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68화 (568/573)

근육조선 568화

2부 외전 11화 황제 그리고 황제(2)

황제의 조언가 라스푸틴의 죽음은 결국 비극적인 사고가 되었다.

라스푸틴은 복도에서 눈이 마주친 시녀를 겁탈하려 하였고, 근처에 있는 가장 큰 방인 입신체비 전용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 직후 이탄이 따라 들어왔고 눈이 마주친 라스푸틴은 세례를 내릴 작정이라며 저항하였지만, 이탄은 웃옷을 벗으며 달려들었다.

당시 상황을 증언한 시녀는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증언하였다.

-대한의 황태자께서는 세례를 내리기 전에 근육을 받으라 하시며 달려들었습니다. 그 거구를 몇 번을 잡아 메치시더니 머리 위로 라스푸틴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탄은 라스푸틴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16세가 지난 뒤 교양 삼아 배운 내수린 기술로 더러운 짓을 자행한 라스푸틴을 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힘은 강대하였고 기술에 대한 이해는 반비례로 너무나 얄팍하였다.

-그 거대한 몸을 아이 다루듯 하며 머리 위로 올리시더니 가슴과 허벅지를 잡고 한껏 힘을 주셨습니다. 라스푸틴은 잠시 저항하였지만, 허리에서 사람의 몸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나더니 게거품을 물고 오줌을 지리며 혼절하였습니다.

이탄의 괴력으로 재현된 두골척추부수기(아르헨틴 백 브레이커)에는 어떠한 절제도 없었으니 라스푸틴의 척추는 단번에 부스러졌다.

라스푸틴은 사흘 뒤 사망하였고 니콜라이 2세는 그제야 이탄과 대한제국 사람들이 가진 괴력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후 이탄은 수많은 호위병들이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비극적인 사고’를 막기 위해 철통같이 호위하게 되었다.

물론 그의 생활에 변화는 없었다.

“오늘도 입신체비를 수행하려 하니 다들 밖으로 나오시오.”

러시아에서 생활한 지 일 년이 넘은 이탄은 오늘도 새벽부터 일어나 입신체비에 몰두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실은 19세 이전까지 최대한 몸을 키우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이는 머나먼 세상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한의 대공께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도 같이 몸을 단련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비록 추운 날씨이지만 한양의 추위도 견딘 몸이니 입신체비 이전 몸을 덥히기에 오히려 좋구려. 어서 뛰어 봅시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후는 한양과 비교하면 제법 추운 형편이지만, 신장 178㎝에 체중이 104㎏에 달하는 이탄의 몸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짙은 입김을 내뿜으며 이탄은 물론이요, 대한제국의 사절단과 호위병이 일제히 운집하여 거리를 질주하자, 그 근육에서 발생하는 열기로 주변이 훈훈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탄은 주변을 돌아보며 의아한 듯이 말하였다.

“그나저나 내가 한양에서 입신체비를 위해 밖을 활보할 적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나를 따라 움직였는데 이곳에서는 기껏해야 대한에 유학을 왔던 귀족 자제들이 따라붙는구려. 이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형편이요?”

“네? 일개 백성들이 입신체비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당연한 일이 아니오? 아국에서는 백성의 팔 할이 글을 깨우치고, 육 할이 능숙히 글을 쓰며, 사 할이 입신체비에 발을 들였소. 덕분에 제철소가 불이 꺼질 날이 없긴 하지만 여기의 공장도 불이 꺼질 날이 없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여기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당연시되자 호위병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80%에 달하며 경제구조가 빈약하고 부패가 만연하여 백성들의 삶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공장은 노동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8시간 2교대로 하루 16시간이 가동되었으나, 러시아의 공장은 교대도 없이 14시간 이상을 강제 노동으로 가동하였다.

당연히 착취와 이로 인한 빈곤이 러시아 백성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당도한 지 일 년이 지났지만, 백성들의 삶을 구경한 적이 없구려. 자고로 혼담을 나누려면 세세한 사정에 대하여 능통해야 하는 법이 아니겠소?”

