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69화 (569/573)

근육조선 569화

2부 외전 12화 시민 그리고 왕

근육은 전장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하였다.

갑주는 아니더라도 8㎜에 달하는 철판을 금속 용접기로 사람을 가릴 만한 크기로 잘라내라는 지시를 내린 홍범도는 이런저런 추가 지시를 하달하였다.

“철판의 손잡이는 대갈못(리벳)으로 붙이지 말게. 잘못해서 대갈못 부분에 적의 총탄이 적중되면 안으로 튕겨서 쐐기처럼 몸을 뚫어버릴 걸세. 그리고 철판 하나로 참호를 뚫을 수 있겠는가? 이런저런 준비물이 필요하다네.”

아득한 벌판을 메운 참호의 방어체계는 기관총이 전부가 아니었다. 당연히 진격을 막기 위한 삼중 철조망과 사방에서 저격을 일삼는 특등사수들이 배치되기에 마련이었다.

홍범도는 이를 염두에 두고 즉석에서 결사대를 구성하였다.

“모두 비단 방탄복을 껴입도록. 전열에 선 이들은 철판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진격하는데 최소한 진양근에 도달한 이만 가능하니 절대 주의하도록 하게. 후열의 병사들은 즉각 내릴 수 있게 연은(鍊銀: 알루미늄)제 사다리를 준비하고!”

“이 방패로 적의 기관총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뚫리면 저희 모두 개죽음인데요.”

“놈들은 영길리에서 개발한 맥심 중기관총의 불법 복제품을 사용하고 있어. 그 기관총 관통력이 백 미터에서 6㎜에 불과하니 초근거리 직격사격만 안 맞으면 충분하지.”

방패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무게가 70㎏에 달하는 거대한 철판이었고, 전방 확인을 위한 구멍 여러 개가 뚫린 것이 전부여서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에 달린 작은 바퀴가 하중을 줄여준다 해도 총에 맞은 충격은 오로지 근육으로 받아내야 했다.

참호 앞의 무인지대. 돌입하는 모든 생명체는 야포사격을 시작으로 온갖 중화기에 두들겨 맞는 인간 분쇄기에 돌입한 대한제국군은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진군하였다.

그 둔한 진격에 기관총의 산발적 사격이 시작되었다.

-터텅!

“우와! 이거 생각보다 잘 막아내는데요? 총탄에 맞았는데 팔이 뻐근한 정도입니다.”

“아직 참호까지 사백 미터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막아낼 만하다 생각하지 말게.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기관총 사격이 연속으로 실시될 거야!”

거대한 A자 진영으로 사람이 걷는 속도로 움직이는 대한제국군의 모습에 당황한 대륙연합군은 산발적인 기관총 사격과 라이플 저격으로 대응하였지만 8㎜의 강철판을 뚫을 화력은 나오지 않았다.

김상옥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철조망 근처에 와서 명령을 하달하였다.

“다음 일제사격 버텨내자마자 방패를 맨 앞 철조망에 버리고 두 번째 철조망 위에 사다리를 올려! 바로 놈들의 참호로 돌입한다! 수류탄 던지는 것 절대 잊지 말고! 지금이다!”

기관총 과열로 인해 잠시 사격이 중단된 순간 진형이 급격히 변했다.

고작 세 겹으로 둘러쳐진 첫 번째 철조망은 70㎏이 넘는 방패에 짓눌려 납작해졌으며, 두 번째 철조망 위에는 알루미늄 사다리가 놓여 진로가 형성되었다.

순간적인 변화에도 즉각 대응한 순나라 병사들이 총을 쏘았지만, 대한제국군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질 뿐이었다.

참호 안으로 굴러간 수류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고 쌍권총을 거머쥔 김상옥을 시작으로 9명의 결사대가 참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 죽여! 죽이라고!”

볼트액션 라이플의 노리쇠를 당기던 순나라 병사는 김상옥의 권총을 맞고 피를 뿜으며 뒤로 자빠졌고 다른 대한제국 병사는 주먹 크기의 도끼를 던져 머리를 박살 냈다.

