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53화 (553/573)

근육조선 553화

2부 30장 15화 문안 인사

요동의 모든 업무가 끝나고 도성으로 돌아오니 나의 퇴직 허가가 떨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퇴직이 아니고 관직을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하지만.

1606년 2월 말엽 새로운 영의정으로 발탁된 이원익에게 업무를 모두 인수인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근정전으로 나아갔다. 주상전하께서는 조회 시간에 앞으로 불려 나온 나를 보면서 말하였다.

“유성룡은 만고의 충신이자 명신이며 모든 관원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이제 다음 업무에 종사하여라. 이를 후대에 퍼뜨려야 하니 박물관에서 저술과 연구에 힘쓰도록 하여라.”

“신을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하오나 어명을 내리신다면 신은 박물관에 둔 궤장(机杖)을 짚고 다시금 조정으로 나설 수 있사오니, 부디 신을 잊지 말아주시옵소서.”

“그럴 염려는 추호도 하지 말도록 하여라. 생각하여 보니 박물관에서 업무에 종사하는 이이는 아직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니 여유가 조금은 있겠구나.”

생각해 보니 공식적으로 은퇴했다가 박물관 관장 자리가 남아 억지로 끌려온 이이가 있었지. 내가 요동에서 보내온 유물이 많아 분류해도 끝이 없어 결국 보관을 위한 분원(分院)을 따로 설립하였다던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요동에서 안시성을 발굴하고 겨울에는 도성에서 이이와 함께 유물을 연구하였으니, 그 고생을 잘 알고 있다.

주상전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말씀하셨다.

“군사부일체라 하였는데 유성룡은 스승인 이황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변란으로 인하여 임종을 지키지 못하지 않았더냐. 조만간 한식(寒食)이니 선친과 이황을 비롯한 이들의 묘소를 돌아보고 오도록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 * *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거의 오 년이 넘게 흘렀다. 삼년상을 비롯한 예식이야 형님의 몫이지만, 나도 당시에는 49재까지 상복을 입기도 했고.

두 분 다 84세를 기점으로 돌아가셨는데 잠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그대로 돌아가셔서 호상(好喪)이라 하여 가끔 묘소를 돌아본 것이 전부였다.

기왕 휴가를 받은 김에 두 분의 묘소에 형님의 가족들과 함께 나아가 한식차례(寒食茶禮)를 올렸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였구나. 너도 나도 업무가 바쁘니 두 분을 많이 힘들게 하였지만, 부친께서는 언제나 네 모습을 보며 좋아하셨다.”

“제가 살아생전 부친을 배알하면 언제나 태연한 모습으로 관직에 종사함이 한결같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혹여나 형님께서는 다른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네 재주가 나를 뛰어넘고도 한참을 더 넘었으니, 만에 하나라도 교만해질까 두려워 함부로 칭찬할 수 없다 하였다.”

부모님이 내가 관직이 올라가고 더욱 중요한 업무에 매진하여도 칭찬을 별로 안 하였기에 언제나 의문을 품어두었지만 이제야 그 의문이 풀렸다.

나를 아끼고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으로 참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집에서 시행하는 제사는 양반의 의무인 접빈객(接賓客: 손님을 대접함)을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할 평범한 음식을 만들지만, 묘소에서 드리는 제사는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에서 고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는 법이었다.

형님은 아버지가 즐겨 드신 간장으로 양념한 닭가슴살 찜과 말년이 되어 달콤한 음식을 가끔 드신 어머니를 위해 로마에서 입수한 바르톨로메오 스카피의 저서를 기반으로 한 과자를 올려두었다.

다른 음식들이 차려지고 형님이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온 가족이 묘소에 모이게 되었으니 참으로 뜻깊은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업무에 종사하던 성룡이도 이제 업무를 줄이고 정말 가족을 위해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고, 내 아내도 불만을 털어놓지 않을 뿐 조심스럽게 술을 올리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이런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묘지를 정리하며 말하였다.

“이제 제 나이가 예순이 넘어 삼대운동으로 효심을 증명하는 행동은 불가하게 되었으나 이 자리에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앞으로 어명이 아닌 이상 외방으로 나아갈 일도, 야근을 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정말 가족을 위해 박물관에서 연구와 저서 집필에 전념하는 선에서 업무를 줄이리라.