운동을 마치고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이탄이 몸을 수건으로 닦으며 말하자 호위병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 귀족 자제들인 자신들 기준으로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가축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로 손꼽히며 백성의 삶에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이들을 확인한다면 무슨 평가를 내리겠는가.

그러나 이탄은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다.

“러시아의 황제 폐하께 청하여 약혼자인 타티야나 여대공과 함께 공장과 노동자 숙소를 방문해 보겠소. 생각하여 보니 아예 같이 나아가면 더욱 좋겠구려. 어떻소?”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이 좋지 않으니 며칠 말미를 두시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아니오. 오롯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알아야 하는 법이니 바로 실시하겠소. 그래도 어수선한 환경을 만들면 아니 되니 입신체비를 마치고 나아가 보고를 올릴 때까지 공장을 정리할 시간은 내어줄 것이오.”

이탄과 대한제국 사절단은 곧이어 삐걱거리는 쇳소리를 내며 입신체비에 몰두하였고 호위병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니콜라이 2세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장장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윽고 입신체비를 마친 이탄이 나오자 누군가가 이탄을 맞이하였다.

“받아라! 근육괴물! 나의 강철 주먹!”

“으악! 내 강철 근육이 무너지다니!”

이 시대의 불치병인 혈우병으로 인해 창백한 외모와 앙상한 팔다리를 후들거리는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세이가 이탄의 허벅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탄은 마치 막내의 장난을 받아넘기는 큰형처럼 그 가벼운 주먹을 맞고 뒤로 세 바퀴를 구르며 자빠졌다.

알렉세이의 우상은 어느새 위대한 근육을 가진 이탄이 되었다.

몸을 훌훌 털고 일어난 이탄은 울퉁불퉁한 손으로 가볍게 알렉세이를 들어 목말을 태우며 타티야나의 방으로 향하였다.

“타샤(타티야나의 애칭) 누나! 내 키가 더 크지!”

“깜짝이야! 대한의 황태자께서는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그러다가 넘어질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제 몸으로 받아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입신체비를 행하다 궁금한 생각이 들어 잠시 방문하였습니다. 타티야나 대공께서는 백성들의 삶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백성들의 삶이라는 말에 한참을 생각하던 타티야나였지만, 철저히 보호받는 구시대적 황실인 로마노프 황가의 일원이자 고작 13세에 불과한 어린 나이었다.

그의 기억에는 오로지 니콜라이를 통한 간접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었다.

“사 년 전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당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인들이 총을 쏘아 격퇴했다더군요.”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총을 쏘아 격퇴하였다니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당시에 기병대 돌격까지 실시하여 겨우 격퇴하였고 이후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서 아버지께서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 블라드미르 대공이 사력을 다하여 이를 진압했다고 들었어요.”

이탄은 익문사의 보고를 직접 들을 수 있어 진상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국가를 부르며 차르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려던 노동자들을 일제사격을 시작으로 무너트린 뒤 기병대 돌격으로 짓밟았다고.

대한제국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황제는 양위함이 마땅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감행할 일이지만, 이 사건의 진상조차 모르는 것이 러시아 제국의 황실이었다.

태연한 타티야나를 슬쩍 살펴본 이탄은 알렉세이를 내려놓고 말하였다.

“아무래도 우리 모두 백성들의 삶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께 청하여 볼 것이니 올가 대공과 함께 백성들의 삶을 확인해 보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그런 곳에 가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는데요. 일단 대한의 황태자께서 말씀하셨으니 사소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와 함께 춤 교육을 받던 장녀 올가도 어머니와 함께 나서기를 청하였다.

자신의 앞에 도착한 넷을 바라본 니콜라이 2세는 이야기를 듣더니 단번에 수락하였다.