순식간에 근육의 물결이 참호를 부수자 다급해진 순나라 병사는 기관총을 참호 안으로 들여왔다.

“아! 기관총! 좋아! 정말 좋아! 크고 아름다운 기관총이군!”

김상옥은 참호 벽을 박차고 뛰어 삼각차기를 날리며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를 모조리 때려눕히고 짓밟아 목뼈를 뒤틀어 버렸다.

탄환이 없는 권총 대신 3인 사용이 권장되는 맥심 중기관총을 양손으로 거머쥔 김상옥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방탄복도 입었다! 어디 덤벼봐라!”

김상옥의 앞에 있는 수많은 순나라 병사들은 삽시간에 기관총에 갈려 곤죽이 되었다. 그나마 한 병사가 사력을 다하여 권총을 쏘았지만 비단으로 만든 방탄복 덕분에 총알은 김상옥의 복근에 박혀 멈추었다.

단 열 명의 결사대가 천 명에 달하는 순나라 병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한 홍범도는 후방의 야포사격과 동시에 전방의 순차적 돌입을 명령하였고 근육의 힘으로 참호가 무너져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홍범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퇴각! 전부 퇴각시켜! 저거 각도를 보건대 아군 진형을 향해 쏘는 독가스탄이다!”

방독면을 준비한 대한제국군과 달리 순나라 병사들에게 방독면은 없었다.

그나마 방독면이 있다 해도 독가스 농도가 어찌나 짙었는지 정화통에서 누런 물이 새어 나오더니 대한제국 병사들도 피를 토하며 퇴각 중에 사망하는 이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독안개로 뒤덮인 전장을 바라보던 홍범도는 지휘봉을 바닥에 내리치며 분노하였다.

이번 교전으로 순나라 병사 육천여 명이 죽었겠지만 대한제국군도 팔백여 명 가까이 죽어 나갔다.

이후 전쟁은 순나라가 점차 대응책을 찾기 시작하며 끝없는 소모전 양상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의 방패 전술에 대비해 최소한 세 정 이상의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방패 자체의 접근을 봉쇄하는 전략을 구상하였다.

고작 열 명을 상대하려고 기관총 세 정을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지만, 인구가 넘쳐나는 대륙연합군은 그 전략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 지지부진한 전쟁을 뒤엎을 병기를 개발하려는 한양의 병기창은 오늘도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 * *

전선에서 장병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건양제도 평상시 업무에 더욱 늘어난 전선의 업무를 처리하며 코피를 쏟고 있었다.

세 시간의 수면을 취하는 것이 전부인 건양제는 게슴츠레한 몰골로 국방연구소의 직원들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현재 독일에서 개발한 디젤기관과 대한제국 연구소에서 개발한 휘발유 기관을 사용하여 여러 시험을 거치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참호를 뚫는 신병기의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잡담은 필요 없으니 이 지상전함이라는 녀석의 시험 운전에 돌입하게.”

명령이 하달되자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건양제의 눈이 번뜩 뜨여질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초창기 가솔린 기관의 어마어마한 소음과 진동이 전달된 전차는 둔탁한 무한궤도를 울리며 조금씩 전진하였다.

“움직이는군. 잘 움직이는데 뭐가 문제라 그러는가? 저 지상전함을 이끌고 참호를 뛰어넘으면 충분하지 않은…… 아니로군. 심상치 않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어서 기관을 정지시키고 소화기를 분사해! 또 과열이다!”

기껏해야 150m를 움직인 지상전함은 굉음을 내며 연기를 피워 올렸고 진동을 일으키던 가솔린 기관이 붕괴하기에 이르렀다.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을 진정시킨 건양제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이미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군. 대체 뭐가 문제인가? 우리 대한제국의 기술력이 총집결하여 만들어낸 가솔린 기관이 저런 쇳덩이 하나를 움직이지 못한단 말인가?”

