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66화
2부 외전 9화 내수린으로 맺은 인연
입신체비가 대세가 된 대한공화국에서 나 정도의 덩치를 자랑하는 입신체비사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근육량이야 나보다 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내가 빙의하기 전의 김성원은 절육(커팅)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128㎏의 체중에 체지방을 절제하지 않았으니 씨름선수 같은 체형이라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데 나에게 우유를 던지며 내수린을 신청한 신농도인의 덩치는 나보다 비대하였다.
이 정도 상대와 내수린을 해서 경험을 쌓아야 영직이를 내수린으로 밟아버릴 수 있으리라.
콧김을 뿜으며 질주하는 신농도인을 따라 뛰어가니 내수린장이 있었고 직원은 우리 둘의 표정을 보면서 일단 만류하였다.
“두 분이서 내수린을 격렬히 하시면 체중이 워낙 비대해서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냥 승근도로 승부를 내시지 왜 내수린까지 가셨습니까?”
나도 바보는 아니라 비는 시간에 이리저리 상식을 알아보았는데 보통 옛 대한제국 소속 국가들은 개인 간의 분쟁, 특히 법적 개입이 불가한 언쟁이 벌어질 때 승근도로 승부를 낸다.
그러나 승근도로 결판을 낼 수 없는 상황.
예를 들면 지독한 모욕을 당했을 경우에는 내수린까지 격화되는 일이 잦았다.
폴리네시아인이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는데 내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이 양반이 나에게 아주 신선한 우유를 던져서 그렇지요.”
“신선한 우유? 공령을 집어던질 일인데 내가 참은 거라니까! 세상에 유허 이철의 정체가 유성룡을 비롯한 네 후보가 힘을 합쳐 집필한 가상 인물이라고? 이 사문난적이!”
“사문난적이라 말하지 마라! 내가 왜 사문난적이냐!”
사문난적은 골수 성리학자들이 상대 비방할 때 쓰는 말이고 내가 조선시대에 살 때에도 없던 말인데 왜 이러나?
그런데 내수린장 직원은 내 눈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승인 도장을 거칠게 찍으며 맞장구를 쳤다.
“참 사문난적 같은 말을 하셨군요. 사문(斯文: 글을 쪼개다)이 무슨 뜻인지는 아십니까?”
“글을 쪼개다는 뜻 아닙니까. 그게 뭐가 대수라 그렇게 격렬히 반응하는지 모르겠군요.”
“유허 이철은 오롯이 한 사람의 작가입니다. 광조대왕께서 정체를 숨기라 하셔서 기록이 없는 상황이라 모두가 유추할 뿐이지요. 이를 넷으로 쪼개면 복수자설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의 순수성이 어떻게 됩니까?”
“거 그럴 수도 있지 않습…….”
“내수린 끝나시고 저와 다시 내수린 한판 하시겠습니까?”
내수린장 직원이 팔짱을 끼면서 눈을 부라리는 걸 보니 엄청난 모욕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분명하였다.
아마 내가 창조한 가상인물인 유허 이철의 작품은 사백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며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다.
수많은 저서를 단숨에 저술한 천재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후대 사람들을 지배했을 것이고, 다들 그 시기에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갔으리라.
그런 위대한 작가 유허 이철이 네 작가를 합친 인물이라 말해도 들을 사람은 없다.
평범한 사람은 한 사람의 위인이 세상에 획을 그은 것을 좋아하지, 네 명이 힘을 합쳐 뭔가를 만들어낸 것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니까.
“네 죄를 알겠나? 내가 내수린꾼 두와인과 보조도 맞춰본 사람인데 너 같은 사문난적 따위는 박살을 내주마! 어서 올라와!”
사문난적의 본래 뜻은 유교 경전을 멋대로 해석하는 이단자라는 모욕인데 여기서는 유허 이철의 명작을 쪼개버리는 놈이라는 순수한 뜻으로 쓰인 것이다.
링 위로 올라가 몸을 풀면서 나도 열이 올라와서 한 소리 했다.
“그렇다고 몸의 근본이 되는 우유를 마시다 말고 던져? 내가 사문난적이면 너는 근적(筋賊: 근육의 적) 아니냐? 널 박살 내주마!”
링 위에 올라갔는데 상대도 내 덩치와 근육을 살펴보더니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였다. 덩치야 상대가 크지만 예상보다 내 근육이 튼튼해 보였으리라.
서로 팔을 뻗고 내수린 기본자세를 취한 채 대치하고 있었는데 선공 필승이라는 말이 생각나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었다.