“대한의 황태자께서 공장을 보려 하니 내 얼마 전 새로 설립하였다는 공장이 떠오르는군. 자네가 여기에 오며 제공한 설비에 걸맞은 최신식 공장을 지어서 노동자들이 편히 지낸다던데 가보세나.”

니콜라이 2세의 선량한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본 이탄은 점점 속이 답답해졌다.

아무리 대한제국의 공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편안한 공장이라 하여도 노동자들은 언제나 고된 노동에 치어 살게 마련이었다.

어느새 일이 점점 커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이탄은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감내하기로 생각하고 황제 일가족과 함께 공장으로 향하였다.

공장 입구에 황제가 방문하자 모든 노동자가 고개를 숙이며 황제를 맞이하였다.

“음…… 노동자들이 제법 열심히 일했나 보구려. 창문이 다 깨져 버렸네.”

니콜라이 2세는 선량하고 열정적이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귀족과 공무원들은 부패하여 열정적인 마음을 담아 투자한 예산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보고받기를 드넓은 유리창으로 조도(照度)를 확보하였다는 공장의 창문에는 유리 대신 거적때기가 붙었으며 얼마나 예산을 착복하였는지 얇은 벽에 균열이 생겨 메우기를 반복하였다.

여기에 어디선가 밀려오는 퀴퀴한 악취의 근원을 찾으니 왼편에 위치한 거대한 노동자 숙소였다.

자신의 상상과 다른 현실에 충격받은 니콜라이 2세를 대신하여 이탄이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공장 안을 잠시 보고 싶군. 어서 안내해주고 올가 대공과 타티야나 대공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안의 환경이 제법 험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장소인데 환경이 험하다니요! 노동자들도 사람이라고요!”

타티야나가 항변하자 노동자들은 ‘우리가 사람이래. 참 대단하신 분이야’라고 조소를 날렸고, 니콜라이 2세는 노동자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냉엄한 현실에 직면하였지만 그의 열정은 아직 꺼지질 않았다.

공장 내부는 황태자 이탄을 보낸 대한제국에서 선물로 제공한 최신식 프레스 기계가 넘쳐났지만 대조적으로 공장 내부는 온갖 때로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바닥에 뒹굴었다.

“이건 웬 보드카인가? 대체 얼마나 보드카를 마시기에 내가 방문하는 사실이 전해졌음에도 미처 치우지 못하고 병이 나뒹굴고 있는가?”

“보드카 병이 널려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귀족분들이야 즐길 여가거리가 넘쳐나지만 노동자들은 술 외에는 없습니다. 저희 공장은 황제폐하의 명을 받아 보드카를 무제한 공급합니다.”

“짐이 책을 공급해주겠네. 조선시대부터 명작으로 알려진 복수자설은 물론이요 예맥대장전이나 신농도근육인전 같은 즐거운 책이라면 어떠한가? 열 명이 돌려 읽으면 충분할 것이네.”

“공장 사람 가운데 팔 할이 글을 읽지 못하니 조금만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니콜라이 2세가 답답한 듯이 가슴을 매만졌지만, 이탄의 손은 프레스기에 묻은 시커먼 얼룩으로 향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피가 묻은 흔적이기에 공장장을 노려보니 그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하였다.

“나흘 전 술을 마신 노동자가 프레스기를 작동시키다 손목이 날아간 흔적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안전 문제인데 술을 마셨다면 본인 과실이지요.”

“내가 알기로 최신식 프레스기는 사고를 막기 위해 두 개의 단추를 동시에 꾹 눌러야 작동하는데 그 노동자의 팔이 세 개라도 되는가?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속도를 늘리려고 안전장치를 해제하였는가?”

“지금 뭐라 하였는가? 프레스기에 손목이 잘린 노동자가 있다고? 이 땅의 모든 백성은 이 차르의 백성이다! 당장 그 백성을 위문하러 갈 것이니 안내하도록!”

