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54화 (554/573)

근육조선 554화

2부 30장 16화 평안한 줄 알았는데

이이첨이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린 시절의 만력제부터 이제 마흔이 넘어 쉰을 향해 달려가는 만력제까지 만나본 입장에서는 그가 어떤 고통을 겪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박물관 관장은 정1품 관원이자 명예직이며 발굴한 유물과 관련된 업무가 전부이다.

내가 조선에서 퍼뜨린 기술을 저서로 정리하고 유물의 보존 처리를 실시하니 한 해가 지나갔고, 아내와의 관계도 어느 정도 좋아졌다.

“근래 들어서는 야근을 정녕 실시하지 아니하니 자네가 죽을 때가 된 것 같군.”

“말도 참 험하게 하는군. 자네 나이가 더 많으니 자네가 먼저 가지 않겠나.”

“나는 유허 이철의 소설을 모두 읽기 이전에는 세상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라네.”

오늘도 정시에 퇴근하여 권율과 가벼운 술잔을 나누었다.

요즘에도 계속 나오는 신소설은 벌써 30개에 달하는 줄거리가 집필이 완료되었고, 정철도 이를 모두 만연체로 작성하였다.

남은 건 이항복과 허균의 수정 작업이 전부이다.

1607년 9월에 이르러 드디어 고전 명작 영화인 ‘전차경주’를 가톨릭 신부들의 요청으로 번안한 소설이 나왔다.

권율이 가까스로 이를 입수했는지 나에게 보여주며 자랑하였다.

“유허 이철의 신작 마차격전(馬車激戰)이라네. 이 친구가 언제 구주의 옛이야기를 익혔는지 모르겠지만 참 대단한 친구가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주인공의 가문이 허(Hur)라는 성씨를 쓰는데, 유허 이철은 혹여나 허균이 아닌가?”

“허균? 그 애송이가 글재주가 좋다 하여도 애송이에 불과하네. 자네는 지난번에 유허 이철이 나라 하더니만 이제는 허균이라 하니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군.”

작가 중에 한 명은 맞지만, 다른 한 명은 사위인 이항복이라 하려다가 참았다.

아직 유허 이철의 이름으로 내놓을 소설은 많으며 더 훗날에 세상을 떠날 이항복과 허균이라면 나를 대신하여 소설을 계속 집필하여 내놓겠지.

친구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변하니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나도 적당히 노년을 즐기다 세상을 떠나고 싶다.

너무 오래 살지는 않고 죽을 때에는 나보다 어린 이순신이 유언을 들어주면 딱 좋을 것 같군.

다음 날 박물관으로 출근하니, 웬 관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상왕 전하께서 밀명을 수행하라 내게 보낸 것이 아닐까 하였는데, 내가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박물관 관장 유성룡은 어명을 들으시오. 주상전하께서 필히 수행해야 할 업무가 있다 하였으니 어서 입궐하시오.”

내게 어명? 상왕 전하도 아니고 주상전하께서 어명? 이 나이에 어명? 정말 거절할 수 없는 어명이라니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고 교지(敎旨)를 확인했는데 정말 입궐하라는 명령이었다.

다시 외국으로 나가거나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업무 지옥이 시작되면 진짜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고서는 무조건 거절하리라.

내 짬이면 그 정도는 가능하고, 아예 배를 째고 누워버리는 것도 가능하니까.

일단 예전의 세자저하께 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전하께서 어명이라 하시니 가슴이 먹먹하고 오금이 저려오며 한기가 온몸을 맴돌고 있사옵니다. 신이 외방에서 근무한 시일만 따져도 어언 이십여 년이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근무가 아니고 잠시 방문과 시찰을 겸하여 석 달 정도 머무를 뿐이지. 지나치게 먼 곳도 아니며 여송의 옆인 대성국(大城國: 아유타야 왕국)이네.”

대성국이라 하면 정보를 들은 적이 있다.

태국 일대에서 발호한 동남아시아의 강국이며 조선의 화약병기와 화약을 사들여 그 기세를 더욱 끌어올렸다는 나라다.

아직 조선의 동맹국인 대월(응우옌 왕조)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군주인 나레쑤언은 전황이 불리해지면 친히 코끼리를 이끌고 동생과 함께 적진 한복판으로 돌격하였다던가.

