말하였다.
“세상의 주권은 왕이나 황제 혹은 또 다른 대표가 쥐고 있습니다. 주권을 휘두를 수 있는 주권자는 휘하 백성들의 삶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러한 의무를 저버릴 때에 시열 송께서 말한 계몽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군주가 의무를 저버릴 때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사회가 온전하다면 계몽은 헛된 힘을 쓰는 사례가 될 수 있지만, 사회가 온전하지 않다면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계몽을 앞세워도 될 것입니다.”
다시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 시대 서구의 왕권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기에 토머스 홉스의 주장은 서양에선 과격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맹자는 왕의 자리에 있어도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면 왕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 내칠 수 있다 하였다.
이를 역성혁명이라 하며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는 말과 상통하니 오히려 조선에서 받아들일 만한 말이었다.
아직 태동하지 못한 계몽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은 송시열은 보답으로 더욱 많은 근육을 제공하였다.
그는 구석에 놓인 대역기를 건네면서 말하였다.
“제 마음이 북돋아 올라 대흉근이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니 모두 근육을 논하여 봅시다. 자고로 사념이 생길 적에 의압을 한 회차 반복하면 사념이 사라지는 법입니다.”
“나는 잠시 나가보아도 되겠나?”
“아니 됩니다. 모두 의압을 실시하여 잡념을 걷어낸 다음 다시 논하여 봅시다.”
결국 유럽의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근육의 공포’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아로새겨질 때까지 근육을 논하였고 가장 많은 입신체비를 행한 르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하였다.
[입신체비라는 동양의 수련법으로 온몸의 근육을 괴롭히면 강력한 악마가 자신에게 개입하여 감각을 일그러트린 것과 같다. 이럴 때에 스스로를 사유(思惟)하면 내 존재를 더욱 잘 알아차릴 수 있다.]
근육으로 인한 사소한 역사적 변동은 르네 데카르트의 수명을 97세까지 연장시켰지만, 근육적 철학자가 되어 아주 큰 변화는 아니었다.
자신의 철학을 정리한 송시열은 삼 년의 기한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홍문관으로 돌아와 서양에서 가져온 각종 저서를 정리하려던 송시열을 맞이한 이는 이시백이었다.
그는 흥분한 얼굴로 얼마 전에 인쇄된 조보를 건네주며 말하였다.
“우암 자네가 구주에 다녀온 동안 세상이 제법 변하였다네. 붕탁(崩坼)이라 불리는 편복인의 분장을 한 내수린꾼이 근적들을 벌하다가 결국 패싸움이 벌어졌다네.”
“패싸움이라 하셨습니까? 붕탁이라 불리는 내수린꾼은 홀로 나아가 야음을 틈타 근적들을 벌하는데 어찌 패싸움이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자네가 구주에 다녀온 동안 세상이 많이 변하였다네. 편복인 한 명이 아니고 편복군(蝙蝠軍)이라 하여 편복인의 분장을 한 이들이 근적을 벌하는 경우가 생겨났다네.”
송시열이 조보를 읽어보니 34명의 입신체비사와 내수린꾼이 패싸움을 벌여 1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어 불구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송시열이 깊은 한숨을 쉬자 이시백은 영문을 모는 눈치로 말하였다.
“내용을 다 읽어보기는 하였는가? 주상전하께서는 근적들에 대하여 엄벌을 내릴 것이라 하였으니 근적들이 삿되게 행동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제가 염려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타초경사(打草驚蛇)를 행하듯 숨어있는 적을 드러내 벌하였지만 근본을 무너트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놀란 근적들이 숨어들어 후일을 도모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송시열의 말을 들은 이시백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하였다.
사상 자체가 뒤틀린 이들이 그들의 폭력성을 숨긴 채 정치세력이 되어 당파를 형성한다면 이를 어찌 상대하겠는가.
처음에는 정치에 투신하여 붕당(朋黨)을 형성한 이후 이들을 억누르려 하였지만 잘못하면 근적들의 붕당이 먼저 형성될 수도 있으리라.
이를 심히 염려한 송시열은 왕 이준에게 나아가 고변을 시작하였다.
“주상전하께 아뢰옵나이다. 근래에 들어 삿된 행적을 논하고 근력만을 앞세워 백성들을 핍박하는 근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사옵니다.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러 편복군이라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에 이르렀사오니 이를 엄히 벌하여주시옵소서.”
“이미 삿된 행적을 벌이는 이들을 암행어사를 동원하여 엄히 벌하였다. 올바른 뜻이 삿된 뜻을 몰아내는 법이니 효심이 아닌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근력을 다루는 이들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 아니겠느냐.”
외방의 수많은 업무를 담당하여 퇴근이라는 단어가 꿈과 같이 취급되는 고위 관료들의 입장은 이러하였다. 그저 세상을 올바로 통치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가리라 여기며 조금씩 정체되기에 이르렀다.