황후 알렉산드리아와 두 딸 올가, 타티야나는 반쯤 혼절하여 궁으로 돌아갔지만, 이탄은 바로 옆의 숙소에 도착하자 둘이 궁궐로 돌아간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착복으로 인해 외형만 갖춘 임대형 숙소는 돼지우리보다 못한 환경이었다.

외부는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다급하게 치우기는 하였는지 뭔가 삽으로 떠낸 흔적이 있었지만 분변의 흔적이 가득하였다.

역겨운 냄새의 근원을 확인하고 아파트로 들어가자 더욱 끔찍한 몰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공용 화장실의 문밖으로는 새어나온 오물이 바닥을 질척하게 메워버렸으며 이탄의 단련된 몸으로도 가까스로 구토를 참을 뿐이었다.

그 악취에 구토한 니콜라이 2세는 호위병의 부축을 받고 격노하여 공장장에게 고함을 쳤다.

“공장 노동자 삼천여 명에게 배정된 숙소이며 모든 시설을 완비했다 들었네! 그런데 식수는커녕 화장실조차 제대로 설비가 안 되어 있어? 그리고 사고를 당한 백성은 어디 있는가?”

“이 방 안에 있습니다. 어서 나오도록! 차르께서 친히 방문하셨다!”

니콜라이가 방문을 열자 기껏해야 10평에 불과한 좁은 방 안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몸에서는 벼룩이 튀어 올랐다.

배정된 인원의 몇 배에 달하는 사람이 풍기는 역한 냄새가 몰려오자 니콜라이 2세는 헛구역질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방에 있던 일가족은 축 늘어져 창백해진 시신을 업은 채로 니콜라이 2세에게 절을 올렸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였는지 팔에 구더기가 끓는 시신을 확인한 차르는 뭐라 말하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이럴 수는 없다! 이 제국이! 이 차르의 백성이 이런 비참한 몰골이라니!”

최악의 참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니콜라이 2세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하였다. 공장장을 당장 투옥하라 하였고 노동자들에겐 처우 개선을 약속하였다.

모든 처리를 마친 니콜라이 2세는 이탄의 손목을 잡고 흔들며 말하였다.

“자네 덕분에 내 눈이 뜨였네. 지금까지는 일이 틀어졌지만 믿을 수 있는 귀족들을 임명하고 이들이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면 이런 일은 없을 걸세.”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신다면 언젠가는 이 제국에 올바른 질서가 생길 것입니다.”

이탄이 보기에는 사태가 해결될 이유가 없었다. 제대로 된 제도를 만들지도 않고 사람을 갈아치우면 몇 달 정도만 눈치를 보고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리라.

모든 제도를 정립하고 부정부패를 일소하며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는 고된 길이 러시아 제국을 되살릴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이 희망을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니 더욱 필요한 것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일세. 이런 부끄러운 몰골을 보였으니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순수 자력으로 부설할 것이네! 대한제국에서는 그저 기타비용만 대 주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탄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자신의 처가가 될 러시아 제국의 앞날을 생각하자 울고 싶어졌다.

예정된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니콜라이 2세는 횡단철도에 대한 장광설을 시작하였다.

* * *

니콜라이 2세가 노동자들의 처우를 확인하고 절규할 무렵 대한제국의 수도 한양에서도 황제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선전포고도 없는 요동 일대의 무차별적 포격에 경악한 건양제는 급보를 듣자마자 서류를 갈기갈기 찢으며 외쳤다.

“이럴 수는 없다! 이 제국이! 이 대한제국의 군대가 비참한 패퇴라니!”

장남 이탄이 보내오는 편지로 언젠가 업무가 줄어들 나날을 기다리던 건양제는 다급히 서랍을 열고 간혹 사용하는 안정제인 브로민화 리튬(LiBr: 심장마비의 위험성이 있다) 삼켰다.

미친 듯이 쿵덕거리는 심장박동이 안정화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건양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회로 향하였다.

