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55화
2부 30장 17화 한 사람의 죽음
두통과 지독한 발열 증상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아마 내 옆에서 뭐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각종 질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사물을 인지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데, 왜 그러는지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상황인가 고민하려 했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그 고민조차도 오래 이어지질 않았다.
“······십니까? 대감!”
잠시 기절했다 생각했는데 몸의 감각이 이상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사물을 분간할 수도 없으며 뭔 느낌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목으로 넘어갔는데,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후 몇 번이고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한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희뿌연 안개가 끼었다가 다시 시커먼 어둠이 돌아오기를 반복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몸의 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거··· 거기······ 거······.”
목으로는 목소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현대의 젊은 시절에 디스크 수술을 하고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때와 흡사하게 몸의 감각이 천천히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대감께서 정신을 찾으셨다! 의원님! 대감께서 뭐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웅얼거리는 것 같은 이명이 들리던 귀의 감각도 돌아오고 피부의 감각도 천천히 돌아왔는데 차갑다.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견딜 수가 없어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네! 대체 왜 이렇게 끔찍하게 춥단 말인가!”
“물수건으로는 열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아 방도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몸에 물을 끼얹어도 차도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얼음물을 사용하였습니다.”
아직도 뿌연 시야로 몸을 보니 정말로 욕조를 만들어 얼음물과 함께 나를 보관해 두었다.
그나마 손과 발은 동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밖으로 빼두었지만, 몸통은 푹 잠긴 상태였다.
의원은 진맥을 하고 열을 확인하면서 말하였다.
“정신을 잃으신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기력을 찾으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조만간 좌 지휘사 대감을 불러올 작정이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동안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의원은 내 열이 좀 더 떨어졌음을 확인하더니 달곰한 죽을 먹여 기력을 되찾게 하고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대양도의 감영이 있는 서원(西原)에 내가 도착한 것은 열흘 전의 일이었다.
내가 쓰러지자 지휘를 대행한 이순신은 대양도에 가장 빠른 함선을 보내 내 열을 떨굴 명약(名藥)을 챙겨두라 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 산악지대에서 겨울에 채취하여 귀중히 보관하는 얼음이었다.
보통 환자라면 얼음물까지 쓸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약을 쓰면 간이 손상되어 죽을 것이고 약을 쓰지 않으면 고열로 죽을 상황이었다.
부작용을 감수하고 얼음물로 열을 내린 다음 키니네의 양을 줄여가며 열흘 동안 천천히 투약하였다더라.
“저도 천운이라는 말 외에는 뭐라 말씀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음물로 몸을 식힌 반작용으로 절명하였을 것인데, 열흘 가까이 견디시다니요.”
바꿔 말하면 내 몸은 열흘 동안 40도 이상의 고열을 발생시켰고, 이를 얼음물로 식혔다는 소리이겠지.
잠시 손거울을 들어 내 눈을 확인해 보니 노란빛이 맴돌았고 의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기에, 그가 돌아가기 전에 질문을 하였다.
“여해를 불러오기 전에 잠시 물어볼 것이 있다네. 내 몸이 지금 어떠한가? 짐작대로라면 나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네.”
내가 기력을 되찾았다면 표정이 밝아져야 하는데, 의원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동안 나를 간병하고 침을 놓으면서 몸의 상태를 상세히 살펴보고 이상을 감지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은 키니네를 먹고 잘만 버텼는데, 나 혼자만 극심한 황달에 시달린 것이 이상했다.
의원은 내 눈을 잠시 확인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였다.
“제 진맥과 시침이 올바를지는 의문이지만 간장(肝臟)이 지극히 쇠약해졌습니다.”
“간장이 지극히 쇠약해졌다니. 내가 알기로 금계랍은 간을 상하게 만들지만 일반적인 장정은 여섯 달을 복용하기 이전까지는 간이 크게 상하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러하면 간이 이미 만신창이겠군.”
간은 침묵의 장기라 불릴 정도로 병세를 알아차리기 힘든 부위이다.