덕분에 엄청난 속도로 정복을 벌일 수 있었고, 삼십 년 만에 일대를 모조리 정벌하였다.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조선에 도움을 요청했을까. 일대를 평정한 군주라면 조선의 힘을 알고 있어도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뻣뻣이 들게 마련이라 역으로 물어보았다.

“대성국의 군주 납서선(納瑞宣: 나레쑤언의 음차)은 아국의 옛 강역인 팔도보다 더욱 큰 강역을 단숨에 늘린 자이옵니다. 이러한 이가 무엇이 아쉬워 아국에 도움을 청하였나이까.”

“평상시에는 무기를 팔고 코끼리와 물소를 얻어왔지만 얼마 전에 좋은 일이 생겼네. 전쟁 이후 돌아온 병사들을 통해 두창(천연두)이 번져서 아국 상단에 소속된 의원들이 영창(우두) 접종을 실시하게 되었다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 사람들이야 천연두에 걸리지 않지만, 물건을 거래해야 할 상대가 천연두로 죽으면 결국 거래가 실패하고 손해를 보니까.

좋은 일이지만 주상전하께서는 여전히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다른 사람의 고름을 몸에 넣는다는 말에 대성국의 관원이 격노하여 아국 관원과 다툼을 벌였지. 이를 납서선이 알게 되었는데 두창을 막아내는 방법이라면 왕이 본보기로 나서야 한다고 스스로 영창 접종을 받았다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이옵니다. 아국에서도 여러 반발이 있었는데 정녕 왕이 스스로 나서서 영창 접종을 가장 먼저 받았다는 말씀이옵니까?”

“나도 믿기지가 않았지만 사실이라네. 이후 대소신료들은 물론이요, 납서선 휘하의 정예군까지 모조리 영창 접종을 받았는데 하필 작년부터 수도에 두창이 퍼지기 시작하였다네.”

“그러하면 왕을 비롯한 대소신료들 모두 두창에 걸리지 아니하여 피해를 줄였을 것이옵니다.”

뭔가 역사가 틀어진 느낌도 든다. 내가 동남아사는 거의 모르지만 우두 접종 하나로 죽어야 할 사람이 살고 살아야 할 사람이 전쟁으로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주상전하께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씀하셨다.

“당연한 일이라네. 납서선은 자신과 신료들이 두창에 걸리지 않은 연유를 아국의 영창 접종이라 공표하고 아국에게 철저히 감사의 뜻을 표방하고 또 다른 도움을 요청하였다네. 바로 운하 건설이지.”

“운하(運河)라 하였사옵니까. 전조는 물론이요, 태조대왕께서도 뒤를 이은 태종대왕께서도 운하 건설에 총력을 다하였사옵니다만 실패한 사례가 빈번하옵니다. 하물며 대성국에서 운하를 파내다니, 이는 너무나 험난한 일이옵니다.”

고려는 물론이요 조선시대에도 운하를 파려다 완벽하게 실패한 사례가 있었다. 이제는 조운선이 아예 드나들지 않고 멀리 돌아가는 태안반도 일대이다. 여기에 굴포운하를 파려던 시도는 11회나 있었고 모두 실패하였다.

이후 한참 뒤에 즉위한 환종은 조금 작은 규모의 의항운하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지만, 공사가 끝나고 3년이 지나자 모래와 진흙이 유입되며 다시 메워져 버렸다.

설령 굴포운하를 파내더라도 실패할 것이라는 증거이기에 아예 계획이 백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례가 내 스승 이황이 말년에 만든 판목운하이다. 이 덕분에 안면도라는 섬이 생겨났고 조운선 피해를 줄일 수 있었으나 규모는 위의 운하들과 비교할 수 없이 작다.

주상전하께서도 이걸 알고 계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험난하다 하여도 가치가 있는 일이라네. 대성국의 남방인 크라(kra)라는 지역에 운하를 파내려 하네. 일대에는 큰 강이 있지만, 그 강을 이을 방법이 없어서 문제라 하더군.”

어딘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대성국의 남방이라 하니 감이 잡혔다. 말레이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구간이며 땅이 아주 좁아지는 지형이 하나 있다던가.