“황제폐하께서 수많은 예산을 투자하셨으나 그 예산이 쓰인 방법이 다르옵니다. 저희 연구진은 크고 튼튼하며 출력이 좋은 내연기관이나 자동차에 쓰이는 녀석을 연구했지 중간 크기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이 하지 않았사옵니다.”

대한제국에서 널리 보급되는 자동차의 엔진은 가솔린 기관으로 24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며 선박용 디젤 엔진은 400마력의 출력을 낼 수 있다.

전 세계 기준으로 보자면 기술력이 뛰어나지만 중간 단계가 부족하였다.

연구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를 이어갔다.

“전선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계속 반영한 결과 전차의 장갑 두께는 10㎜로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차체 무게가 증가하고 결국 내연기관의 부담도 증가하였습니다.”

“전차의 장갑 두께가 10㎜가 필요하다고? 대체 왜인가?”

“최전선의 병사들이 철판으로 방패를 만들어 진군하였기에 적들이 나날이 대형 중기관총이나 소형 야포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사옵니다. 처음 설계한 5㎜ 장갑으로 전선에 나갔다가는 벌집처럼 구멍이 뚫릴 것이옵니다.”

“결국 기술력이 부족하여 전선에 쓰일 수 있는 병기를 만들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아쉬운 듯 눈을 내리까는 건양제의 앞에 분해가 완료된 지상전함의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피스톤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채 과열로 뒤엎어진 가솔린 엔진은 건양제 자신의 실수를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짐이 예산을 배정할 적에 백성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용 소형 내연기관과 선박을 양산할 수 있는 대형 내연기관을 우선시하라 하였네. 덕분에 참호를 돌파할 내연기관 연구가 늦어졌군. 그러니 늦게라도 예산을 투자할 것이네.”

전 세계의 학자들과 연구진을 소집하여 지상전함에 사용할 엔진을 찾아낼 꿈에 부푼 건양제였지만, 그 꿈은 이 시대에는 이룩할 수 없는 꿈에 불과하였다.

전선에서 여러 차례 검증된 요구 설계사항을 준수하려면 초기 전차를 개량하여 1919년에 개발된 영국의 MK.V 전차가 필요한 수준이었다.

일 년 뒤인 1911년 초에 전 세계에서 소집된 기술자들도 동일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께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 독일의 기술력을 모조리 동원하여도 전차에 쓰일 내연기관을 만들 수 없습니다. 150마력의 엔진이 필요한데 독일에서 쓰이는 엔진 중 전차에 넣을 크기로는 90마력이 한계이지요.”

“저희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거대한 쇳덩어리를 사용하시다니 대한제국은 철이 남아도는 나라인 것이 분명하군요.”

은근슬쩍 대한제국을 욕보이는 영국 기술자를 노려본 건양제였지만 이제는 성을 낼 힘조차 없었다. 얼마 전에는 업무 중에 혼절하여 이틀 내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피로가 쌓여 있었다.

끝없는 소모전을 벌이는 대륙연합군과의 싸움을 돕기 위해 미국이 참전하길 원하였지만 물자 지원이 전부였다.

남 잘되는 꼴은 절대 못 보는 영국은 아메리카를 움직여 미국을 견제하였고 덕분에 병사를 보낼 여력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이 전쟁에서 공세로 전환할 희망은 남아 있었다. 이미 서해상에서 수많은 교전을 통해 대륙연합군의 해군을 완전 격멸한 대한제국 해군이 이제 요서회랑으로 진입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총리대신이 보낸 국서도 있었다.

[저희 일본은 대한제국이 부당한 침략을 받았음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삼십만의 병력과 대한제국 해군을 보조할 수 있는 함대를 파병할 예정이니 저희의 국채(國債) 가운데 오 할을 탕감해 주십시오. 일본 총리 사카모토 료마]

이 대신 잇몸이라고 일본이 참전하기를 원하였으니 조만간 중국 해안가는 초토화될 것이며, 후방의 공업생산기지도 모조리 박살 나리라.

그러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건양제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 가득하였다.

“오늘도 또 야근이군. 전선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내 수면시간이 두 시간씩 줄어드네.”