친척 중에서도 잘만 살아가다가 갑자기 간 수치가 폭락하고 간경화까지 악화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시대라면 혈액검사는 없고 진맥이 전부이다.
이 시대의 진맥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질병이 내 간을 계속 좀먹어왔고, 조만간 터질 병이 독성이 강한 키니네를 해독하는 순간 발병한 것이다.
의원은 내 답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다 나를 위로하듯이 말하였다.
“하오나 간부가 손상되어도 오랫동안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를테면 지금은 은퇴하신 율곡 대감께서는 황달이 조금 진행되었을 뿐, 멀쩡히 제자를 기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율곡 대감은 나처럼 금계랍을 복용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지 아니하였네. 솔직하게 말해주게나. 내가 얼마나 살 것 같은가?”
“저보다 나은 의원에게 진맥을 받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저는 고작 대양도에 파견된 의원에 불과하며, 대감께서는 내의원에 근무하는 분들께도 진료를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구암도 있고 다른 이들도 많이 알고 있으니 그들에게 진맥을 받음이 마땅하군.”
의원이 자신의 진맥이 틀렸다고 말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아직 완전히 내리지 않은 열을 견디면서 거울로 스스로 확인해 보니 흰자위가 조금 노랗게 물들었다.
내 간은 확실히 손상되었고 이 시대의 의학으로는 복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약을 비롯한 이 시대의 약은 본래 간에서 약물을 해독하여 온몸에 퍼뜨리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만들어진다.
당연히 간이 손상된 사람은 탕약을 마셔도 약효는커녕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 되니 탕약을 쓸 방법이 없어진다.
기껏해야 수명을 늘리기 위해 간에 좋은 식품을 먹거나 움직이지 않으며 최대한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전부이리라.
이순신과 산시양이 달려와 내 손을 맞잡았고 둘 다 내가 기적같이 생환하였음을 축하하였다.
“다들 내가 죽은 줄 알았나 본데 멀쩡하니 염려하지 말게. 다만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절대 업무에 종사하지 아니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히 여생을 보낼 것이네.”
“자네가 죽다 살아나니 새사람이 되었군. 몇 년이 된다 하여도 평안히 쉬도록 하게나.”
“그래,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달라지는 법이니 틀린 말은 아니로군.”
열흘 정도 더 쉬니 몸은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열흘 가까이 얼음물에 시달린 대가는 혹독하였다.
온몸의 근육은 물론이고 지방이 쏙 빠져나가 날렵한 수준의 몸이 되어버렸다.
더군다나 40대 후반으로 보였던 외모는 어느새 60대 초반으로 폭삭 늙어버렸다.
도성으로 돌아가니 다섯 달 전의 내 외모를 알고 있던 관원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하였다.
“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기에 대감께서 이렇게 노쇠하게 변하신 것입니까?”
“이미 소식을 못 들었나? 지독한 학질에 걸려 한 달 가까이 정양하였다네.”
아직 내 발로 걸을 수 있으니 뚜벅뚜벅 걸어서 주상전하께 보고를 올렸고, 주상전하는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자네를 보낼 적에 학질이 대상국(아유타야 왕국)에는 퍼지지 않았다 하여 안심하고 보냈다네. 얼마나 지독한 학질이 자네를 괴롭혔기에 이다지도 변하였다는 말인가.”
“의원이 말하기를 죽다 살아난 것과 같은 일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배를 정돈하지 않고 석감으로 몸을 잘 씻지도 않는 선원을 통하여 대상국 일대에 학질이 번진 상황이옵니다.”
“과인의 잘못이 크다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네를 보내기 전에 선발대를 파견하여 미리 정황을 파악하여야 했는데, 자네를 끔찍한 병마에 시달리게 하다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평안히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나.”
당연히 죽다 살아난 내 몰골을 확인한 아내는 내 허리를 부여잡더니 대성통곡을 하였고, 기력을 회복할 탕약을 사들이려 하였다.
다만 나도 내 상태를 대충 알고 있기에 탕약을 마시지는 않고 어의들이 방문하기를 기다렸다.