주상전하께서 시급한 업무가 있다 하면 모르겠지만 내 토목기술도 점차 퍼져 나가니 정말 거대한 업무가 아닌 이상 내 힘이 필요하지 않겠지.

다음으로 향한 장소는 나와 형님의 스승인 이황의 묘소이다. 경상북도 안동까지 내려와야 하지만 아내의 마음을 풀어줄 여행을 겸한 행동이다.

나도 예순이 되었으니 천천히 시내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산천은 변하지 아니하였는데 사람은 변하였소. 저기 관아에 모인 아이들은 아무리 보아도 영창(우두)을 접종하는 아이들이 분명하구려.”

“보아하니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팔뚝에 침을 맞고 아픔에 몸부림치지만 아국에 영영 두창이 퍼질 염려가 없어지니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온 국민에게 종두법을 시행하였고, 이제는 새로 태어나서 호적에 처음으로 등록된 아이들이 종두법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도 번영하였던 조선이 내가 늙을 무렵이 되어 더욱 번창하였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어린 시절에 간혹 지방 시장에 보였던 외국산 물건들은 더욱 늘어난 무역량으로 보부상이 아닌 정규 상인들이 경영하는 가게에서 팔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길거리 곳곳에 거대한 피뢰침이 설치되어 있으니 이는 낙뢰를 막아내기 위한 수단이리라.

흐뭇한 마음으로 이황의 종가를 찾아가니 이황의 장남 이준(李寯)은 예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장손 이안도가 나를 맞이하였다.

비슷한 연배인지라 서로 인사를 올리니 그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듯 슬쩍 웃으며 말하였다.

“젊은 시절 조부님께서 제자 중에 절대 퇴직하지 못하고 한명회처럼 업무와 세파에 시달리다 명을 달리할 사람이 있다 하였는데 이제 한직에 배정되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훗날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요. 물론 스승님께서도 저를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이리저리 편의를 보아주셨지만, 제가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한 제자였습니다.”

형님도 나도 웃으며 답하였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산소를 돌보는 소분(掃墳) 절차가 시작되었다.

안동은 워낙 유생이 많은 고장이라 이 절차에 필요한 물자야 쉽게 댈 수 있었다.

제사 준비가 진행되니 사람들이 이황의 종가인 양송정에 기웃거렸고 이안도가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었다.

이안도는 영의정이 방문한 상황이라 잔치와 같은 날이라 여기고 지시를 내렸다.

“조부님은 물론이요, 영의정 대감께서 젊은 시절 드시던 반찬을 내어주어라. 보리밥에 닭고기를 구워 내놓고 가지와 미역, 그리고 나물을 무쳐서 내놓으면 적당할 것이 아니겠느냐.”

“미역은 조금 부족한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얼마 전에 왜상(倭商)이 저잣거리에 방문하여 건어물을 잔뜩 팔아치운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게 미역 열 뭇(100개)을 사서 불려 내놓도록 하여라.”

절육(커팅)이 아닐 때도 이황은 사치를 경계하여 거친 음식을 즐겨 먹었고, 나도 이황 아래에서 배우며 이런 음식을 주로 먹었다.

형님도 기억하고 있는 음식이니 나와 함께 주방 일을 도왔다.

종갓집 아니랄까 봐 수십 마리의 닭이 도살되고 나물들이 무쳐지며 요리가 하나씩 완성되었다.

예상대로 미역이 부족했는데, 일본 상인이 미역을 잔뜩 짊어지고 주방에 들어왔다.

건어물상은 형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뒤로 자빠졌고, 형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분노한 표정으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뭔 일인가 궁금했는데 형님은 버럭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네놈은 탐라에 표류한 주제에 정갈하게 만든 밥상을 뒤엎은 왜장 협판안치(脇坂安治)가 아니더냐! 대체 무슨 낯으로 여기까지 방문하여 한가로이 상행을 벌인다는 말이냐!”

“이 손 좀 놓아주시오! 상황을 보면 모르겠소? 포로 생활이 끝나고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오고 보니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소이다. 난 이제 장수가 아니고 상인이오!”

형님에게 지나가는 말로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왜인이 철저히 근육 당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멱살이 풀리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자신의 신세를 털어놓았다.

“구루지마가 나에게 어선으로나 쓸 수 있는 배 다섯 척을 사죄의 의미로 제공한 것이 재산의 전부였소. 물고기를 잡으며 살다 내가 표류한 섬에 미역이 잔뜩 밀려온 것을 떠올렸지.”