여기는 운하를 파면 제법 이득을 볼 수 있기는 하니 답을 하였다.

“그 지역은 만랄가(滿剌加: 말라카 해협) 일대의 도시가 아닙니까? 만약 이 운하가 완공되면 비좁은 만랄가 해협을 우회하지 않아도 되니 삼천리의 거리를 버는 셈입니다.”

“만랄가 해협은 아국은 물론이요, 천축과 구주의 수많은 이들이 사용하니 번잡하기가 이를 데 없고 일대의 항구에는 전염병이 넘쳐나는 실정이라네. 다만 너무나 거대한 운하가 필요하기에 납서선도 건설을 조금 하다 포기하였다네.”

나레쑤언이 굳이 나를 지명한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 곳곳에 내 능력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으며 그 소문에는 건축은 물론이요, 토목에도 일가견이 있는 관료라는 내용도 있을 테니까.

주상전하께서는 내가 우물쭈물거리자 쐐기를 박으려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아국이 영창을 접종해 준 은혜를 갚는다며 아국에게 공사를 도와달라는 국서를 보냈다네. 처음에는 자네를 총책임자로 임명할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거절하였다네.”

“만에 하나라도 신이 몇 년 동안 나아간다면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주상전하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그렇지만 몇 번이고 거듭하여 국서를 보내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네. 자네가 석 달 동안 기본적인 운하를 설계하면 향후 일백 년 동안 운하 이용료의 절반을 아국에 전해주기로 하였지.”

주상전하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국서를 몇 번이고 받으며 이득을 얻을 기회가 있었지만 나이가 많은 나를 배려하여 조건을 차츰차츰 좋게 바꿔가며 가급적 거절하려 한 것이다.

이미 수많은 논의가 오갔을 것이며, 더 이상 거절하다가는 주상전하의 체면이 깎여나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이 많은 노신이 고집을 부리자 젊은 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면 신하를 어떻게 통솔할 수 있겠는가.

몇 년을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고작 석 달을 머무를 뿐이니, 장기 출장도 아니고 내 기준으로는 단기 출장이다.

이번만 일하고 정말 퇴직을 청하자고 마음을 먹으며 고개를 숙였다.

“신을 위하여 이토록 성은을 내려주시니 더 이상 거절함은 금수와 같사옵니다. 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대성국으로 나아가 운하의 초안을 작성하고 돌아오겠사옵니다.”

“자네를 위하여 우의정 산시양은 물론이요 수많은 관원들을 함께 보낼 것이네. 부디 몸조리를 잘하고 아국으로 돌아와 제자를 육성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두게나.”

주상전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고 아내가 성을 낼 거라고 생각하였지만, 이미 주상전하께서 밀지(密旨)를 내려주셨는지 오히려 안도하며 나에게 말하였다.

“이미 주상전하께서 뜻을 정하셨으니 나라에서 녹봉을 받는 사람으로서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이십 년을 외방으로 다녀오신 분이신데 고작 석 달로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나 스스로 조심하면 삼재(三災) 가운데 인재(人災)를 막아낼 수 있는 법이오. 몸을 조심하며 다녀오도록 하겠소.”

고작 석 달인데 큰 문제는 없으리라. 더군다나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철저히 보호하려 하였는지 이순신이 인솔하는 수군에 실질적으로는 내 부관으로 일할 산시양을 함께 보냈다.

* * *

신형 전선인 해추선은 고작 20일 만에 아유타야 왕국으로 닿을 정도로 빠른 함선이었다. 우리의 도착을 환영하듯 나레쑤언은 수많은 코끼리를 시작으로 하여 극진한 대접을 실시하였다.

이틀간의 환영식이 끝나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의 동생이자 왕제(王弟)인 에이커토사롯과 함께 운하를 파내다가 실패한 장소를 확인하였다.

이미 공사를 진행하다 실패한 흔적이 주변에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여기가 저희가 정한 운하의 경로입니다. 보시다시피 숲이 좀 많지만 나무를 잘라내고 코끼리로 그루터기를 끌어내면 숲이야 금방 정리할 수 있지요. 보시니 어떠하십니까?”

같은 코끼리에 올라타 나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에이커토사롯은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기가 차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는 공사 경로였다.

경로에 호수도 없고 오히려 거대한 언덕이 있지 않은가!

