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50화
2부 30장 12화 서른이 넘네(2)
내가 산성의 규모를 파악하며 열을 올리는 동안 니당개를 비롯한 하마 니씨의 북인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발견한 탄광은 고구려 시대에 많이 캐내지 않았는지 노천탄광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가는 길이 문제였다.
숲을 가로질러 사십 리를 지나가야 하니 수레를 이용할 수 없어서 지시를 하달하라 하였는데 북인들은 어느새 내가 애단현을 개척하던 당시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 넘겨 대충 말려! 나무는 썩어 넘치니 대충 습기를 빼고 목탄을 만들면 충분할 거다. 그루터기는 예전에 서애 대감께서 하시던 대로 화약으로 날려 버려라!”
내가 길을 만들라 지시하기도 전에 알아서 숲이 갈라지는 기적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좋은 일이라 알아서 일하게 내버려 두고 철광을 확인했다.
이여송이 많이 캐내었는지 철광이 제법 상태가 좋았다.
고구려가 개발하였던 광맥은 표층(表層)에만 있었는지 넓은 구덩이가 있었고, 이후 발해와 금나라를 거쳐 이여송이 계속해서 파고든 입구가 여럿 있었다.
니당개가 손짓을 하자 하마 니씨의 인부들이 안에 들어가서 광석을 캐내 나와 니당개에게 보여주었다.
“철의 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관찰사께서도 아시다시피 철광석은 한 덩어리에 붉은빛이 많이 돌고 윤기가 흘러야 하는데, 경원의 철과 비교하면 이곳의 철은 훨씬 단단하군요.”
“그뿐만이 아닐세. 철광석을 제대로 녹이려면 차돌처럼 단단해야 강철이 잘 나오는 법일세. 이 돌을 보게나. 서로 부딪치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지 않은가.”
이제 노인이 다 되어 허리가 구부러지기 시작하는 니당개도 철광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탄하였다.
마침 이여송이 철을 제련하려고 만들어 둔 가마가 있어 그걸 수리하려 하였는지, 니당개는 손짓을 하며 지시를 내렸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여태까지 조선과 외방을 들쑤셔도 찾아내지 못한 철광석과 최고급 역청탄을 발견하였는데, 옛 방식을 고수하다니.
잠시 니당개의 일에 끼어들어 다른 지시를 하달하였다.
“최고의 철과 최고의 흑토(역청탄)가 있는데, 왜 최고로 좋은 가마를 만들려 하지 않는가. 아국은 철의 생산량이 많아 당장은 급하지 않으니, 가장 높은 가마를 만들어보지 않겠나?”
“최고로 높은 가마라 하셨습니까? 이론상 고로(高爐: 높은 용광로)는 높아질수록 효율이 좋아지지만, 저희 하마 니씨가 옛적부터 개량해서 쓰는 고로도 높이가 지구척으로 아홉 자(3m)에 불과한데요.”
“내가 구주 일대를 돌아보고 그들이 사용하는 고로를 확인해 보았는데 그들은 목탄과 훨씬 부족한 철광석을 사용하고 열두 자 높이의 고로를 사용하고 있다네.”
스페인에서 최고품질의 철을 양산하는 톨레도 장인과 면담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톨레도에서도 이런 수준의 고로를 설계할 욕심만 있고 실제로는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더라.
반면 조선은 전체적으로 따지자면 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기술은 필요에 의해 발전하니 언젠가는 각 분야에서 다른 나라에게 뒤처지겠지만, 한번 치고 나갈 때에 발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간단한 가마 도면을 그리며 말하였다.
“근래 들어 승자기(본차이나)가 양산되며 고령토의 사용량이 다소 줄어들었네. 불에 잘 견디는 벽돌은 고령토와 석묵(石墨: 흑연)을 섞어 만들면 충분하니 이를 이용하여 가장 높은 고로를 만들어보게나.”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고로에 넣는 흑토나 철광석은 고로가 높아질수록 단단한 녀석을 넣어야 하니 한계가 있었지요. 이런 좋은 물건을 두고 어찌 편한 길만 찾으려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기술은 필요에 의해 발달하는 법이니 당연하지 않겠나.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행해오던 일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계속 마음을 다잡으며 나아가야 하는 법이네.”