주상전하께서 혹여나 내가 다른 병을 앓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낸 어의들은 나를 진맥하고 침을 놓아 반응을 확인했고, 심각한 표정으로 돌변하였다.
결국 내의원 도제조인 허준이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간이 쇠하다 못해 망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질의 병세와 금계랍의 독성으로 간이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여기에 고열로 인해 재차 쇠하였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하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가. 참으로 궁금하니 꼭 알려주게나.”
처음에는 성을 내며 내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으려 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허준은 내 무덤덤한 표정을 보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떠올리며 말하였다.
“환후를 다스리고 운이 좋다면 삼 년 정도는 살 수도 있지만,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삼 년이면 제자를 기르지는 못하여도 평생 쉬지 못한 것을 단번에 몰아서 쉴 수 있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둘 중 하나입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쇠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즉각 토혈하며 고꾸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뭘 해도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끝낸 허준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을 살다 죽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죽어야지.
허준이 돌아가고 주상전하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닷새 뒤, 아직까지는 멀쩡히 돌아가는 몸을 이끌고 궁궐로 향하였다.
이미 보고를 들은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보자 어쩔 줄 몰라 했고, 나는 곧 죽을 사람이니 당당하게 말하였다.
“신이 머나먼 변방으로 나아가 고난을 겪으며 깨달은 점이 있사옵니다. 아무리 입신체비로 몸을 단련하여도 환갑이 지나면 사소한 질병이 몸을 망칠 수 있다는 점이옵나이다.”
“익히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과인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할 것이네.”
“신이 바라옵건대 법을 제정하여 환갑이 넘은 관료를 배려하여 주시옵소서. 국난(國難)이 발생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방으로 출장을 나가지 아니하며, 하루 다섯 시진(10시간) 아래로 근무하여야 하옵니다.”
사관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는 나에게 놀라서 붓을 정신없이 놀렸지만 그게 뭐 어떤가.
주상전하는 나에게 어마어마한 채무를 짊어진 상태이며, 난 뒷감당을 할 필요조차 없다.
군대를 나오진 않았지만, 영직이가 말하기를 더 이상 진급을 포기한 대령이 가장 무섭다는 말을 하였다.
말 그대로 막 나가며 미친 짓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역으로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상관 눈치를 보지도 않고 마구 질러댄다 하더라.
그나마 이건 양반이다. 내가 시한부 인생임을 숨기지 않거나 아예 대양도에서 죽었다면 조정 대신들 모두가 들고일어날 상황이며, 왕권은 순식간에 무너지리라.
억울한 마음은 있지만 젊은 왕이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로 왕권이 흐트러지며 난장판이 나는 꼴은 바라지 않아서 참고 있을 뿐이다.
주상전하께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조만간 경국대전을 개편할 것이며, 그 이전이라도 환갑이 된 관료를 외방으로 보내지 아니할 것이네. 또한 지독한 병환에 시달린 자네에게 과인이 내려줄 것이 많지 않으니 이제 퇴직하여 쉬는 것이 어떠한가.”
“신의 무리한 간언을 받아들여 주시니 성은이 지극히 망극하옵나이다. 그러하면 신은 고향으로 내려가 저술을 완성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어차피 시한부가 되어서 퇴직하는 상황이니 그리 기쁘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죽을 때까지 영원한 휴가를 받게 되었다.
내가 짐을 싸기 시작하자 손님이 왔는데 상왕 전하가 아닌가.
상왕 전하께서는 방 안으로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네의 이야기는 모두 알게 되었다네. 주상이 젊은 자신감으로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자네가 살아 돌아온 것이 천운과 마찬가지이며, 자네가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큰 행운일세.”
“한 나라의 중신으로서 옳은 일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신이 평생 나라의 녹봉을 받는 이로서 해악을 끼칠 수는 없는 법이 아니옵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다른 것은 줄 수 없지만, 여기에 축객(逐客) 명령이 있다네.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이걸 자네가 머무는 집에 두고 귀찮은 손님이 찾아오면 쫓아내게나.”