이상적인 운하는 예인선이나 배를 끌어당기기 위한 말과 소를 동원하더라도 모든 구간의 높이가 같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별다른 힘을 들이지도 않고 배를 천천히 보낼 수 있으니까.

중국의 대운하는 구간에 높은 산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간별로 갑문과 물을 공급하기 위한 거대한 호수를 둔다.

갑문마다 물을 채워가며 높이를 맞춰 배를 다음 구간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기는 했다.

“공사 경로가 아무리 보아도 불편하군요. 혹여나 인근에 거대한 호수는 있습니까?”

“없습니다. 작은 못이야 제법 있는데 건기가 되면 말라붙어 버리지요. 지금 보이는 개천들도 건기가 되면 죄다 진흙탕이 되었다가 우기가 되면 물이 불어납니다.”

그럼 여기에 운하를 파내보았자 물을 계속 공급할 호수가 없으니 건기가 되면 진흙탕이 되었다가 우기가 되면 물이 불어나겠지.

결국 운하는 십 년도 가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리라.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 앞뒤 안 가리고 무모하게 정책만 추진하면 이런 꼴이 되는 법이다.

나레쑤언의 체면은 왕창 구겨지겠지만 나는 전문가로서 이 운하의 설계 초안을 전제조건부터 뒤엎어 버렸다.

“미리 정한 경로에 맞추어 운하를 파내는 것은 불가한 일이군요. 설령 완공하였다 하여도 산 위에 물을 올려둘 방법이 없으니 건기가 되면 진흙탕이 되었다 우기가 되면 흙이 쓸려 내려가며 메워질 것입니다.”

“그럼 이 경로가 아니라면 어디로 파 내려갑니까? 지금 저희가 계산한 거리가 조선 거리로 일백 리에 달하는 형편입니다.”

“평판측량기를 동원하여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최대한 낮은 구간으로 굽이굽이 산과 언덕을 돌아가며 파내야 하지만, 구간별로 시굴(試掘)을 실시하여 거대한 암반을 돌아가야 하겠지요.”

나레쑤언은 분명 ‘운하가 완공되면’ 수익을 배분한다 하였다. 이는 운하 완공 이후 향후 일백 년 동안 유지되는 조약이며, 이를 달성하고 조선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지시한 대로 조선에서 파견된 수많은 관원들이 숲속으로 달려들어 측량을 실시하였다.

백여 명이 넘는 이들이 서로 합을 맞추어가며 표석(標石)을 세우고 거미줄처럼 일대의 지형을 측량하고 나에게 돌아왔다.

이걸 산시양과 함께 진두지휘하며 두꺼운 종이를 겹쳐 등고선 모형, 이 시대의 용어로는 지업(紙業)을 만들며 크라 일대의 거대한 지형도를 만들었다.

거의 한 달에 걸친 작업이 끝나자 나레쑤언은 우리가 만든 모형을 보며 말하였다.

“이래서 조선이 강대한 법이구려. 이렇게 상세한 지형을 알 수 있다면 병사들이 어디로 움직일지 손금 보듯 훤히 보일 것이오. 그나저나 아교는 위에 왜 바르는 것이오?”

“이 위에 옅게 만든 먹물을 부어 경로를 확인하려 합니다. 물이 가급적 덜 차오르는 구간을 택하여 암반을 조사하면 가장 효과적인 경로를 찾아낼 수 있는 법입니다.”

산시양도 나도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속도와 완벽함 둘 다 추구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밀하게 만든 등고선 모형 위에 묽게 만든 먹물을 부어 넣자 깊이에 따라 명암(明暗)이 생기며 가장 높이가 낮은 장소가 더욱 뚜렷하게 표시되었다.

이렇게 경로를 설정해도 거대한 암반을 만나면 크게 우회해야 하니 땅 내부를 조사하는 작업도 필수적이다. 내가 경로 세 개를 만들어내자 나레쑤언은 즉각 지시를 하달하였다.

“당장 코끼리와 인부들을 동원하여 조선 관원들이 파악한 장소에 나아가도록. 일대의 땅을 파내어 조사하고 혹여나 단단한 암반을 만나면 폭파할 수 있는지 일대를 더욱 많이 파내어 확인하라.”