다급히 방문한 유길준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바로 보고를 올렸다.

“저희 익문사의 첩보에 의하면 순나라의 무력도발 조짐은 보였습니다만 준나라와 제나라가 합류한 것은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사옵니다. 기껏해야 무력도발에 호응하여 외부 함대를…….”

“상황이나 빠르게 보고하게. 우리 제국군이 요서회랑을 틀어막는데 사력을 다함은 알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빈약한 순나라의 포병으로 우리의 포병을 역으로 격퇴하다니.”

“헤이그 조약으로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 병기를 사용하였사옵니다. 그나마 영길리의 사인화카코딜(최초의 독가스) 대신 엄청난 양의 아황산가스탄을 쏘아서 사망자는 적습니다.”

“그 인구만 많은 돼지 놈들은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황산가스를 스스로 퍼마실 것이지 이를 전쟁에 활용한다고?”

선전포고도 없이 국제조약도 무시한 채 전쟁을 벌이는 행동은 유길준은 물론이요, 대한제국의 사람들 모두가 예측할 수 없는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벌어진 이후 수습하는 일은 자신의 몫이기에 건양제는 의회의 문을 열고 나섰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인사는 되었네. 허례허식은 다 집어치우고 지금 상황보고를 시작하게. 전쟁이 12시간 전에 발발하였는데 현 상황은 어떠한가? 국방부장관인 민영환은 어서 보고를 올리게.”

사방에서 전신이 쏟아져 들어오는 의회는 이미 전시체제를 위해 모든 의원들이 비상 소집된 상태였다.

탈모가 한창 진행되어 앞머리가 사라진 민영환은 이를 악물고 보고를 실시하였다.

“현재 요서회랑의 군대는 사단단위 철수작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황산가스의 독성이 상당히 약한지라 피폭된 인원들도 퇴각이 가능하지만 역공은 불가한 실정입니다.”

“사단단위 철수작전? 독가스 공세를 실시하면 놈들도 진격을 못 할 것이네. 방독면이 우리보다 훨씬 부족한 놈들이 무슨 진격을 실시한단 말인가?”

“그러나 꾸준한 진군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놈들은 가스농도가 짙든 옅든 간에 분간하지 않고 덮어놓고 병력을 밀어 넣고 있기에 대처할 수 없는 판국입니다.”

“아주 작정을 하였군. 덮어놓고 진군 명령을 내려서 죽는 병사가 백만 명이 되건 우리 제국군을 몰아내고 요새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분명해. 그러하면 목적지는?”

“반금(盤錦: 현 핀잔 시) 일대에 있는 유전으로 보입니다.”

이런 방식의 전쟁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자신들의 무기에 죽는 병사가 몇이나 되건 말건 순나라의 군부는 일단 유전을 강탈하려는 마음 하나로 움직였다.

민영환은 현장에서 이어지는 전신을 받고는 보고를 재차 확인하였다.

“지금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순나라 군대는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으며 준과 제의 기동부대가 먼저 전선으로 투입되었다가 독가스에 질식사하는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순나라 놈들은 우리가 독가스를 쏘았다고 발악하겠지. 일단 훗날 진상규명 작업을 실시하여 세 나라를 교란시키기로 하세. 즉시 함대를 파견하여 요서회랑 일대를 무차별 포격하고 산동 반도에 상륙하여 진군을 막아내야 한다네.”

그 대가로 자신은 동원령과 명령서를 작성하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우는 게 당연하겠지만.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보고를 받으며 명령을 하달하는 건양제에게 유길준이 돌아와 전신을 건네주었다.

<고토 요동의 수복을 위하여 무력을 사용할 것이며 전쟁 상태에 돌입함을 통보한다. 전신 운영에 차질이 있어서 선전포고 전문을 늦게 보내게 되어서 유감이다. 순나라 황제>

“이 근육도 없이 뒤룩뒤룩 지방만 넘쳐나는 이(李)가 놈팡이가 어쩌고 어째? 전신 운영의 차질? 이미 다 준비해 놓고 동맹국 군대를 스스로의 무기로 죽이면서 할 소리냐?”