4년에 걸친 전쟁을 경험한 대한제국군은 마침내 요서회랑을 봉쇄하여 승전을 거두었다.

이미 개봉을 비롯한 수많은 도시가 함포사격과 상륙군의 무차별적 공격으로 무너졌으며 복구하는데 수십 년이 소요될 피해를 중국 대륙에 입힌 것이다.

전쟁이 종전된 1914년, 대한제국은 총 육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해 7월 28일, 유럽에서 전쟁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 * *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전쟁에 참전하라는 협상국은 요청은 대한제국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요청이었다. 물론 대한제국에는 여력이 남아 있었지만 연이은 전쟁은 한 세대를 붕괴시키고도 남을 타격을 입히기 마련이었다.

아직까지 이 시대 기준으로 현대의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지 모르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협상국은 대한제국을 열강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비겁자로 비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제국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유럽 전선에 우리 대한제국이 참전하면 나는 말라 죽어버리겠지. 전후처리로 아직도 4시간밖에 못 자는 내가 황제냐, 아니면 나라의 노예냐? 그리고 처가는 아주 난리가 났군.”

1914년 대한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탄과 타티야나는 행복한 부부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실시간으로 멸망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성되었고 수많은 식량이 공급되었지만 그 식량은 이내 사치품으로 대체되었다.

부패한 관료들이 대한제국에서 제공할 식량을 온갖 사치품으로 바꿔 들였으며 공급되는 곡식은 부패한 관료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결국 풍요 속의 기근을 경험한 사회주의 세력은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하여 1917년 3월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반란은 내전으로 격화되었으며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제의 가족들이 유폐당하기에 이르렀다. 황태자 이탄은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아내 타티야나를 염려하여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였다.

그렇다고 러시아 내전에 멋대로 참전하면 다른 국가는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도 마음대로 놀아대는 나라라는 시선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였다.

처가 식구들이 납치당한 상황에도 뾰족한 수를 쓰지 못하는 건양제는 오늘도 서류의 산더미에 묻혀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우리가 대륙연합군을 상대로 혈투를 벌일 적에는 동방의 일이라며 간섭을 하지 않다가 자기들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도와달라고 간청을 해?”

온갖 욕설을 하면서도 유럽으로 보낼 물자 지원과 관련한 서류를 확인하고 옥새를 찍어 결재를 하는 건양제는 몰려오는 피로에 눈을 비볐다.

이러다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옥새를 손에 쥔 채 과로사할지도 모르는 판국이 아닌가.

그러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급히 들어왔다.

“신 최익현 황제께 인사를 올리옵나이다. 다름이 아니고 일본의 부총리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큐슈와 관련된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큐슈와 관련된 서류라 하였는가? 또 멋대로 들어온 난민들을 돌려달라는 요청…….”

최익현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건네는 외교 요청서를 받은 건양제는 내용을 읽어보다 입을 벌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황제인 자신조차 모르는 항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조선과 다테 막부 사이에 맺은 조약이 현재까지도 유효함을 확인하였음. 이에 의거하여 큐슈 반환을 요청하며 제반 비용의 계산을 조선 측에 일임할 것이니 확인 바람>

“큐슈라 하면 하주도가 아닌가? 하주도를 왜 반환한단 말인가!”

“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오나 이등박문이 아주 당당하게 요구하였으니 속내가 있을 것이 분명하오며 익문사의 첩보에 의하면 순나라가 이 조약에 끼어들었다 하옵니다.”

“당장 사람을 부르게. 지금까지 왜국…… 아니, 일본과 맺은 조약과 국서를 모조리 분석하여 대체 무슨 조약을 빌미로 삼았는지 확인해 보란 말일세!”

아버지 광무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밀약이었으니 현재 황제인 건양제도 이 밀약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1867년 대한-일본 조약서의 내용에도 옛 밀약의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적혀있었다.

[제15항. 이 조약에 해당하지 않는 옛 조약의 항목은 양국의 합의가 없는 한 50년 주기로 자동 갱신된다. 이는 양국의 국서를 주고받은 조약에 한정된다.]