50세가 넘은 노련한 왕답게 지식은 부족해도 지혜는 넘쳐났다.

뿔처럼 튀어나온 화강암을 만난다 하여도 약간의 화강암은 폭약으로 터뜨려서 제거할 수 있으니까.

시굴 조사도 모두 끝나자 거의 두 달이 지났다.

뺨에 붙어 한참 피를 빨아먹던 모기를 손바닥으로 짓눌러 죽이고 굴착된 지반을 확인하니 운하의 총 길이가 가까스로 도출되었다.

“역시나 일백 리로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부디 이백 리는 넘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백사십 리에 달하는 길고 거대한 운하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백사십 리에 달하지만 문제가 또 있지 않소. 중간에 붕 떠 있는 구간이 있는데 이는 어찌 처리할 작정이오?”

“우회하면 거의 사백 리에 달하는 경로가 나오니 도저히 완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아국에서 즐겨 사용하는 기물을 몇 가지 알려 드릴 것이니 이를 이용하십시오.”

언덕을 우회하고 산을 지나치며 운하의 경로를 설정하였지만 한 구간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갑문과 인공호수를 설계해야 하였다. 여기를 우회하면 운하 경로가 최소 360리, 144㎞에 달하는데 공사에만 오십 년 넘게 걸리리라.

조선에서 간혹 사용하는 갑문과 인력 양수기에 대한 도면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인력 양수기로 거대한 호숫물을 퍼내 옮긴다는 말에 나레쑤언은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하여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는 코끼리를 두어 힘을 쓰게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겠군. 그러고 보니 조선에는 운하를 만드는 대신 배를 뭍으로 끌어 올려 옮긴다고 들었는데.”

“배를 뭍으로 끌어 올려 옮기다니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설령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움직인다 하여도 배의 하부가 모조리 무너져 내릴 것입니······.”

나레쑤언이 내 말을 듣고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웃는데 밖에서 웬 함성과 거대한 물체가 질질 끌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막 밖으로 나아가니 나레쑤언의 말대로 배가 뭍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순신이 데려온 해군 병사들은 가장 작은 해추선, 배수량으로 약 300톤에 달하는 배를 정말 물 위로 끌어 올려 옮기고 있었다.

그 기괴한 광경에 아유타야 왕국의 정예 코끼리마저도 뒤로 도망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소형 해추선이라 하여도 선박 무게는 120톤에 달한다. 이론상으로 병사 600명을 동원해 200명은 바닥에 통나무와 거적을 깔아 마찰력을 줄이고 400명은 배를 끌어당기면 움직일 수는 있다.

나레쑤언은 계속 움직이는 배를 보며 말하였다.

“내가 경로 가운데 언덕이 있는 것을 염려하여 이순신이라는 장수에게 배를 언덕 위로 끌고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해 달라 부탁하였네. 그런데 정말 배를 끌어서 움직일 수 있었군!”

이순신이 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가능한 일이라 놀랍다.

이윽고 배 위에서 지시를 내리던 이순신이 그만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은 밧줄을 집어 던지며 바닥에 자빠지고, 이순신은 배에서 내려와 나레쑤언에게 보고를 올렸다.

“말씀하신 대로 병졸들을 시켜 배를 뭍으로 끌어당기게 해보았는데 실효성이 없을 것입니다. 혹여나 변란이 일어나 급히 배를 움직인다면 모를까 배의 바닥이 손상되고 용골이 뒤틀려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덤덤한 얼굴로 보고를 올리는 이순신과 바닥을 뒹굴며 웃어대는 나레쑤언의 극명한 대비를 보고 정신이 나가 버렸다.

나레쑤언은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더니 이순신을 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부탁을 하였다고 정말 실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세상에 운하가 끊어지는 구간에서 뭍으로 배를 끌어서 옮길 수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부탁이었는데 정말 실행하다니!”

“주상전하께서는 대성국의 군주께서 명령을 내리면 듣지 말라 하셨지만, 아국이 이득을 볼 수 있는 부탁이면 주저하지 않고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그러하면 이 부탁으로 조선이 얻을 이득은 무엇인가? 배가 파손되면 내가 변상을 한다고 말하였는데, 엄연히 따지면 이득도 손해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예전에 갯벌에 좌초한 판옥선을 힘으로 끌어당겨 바다로 넣으라는 훈련이 있었는데 이를 해추선으로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손된 배의 가격을 제공하신다면 이득이지요.”