“황제폐하 진정하시옵소서!”

근육의 종주국 대한제국의 황제라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평범한 국가 기준으로는 근육질인– 몸에 분노가 치밀어 뒷골의 뻐근한 기분을 느낀 건양제는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였다.

그리고는 펜을 휘둘러 유길준에게 답신을 보내라 하였다.

<너를 근육하겠다>

“이거면 충분하겠지. 지금부터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전면공세에 나선다! 놈들이 원하는 바는 요동의 무력 합병이 아닌 반금 일대의 유전을 장악하려는 생각임을 명심하게!”

“당장 호주와 미국 그 외의 동맹국에게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또한 독가스 공세를 실시하였으니 이를 응수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수라…… 응수? 덮어놓고 똑같이 보복하면 국제사회의 평판은 물론이고 시민들이 그 잔혹함에 몸서리칠 것이네. 일단 우리는 세 차례에 걸친 독가스 공격을 받았다 말하게.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하는데 네 번째는 참지 못하지 않는가.”

실리를 추구하며 대외적인 평판도 생각하는 건양제다운 생각이었다.

실질적으로는 다음 독가스 공격이 시작되면 바로 반격하라는 주문이니 민영환은 포병부대에 연락하여 미리 최신식 포스겐 독가스 탄두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요동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요새화된 요서회랑에서 무차별적으로 진격한 순나라와 제나라 그리고 준나라의 대륙연합군을 맞이한 대한제국군은 즉석에서 합리적인 대응을 모색하였다.

“놈들이 사용하는 아황산가스는 공기보다 두 배가량 무겁다! 가스의 영향이 적은 고지대로 퇴각하고 부대를 재정비한 뒤 포병의 지원을 받아 격멸한다!”

사관학교 교장이자 대한제국군 중장의 직위를 역임하는 홍범도는 적에게 일방적인 피해를 강요하는 교리를 철두철미하게 이행하는 장성이었다.

비록 다급한 퇴각 덕분에 전투력이 많이 손실되었지만 대한제국의 작전교리를 지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무턱대고 아황산가스를 사용하였다가는 아군이 피해를 입을 수 있어 저지대에서 정비한 순나라 제25 보병사단의 진영을 확인한 홍범도는 적의 움직임을 확인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놈들이 우리의 화력 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나 보군. 밀집대형이니 24㎝ 곡사포 준비해.”

“24㎝ 곡사포 말씀이십니까? 너무 과잉화력이 아닐지…….”

“그 정도는 쏴야 화풀이라도 하지! 당장 이하 구경의 포 모두 모아서 발사해!”

다른 국가에서는 거포나 공성용 포로 분류하는 24㎝ 곡사포가 몸을 눕혀 거대한 탄환을 받아들였고 다른 야포들도 일제히 장전을 실시하였다.

기껏해야 최전선에서 소모될 예정인 순나라의 보병사단에게 지나친 화력이었지만 전쟁에서는 기세가 중요한 법이었다.

24㎝ 곡사포를 시작으로 유압식 제퇴장치가 달린 15㎝ 야포와 보병들이 애용하는 6㎝ 구포까지 모든 포탄이 하늘을 어지럽게 수놓았고, 일개 보병사단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와해되었다.

“역시 일제포격보다 멋진 건 없지. 문종대왕께서도 포탄의 향취를 즐기셨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 흑색화약을 쓰지 않는 시대라 옛날처럼 지린내는 나지 않는군.”

“장군님이 보시기에는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놈들 제대로 된 포격 대응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대포병 사격으로 독가스탄이 날아들까 염려했는데 후방이 조용하군요.”

