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67화
2부 외전 10화 황제 그리고 황제(1)
1908년 11월 2일. 월요일 아침의 대한제국 황궁 경복궁의 아침은 언제나와 같이 소란스러웠다.
어스름이 걷히기도 전인 새벽 5시 20분, 내관은 황제인 건양제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폐하. 다섯 시 이십 분이 되었사옵니다.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정무에 임하시옵소서.”
궁궐에 근무하는 이들은 예진원이 개명한 예진청의 직원들에게 입신체비를 배울 수 있으며, 유사시를 대비하여 언제나 입신체비를 익혀야 하였다.
한낱 내관조차도 두툼한 몸집을 자랑하였지만 황제의 몸은 달랐다.
“꿈결 같은 주말이 지나가고 다시 업무가 시작되는군.”
한숨을 내쉰 건양제는 아직도 눈 아래가 시커먼 몰골로 터덜터덜 걸어 욕실로 향하였다.
입신체비의 종주국인 대한제국의 황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몸매를 바라보던 내관은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중얼거렸다.
“우리 황제 폐하는 언제쯤 평안히 입신체비를 해보시려나. 매번 업무에 치어 살다 가까스로 돌아오셔도 또 업무를 보시니 내 광무제께서 승하하실 적이 기억나는군.”
선대 황제 광무제는 1860년 23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거대한 제국을 이끌며 30년을 업무에만 종사하면서 살았다. 결국 1890년 53세의 나이에 양위조차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막중한 업무의 근원은 미주를 비롯한 속주(屬州)에 있었다. 이미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고도 남을 정도의 건전성을 지닌 지방 세력들을 눈여겨본 광무제는 이들을 민족자치의 개념을 앞세워 독립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저 미국아. 약속한 대로 자치정부 수립까지 오 년 동안 지원해줬는데…… 이제 좀 독립하면 안 되겠니? 나도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죽을 것 같아>
<아 X팔 대한제국이 다 해결해 주는데 나갈 생각이 있어? 군소리 말고 지원금 줘>
당시 제국일보 사설란의 시사만화만 보아도 원인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민족자치니 독립이니 거대한 대한제국에 빌붙어 사는 것이 옛 속주들의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광무제는 30년 동안 하루 10시간 이상의 업무와 속주 독립을 위한 준비 작업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광무제가 눈을 감을 때 자신의 아들이 이 업무 지옥에서 해방되기를 원했지만, 아들 건양제는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바로 집무실로 향하였다.
“어서 업무를 실행해야 하니 서류를 가져오게. 오늘은 또 어디의 업무가 기다리고 있을꼬.”
전근대 계몽(啓蒙)군주의 업무량이 무시무시하지만 건양제의 끔찍한 업무량과 비견할 수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지가 독립해도 서원과 향교는 입신체비의 종주인 대한제국 황실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아침을 먹고 바로 양치를 한 건양제가 자리에 앉자 수많은 탄원서와 서류들 그리고 임명 후보를 수록한 서류들이 탑을 쌓았다.
저 멀리서 의원들이 입장하는 모습을 살펴본 건양제는 눈을 굴리며 서류를 읽어 내려가다 분통을 터트렸다.
“삼대운동이고 뭐고 내가 입신체비를 해볼 시간이 되어야지 이런 상황을 판가름하지! 상체가 어떻고 하체가 어떻고 나발이고! 거기 있나? 입신체비 관련 서류들은 숙부님께 보내게.”
“하오나 산당왕(珊當)께서는 현재 탄원서를 읽으시느라 야근을 실시하셨사옵니다.”
“숙부님께서 그리하셨다면 내가 해야지 뭘 어쩌겠어. 빨리 탄(坦)이가 장성하여…….”
이제 고작 16세에 불과한 이탄이 장성해서 업무를 보좌하려면 삼 년은 걸리리라.
생각하여 보니 자신도 19세부터 업무를 분담하여 처리하다 이 지경까지 왔으니, 대체 인간의 삶을 사는지 일개미의 삶을 사는지 의심스러웠다.
한참 동안 서류를 결재하던 건양제는 뻐근해지는 목 근육을 주물러 풀면서 벽에 걸린 서애 유성룡의 초상화를 보았다.
업무의 신이라 불리며 섬기는 무당까지 있는 위인이지만 제발 유성룡이 이 자리에 와서 업무를 대행해 줬으면 하는 소원만 품게 되었다.