내 설계대로 고로를 만들고 계속 개량하며 발전하면 언젠가는 질 좋은 철이 나오기는 하리라. 그렇게 되면 무순에서 만든 입신체비 기구들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가지 않을까.
이외에도 여러 지시를 내렸다. 당장 산성에서 유물을 찾아낼 순 없으니 위치만 파악하고 기본적인 조사를 해서 후일 발굴조사를 실시할 때 사람들이 머무를 터전을 만들라는 지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의 석 달이 흐르고 보니 음력 9월이 되었고, 불현듯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는 내가 요동으로 출장을 나가자 한숨을 내쉬더니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낭군께서 의도하신 바는 아니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기는 했다.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니라 아내도 꾹 참고 넘어갔지만, 더 큰 문제는 올해 음력 10월 1일이 내 환갑이라는 점이다.
환갑이 되면 능력이 부족한 관료들은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아예 요동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뭔 소리가 나겠는가.
잘못하면 60이 다 되어 아내의 화를 불러와 각방을 쓰며 70까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도성에서 환갑은 지내려고 하였는데, 이덕형은 미리 보내온 서신을 확인하며 말하였다.
“순변사께 찾아온 손님들이 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백정들 가운데 요동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보내셨으니 이들의 거처를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지금 뭐라 하였는가? 웬 백정들이란 말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동의 땅이 넓으니 집히는 대로 보냈다 하시더군요.”
이덕형도 기본적인 재주는 있었으니 이들이 먹을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준비하여 미리 비축해 두었고 예상대로 의주부터 올라온 거대한 행렬들이 눈에 들어왔다.
백정들의 거주지는 가축 품종 보존을 위해 산골로 한정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알아서 산골에서 생활하며 입신체비에 필수적인 고기를 팔아 중인(中人)에 가까운 계급이 되었지만, 지금은 조선 중기이니 인구 압박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미주로 이주할 마음이 생기지만 자신이 기르는 가축을 데려갈 수 없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백정들에게 요동은 가축과 함께 이주할 수 있는 꿈같은 장소이리라.
백정의 대표로 나온 사람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주상전하께 청을 올리니 허락하시어 머나먼 요동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각지에서 모인 백정 일천여 호(戶)와 가축 일만 마리를 데려왔으니, 저희가 정착할 장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백정 일천여 호라 하였는가.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믿으셔도 너무 믿어주시는군.”
아예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였으니 나은 형편이다.
생활력이 뛰어난 백정이고 요동은 좀 춥다는 것만 제외하면 사람이 살기 좋고 산세도 수려하며 가축을 키우기 좋은 지역이니까.
문제는 백정들이 도착하자마자 벌인 행동이었다. 서로를 확인한 북인과 백정들은 앞으로 걸어 나와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백정들은 먼저 북인의 복장을 보더니 꼴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매몰차게 말하였다.
“북인들 아니랄까 봐 꼴같잖은 행색을 하고 자빠져 있군. 아국의 사람이라면 무명을 표백하여 이가 시리도록 하얗게 만든 옷을 입고 갓을 써야지! 자네들은 말 꼬랑지를 그대로 두고 흑립(黑笠: 일반 갓)을 쓰지도 않는군!”
“어이구 백정 놈들이 뭔 소리를 하는가? 네놈들이야 팔도 산골에서 좋은 자리 차지해서 떵떵거리며 먹고 사니 그게 가능하지, 이런 변방까지 와서 하얀 무명에 갓? 웃기고 자빠져 있군.”
백정들은 도시 인근의 산골에 거주하면서 가축을 길러 도축하고 고기와 유제품을 생산해 도시에 팔아넘기고, 북인들은 머나먼 북방에서 거대한 목장을 기르는 이들이다.
결국 이 둘은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서로를 헐뜯을 거리가 넘쳐 나는 이들이고 따지고 보면 경쟁 계층이었다.
저 정도의 반응이면 나를 보아서 꾹꾹 눌러 참는 수준이겠지만, 참는다고 싸움이 멈추진 않았다.