이윽고 수장고를 사흘 내내 찾아내 양국이 주고받은 국서를 확인하자 답이 나왔다.

을병대기근이 절정에 달한 1698년 맺은 조약서의 내용에 답이 있었다.

[왜국의 정이대장군은 하주도를 구매할 수 있다. 다만 백성의 뜻은 하늘의 뜻이니 백성은 하주도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자 외에는 모두 조선의 땅으로 이주시키며 모든 비용은 왜국의 정이대장군이 일괄적으로 지급한다.]

1867년 대한제국과 일본은 외교통상조약을 맺었으니 자동 갱신은 1917년에 실시되는 것이 당연하였다. 일단 대한제국의 황제가 날인한 조약이니 효력은 있었다.

그러나 건양제는 코웃음을 치며 최익현을 바라보고 말하였다.

“일단 선황제(先皇帝)께서 옥새를 날인하시어 조약의 효력을 인정하였으니 지켜야 함은 마땅하네. 그러나 하주도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난민을 제외하고도 팔십만 명이며 난민을 포함하면 백오십만 명에 달하네. 이들의 이주비용은 얼마나 되겠나?”

“대략 사십만 가구라 하면 평균적으로 새로운 집의 건축비용과 직장 설립에 따른 비용 그리고 이를 위한 제반시설 건설비용을 따질 경우…… 최소 이백억 원이 소모될 예정입니다.”

“그러하면 이등박문에게 전하게. 옛 조약을 잊고 있었음은 짐의 실책이지만 선황제께서 뜻하신 바를 그대로 정할 것이라고. 그러니 백성들의 이주비용으로 삼백억 원을 현물과 그에 준하는 화폐로 내놓으라 하게.”

일본의 국내 총생산은 대한제국의 화폐 기준으로 900억 원에 불과하였다. 총 생산량의 1/3을 내놓는다면 나라의 허리가 꺾이다 못해 현 정권이 붕괴될 수준이다.

심지어 일본은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실시간으로 인력이 갈려 나가는 판국이었다.

억지로 300억 원을 만들어냈다 하여도 대한제국이 볼 손해도 없었다.

그 돈이면 이주하는 모든 하주도민에게 벽돌집과 새로운 공장은 물론이요 입신체비기구도 마련해 줄 수 있는 액수였다.

이미 자원이 고갈되고 공장도 노후화된 하주도를 비싸게 파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 모든 제반사항을 처리하려면 건양제 자신이 하루 2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못하겠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문제는 석 달 뒤 돌아온 답신이었다.

<대한제국 황제께 감사의 뜻을 전함. 1919년부터 5년에 걸쳐 300억 원을 분납할 것이며 이에 대한 이자를 고려하여 총 317억 원을 대한제국에 제공할 예정임. 화폐가 아닌 현물로 제공하겠음>

“이게 사실인가……. 정말 사실이냐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이옵니다. 또한 순나라가 이 조약에 개입한 사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사옵니다. 익문사의 첩보에 의하면 순나라는 황제폐하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인두세를 매겨서 주민들에게 현물을 거두고 있사옵니다.”

일본의 힘이면 불가능하겠지만 인구가 많은 순나라가 개입하면 가능하다.

대한제국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인 황제를 무너트려 대한제국을 붕괴시키려는 수작질을 벌인 것이다.

물론 이런 수작으로 대한제국이 붕괴할 염려는 없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교육을 받고 정치에 참여하며 관리들은 백성을 위하여 사력을 다함이 대한제국의 근본이었으니까.

그러나 건양제의 정신은 실시간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그 업무를 어떻게 다 하라고…….”

“하오나 황제께서 하신 말씀을 도로 물리신다면 권위가 손상될 것이옵니다.”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최익현이었지만 건양제는 그 신뢰에 부응할 기력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평범한 대한제국의 공장 노동자처럼 8시간을 근무하고 8시간을 쉬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하였다.

최익현을 돌려보낸 건양제는 한동안 서러운 듯 울어대고 마음을 정리하였다.