상대방도 내 모습을 알아차리고 서로의 어깨를 부여잡고 내수린의 첫 단계인 힘겨루기에 들어갔는데 의외로 할 만했다.
“크오오오옷!”
“으랴아아아앗!”
상대의 체중은 나보다 10㎏가량 비대한 근육과 지방의 덩어리였지만, 나에게는 서애 유성룡 시절부터 착실히 쌓아온 근육에 대한 기억이 있다. 몸은 아니지만 내 영혼은 기억하고 있다.
어줍지 않은 꾀를 부리다 율곡 이이와 함께 입신체비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분절운동까지 완전히 터득해 버린 나이다.
자세와 각 부위의 조화가 중요하니 이 조합을 착실히 이행하며 온몸의 힘을 쥐어짰고 상대는 내 괴력에 놀라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내가 수양근을 들어 올렸는데 너도 수양근(삼대운동 768㎏)이 가능하냐?”
“아마도! 아직 부상이 두려워서 진양근(삼대운동 640㎏)까지 들었지만!”
영직이가 만든 내수린의 규칙은 힘겨루기 이후 한 번의 잡기와 한 번의 타격이 허용되며, 상대가 일어나 교착상태에 빠지면 다시 힘겨루기로 돌아온다.
종이 울리며 잡기 허용을 알렸고 나는 상대를 엎드리게 만든 다음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폭락(파워 밤) 받아라!”
“이 무식한 놈! 너 심부근육(코어근육) 얼마나 기른 거야!”
요추부터 척추를 따라 뻐근한 기운이 올라왔지만 버틸 만했다. 이것보다 더욱 호된 배례거(굿모닝 리프트)를 수십 번이나 한 기억이 있었으니 온몸의 근육에 하중을 분산하여 상대를 들어 올렸다.
상대가 접수 자세를 취할 때까지 잠시 기다린 뒤에 바닥에 전력을 다하지 않고 내리찍었다.
전력을 다하면 살인무술이 되는 내수린이니 그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지만 어마어마한 충격이 내수린장을 진동시켰다.
“크허으허억!”
“쓰러지셨으니 한 대 맞아야지!”
내수린답게 과장이 섞인 자세를 취하며 몸을 떨구어 팔꿈치로 찍었는데, 복근이 얼마나 단단한지 철골에 두터운 고무타이어를 씌운 것 같았다.
상대가 몸을 추슬러 자세를 잡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거 사문난적이라 생각해서 지방만 비대한 줄 알았는데 힘이 좋아 어지간한 비호(飛虎) 내수린꾼은 상대하기 힘들 것 같군.”
“네 체격을 보아하니 비돈(飛豚: 날아다니는 돼지) 내수린꾼 같은데?”
비호 내수린은 체격이 비교적 작은 미국과 남미국에서 한때 유행했고 지금도 리그가 벌어지는 고공 공격 위주의 내수린이다.
현대의 루차 리브레였던가? 상대는 내 도발에도 자세를 낮추더니 경력자답게 날카로운 태클로 내 허리를 잡았다.
내수린은 힘이 센 놈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한 번 공격을 당한 사람이 자세를 바꾸어 선공을 취할 권리가 있었다.
물론 이 규칙은 고전 내수린, 이를테면 궁예전 같은 것에서는 적용되지 않았고.
내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체중이 더 많은 상대가 허리를 잡았기에 자세가 무너졌고 상대의 공격이 진행되었다. 상대도 나와 대등한 괴력을 가지고 있으니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측폭격(사이드워크 슬램) 받아라!”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250㎏의 무게가 합쳐진 충격이 좌반신을 강타했다. 반사적으로 접수 자세를 취해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폐의 충격으로 숨조차 쉬지 못했으리라.
거대한 다리가 가슴에 내리꽂혔지만 내 두툼한 대흉근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심하게 피격당한 척 사지를 허공으로 띄워 반동으로 충격을 완화하고, 한 바퀴 굴러 자세를 취하니 상대는 내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기술 거는 모습은 무식하게 힘을 앞세운 초보자인데 근육 사용법은 어중간한 입신체비사 이상이고 접수는 나보다 잘하는 것 같잖아?”
“그럼 기술만 익히면 어중간한 내수린꾼이라는 소리잖아?”
“이미 내수린꾼이지. 주변이나 돌아봐라.”
주변을 슬쩍 돌아보니 두 거구가 격돌하는 모습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수린도 멈춘 채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직원과 어느새 따라온 최 대리는 핸드폰을 들고 우리의 싸움을 녹화하기까지 하였다.
상대는 슬쩍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언쟁을 벌이다 내수린을 한다는 사람들이 서로를 무턱대고 던지다가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자주 있지. 그런데 아마추어 수준에서 이런 수준 높은 경기가 나오니 다들 우리를 내수린꾼으로 아는군.”