“폐하, 낮것상(점심)을 대령하겠사옵니다.”
수레를 통해 운반된 으리으리한 상차림이 나왔지만 모두 먹을 시간도 없었고 모두 먹을 이유도 없었다. 원하는 음식 한두 개만 골라 먹으면 나머지는 시종들이 치우게 마련이었다.
몸에는 좋지 않지만 업무를 조금이라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찐빵과 와플 그리고 각설탕을 잔뜩 챙긴 건양제는 설탕가루가 씹히는 와플을 맛보며 다시 업무에 몰두하였다.
이윽고 산더미 같은 서류가 사라질 무렵 방문객이 찾아왔다.
“신 신민당 당수이자 의회 대표인 최익현 인사 올리옵나이다.”
“들어오시오.”
오늘도 자명종의 뻐꾸기가 두 번 울어대는 오후 2시가 되자 기계처럼 방문한 최익현은 절을 올려 건양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더니 다시 산더미 같은 서류를 꺼내 들었다.
최익현의 체격은 건양제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하였지만 소룡식 입신체비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심지어 4년 전에 개최된 1904년 금성(현 캘리포니아) 올림픽에서 70세의 나이로 체조부분 철봉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한 근육과 정치 양 분야의 최강자였다.
건양제는 슬쩍 눈을 돌려 서류를 훑어보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전동안 이렇게 많은 안건이 처리되었으니 오후 6시에는 더 많은 안건이 쏟아지리라.
결국 건양제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항의하였다.
“오늘도 의회에서 정해진 일을 내가 또 담당하라니. 스스로의 뜻조차 정하지 못하는 의회가 왜 있단 말인가? 최 대표는 대체 무얼 하는 사람인가?”
“저희가 결의안을 제출하더라도 황제폐하께서 재가(裁可: 안건을 결재함)를 행해주셔야지 이 안건의 효력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당인 신민당의 방침이 아닙니까?”
“제1야당인 민중당의 방침도 매한가지이지. 애초에 의회에서 결정된 모든 안건을 내가 확인하는 작업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자네는 총리가 되어 모든 안건을 결정해야 할 사람일세.”
대한제국의 입헌군주정 전환은 절반의 성공조차 거두지 못하였다. 삼권분립의 원칙 이전에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였으며 입법과 사법 그리고 행정처리 과정도 황제의 손을 거쳐야 했다.
최익현은 건양제의 표정을 보더니 무덤덤하게 말하였다.
“하오나 이것이 광무제께서 정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정한 뜻이 아니고 정하다가 힘이 다하셔서 쇠하신 것이지.”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건양제의 도장이 찍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도장 찍는 기계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놀리려던 건양제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교육대로 반사적으로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신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광무제의 입장에선 답을 할 시간조차 아까운 형편이었다. 설탕을 잔뜩 넣어 커피인지 모를 뜨듯한 무언가를 들이켜고 다시 서류를 읽어 내렸다.
서류를 절반 정도 읽으며 도장을 찍을 때쯤 자명종이 울리며 사람이 들어왔다.
“황제 폐하께 신 성림왕(聖臨王: 고종의 자) 이형 인사 올리옵니다. 오후 네 시가 되었으니 입신체비를 행하실 시간이옵니다. 하온데 또 설탕을 섞은 가배를 잡수셨나이까?”
“설탕을 섞은 가배를 마셔야 머리가 좀 돌아가지 않겠소.”
수양대군의 직계 후손이자 십오 년 전에 예진청(예진원의 대한제국 이후 이름) 도제조로 임명된 이형은 평상시에는 느긋한 성격으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 예진청의 대표였다.
반면 그 느긋한 성격은 입신체비에서는 절대 드러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제자를 청해 몰려온 인재들의 삼 할이 포기하고 도망칠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이며 이는 황제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는 음식 하나하나를 따지더니 대성통곡하듯이 말하였다.
“폐하! 이런 식으로 섭생을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곡분과 당분을 많이 섭취하시면 몸에서 남는 영양분이 쌓이는 법이옵니다! 어서 신과 함께 입신체비를 실시하시옵소서!”
“조금 덜 하면 아니 되겠는가? 내가 얼마나 피로한지 알고 있지 않은가?”