어차피 황제로 남아 있으면 업무에 치어 살다 죽을 것이니, 황제를 그만두기 전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기로 하였다.

“이런 황제 생활을 하느니 그냥 황실을 폐지하고 일반인이 되고 말지. 오늘 업무는 폐할 것이니 잠시 시간을 내어 종친 모두와 성림왕(본래 역사의 고종)을 불러오도록 하게.”

한양 각 부처에서 피로에 찌든 종친들이 모조리 몰려들었고 건양제는 목 놓아 황실 폐지를 주장하였다.

종친 대다수가 6시간 이상의 수면을 취하는 것이 소원이었으니 이에 절실히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끝까지 반대하던 성림왕 조차 건양제가 지나친 피로로 심각한 빈맥(頻脈: 심장이 빨리 뜀)을 비롯한 부정맥 증상을 앓고 있음을 알려주자 동의하였다.

그리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하여 건양제는 역설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즉각 제정 러시아에 병력을 파병하여 처가 식구들을 구출하도록.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점령하고 적군(赤軍: 적백내전의 공산군)을 소탕하도록 한다.”

20만 병력을 러시아 내전에 개입시키는 건양제의 결정은 당연히 국제사회의 어마어마한 비판으로 돌아왔다.

물론 책임을 지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건양제는 코웃음을 치며 ‘돼지비계나 먹어라’라는 신랄한 욕설을 돌려주었다.

대한제국군은 적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마침내 로마노프 황실이 유배된 예카테린부르크에 진입하였다.

가까스로 구출된 니콜라이 2세는 이탄의 손을 맞잡고는 울음을 터트리며 말하였다.

“대한제국이 참전하였으니 이제 빨갱이 놈들을 모조리 몰아낼 수 있을 것이네. 어서 오백만 대군을 이끌고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세. 건양제께서는 이럴 줄 알고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아니하셨군.”

“황제폐하께 유감스러운 말씀이지만 저희 제국은 내전에 적극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바이칼 호수를 기준으로 삼아 동쪽 일대를 러시아 제국으로 남길 작정입니다.”

“그게 무슨…… 무슨 소리인가! 그 땅은 일부 영토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황무지와 수림만 우거져 있다네! 전쟁에 참전할 것이면 적극 개입하거나 아예 개입하지 않거나를 택해야지!”

“대한제국의 백성들은 지난 무진천명대선에서 이백사십만 명이 죽고 삼백육십만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고작 구 년 전에 이런 참극을 겪었는데 또 전쟁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대한제국의 힘이라면 적백내전을 백군의 승리로 뒤엎기 충분하였지만, 로마노프 황실의 몰골을 잘 알고 있는 건양제는 그런 개입은 사치라 생각하였다.

어차피 자기 멋대로 날뛰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인데 나라를 위해 자신이 욕을 먹어도 충분하리라 여겼다.

오로지 하야를 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건양제는 더더욱 국익만을 추구할 뿐이었다.

귀환열차에 오른 니콜라이 2세는 점점 험난해지는 풍경을 보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쓰레기 같은 땅에 몸을 누이다니 내가 차르인가? 러시아는 이제 제국이 아닐세. 제국의 심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빨갱이들에게 빼앗긴 순간부터 우리는 왕국이라네.”

온갖 후회와 분노를 견디다 못한 니콜라이 2세는 임시 거처로 배정된 캄차카 반도의 숙소에서 술독에 빠져 살았고 다른 황실, 이제는 왕실이 된 로마노프 왕가의 일원들도 우울한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타티야나는 건양제에게 이혼을 요구하였다.

“제가 대한제국과 연을 맺은 이유는 이 나라가 모든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득과 손실을 계산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임하여서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국익만을 따지는 이런 행동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아직 아이도 없는 사이이니 이혼을 하겠습니다.”

며느리의 이혼서류를 받은 건양제는 타티야나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내를 알아차렸다.

척박한 동부로 쫓겨난 니콜라이 2세가 벌써부터 술독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 우선시 되었으리라.