상왕 전하께서는 자신의 서명이 담긴 축객 명령을 여러 장 주셨는데, 아무리 왕이 대단하다 하여도 상왕 앞에서는 아들일 뿐이다.
혹여나 귀찮은 손님이 방문하여 내 휴식을 흐트러뜨릴까 염려하여 직접 써주신 것이겠지.
내가 은퇴하였다 하면 수많은 이들이 나와 인연을 맺자고 몰려들 것인데, 이걸 받으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리라.
심지어 주상전하가 사람을 보내도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축객 명령을 내세워 접근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앞으로 몇 년을 살지는 모르지만 정말 평안하게 살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까.
상왕 전하에게 절을 올리고 짐을 챙겨 돌아가니 모두가 내 귀향(歸鄕) 행렬을 에워싸고 인사를 올렸다.
“대감님! 제가 말년에 외방에 나가게 되었는데, 대감께서 힘을 써주셔서 나가지 아니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뭘 하나! 하주도 사람들은 인사를 올리지 않고!”
퇴직은 못 하지만 근무 시간이 줄어들고 외국엔 나가지 않게 된 산시양은 하주도에서 관원으로 임명된 이들과 도성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 모두를 앞세워 인사를 올렸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제 다 늙어 장남인 양평군(陽平君)에게 예진원 대제학의 자리를 넘겨준 하성군과 입신체비사들도 내 퇴직이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 여겨 웅장한 흑룡세를 취하며 근육의 벽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수많은 백성들이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점점 멀어지는 도성을 보며 아내와 어깨를 맞대고 가마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고향인 안동 인근에 적당한 기와집을 하나 세우고 정자를 만들어 말년을 보내면 충분하리라.
* * *
내가 그동안 배워온 지식이나 임시로 사용하여서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던 지식과 관련된 저서를 적어나가며 소일거리를 하기를 3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이이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을 챙겨야 하는 법이니 붓을 놀려 서신을 작성하여 머슴에게 은자와 함께 말을 내어주며 말하였다.
어차피 손님을 받지도 않으니 말이 살이 올라 운동을 좀 시킬 시기도 되었다.
“율곡 대감의 삼년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 끝났으니 문안의 표시로 서신을 하나 보내도록 하게나. 또한 만취당(권율의 호)의 사십구재가 얼마 뒤이니 서신을 보내도록 하고.”
이제는 내 나이도 만으로 70세, 칠순이 다 되어 석 달 뒤에는 칠순 잔치가 열릴 예정이었다.
1611년 음력 8월의 가을 하늘을 보고 있자니 멀리서 사참(사설 역참)에서 온 사람이 나에게 온 서신을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사참을 통해 온 서신이 많기도 하군. 대체 누가 얼마나 많은 서신을 보냈는가.”
“이 서신은 겉으로만 보아도 머나먼 미주에서 만들어진 서신이로군요. 목화로 만들어진 강화지가 이토록 값싼 고장은 미주 외에는 없습니다.”
아내도 나와 편지를 읽기를 즐겼는데 아내의 예상대로 처음 개봉한 서신은 하와이에서 보내 태평양을 건너 도달한 서신이었다.
카웨라, 조선식 이름으로 강덕만은 정말로 입신체비를 익혀 하와이에 있는 거석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였다.
문제는 이 거석을 움직인 것이 순수한 본인의 힘 덕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화산이 터져 땅의 높낮이가 뒤흔들린 덕분에 거석이 조금 기울어 버렸고 다섯 명이 동시에 시도해 성공하였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다섯 사람이 왕위에 오르면 내전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라네. 결국 일곱 섬의 추장들과 다섯 명의 도전자, 그리고 이후 달려든 여섯 명의 도전자를 합쳐 열여덟 명이 의회(議會)를 만들었다 하는구려.”
결국 하와이의 정치구조에 의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거석을 탁자로 삼아 위에 집을 짓고, 열여덟 명이 당대에 걸쳐서 의원을 구성하는 일종의 근력(勤力)내각제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정치구조이지만 이미 미주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체비사 가운데 가장 빼어난 이를 자신의 부족의 힘 추장으로 임명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리라. 다음 소식은 정철의 부고였다.