“결국 그토록 혐오하던 미역을 뜯어서 말리는 생활을 하며 살아왔나?”

“그나마 할 수 있는 재주가 없었으니 당연하지 않소. 그나마 미역의 품질이 좋아서 조선의 땅인 하주도에서 값지게 팔리고 더욱 많은 상행을 하고자 내 직접 안동까지 나오게 된 거요.”

본래 역사에서는 이순신에게 당해 미역을 퍼먹고. 변한 역사에서는 이순신에게 당한 이후 미역으로 투정을 부리다가 보름 동안 미역을 먹게 된 사람이 미역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니.

형님은 말린 미역을 오독오독 씹어 먹어 맛을 확인해 보더니 와키자카를 노려보았다.

철저히 근육 당한 와키자카는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형님을 바라봤지만, 형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더니 앙금이 남아 있는 표정으로 요리를 하였다.

상이 차려지고 백성들은 우리에게 인사를 올린 다음 이황이 즐겨 먹던 음식을 같이 먹었다.

요리야 평범했지만, 미역초무침을 한 입 먹은 백성들은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세상에! 이 미역을 어떻게 무쳤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은은한 단맛이 올라오는데, 여긴 생미역은 올라오지 않고 건미역이 전부가 아닙니까? 이리 좋은 미역을 누가 팝니까?”

이게 다 형님의 꾀였다. 미역에 귀한 설탕을 넣어서 불렸는데, 이게 조미료 역할도 해서 은은한 단맛이 올라왔다.

졸지에 최고품질의 미역을 팔아치우게 된 와키자카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고, 형님은 와키자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왜국의 건어물상인 협판안치가 머나먼 바다의 무인도까지 나아가 채취한 미역이네. 이토록 품질이 좋은 미역이니 협판미역이라 칭하고 대대손손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네.”

“협판······ 미역이라고요? 대대손손 판매한다니요?”

“이렇게 품질이 좋은 미역을 값싸게 팔아치울 수 있다면 성씨를 앞세워도 충분하지 않겠나. 자네도 형편을 필 수 있겠고, 물량이 부족하다면 안동의 사람들이 모두 자네에게 연락을 넣을 것이네.”

이제 미역 장수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으리라.

졸지의 자신의 후손들의 운명을 미역 장수로 만들어 버렸지만, 와키자카는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형님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소동이 끝나고 이황의 묘소 정리가 끝난 뒤에 우리 형제가 제사를 올렸다.

이황은 평소에 근육이 쇠하는 것을 염려하여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녹차를 올리고 절을 드리며 말하였다.

“불초 제자가 문안 인사를 올립니다.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저를 심히 염려하시었으니, 모두 저의 과오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 제자가 부족한 머리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이행하려 힘을 썼습니다.”

이황은 나에게 조선 시대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이황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현대와 흡사하게 무작정 일을 추진하고 마음대로 하다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에게 적잖이 문책당했으리라.

형님도 내 말에 반대하지 않고 잠자코 제사를 진행하였다.

이황과 같이 음식을 거칠게 먹고 사치를 경계하되 꼭 필요한 일에만 돈을 쓰는 것이 모범이요,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아내와 함께 장인어른인 조식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고 돌아왔다.

도성으로 막 돌아올 무렵 주상전하께서는 양위를 결정하셨다. 휘는 준(浚)으로 29세의 연령이었다.

주상전하께서는 군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을 내려놓았고, 세자 저하께서는 보위에 올라 대소신료들에게 첫 어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할 나를 기념하듯이 주상전하께서는 정(丁)자로 된 자를 들어 보이며 말하였다.

“이 척도는 기존까지 사용하던 황종척(黃鍾尺)을 개선한 새로운 척도이다. 곡식의 낱알로 길이를 정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지구(地球)의 길이를 역산하여 만든 척도이지. 이미 세종대왕 시대에 퍼져 나간 황종척은 효력이 다하지 않았더냐.”

세종대왕 시기에 만든 황종척은 각 지방에서 복제를 거듭하며 점차 오차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듣자 하니 표준 척과 비교하면 일 할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까지 있다던가.

새로 왕위에 오른 세자 저하께서는 이를 염두에 두셨는지 거듭 말씀하셨다.