이미 황태자 이탄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타티야나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건양제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상 최초로 제출된 이혼서류에 옥새를 찍으며 말하였다.

“짐이 부덕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어찌하겠나. 그저 머나먼 동방에서 편히 살기를 바랄 뿐일세. 또한 짐의 잘못이 크니 위약금은 가급적 많이 물어줄 것이네.”

이후 일 년이 지났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국제사회가 새로 정립되며 적백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끝나 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도 격변을 맞이하였다.

[짐의 책임으로 인하여 이 나라는 국제사회의 수많은 비난과 모욕을 감당하였습니다. 또한 하주도의 반환으로 인한 혼란과 이 혼란을 불러일으킨 제 실책이 너무나 큽니다. 이 실책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기 위하여 황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황실을 폐지할 것입니다.]

1919년 2월 1일. 하주도의 일본 반환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느닷없이 들려온 라디오 방송은 모든 대한제국 국민들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건양제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는 국민 여러분과 운명을 함께 하는 한양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종친들은 박물관과 유물을 관리할 것이며 저와 태자 그리고 친왕(親王)들은 국영 입신체비 기관의 일부를 할양받을 예정입니다. 잠깐! 자네 누군가!]

마이크를 부여잡고 황제 자리에서 마지막 연설을 이어가는 건양제의 앞에 등장한 사람은 한양대학교 교수 백범 김구였다.

그는 이미 근위병 여러 명을 힘으로 제압했는지 코피를 흘리며 건양제를 노려보았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황실을 폐하지 마시옵소서!”

“백범 교수는 뒤로 물러나게. 황제께서 뜻을 정하셨으니 신하를 자처하는 자라면 이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구의 팔을 부여잡은 성림왕 이희는 30㎝가 넘는 신장 차이에도 눈을 부라리며 김구를 노려보았다.

잠시 악다구니를 벌이던 두 사람은 어느새 내수린으로 돌입하였고 김구의 거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몰골을 지켜본 건양제는 마지막 방송을 하였다.

[잠시 소란이 있어 죄송합니다. 이제 대한제국은 국민을 위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이며 시대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한 황실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입신체비는 이 나라와 함께할 것입니다!]

방송이 끝나는 순간 내리 찍힌 성림왕의 면직락(DDT)에 당한 김구는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하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김구가 실려 나가자 황실 종친을 시작으로 여당 대표 최익현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건양제에게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며 황제의 퇴위를 받아들였다.

“폐하. 신이 불민하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사옵니다. 신이 조금이라도 더 폐하를 보필하였다면 이런 참극이 벌어지지 아니 하였을 것입니다.”

“아닐세. 자네들 모두가 사력을 다하였음에도 내 능력이 부족하였을 뿐이네. 내가 수양대군과 같은 지혜를 가지거나 서애 유성룡과 같은 지식을 가졌다면 황실을 폐하지 아니하였겠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건양제의 속마음은 오로지 쉬고싶다와 입신체비에 몰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마음 하나였기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김구는 그 모습을 보며 황제의 마지막을 위해 절을 올릴 뿐이었다.

이로써 526년을 이어온 대한제국 황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 황제와 황실 종친들을 존경하는 백성들은 언제나처럼 그들이 지나갈 때에 정성을 다하여 인사를 올렸다.

또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공식적으로 국호를 러시아 제국에서 러시아 왕실로 격하시켰다.

국제사회는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물러난 건양제 덕분에 대한제국, 이제는 공화국이 된 대한의 힘이 꺾이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황제와 황실이라는 틀이 사라졌지만 정신적 지주는 남아 있었다.

모든 의원들은 스스로의 뜻이 아닌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정책을 결정하고 나라를 발전시켰으며, 그 중심에는 입신체비가 있었다.

#작가의 말

커피를 많이 마시고 잠을 4시간 정도만 자는 생활을 석 달 정도 하면 혈압이 190까지 치솟고 맥박이 130까지 올라가더군요. 제 친구가 경험한 끔찍한 비극입니다.

저런 생활을 했던 건양제가 몇 년 동안 살아 있는 이유는 입신체비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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