“정철 이 친구도 죽었군. 술을 그렇게 마셨음에도 간의 문제가 아니고 뇌일혈(腦溢血)로 급사하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주량을 줄였는데도 독한 소주를 댓 병씩 마셔댔으니까요.”
형님도 슬슬 노환이 시작되었다 하시는데, 아마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유감스러웠다.
내 간이 얼마나 손상되었는지 이제는 혈변이 시작되어서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았다.
그나마 소일거리가 있다면 동네 노인들을 불러다 대접하고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쇠약하다 하여도 몇 점을 내어주고 한참을 봐 줘야 상대가 될 정도이니, 유령이 된 이지함을 제외하면 조선 팔도에 내 적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계라네. 이번에는 자네가 이겼으나 다음번에는 더욱 실력을 갈고닦아 이기도록 하겠네.”
“아홉 점을 두고 이겼다면 이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야말로 언젠가는 일곱 점을 두고 이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동네 노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가니 집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아내는 시녀와 머슴들을 시켜 집안일을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머슴이 뛰어와 나에게 말하였다.
“도성에서 손님이 찾아왔는데 도통 돌려보낼 수 없는 분인지라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평안히 휴식하기로 하였으니 손님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받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머슴을 설득하여 들어온 사람은 세종대왕의 현손인 이정(李霆)이었다.
그는 화공(畫工)도 데려와 나에게 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시어 대감의 초상화와 동상을 남길 본을 미리 떠두라 하셨습니다. 한 시진이면 충분하니 잠시만 가만히 앉아 계시지요.”
“이런 나이가 다 되어서 초상화와 동상을 남긴다 해주시다니, 이는 주상전하의 성은일세. 더군다나 석양군(石陽君: 이정의 호) 자네가 이를 감독할 것이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도화원(圖畫院)에서 근무하는 화공은 나를 만나 본 적이 있는지 몇 년 전과 달라진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 무례임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간 기능이 감퇴하여 안색이 검게 변하고 부종이 생겨나서 외모가 제법 변했으리라.
이런 피폐한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긴다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초상화는 극도의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남기는 규칙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화공을 타이르듯 말하였다.
“내 안색이 이토록 나빠졌으니 초상화는 두 개로 나누어 그리게. 형태는 똑같이 하되, 하나는 예전처럼 늙지 않은 색으로 칠하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그리도록 하게나.”
“말씀하신 바를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제법 실력이 뛰어난 화가였는지 붓을 단숨에 놀려 외곽선을 따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내 집중력은 화공의 손놀림보다 부족하였는지 고개를 휘청거리며 잠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말일세. 미안한 일이로군.”
이제는 잠을 자면 하루 5시진, 현대로는 약 10시간을 잠들어 있는 것이 기본이었고, 이렇게 잠을 자도 피로가 몰려와서 고개를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정말 갈 때가 되었는지 아내는 묵묵히 내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내 죽음을 받아들였으리라.
한 달쯤 지나 병세가 조금 나아지자 칠순 잔치는 하고 세상을 떠날까 하는 욕심이 생겼는데, 안동 촌구석에 웬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문을 바라보니 이순신이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여해 자네가 왜 여기에 와 있는가. 자네는 도성에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법인데.”
이순신은 의정부의 중핵으로서 근무하는 자였는데 근무를 팽개치고 여기에 오다니.
그는 전력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흙먼지를 털어내고 탈진한 말을 마구간에 맡기며 말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업무도 내던지고 홀로 내려왔다네. 지금쯤 의정부에서는 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좋지 않아서 말이지.”
“감이 좋지 않다니. 아마 나와 바둑을 두어 대판 깨질 일을 예견하여 그러한 것이겠지. 거기 있느냐? 바둑판을 가져오너라!”
한때 이황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물 먹였던 바둑판을 보니 저절로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몸을 돌려 대청마루에 놓인 바둑판으로 다가가려는데 속에서 비릿한 맛이 올라왔다.