왕의 뜻을 돌리지 못한 송시열은 정치의 핵심으로 더욱 파고들어 근적보다 빨리 붕당을 형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송시열의 편이 아니었다. 이준이 왕위를 세자 이면(勔)에게 양위한 지 2년 뒤인 1644년, 중국에서 급보가 전해졌다.
“급보입니다! 북경이 이자성이 세운 순(順)이라는 도적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대거 처형당하였습니다. 이를 틈타 서(西)라 칭한 도적이 낙양을 함락시켰습니다!”
“황군의 장수 오삼계는 대체 무얼 하였단 말인가! 그나마 멀쩡한 장수가 아니던가!”
“오삼계는 칠만여 명에 달하는 별동대를 막아내다 명을 달리하였습니다.”
본래 역사와 다르게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정무에 임한 만력제는 어떻게든 도적의 발호를 억눌렀지만 억누르는 것이 한계였다.
이후 1621년 즉위한 후계자 태창제가 고작 석 달 만에 죽으면서 명나라의 국운은 더욱 기울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즉위한 천계제가 만천서원을 능가하는 궁궐을 만들기 위해 정사를 환관 위충현에게 넘긴 이후 도적의 발호를 억누를 방법조차 없었다.
서로 대연의 후예를 칭하며 상잔(相殘)을 벌이는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시점에서 명나라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조선의 지원 덕분에, 실제로는 각종 자원과 이권을 얻으려는 거래 덕분에 더 버틸 수는 있었지만 명장 원숭환을 처형한 숭정제의 실책 때문에 북경이 함락된 것이다.
상왕의 자리이지만 아직 군권을 쥐고 있던 이준은 급히 명령을 내렸다.
“도적들의 기세가 심상치 아니하니 얼마 전에야 완전히 제도를 정비한 요동으로 침습하는 일이 심히 염려되는구나. 새 황상이신 홍광제께서 구원을 요청하였으니 이에 응하도록 하여라.”
조선의 오위(五衛)와 북방군은 이준의 명령을 받고 중국의 분열을 위하여 움직였다.
중국이 통일되지 않도록 남경 일대를 가까스로 지키는 명과 화북을 모조리 집어삼킨 순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서로 간의 상잔으로 경험이 쌓인 서와 제의 병사들은 조선군에게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수많은 피가 흘렀으며 조선군도 이러한 적을 상대로 신병기를 동원하고 경험을 쌓아나갔다.
어느덧 세 국가의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쯤 송시열이 염려하던 붕당이 형성되었다.
요동 일대에서 부임하여 출세가도를 달린 김자점의 휘하에 출세한 근적들이 집결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질서가 성립해야 하는 법이옵나이다. 이미 명국의 명운은 다하였고 새로운 국가가 대륙에 형성될 것이옵니다. 이미 아국의 강성함은 천하가 알고 있사오니 주상전하께 부디 개입을 중단하길 청할 뿐이옵니다.”
“아국의 인구는 삼천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제와 순 그리고 명이 나눠 가진 대륙의 인구는 일곱 배에 달하는 이억 명이다. 이들이 하나로 뭉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분명하지 않더냐.”
김자점 휘하에 결집한 근적들은 스스로의 자만심에 취하여 주제를 모르고 날뛰었지만 이미 명나라가 붕괴한 시점에서 수많은 이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반대로 김상헌도 송시열을 비롯한 이들을 결집시켜 이에 반대하는 당파를 세웠다.
김자점의 당을 새로운 예절을 세운다 하여 스스로를 예(禮)당이라 칭하였다. 반면 김상헌이 세우고 송시열과 윤휴를 비롯한 신진 세력이 합류한 당파를 이에 송사를 벌인다 하여 송(訟)당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예당과 송당의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는 와중에 상왕 이준이 명을 달리하였다.
각 대신들에게 유언을 남기어 중국 대륙의 분열만이 조선의 활로라 뜻을 전하였으며 후계자 이면은 이를 엄정히 지키기로 하였다.
“묘호가 현종(顯宗)대왕이라 정하여졌으니 스스로의 뜻을 드러내시지 아니하신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행실이 나라 안팎에 드러나신 분이시니 오히려 마땅하신 묘호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자네도 행실을 안팎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있으니 잘된 일일세. 다음 송당의 영수(領袖)는 우암 자네이니 나도 물러날 때가 되었지.”
김상헌에게 영수를 물려받은 송시열은 현종의 사망 이후 논쟁의 중단을 요청하였다.
마침 세대교체가 필요하던 예당도 이에 응하였고 예당과 송당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이어갔다.
송시열은 이 찰나의 휴식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갔으나 근적들은 김자점의 아들 김익을 새 영수로 추대하여 더욱 기세를 넓혔다.