저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가며 기운이 샘솟아 낮은 자세로 태클을 걸었는데, 상대는 이미 내수린에서 수십 번이고 당해온 일인지 내 미숙한 태클을 풀면서 두골헌(헤드락)을 걸었다.
“너 우리 내수린 극단에 합류해라! 잘만 하면 두와인과 내수린을 할 기회도 생긴다니까?”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전통건축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 이후로 내게 기회는 별로 없었다. 힘이야 내가 앞서지만 공격기술을 거는 상황이나 서로 교착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대충 세 번 공격당하고 한 번 반격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마저도 상대가 봐준 느낌이 들었다.
“더는 못 하겠다. 당(糖: 혈당) 떨어져서 몸이 안 움직여.”
“참 왜놈처럼 말하네. 당 떨어졌다는 소리 대신 곡분 떨어졌다는 소리를 해야지. 그나저나 이렇게 대단한 양반이 왜 그렇게 사문난적 같은 말을 했을까. 유허 이철은 누구다?”
진실을 말하고 싶지만 서로의 의견이 대립하다 내수린까지 이어지고 패배했으면 상대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규칙이다.
어쩔 수 없이 진실 대신 거짓을 말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공동 저술은 아닌 것 같다. 이제 만족하나?”
“만족하고말고. 몸 한번 제대로 풀어서 기분도 좋으니 밥이나 사줄게. 공화국은 진 사람이 밥을 사지만 내수린을 이긴 사람이 밥을 사는 것이 우리 투이도 전통이야.”
“투이도? 너 투이도 출신이었어? 그렇지 않아도 내일 저녁에 투이도행 비행기 타는데. 그나저나 이름이 뭐지? 이름도 모르고 내수린을 했잖아?”
“내 이름? 마울리(Mauli)다. 내수린꾼으로 일할 때에는 마영도고. 네 이름은?”
“김성원이다, 지금 전통건축 사무소에 다니고 한양에서 살고 있어.”
어느새 내수린이 끝나 친구가 되었으니 마울리를 앞세워 최 대리와 함께 음식점으로 향했다.
서로 죽어라 몸을 던져대며 피로가 쌓였으니 뭘 먹을까 궁금했는데 백월(白月)이라 불리는 해산물 전문점이었다.
조선시대의 전통이 있었는지 커다란 사랑채를 재현한 것 같은 식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다.
마울리는 메뉴를 확인하지도 않고 멀리 있는 수조를 보면서 말하였다.
“여기 백월거사식 정식으로 러시아산 왕게 큰 것에 닭새우 세 마리, 나머지는 적당한 해산물로 채워주시죠. 대충 백오십 원(본래 역사기준 30만 원)에 맞춰주시면 됩니다.”
마울리는 몇 번이고 와보았는지 능숙하게 주문하였지만, 직원은 주변을 슬쩍 돌아보더니 다른 음식을 권하기 시작하였다.
현대에서 가끔 보였던 대놓고 사기 치는 횟집 같지는 않고 좋은 음식을 추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산 왕게는 수입 제품이라 가격이 비싼데 대신에 진흙 게(머드크랩)이나 야자집게가 어떻습니까? 아니면 팔라와 왕게도 지금 할인행사 중인데요. 진흙 게로 만든 게장을 제공하는 행사도 겸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니 과장을 안 보태고 입신체비사가 분명한 거구의 사내들이 등딱지가 머리통만 한 거대한 게를 해체해서 살을 발라 먹고 있었다.
군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마울리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하였다.
“내가 어린 시절에 먹었던 녀석이 조부께서 잡아 오신 러시아산 왕게인데 그걸 먹지 않고서는 게를 먹었다 할 수 없지 않은데. 가격이 조금 올라도 잘 맞춰서 가져와 주시지요.”
“조부께서 러시아산 왕게를 잡아 오셨다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증조부님께서는 러시아 왕국과 교역권을 확보하셔서 왕게 통조림을 사들여 풀어댔지. 조부님께서는 뒤를 이어 아예 게잡이 어선을 끌고 러시아 왕국으로 향하셨고.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게는 배 터지게 먹었어.”
사실상 지구 반대편에서 게를 수입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생각했는데, 직원들은 주문을 받더니 수조에서 해산물을 잔뜩 꺼내 우리 앞에 늘어놓았다.
정말로 현대의 킹크랩, 여기서는 러시아산 왕게라 불리는 녀석이 집게를 딸각거리고 있었다.