건양제는 제발 오늘만이라도 입신체비를 하지 않기를 바라며 간절한 표정으로 이형을 바라보았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가까스로 잠드는 이 지옥 같은 생활에 휴일을 제외하고 하루라도 휴식이 가미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반면 그 말을 들은 이형은 눈을 부릅뜨며 바닥에 절을 올리고 머리를 쾅쾅 찧으며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답하였다.
언제나 듣던 피가 목구멍에서 치솟아 오를 것 같은 목소리였다.
“폐하! 차라리 업무를 중단하시옵소서! 이 빈약한 몸을 보십시오! 입신체비의 종주인 대한제국의 황제라 불릴 수 있는 몸이 아니옵니다! 얄팍한 대흉근! 가느다란 허벅지! 위태위태하게 지탱하고 있는 삼각근! 신은 이런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사옵니다!”
대한제국 기준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작 삼대운동 500근(320㎏)에 불과한 건양제는 대한공화국에서 철저히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였다. 대신 전 세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튼튼한 몸이었다.
이형의 모습을 바라본 건양제는 푸념을 시작하였다.
“가만히 둘 생각이 없다면 업무를 좀 어떻게 해보시게!”
“그러하면 신에게 최익현 대표와 내수린을 실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십시오! 신이 반드시 내수린에서 승리하여 폐하께 입신체비를 행할 기회를 만들 것이옵니다!”
신장이 155㎝에 불과한 단신인 이형이지만 그의 삼대운동은 1,000근을 달성하였으며 내수린으로 따지면 당대 제일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최익현이라 하여도 내수린에서는 이형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대신 훗날이 문제였다. 기껏해야 며칠이 지난 뒤 수많은 의원들이 이형에게 내수린을 신청할 것이며 힘이 다한 이형이 패배한 뒤 신의 생활은 변하지 않으리라.
결국 건양제는 이형을 만류하며 입신체비장으로 향하였다.
“폐하! 의압을 행하실 때 조금만 더 정자세를 유지하시옵소서! 반동은 아니 되옵니다!”
“이러다 죽겠네! 어떻게 좀 해주면 아니 되겠는가!”
“수양대군께서 입신체비의 법도를 세우실 적에 문종대왕께서도 이를 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자고로 이 땅의 군왕이시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옵니다!”
단순한 의압(벤치프레스)을 하는 데에도 사력을 다해야 하니 입신체비가 자신의 명줄을 잡고 있는지 아니면 입신체비가 명줄을 갉아먹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 끔찍한 악순환을 끊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이형이지만 다시 업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오후 업무가 끝나고 다시 산더미 같은 서류를 퍼부은 의원들이 자신의 당사로 돌아가 업무에 종사하였고 건양제 또한 업무를 시작하였다.
최근 들어 늘어나는 외교서신들은 건양제의 눈 아래를 시커멓게 물들이기 충분한 양이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는 뭔 철도 욕심이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군. 전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는 별다른 욕심을 보이지 않더니만. 나라 내실이나 튼튼히 다질 것이지 이게 제국이라니.”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열정적이고 눈치가 없으며 능력이 지독히 없는 사람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 하여 사소한 문제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제대로 진압조차 하지 못하는 황제 자격이 없는 자였다.
심지어 막내아들은 기이한 불치병에 걸려 세 살의 나이에도 목숨이 위태로우니 국가 내부도 왕실 내부도 모조리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그런 니콜라이 2세는 작년부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같이 완성하자는 제안을 보내왔다.
“정작 제안을 해놓고 돈이 없어서 공사비 중 7할을 우리 대한제국이 내라고? 그럼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니고 대한제국 횡단열차라 할 것이지.”
나라에는 돈이 없지만 어떤 수를 쓰든 간에 횡단열차를 개통하고 싶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이었다.
건양제는 이번에도 정중한 거절을 하려다 첩보원이 보내온 서류를 확인하고 다급히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리 라스푸틴? 뭐 하나 내세울 건수도 없는 괴승이 말을 좀 잘한다고 황실에서 융숭히 대접해? 더군다나…… 익문사(益聞社) 대표인 유길준을 어서 들라 하게.”
건양제는 서둘러 방문한 유길준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제국일보 출판기관이지만 정보기관도 겸하고 있는 익문사의 수뇌답게 서류의 제목만 보고 상황 보고를 즉각적으로 진행하였다.