송시열은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힘이 필요하다 여기고 이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작금의 세태가 어떠한지 돌아보시구려. 북방부터 혹한이 몰려오고 물이 결빙되는 시일이 늘어나고 있소이다. 그 증거로 서방과 협력하여 만들어낸 기압계와 온도계의 기록을 보시구려.”
“추위가 이어지고 있구려. 그나저나 이 온도계에 적힌 영(0)과 일백은 뭘 의미하는 거요?”
“맨 아래의 영은 물이 어는 온도를 뜻하며 일백은 물이 끓는 온도를 의미하지. 약간의 오차는 있겠으나 기록을 보니 아국의 기온은 이십 년 동안 일 도 가까이 떨어졌소.”
송시열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평균기온이 2도만 떨어져도 작물이 추위에 성장하지 못하는 냉해가 빗발치며, 평균기온이 3도가 내려가면 사실상 한반도 전체가 냉해를 입는 수준이라고.
윤휴는 설명과 기록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참으로 암담한 일이군. 그러하면 우리 송당은 백성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야겠군. 역시 청음대감이 젊은 자네를 영수로 임명한 보람이 있다니까.”
연이은 흉년을 대비하고 백성의 힘으로 예당을 축출하기 위하여 송시열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갉아먹는 정책을 계속 입안하였다. 흉년을 입은 고장의 환곡(還穀)은 흉년 1년당 환곡 1할을 비축하는 법안이었다.
이미 1,400만 석에 달하는 조선의 환곡을 끝없이 증액하자는 말이니 돈을 빼낼 장소가 문제였다.
송시열은 관료들의 연금을 기반으로 환곡을 벌충하자 하였지만 예당의 영수 김익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를 반대하였다.
“주상전하! 연금은 아국 관료들의 명줄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수많은 교역을 행하여 이를 기반으로 아국의 부귀영화와 은퇴 관료들의 생활을 유지해주는 수단이옵니다. 송시열을 엄히 벌하여주시옵소서!”
“옛적에 서애 유성룡이 연금을 만들 적에 큰 기근이 발생하였을 때에 연금을 동원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라 하였으니 옳은 말이다. 다만 일 할을 계속 증액하면 환곡이 지나치게 커지는 법이니 삼 할까지만 증액함이 어떠한가.”
송시열도 김익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환곡은 차츰 증가하였지만 1,750만 석에서 비축의 한계선에 다다랐고 예당과 송당의 대립이 극한에 달할 1670년, 마침내 한반도 초유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자네 소식은 들었는가? 지난 윤이월 말(양력 4월 초)에 한양에 눈이 내린 것도 모자라 사월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고 먹장구름이 삼남에 끼었는데 우박이 떨어지고 서리가 내렸다네.”
“이미 알고 있다네. 지난 삼월에 삼남에 모내기가 시작되어야 했는데 모내기는커녕 논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질 정도로 가뭄이 심하다 하더군.”
1670년, 좌찬성으로 의정부에 재직하고 있던 송시열은 각지에서 올라오는 참담한 보고를 확인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재앙 가운데 가뭄 하나만 닥쳐도 끔찍한 일인데, 서리와 우박은 가까스로 물을 대서 파종한 모든 곡식을 무너트렸으리라.
마음을 정리한 송시열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스물 무렵에 만들어둔 근육이 예순이 넘어서도 꿈틀거렸지만 이러한 대기근에 근육은 없어도 될 존재이다.
입궐한 송시열은 이면 앞에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주상전하께 아뢰옵나이다. 각지에서 올라오는 장계에 의거하면 작금의 상황은 평범한 흉년이 아닌 아국 전역이 휩쓸린 대기근으로 보아야 할 것이옵니다.”
“대기근이라 하여도 아국 전체가 굶주릴 일은 없을 것이다. 환곡은 이미 이천만 석에 가깝게 쌓여 있으니 오백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건만 어찌 이리 다급하단 말인가.”
“온도가 문제이옵니다. 우박이나 가뭄은 부차적인 것이오며 설령 물을 댈 수 있다 하여도 기온이 4도나 떨어진 작금이라면 벼가 이삭을 맺지 못할 것이옵니다. 신이 추측하건대 아국의 작황은 사 할이 감소할 것이옵니다.”
조선의 인구는 본토라 불리는 조선팔도를 시작으로 요동, 만주, 대양도 그리고 하주도까지 합쳐서 3,100만 명에 달하고 본토와 북방에는 약 2,25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 년의 작물 생산량은 9,500만 석에 달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고 유생들이 입신체비를 즐길 수 있지만, 이것이 6할로 감소될 경우엔 5,700만 석으로 줄어든다.
환곡을 모조리 제공해도 백성들의 아사(餓死)를 막으려면 최소 2,000만 석의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말이 쉽지 조선의 모든 해군력을 동원하여도 수입 계획 자체가 문제였다. 배는 한정되어 있으며 곡식은 더욱 한정되어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