팔뚝만한 닭새우가 몸을 펄떡거렸고 이외에도 살아 있는 새우와 가리비 그리고 주먹만 한 생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국이라면 최소 100만 원이 날아갈 해산물 한 상 차림이었지만 계산서에는 고작 200원, 약 40만 원이라 적혀 있었다.
“품질은 아주 좋은데 역시 백월거사(白月居士: 허균의 호)의 기백이 느껴지는 가게라니까. 전에 일본에서 내수린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의 해산물은 품질이 영 안 좋고 가격만 비싸서 실망했었는데.”
내가 대한민국에서 살던 기억대로라면 대형 할인매장에서 해산물을 사들여도 이 가격으로 나오지는 않을 수준이었다. 킹크랩은 바다를 건너왔는지 움직임이 둔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최 대리도 군침을 삼키며 말하였다.
“교산 허균이 말년에 자신의 호를 백월거사라 칭하고 호주로 내려와 음식에 정성을 쏟은 것은 유명하지요. 마울리 씨 덕분에 입이 호강하게 생겼습니다.”
“해산물 품질에 만족하셨다면 저희 식당의 명물인 백월거사 방식의 한 상 차림을 대접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깐죽거리던 허균이 말년에 창안한 요리는 어떤 음식일까 했는데, 펄떡거리는 생선을 얇게 떠내서 틀 안에 넣고 초밥으로 눌러내는 사이 식전주가 나왔다.
박하향이 느껴지는 식전주로 건배를 올리고 들이켰는데 입안에 화사한 향기가 느껴졌다.
탄력이 넘치는 우럭 틀 초밥을 먹으니 식욕이 동했는데 바로 옆에서 껍데기를 까낸 생굴이 앞에 놓였다.
내가 슬쩍 눈치를 주자 직원들은 간단한 설명도 하였다.
“허균은 노년에 요리에 대한 저서를 정립하였습니다. 이 저서인 월령서(月令書)에서는 달이 기울고 차듯이 요리를 한 상에 차려놓으면 차가운 요리가 미지근해지고 뜨거운 요리가 식으니 바로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였지요.”
“그거 서양에 전파되어 코스요리라 불리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월령서를 읽은 요리사들이 추운 러시아의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요리를 하나씩 내어놓는 방식을 택했다 하더군요.”
넘겨짚었는데 맞는 말이었다. 허균의 방식을 조금 개선한 요리라는 설명이었는데 초장을 뿌려 생굴을 들이켜니 뜨듯하게 덥힌 청주와 화로에 구워낸 생굴이 나왔다.
다음으로 나온 음식은 새우로 회를 만들어 연한 양념장에 담근 녀석이었다.
펄떡거리는 생새우를 입안에 넣으니 이번에는 녹차의 맛이 느껴지는 술이 나왔다.
술로 맛을 씻어내고 계속 나오는 요리를 맛보니 마지막으로 나온 녀석이 킹크랩 찜이었다.
킹크랩의 다리를 뜯어내 살을 발라내고 겨자 간장에 찍어 삼켰지만 아직 배가 고팠다.
내수린으로 온몸의 영양분을 소모하였으니 7인분은 될 법할 해산물이 뱃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직 배는 조금 비어있지만 절제해야 하니 홍차를 마시며 아쉬운 듯 말하였다.
“나머지를 볶아서 볶음밥으로 만들어 먹으면 좋겠는데 절육에 심혈을 기울일 예정이라 배를 좀 비워둬야겠어. 아주 잘 먹었는데 나도 접대 한 번 정도 해야 하지 않을까?”
“접대는 무슨! 지금 짹짹이 한번 보라고. 우리 내수린 영상이 화제가 되었어.”
짹짹이는 본래 역사에서 SNS 중 하나인데 대한공화국에서 개발해서인지 이름이 변했다.
내 휴대전화에 있는 짹짹이를 눌러 검색하니 정말 나와 마울리의 경기가 올라와 있었다.
# 수상할 정도로 내수린을 잘하는 사문난적
# 유허 이철을 넷으로 쪼갠 자의 최후
# 마영도한테 근육이 갈라져서 죽어
나보고 사문난적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는데 아내에게도 문자가 왔다.
진성이가 내 내수린 영상을 보더니만 흥분해서 소파에서 뛰어내려 발목이 아프다고 투정을 부린다 하던가.
마울리도 쌀톡을 하나 받더니만 슬쩍 웃으며 말하였다.
“다음 경기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아서 호주로 잠시 여행 왔는데 네가 접수를 잘해서 내 기술이 돋보였나 보군. 지금 WNE(World Naesurin Entertainment)에서 철창격전 참가 제안이 왔어. 접수 잘하는 친구를 붙여준다더군.”