다시 웃음이 터진 나레쑤언은 눈물까지 흘려대며 웃다가 다시 진정하고 이순신에 대한 포상은 물론이요, 배의 수리비까지 첨부하여 지급하였다. 그러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여러 수단을 동원해 보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네. 조선 사람 사백여 명의 힘이라면 우리 아유타야의 사람 일천 명이 동원되어야 하며 코끼리는 서른 마리가 필요하겠군. 유성룡 자네의 설계대로 운하를 만들 것이니 개의치 말게.”

이후 더 이상 설계에 참가하지 않는 나레쑤언이 동생과 함께 운하의 기본 도면을 인계받은 것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운하의 예상 완공기간은 최소 30년이니 나레쑤언의 후대까지 이어지는 대공사이리라.

모든 정리가 끝나고 그때까지 조선에서 움직인 명물로 남아 있던 해추선은 나레쑤언의 계산대로 코끼리 서른 마리의 힘으로 바다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운하가 끝나는 지점까지 확인하니 석 달이 흘러 1608년 3월이 다 되었다.

슬슬 동남아의 우기가 시작될 시기라 후덥지근한 날씨가 시작되고 모기들은 죽어라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역시 여송도를 비롯하여 남방의 모기는 독하기가 이를 데 없다니까.”

“그러게 말일세. 모깃불을 피워도 쉬이 물러나지 않고 계핏가루도 개의치 않으니 말일세.”

이순신도 팔뚝에 앉은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려죽였고 출장을 나가 모기에게 죽어라 피를 빨린 산시양만이 그럭저럭 가려움을 견디며 버티고 있었다.

이제 할 일은 다 했으니 돌아가야 하는데 군관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관리들과 병졸 사이에 학질이 퍼지고 있습니다! 일대에 구주의 상인들이 오가서 질병이 많이 퍼졌다 하는데 아마 그 영향 같습니다!”

“학질이 무어가 대수라 하는가. 금계랍(키니네)은 모두가 먹고도 남을 정도로 가져왔으니 염려하지 말고 학질이 발생한 사람들에게 금계랍을 정해진 양대로 먹이게.”

돌아가는 길에 키니네의 부작용으로 고생을 좀 하겠지만 노약자가 아니고서는 부작용은 단숨에 이겨낼 수 있는 법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배에 올라 돌아가는데 대양도 인근을 지나칠 무렵 갑자기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젠장! 학질이 몇 달 동안 잠복해 있는 경우가 있다 하였는데, 내가 학질이라니!”

60이 넘은 몸이라 그런지 학질은 정말 학(虐: 사나울 학)이라는 말대로 어마어마한 고통으로 찾아왔다.

기침과 오한 그리고 발열이 엄습하며 멀쩡하던 내가 순식간에 앓아눕게 되었다.

당연히 의원이 금계랍을 처방하였으나 이것도 고통이었다.

약이 얼마나 독한지 설탕 한가운데 약을 넣어도 목구멍에서 쓴맛이 올라오고 부작용으로 엄청난 두통이 시작되었다.

내 상태가 심상치 않았는지 이순신은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이대로 항해를 계속하였다가는 도성에 닿기도 전에 자네가 목숨을 잃을 것이네! 일단 대양도에서 의원을 소집하여 병세를 완화시키도록 하게!”

“내가 얼마나 병이 심하다고 그러······.”

이순신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손거울을 내밀었다.

파르스름한 손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황달이 극심해 거의 갈색으로 물들어 있을 지경이었다.

약의 복용을 중단하면 열이 나를 죽일 것이요 이대로 복용을 계속하면 부작용이 나를 죽이리라.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어디론가 옮겨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가 살 수는 있을까.

#작가의 말

현대까지 만들어지지 않은 크라 운하는 아유타야 왕국 전성기부터 사업 검토대상이었습니다. 아유타야의 전성기를 연 나레쑤언이라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요.

본래 역사에서는 1605년에 천연두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여기서는 우두 접종으로 목숨을 건져서 더욱 열정적으로 아유타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ai_Canal_map-d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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