“백정들은 가축을 많이 기르지도 않으면서 도축 의뢰만 받아 의뢰비만 챙기지 않나? 하얀 무명옷을 입어보았자 핏물로 범벅이 되어서 장롱 속에 꼭꼭 숨기고 있다가 도시에 나아갈 적에만 챙겨 입는 것은 잘 알고 있지!”
“그럼 북인들은 겨울 추위에도 멍청하게 옷을 껴입지 않고 외양간과 방을 터놓아 구수한 소똥 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한다는데? 근처에만 가도 분변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야 이 머저리 새끼야! 니들이 북방의 추위를 알아? 축사부터 안채까지 구들을 놓고 불을 때도 가축이 얼어 죽는데, 그걸 방지해야 할 거 아니야!”
예전에 즉위하였던 환종이 세웠던 원칙 덕분에 조선에서 인종차별은 사라졌지만 저런 지역감정은 남아 있는 법이었다.
백정들이 아예 생활 태도를 헐뜯자 북인들은 백정들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잠시 나를 쳐다보고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
“말 다 했나? 네놈들이 도축할 적엔 무식하게 칼만 휘둘러 가축 내장을 터뜨려 버린다던데?”
“얼씨구? 어디 백정 칼 솜씨 좀 보고 싶으신가? 잘 갈려진 경원의 칼 맛은 보셨나? 내장을 손대지 않고 배를 단번에 갈라 버리는 솜씨인데?”
“하마 니씨에서 네놈들이 쓰고 있는 칼을 만들었는데 어쩌고 어째? 네놈들은 식칼이지만 우리들은 장검이야. 어디 칼 솜씨 좀 볼까?”
“싸움은 그쯤 하게나. 백정들을 보낸 분은 주상전하이신데 어찌하여 아국에 충성하는 북인으로서 이들을 내쫓으려 한단 말인가. 또한 백정들은 북인을 보좌하라는 명을 받았을 것인데 이를 어길 셈인가?”
이대로 진행되었다간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말리니, 북인과 백정들 모두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면 불만이 폭발할 테니 모두가 좋아하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싸우지 말고 안전한 내수린을 하게. 스무 명의 대표를 선발하여 열을 셀 때까지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거나, 상대를 눌러 제압하고 셋을 셀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면 될 것이네. 승자는 계속 싸울 수 있다네.”
“역시 영의정 대감님이십니다! 그런 규칙이라면 뼈 몇 개만 부러뜨리면 되겠군요!”
“고의로 그러한 행동을 하면 당장 의금부로 압송하고 사고를 일으킨 측이 패했다고 세상천지에 알리겠네! 내 복수자설을 비롯한 신소설의 검증을 담당하니 소설 서두에 적어둘 것이네!”
다들 신소설에 대해 알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나는 이를 악물고 북인과 백정을 노려보았다.
영의정의 명령으로 내수린을 하였는데 백정과 북인 사이의 살육제전이 벌어졌다 하면 뭔 꼴이 나겠는가.
결국 다들 눈을 내리고 답하였다.
“영의정 대감께서 말씀하시니 저희 모두가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 내수린을 시행하겠습니다.”
“생각하여 보니 나약한 북인들이 사지가 꺾이고 죽음에 이르면 저희가 형무소에 갇히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규칙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겠습! 네놈 지금 뭘!”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이 백정아! 나약한 북인? 당장 쳐 튀어나와!”
벌써부터 첫 상대가 정해지고 공무원들이 달려와 최대한 안전한 내수린장을 쌓았다.
나는 제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 없게 하라고 중얼거렸다.
내수린장이 완성되기 무섭게 북인과 백정이 서로 멱살을 잡고 올라와 몸을 부여잡고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폭풍메치기(F5)를 당해 바닥에 자빠진 북인은 이어진 전신투를 맞고도 바로 벌떡 일어나 코피를 질질 흘리며 배를 걷어차고 백정의 사지를 부여잡아 독사꺾기(코브라 트위스트)를 걸었다.
사지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올라왔지만, 백정은 갑자기 기합을 넣더니 몸을 뒤로 자빠뜨려 기술에서 탈출하고 두골헌(헤드락)을 걸어 기세를 올렸다.