“유성룡이 계산한 지구척은 앞으로 이백 년 동안 표준 척도로 쓰일 것이며, 이후 새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여 만들 것이다. 그러하니 이십 년마다 모든 외방에 지구척을 보내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내가 없는 동안 세자 저하께서 진행한 도량형 개선사업이 제대로 실효를 보였으니 다행이지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길이야 문제가 없는데 입신체비에서 가장 중요한 근(斤)을 수정할 수는 없었나 보다.

세자 시절에 절반만 완수한 어명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해졌다.

이 시대에서 가능한 최대의 정밀도를 자랑하는 지구척은 조만간 전 세계의 표준이 될지도 모르리라.

* * *

박물관장이 되고 처음으로 방문한 손님, 관람객이 아닌 나를 만나고자 찾아온 자는 윤광영이었다.

그는 몇 년 사이에 두툼해진 체격을 보이며 나에게 찾아와 자랑을 늘어놓았다.

“제가 역적의 후손이라는 불명예를 씻어내자 저희 종가에서는 저를 정식으로 대동보에 넣고 미주의 파평 윤씨라 하여 종파를 따로 마련할 예정이라 하였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자네를 문책하지 말라 하였으니, 중요히 대접하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자네 체격이 두툼해졌는데, 입신체비는 실컷 즐겼는가?”

“물론이지요. 각지의 어르신들을 만나고 같은 항렬인 이들을 만나 수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그분들은 제 과업으로 남겨진 만천서원을 염려하시어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윤광영이 소매에서 꺼낸 물건은 손바닥 크기의 옥 조각이었는데, 질 좋은 대양도산 벽옥(碧玉)을 깎아 만든 이 층 누각이었다.

그런데 잠시 살펴보니 양식이 조선의 건물과 달랐다.

윤광영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경상도에서 발견되어 조만간 박물관으로 옮겨질 신라 시대의 건물 조각을 제가 먼저 입수하여 형태를 본뜨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제가 만든 것의 극히 일부이며 제대로 만들어진 물건은 지금 명국의 황궁에 있습니다.”

“명국의 황궁에 있다고? 대체 무슨 물건을 만들어서 조공으로 올렸단 말인가?”

“미주에 건립될 만천서원의 모형을 황상께 진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모형이 북경이 무너지며 사라졌으니 옥으로 다시 조각하여 진상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고생 좀 하였지요.”

그 말을 듣고 윤광영의 손을 살펴보니 정말 필사적으로 만들었는지 손톱이 두 개나 뽑혀 나가 새로 자라나고 있었다.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윤광영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였다.

“조만간 미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만, 조선에서 얻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돌아가기 이전 관찰사님, 아니, 관장님에게 인사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앞으로 만천서원이 완공될 그 날까지 힘을 다하겠습니다.”

“힘을 다하되 말년에 나처럼 은퇴할 수 있도록 열심히 꾀를 써보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오십 년이 걸려서 완공될 건물이니, 앞으로 삼십 년 이상 남지 않았습니까? 대충 완성까지 십 년이 남으면 편히 쉬어보아야지요.”

윤광영이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녀석이 본을 뜬 신라 시대 건물 모형은 현대에서 연구를 거듭하여 신라 시대 건물 양식을 복원하는 데 쓰이리라.

잠시 건물 모형을 보며 형식을 역으로 계산해 도면으로 옮기고 있자니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한때 내 아래에서 일하다 이제 예조참판이 된 이이첨은 인사를 올리고 말하였다.

“이번 성절사(聖節使: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려 다녀오는 사신)의 일행으로 참가하였는데, 처음에는 남경으로 향하려 했다가 명국 황상께서 명을 내려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향하라 하였습니다. 덕분에 조금 고생을 하였지요.”

“조금 고생을 하였다니 별말을 다 하는군. 요동에는 이미 포장이 부족한 흙길이라도 마련해 두었는데, 고생을 할 것이 무어가 있었겠는가.”

“그야 평안한 뱃길을 내버려 두고 마소와 함께 육로로 나아가니 고생이지요. 차라리 뱃멀미에 시달리는 것이 좋지, 흙먼지를 한 달 이상 삼키지 않았습니까.”

이이첨은 천연덕스럽게 말하였지만, 외방에서 죽도록 고생을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여 자격지심이 생긴 것이겠지.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슬쩍 흘겨보고는 말하였다.