아직 레이더가 없는 시대였지만 이 시대의 포병은 포탄의 발사음과 착탄까지 걸리는 시간, 그리고 각도를 유추하여 후방의 포대를 예측사격으로 격파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홍범도도 하늘을 수놓으며 후방으로 날아가야 할 포탄들이 몇 발에 불과한 것을 확인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군인은 언제나 적을 격퇴해야 하는 법이다.

홍범도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에 올라 명령을 내렸다.

“그럼 더 좋은 일이 아닌가? 다음 일제포격이 떨어지는 십삼 분 뒤 돌격하여 적의 부대를 궤멸시키도록! 이후 더욱 진군하여 후방부대에 무력정찰을 시도한다!”

아직 기마병이 활보할 수 있는 전장이며 이미 순나라의 보병사단이 궤멸 직전이기에 홍범도의 돌격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방으로 도주하는 보병사단의 몰골을 확인한 홍범도는 입술을 깨문 채 후방으로 질주하였다.

“이상한데? 정말 이상한데 말일세. 김상옥 자네가 보기엔 뭔 생각 같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놈들이 아무리 인구가 많다지만 일개 사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수행할 작전이 뭐가 있을까요? 진지 구축 시간을 벌어보았자…….”

화력을 퍼부은 이후 수행된 무력정찰은 25사단 후방을 방비 중인 경비부대조차 단숨에 궤멸시킬 수준이었다.

산 위로 올라가 망원경을 들고 적진을 확인한 홍범도는 적들의 기이한 진영을 보면서 침을 뱉으며 말하였다.

“순나라 놈들 정면에서 싸울 수 없으니 머릿수만 앞세워서 참호를 파대는군.”

“네? 놈들의 작전교리는 머릿수를 앞세워 각 부대를 고립시키고 대규모 회전을 유도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망원경을 넘겨받은 김상옥과 장교들이 적진을 확인하였지만 순나라의 진영에는 땅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철조망과 임시로 쌓은 모래주머니, 그리고 어지럽게 널린 참호만 존재하였다.

다들 적진을 확인하자 홍범도는 분통을 터트리며 말하였다.

“놈들이 우리에게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포병의 수도 적고 병사도 나약하며 기관총의 숫자만 그나마 대등하지. 그러니 덮어놓고 참호를 파서 포격을 막고 무한정 소모전을 펼치려는 거야.”

본래 역사에서는 서로의 화력 증강으로 인한 피해 방지로 만들어진 참호전이었지만 이 역사에서는 달랐다.

오로지 머릿수만 믿을 수 있는 대륙의 세 국가가 대한제국의 압도적인 포병 전력을 갉아먹기 위해 전면적으로 도입하였다.

대한제국군도 참호를 사용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기동력과 화력을 강조하는 교리가 대세가 된 지금에는 그리 쓰일 일이 없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김상옥은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참 좋은 일이로군요. 허허벌판에서 싸우면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맞아 죽으니 대여섯 명도 상대하기 힘든데 좁은 참호에서는 열 놈도 상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참호로 돌입하기 위해 사용할 철판이나 준비해야겠습니다. 놈들의 야포가 보잘것없으니 보병의 사격이나 기관총만 막아낼 수준이면 충분하지요.”

대륙 연합군에게 인구가 있다면 대한제국군에는 근육이 있었다.

진양근을 달성 가능한 장병들은 어느새 진지 구축용으로 마련한 철판에 손잡이를 달아 적 참호로의 돌입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작가의 말

러시아 노동자들의 생활은 고증입니다. 영국과 같은 정점의 국가들은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여력이 생겨 쇠고기도 먹고 문화생활도 즐기는 시기인데 러시아 제국은 저게 나아진 형편입니다.

물론 대한공화국 노동자들은 쇠고기도 먹고 닭가슴살도 먹고 입신체비도 즐깁니다.

추석 연휴 동안 근육조선은 연재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대신 목, 금 이틀간 연재할 예정이며 상황이 된다면 월요일 연재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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