이윽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북인이 항복을 표시하자 백정은 가슴을 펴고 말하였다.
“첫 싸움은 내 승리이다!”
“그놈은 하마 니씨 출신이라 힘이 가장 부족한 북인이다! 나는 경원 정씨 소속이니 받아라!”
훌쩍 뛰어 무대에 설치된 밧줄을 밟고 공중제비를 돈 북인은 바로 드롭킥을 날렸고, 발에 가슴을 맞은 백정은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북인이 단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자 백정들도 고함을 지르며 웃통을 벗고 달려들었다.
내가 감독하였기에 고의로 상대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려는 짓거리는 벌이지 않았다.
물론 고의가 없었을 뿐이지 과격함의 끝을 달리는 내수린이었기에 골절상을 입은 사람이 넷, 뇌진탕에 걸려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하는 이가 일곱이었다.
“내가 이겼다! 드디어 백정이 북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는 말이다!”
최종 승자는 백정들이 꼭꼭 숨겨두었다 꺼낸 임차손의 조카인 임부환이라는 자였는데, 그는 승리의 흑룡세를 취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비단을 내려 공을 치하하며 말하였다.
“이번 내수린의 승자는 백정이니 앞으로 일 년 뒤에 새로 내수린을 열어 우열을 가리게. 쓸데없는 싸움을 벌여 서로 힘을 빼는 것보다 철저히 준비하여 우열을 가리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올해에는 너희들이 이겼지만, 내년에는 아니다! 우리 모두 입신체비를 열심히 익혀서 더욱 화려한 싸움을 하자는 말이다!”
“거 고기도 제대로 못 먹어서 힘도 못 쓰는 것들이 말은 많군. 우리가 이겼으니 우리가 기르는 소를 잡아주마. 너희 혹시 불란서에서 들여온 소는 먹어나 봤는지 몰라?”
백정들은 승자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자신들이 계속 길러온 가축을 도축하곤 즉석에서 요리하여 내주었다.
프랑스에서 들여온 살레르 지방의 육우와 저지 섬의 유우(乳牛)는 지난 세월 동안 계속 수가 늘어나 이제 모든 백정들이 기르며 서서히 민간에 퍼져 나갈 때가 되었다.
정작 접시에 놓인 음식은 두꺼운 스테이크여서 문제이다. 이 시대의 소는 오로지 여물을 먹여서 기르는지라 이렇게 두꺼운 스테이크로 만들면 질겨서 아주 잘게 썰어 먹어야 한다.
당연히 북인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적당히 구워서 육즙도 살리고 표면도 꺼슬꺼슬하게 익혀서 좋지만 이렇게 두꺼운 고기가 질기지가 않아?”
나도 한 점을 먹어보았는데 현대의 쇠고기보다는 질기고 누린내가 올라오지만, 이 시대의 쇠고기와 비교할 수 없이 풍부한 맛이 일품이었다.
북인들은 스테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더니 백정들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이런 좋은 고기를 혼자 두고 먹다니 참 대단한 노릇이군. 그 소를 내어주면 우리가 더욱 수를 불려줄 것이니 송아지를 좀 내어주게나.”
“그럼 우리는 말을 좀 받고 싶은걸. 알다시피 말을 기를 공간이 없어서 몇 마리를 마을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런 동네에서는 말보다 좋은 가축이 없지.”
북인과 백정이 서로 감정을 내려놓고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아마도 내년의 내수린 대결을 위해 칼을 갈고 있으리라.
일단 수습은 하였으니 이들을 소집하여 명령을 내렸다.
“북인들은 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험한 산세에 능한 이들이니 각지에 역참(驛站)을 만드는 일을 돕도록 하게. 역참이 있는 곳이 곧 북인들의 마을이 될 것이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하면 역참이 아닌 곳은 어떻게 합니까? 이를테면 옛 고려의 흔적이 남은 곳은 내버려 둔다는 말씀이십니까?”
“옛 고려의 흔적이 남은 곳에는 백정들이 살아갈 것이네. 알다시피 옛 고려의 도시는 모두 무너지고, 대부분 산성만이 남아 있지 않은가. 가축을 보호하고 기르기 적합한 장소로 가장 좋을 것이네.”