“북경이 피폐한 상태로 있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무술년(戊戌: 1598년)의 난이 일어나고 고작 칠 년 만에 거의 온전한 상태로 복구하였습니다.”

“고작 칠 년 만에 복구하였다고? 거의 온전한 상태라 하였는데 얼마나 온전한가?”

“저도 예전에 사행을 두어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만, 자금성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은 대략 팔 할, 시가지를 비롯하여 백성들이 거주할 장소는 오 할 정도 복구하였지요.”

놀랍게도 사력을 다하여 정무에 임한 만력제는 10년 이상 걸리리라 예상했던 북경의 복원을 고작 7년 만에 완수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 복구는 아니지만, 이이첨은 북경을 다녀온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건물이 새로 지어졌기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고 백성들도 예전처럼 거주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상인들이 죄다 남경으로 터전을 옮긴 덕분에 번잡하지도 않더군요.”

“아무리 나라 하여도 칠 년 만에 그 정도로 복구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황상께서 심혈을 기울이셨군. 그나저나 돈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네. 고작 관세를 거둬서는 벌충할 수 없는데?”

조선에서 예측한 북경 복구 시간은 추가 세금을 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준으로 거두고 20년, 민란이 일어날 것을 각오한다면 12년이다.

이것보다 빠르게 복구하려면 다른 수단을 사용했으리라.

만력제의 내탕금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서 조선에서 보낸 호위병의 급료는 공식적으로 세금을 걷어 내놓는다 하였다.

이이첨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혹여나 주변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휘장(揮帳)을 치고 귀를 기울였다.

“입수한 정보로는 위소제는 아니더라도 이갑제를 임시로 갱신하여 이장을 선출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하였습니다. 대신 이장들에게는 휘하의 갑호(甲戶: 평범한 호)를 부릴 권한도 주었지요.”

“미친 짓이로군. 아예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 작정인가?”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을 여러 갈래로 보내고 상인들을 시켜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만, 명국의 명운은 기울어지다 못해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호적에 없는 부유한 가구를 이장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새로 이장이 되어 아래의 평범한 가구를 다스리는 이들은 대부분 은자 이백 냥 이상의 거금을 짊어지고 도주한 대연군의 잔당이 차지하리라.

말 그대로 대연군 잔당이 명나라의 구석구석에서 약간의 권력을 얻을 것이요, 이들은 휘하에 둔 평범한 농부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여 반란군으로 탈바꿈시키리라.

도저히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으니 이이첨은 얼굴을 들이밀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명국의 곳곳에서 변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파촉의 양응룡이라는 자가 연나라의 후계를 자처하여 일만 대군으로 거병하였고, 마천승이라는 장수와 아내인 진양옥이 휘하 병사와 함께 토벌에 협력하여 가까스로 물리쳤다더군요.”

“그걸로 끝이 아닐 것 같은데. 고작 일만 대군으로 끝날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 명국이 파악하지 못한 변란을 감안할 때, 최소 열 건 이상의 반군이 고개를 들고 세를 넓히고 있습니다. 조만간 명국이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아닐세, 명국은 거대한 나라이며 남경 일대는 온전히 관리하고 있으니 그럴 염려는 없을 것이네. 몸이 거대한 코끼리가 화살 몇 대를 맞았다고 죽지는 않지. 다만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다 상처가 곪아 쓰러질 뿐이네.”

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자 이이첨도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으로 동의하였다.

거대한 명나라가 단숨에 무너질 리는 없다. 아무리 병든 코끼리라 하여도 상처를 입으면 단번에 고꾸라지지는 않으니까.

대신 아주 천천히, 온몸이 망가질 때까지 끝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아무리 빨라도 30년, 길면 5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점차 영향력을 잃으며 분열하고 결국 멸망하겠지.

사방에서 발호한 반군은 더 이상 대연이 아닌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것이요, 내가 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의 주상전하께서는 이를 이용해 중국을 여러 갈래로 분열해 버릴 수도 있으리라.

아마 이이첨이 늙어서 정승의 자리에 오르면 조선은 온전히 요동을 먹어치우고 반군에 의해 점령된 명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리라.

이제 나도 사실상 은퇴하였으니 후손들에게 일을 맡길 때가 되었다.

#작가의 말

후대의 사학과 교수 : [앞으로 어명이 아닌 이상 외방으로 나아갈 일도, 야근을 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라는 항목을 형광펜으로 색칠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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