“신 유길준 폐하께 보고를 올리옵니다. 라스푸틴이라 불리는 승려는 이미 니콜라이 2세와 황후에게 총애를 받아 종교 행사를 대행하고 있으며 내정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민한 소문이옵니다만…….”
“불민한 소문이라니? 그자는 승려인데 음주가무를 즐긴다는 말인가?”
“가정교사와 시녀들을 겁탈하여도 문책을 받지 않는다 하였사옵니다. 심지어 정력도 왕성하여 보고에 의하면 노애(전국시대 진나라 인물)와 비견할 인물이라 하옵니다.”
“거참 제대로 미친놈이로군. 가정교사와 시녀라 하여도 각 귀족가문에서 보낸 여식인데 승려의 몸으로 무슨 짓거리를 저지르는 것인가. 그리고 이 내용이 올바른 말인가?”
가소로운 놈이 다 있다면서 코웃음을 치며 서류를 가리킨 건양제의 손가락 끝에는 ‘괴승 라스푸틴은 동방의 문물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차르를 실각시킬 것’이라는 내용까지 적혀있었다.
지금 대한제국의 힘이라면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경우 무조건 승리였다. 지형지물이건 뭐건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진격하여 일전을 벌여도 대한제국의 절대 우세이다.
이를 알고 있는 건양제였으니 유길준도 가소로운 놈이 다 있다는 듯이 말하였다.
“괴승 라스푸틴은 니콜라이 2세를 설득하여 동방의 문물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구주(유럽)의 동쪽 끝인 러시아가 힘을 다하여 서방의 문물을 진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사옵니다.”
“그래서 작년 말부터 횡단철도를 놓을 것이니 협력해 달라고 계속 외교 서한을 보내는군. 괴승 따위가 제안한 말을 듣는 황제라니? 이자가 비선실세라도 되는가?”
“실로 그러하옵니다. 물론 저희 익문사는 폐하의 말 한마디이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제국일보를 움직여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이후 입신체비기구를 이용하여 사고사로…….”
“지금 좋은 생각이 났으니 잠시만 기다리게나.”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된다면 누가 이득일지 고민해 보았다.
대한제국은 태평양을 내해로 두고 있으니 동방으로의 진출이 딱히 필요 없는 실정이기는 하였다. 기껏해야 여분의 식량을 수출하는 것이 전부이다.
반면 러시아 제국은 큰 이득을 본다. 귀족들의 수탈과 피폐한 환경으로 만성 기근에 시달리는 러시아 시민들이 먹고 남을 정도의 압도적인 식량이 공급되면 황실의 평판은 순식간에 복구되리라.
그럼 이득을 보는 쪽이 돈을 더 쓰는 것이 옳으니 공사비용의 대다수는 러시아에 부담시켜야 하리라.
여기에 건양제는 자신의 업무량도 줄여볼 겸 한마디를 보탰다.
“라스푸틴은 언제라도 제거할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닐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개통할 경우 막대한 비용이 문제이지만 남는 식량을 수출할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오히려 바람직하군.”
“하오나 그 막대한 비용을 아국에서 부담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난이 이어질 것이옵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비용의 7할을 대한제국이 부담해 달라 하는 형편이 아니옵니까?”
“동방의 문물이 서방으로 밀려온다는 예언을 신봉하는 자이니 그 예언을 뒤엎으면 충분하지. 지금 탄이가 열여섯이고 니콜라이 2세의 차녀인 타티야나가 11세라 하였던가?”
“폐하 설마 국혼(國婚)을 추진할 작정이시옵니까? 일전에 빅토리아 왕녀(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앨리스 메리, 조지 5세의 딸)와의 혼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사옵니다.”
대한제국은 지금까지 서방과 피를 섞지 않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설령 외부에서 왕비를 들이더라도 미주나 호주 간혹 대양도에서 들일 뿐 서양과는 일절 연관을 가지지 않으려 하였다.
온갖 제국과 왕국에서 혼사를 추진하여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지만 건양제의 시대가 되어 이 규칙이 깨어지려는 찰나였다.
유길준의 놀란 눈을 바라본 건양제는 팔짱을 끼며 말하였다.