철창격전이면 64명에 달하는 내수린꾼이 격전을 벌여 우승자를 정하는 경기이다.
아무리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 해도 여기서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내수린의 정점에 다가가니까.
마울리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며 말하였다.
“처음에는 사문난적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그저 친구 사이로 남기에는 내가 얻은 이득이 너무 많은데 나이가 나보다 많다면…….”
“상팔하팔(조선시대의 법도, 8세 차이까지는 친구이다)이라 했는데 내 나이가 서른여덟이고 네 나이가 서른은 넘었겠지? 그럼 친구 사이지.”
“제 나이가 스물셋에 불과하니 상팔하팔 로도 형님입니다. 앞으로는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30세 초반인데 23세라고?
믿을 수가 없었지만 상대가 내수린꾼 자격증을 보여줬는데 정말 96년생이고 한국 나이로 23세라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이거 친한 동생 하나가 생겼네. 그런데 이틀 뒤인 월요일 오전 7시 비행기로 투이도에 가게 생겼는데 어쩌나.”
“저도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니 염려는 마시죠. 듣기로는 한명회 박물관이 실측예정이라 하였는데 거기 실측하러 가시는 것 같군요. 투이도에서도 형님을 대접하기로 하지요.”
친한 내수린꾼 동생 하나가 생겼는데 영직이를 줘패려면 기술을 익힐 사람이 필요하니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간의 호주 관광을 마치고 아내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마사이족 후손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선물까지 하나 사들였다.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요즘이야 공장에서 만든 면직물이 팔리지만, 저희는 14대에 걸쳐 만들어낸 수제 면직물을 취급하고 있지요. 수제 면직물보다 좋은 게 있겠습니까?”
“14대에 걸쳐서? 정말인가?”
“저희 가게 이름이 뭡니까? 드레이크와 사고뭉치들 아닙니까? 그렇다고 제 혈통에 대해 의심하지 마시지요. 저희 15대 조상님은 정말 솔로몬 제국 사람이었습니다.”
인종차별 같은 생각은 나한테 없지만 가게 주인은 모든 인종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날렵한 근육은 솔로몬 사람인데 피부는 갈색에 얼굴은 아랍인에 곱실거리는 금발은 호인(호주 원주민)이었다. 심지어 눈은 초록색이 섞인 갈색이었다.
호주의 인종 가운데 15%는 분류 없음이라 하였는데 호주 동부에 이주한 목화 농장 사람들이 모조리 뒤섞였기에 분류를 못 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내가 고른 선물은 베개 보였고 주인은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루에 여덟 시간을 몸과 함께 접촉하는 베개 보야말로 수제 면직물의 감촉을 느끼는 가장 좋은 수단이지요. 서비스로 공령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침을…….”
“해외 여행객인데 그거 들고 가다가는 무게 제한에 걸릴 것 같군.”
근육이 일상화된 세상이라 항공기 수하물 제한이 통 크게 40㎏까지 올라갔고 간혹 개인 공령을 항공기에 가지고 타는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아르놀트 이슈테네거가 선물한 공령 덕분에 이 제한이 아슬아슬하다는 점이었고.
투이도행 비행기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마울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느새 형님 동생 사이가 되었으니 승무원에게 요청하여 자리를 변경하였다.
양 부장님은 마울리의 내수린을 보았는지 손짓을 하며 말하였다.
“이거 최 대리를 통해 듣기는 했는데 정말 신예 내수린꾼 마영도와 형님 동생 사이가 되었을 줄은 몰랐어. 동영상을 보니 김 실장 내수린 실력이 회사 제일일 것 같더군.”
“간간이 연습을 해두었지요. 잠시 동생과 대화나 나누겠습니다.”
마울리와 친하게 지내며 계속 내수린 기술을 익혀 공격경험을 쌓아야 영직이를 복날 개 패듯 내수린으로 패버릴 수 있으리라.
마울리는 깍듯이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비행기가 네 시간 뒤에 도착하는데 뭐 대화라도 나눠보겠습니까? 조선의 역사라도…….”
“그것보다는 자네 조부님이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궁금하군. 증조부님께서 러시아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을 텐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요. 당시에 러시아에서 머물며 문학도 익히고 여왕전하와 대화도 나누신 분이시라 이야깃거리는 끝이 없습니다.”
지겨운 비행기에서 러시아 역사나 들어봐야겠다.
대체 19세기 말부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러시아가 제국에서 왕국으로 격하되고 엉뚱한 동시베리아로 이주하였을까?
#작가의 말
조선시대에 내수린을 경험한 영직이를 이기려면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