꿀렁거리며 올라오는 핏물이 느껴져서 당장 토할까 하였지만, 이순신의 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면 평생 마음의 상처로 남으리라.
나는 이를 악물고 피를 삼킨 다음 이순신을 바라보았는데, 내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본 이순신은 놀라며 나를 만류하였다.
“자네 지금 왜 이러는가! 시커먼 사혈도 아닌 생혈(生血)을 입으로 흘리다니, 심상치 않다네!”
“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어서 나를 바둑판 앞으로 부축해 주게.”
이순신의 부축을 받아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넣어 바둑판 앞에 앉으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간이 망가지면 식도의 혈관이 파열된다는데 뜨거운 무언가가 속으로 꿀렁꿀렁 넘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평상시처럼 하얀 돌을 집으려 하다가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느낌에 선공을 뜻하는 검은 돌을 집고 정중앙에 착수하였다.
그 순간 몸에서 모든 힘이 빠지며 희미해지는 시선에 바둑판에 이마를 찧어버렸다.
어떻게든 힘을 쓰려 하였지만 내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며 다시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순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아득한 메아리처럼 들리고 세상이 시커멓게 변하며 모든 감각이 사라졌을 무렵. 갑자기 빛이 느껴지며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왔느냐. 생각하여 보니 네가 일흔은 채우고 돌아올 것 같기는 하더구나.”
“저도 토정 어르신을 다시 뵐 때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나저나 점괘는 어떠하십니까? 아국이 정말 근육으로 뭉친 대조선이 되었습니까?”
“되었고말고. 이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될 기반을 모두 갖추었다. 앞으로 수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이를 극복하고도 남을 자질을 가진 것이 분명하구나.”
어느덧 새하얀 공간에 죽을 당시의 모습을 한 이지함이 정겨운 미소를 지으며 바둑돌을 착수하였고, 나 또한 바둑돌을 놓으며 대응하였다.
한참 동안 바둑을 두니 이지함은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네 장례행렬이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안동으로 향하고 있으니 도성이 텅텅 비고 안동이 꽉 들어차 어지간한 관원들조차 천막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냐.”
“저는 보이지 않습니다. 토정 어르신이야 오래 묵은 귀신이시니 보이기야 하겠지만, 세상은 산 사람들이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관여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참으로 매정한 말이지만 다들 슬픔을 이겨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네 아내는 말년에 네가 남긴 회화와 저서를 끌어안고 이틀 내내 울다가 마음을 정리하였지. 하지만 네 말에 틀린 점이 단 하나 있구나.”
“틀린 말이라 하시니 어떠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일단 다음 수를 착수하심이 어떠한지요?”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귀신같은 실력을 자랑하던 이지함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바둑을 두고 있어서 흥이 절로 나왔다.
같은 귀신이라 이기는 것인가 궁금했는데, 이지함은 돌 두 개를 착수해 불계패를 선언하면서 말하였다.
“죽은 사람이 관여한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이다. 너는 객(客)이니 예전에 수양대군의 몸을 차지하였던 객과 같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다니요!”
“내가 이전에 말을 하지 않았었군. 할 말은 끝났으니 넌 어서 돌아가거라.”
중요한 말은 진작 했어야지!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난다는 생각으로 죽어라 일했는데, 현대로 돌아가 다시 본래 인생을 살게 된다면 어떤 꼴이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많이 놀면서 살걸!
이지함에게 뭐라 말하려 하였지만 어느새 이지함은 바둑판만 덩그러니 남긴 채 자취를 감추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니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며 내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일했다고! 내가 현대로 돌아가면 돌아가자마자 장기 출장이잖아!”
이젠 모르겠다. 일단 영직이 놈에게 전화라도 해서 수양대군임을 확인해 보고 지금까지 쌓아온 세 가지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잠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니만 뭔가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내 정신은 다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작가의 말
금요일, 다음 주 월요일 근육조선 1, 2부를 종합한 에필로그가 연재됩니다.
이후 일주일을 쉰 다음 각 시대의 조선의 모습을 보여줄 외전을 월/수/금에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약 10화 정도 연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