“혼사는 황실의 일이니 내 권한일세. 숙부님들을 포함한 종친분들께 의견을 물어보아야 하겠지만 아마 큰 반대는 없으실 것이네. 일단 탄이를 이 년 정도 러시아에 보낸 뒤 본인의 의견을 물어보면 어떠하겠는가.”
“황제폐하께서 뜻을 정하시고 태자 전하께서 마음을 굳히시면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 하오나 이를 정한 연유가 궁금하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생겨남은 두 나라가 혈맹으로 묶인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네. 이를 인증하려면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침이며 이렇게 되면 니콜라이 2세의 권위도 올라갈 것이네. 물론 횡단철도 공사비는 니콜라이의 부담이 되겠지.”
건양제의 장남 이탄이 러시아로 향하면 수많은 보좌관도 함께 러시아로 같이 파견될 것이다.
이들은 아마 니콜라이 2세의 자존심을 은근슬쩍 긁어버릴 것이고 자연스럽게 시베리아 횡단철도 투자액이 늘어나리라. 아마 그의 허영심과 정비례하는 양으로.
이후 괴승 라스푸틴이 뭐라 하건 간에 입신체비기구로 ‘불행한 사고’를 만들어서 처리하던 아예 실각시키면 그만이다.
여기에 한 가지 꿍꿍이를 숨긴 건양제는 유길준의 표정을 확인하며 손짓을 하였다.
“탄이에게는 내가 직접 말을 하겠네. 자네는 최 대표와 익문사 관원들과 함께 실현 여부에 주목하도록 하게. 장녀는 모르겠지만 차녀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니 불가하진 않을 걸세.”
“폐…… 폐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유길준이 물러나자 건양제는 뿌듯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국혼으로 이후에는 여러 변명거리가 생겨났지만 다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럽과 얽힌 업무를 진행할 때에는 무심코 처가인 로마노프 왕가가 떠오른다며 형평성을 빌미로 업무를 거부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황실 전체에 부담되던 막중한 업무가 줄어 들리라.
예상과 마찬가지로 황실 인원 모두가 업무지옥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건양제의 결정에 동의하였다. 물론 강요는 없었다.
건양제는 아버지로서 자신의 장남 이탄의 의견을 존중하였으니 러시아로 향하는 그의 옷소매를 정리해 주며 거듭 당부하였다.
이탄 다른 종친들의 업무량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당당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동방의 끝에 있는 우리 대한제국이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러시아와 국혼을 추진하고 한 몸이 된다면 이는 동방의 힘이 유럽의 끄트머리까지 미친다는 뜻이다. 다만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혼인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아바마마께서 뜻을 정하였으니 소자 또한 마음을 다할 것이며 머나먼 서역의 러시아에서도 이 나라와 황실의 근본과 같이 행동하겠사옵니다. 부디 소자를 믿어주시옵소서.”
업무에 시달리던 종친들 모두가 눈 아래가 시커멓게 변한 채 황태자 이탄을 전송하였다.
다른 친척들과 같은 업무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기 싫었던 이탄은 빠르게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였으며, 이윽고 사고 소식도 전해졌다.
<러시아 황제를 현혹하였던 괴승 라스푸틴, 황태자 전하께 근육당하다>
이탄 전용으로 만들어둔 입신체비장에서 시녀를 겁탈하던 라스푸틴은 17세에 불과한 이탄에게 철저하게 근육당하여 척추가 부러졌고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대한제국의 기준으로 죽어 마땅한 행위였기에 아무도 이를 탓하지 않았다.
비록 니콜라이 2세에게서 소소한 항의는 있었지만 그 소소한 항의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할 끔찍한 전쟁이 대한제국을 강타하였다.
혼담이 진전되기를 바라던 건양제 앞에 등장한 전쟁은 바로 무진천명대전이었다.
#작가의 말
광무제, 건양제의 하루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전 5시 20분 : 기상
오전 6시 30분 : 아침식사
오전 7시 : 업무(대한제국 속령)
오후 1시 30분 : 점심
오후 2시 : 업무(대한제국 의회 업무)
오후 4시 : 입신체비
오후 6시 : 저녁
오후 6시 30분 : 저녁 이후 의회 업무 잔업
오후 9시 : 기타 탄원서 및 황실 내부업무
오후 11시 : 수면
여기서 의회 업무라도 빼야지 인간답게 살 수준입니다. 현 업무시간은 12시간 기본에 간혹 14시간까지 폭주합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