북인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 딴에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북인들은 기본적으로 사설 역참을 둘 정도로 활발한 성격이며 북방에서는 마을을 오가는 일이 자주 있으니 이들을 산성 안에 둘 수는 없다.
백정들은 가축 품종 보존을 위해서라도 한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백정들의 근원을 알고 있는 나이니 점잖게 타이르듯이 말하였다.
“백정들은 옛적에 수척(水尺)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네. 발해가 몰락하며 옛 고려와 말갈의 후예들이 전조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예가 백정이 아니겠는가. 근본을 따지자면 금나라를 세워 따로 나아간 북인들은 옛 고려의 방계(傍系)이지.”
“듣고 보니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긴 저희가 옛 고려에 소속된 이들이지만 핵심은 아니었으니 수뇌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지요. 다만 부탁이 있을 뿐입니다.”
“이미 알고 있다네. 백정들은 마을을 세울 적에 유물이 나온다면 그 자리를 피하도록 하게. 아니면 아예 그 초석(礎石)을 기반으로 집을 지으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
서로의 근본을 인정하고 화합을 추구하였으니 북인과 백정은 서로 협력해 발전하리라.
* * *
그동안 사방을 떠돌며 공무원과 함께 지도를 만들고 산성을 확인한 북인들이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혹시나 이 성이 안시성이 아닐까 합니다. 거대한 산성인데다 백정들이 집터를 만들 때마다 유물이 발굴되고 있으니 이세민(李世民: 당태종)이 도주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애석하겠지만, 아닐세. 안시성은 옛 고려에서 세운 장성(천리장성)의 일부이며 해안과 근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네. 사서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 지역은 거리가 지나치게 머니 아마도 개모성일지도 모르네.”
본격적인 유물 발굴은 겨울이 지난 이후 내년 봄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문제는 지도에 표기된 성의 위치인데, 요동 일대에 산성과 장성의 흔적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북공정이랍시고 역사 왜곡을 자행하는 중국은 15억에 달하는 인구와 막대한 국력을 자랑하지만, 그 인력을 동원하고도 고구려의 유적을 다 뜯어고치지 못해서 일을 대충 하나 싶었다.
그러나 진상을 파악하고 중국이 제대로 작정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북인들이 대충 조사한 지도에 이미 스무 개가 넘는 거대한 산성과 마흔 곳이 넘는 소규모 요새가 있었으니 내년이 되면 업무에 치어 죽어 나가리라.
내가 저지른 일의 나비효과가 여기까지 왔으니 뭘 어쩌겠는가.
배에 오르니 물자를 대고 군관들을 교체하던 이순신이 내 표정을 보며 말하였다.
“역시 자네가 정시퇴근이니 뭐니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나도 고생을 하지만 이 나이에 대체 무슨 고생을 한단 말인가.”
“자네도 환갑을 앞두었으니 슬슬 은퇴를 해야겠군. 그나저나 자네는 웬 돌을 가져왔는가?”
“요동의 도적들이 혹여나 산동 반도를 통해 요동을 공략할까 염려하여 해안 일대를 시찰하였는데,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성의 흔적이 있었네. 성이 너무나 좋은 위치라 몸이 절로 움직여 시찰해 보았고, 주춧돌 하나를 가져왔다네.”
이순신이 가져온 돌은 거대한 초석이었는데, 칠각형으로 다듬은 데다 정으로 쪼아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고주몽의 아들 유류왕(儒留王)이 칠각 주춧돌 아래에서 아버지가 남긴 증표를 찾아냈다 했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나름 격식을 차린 성이며, 이순신의 기준으로 너무나 좋은 위치라면 최고로 중요한 거점 중 하나이리라.
이순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산세가 예사롭지 않아 일만 명의 병졸만 있어도 십만 대군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위치여서 참으로 마음이 놓였다네. 이 성을 고치는 데 자네의 힘이 조금만 들어가면 좋겠군.”
이순신이 발견한 성은 아마 수나라와 격전을 벌이고 함락당한 비사성(卑沙城)이리라.
비사성의 인근에는 안시성이 있는데, 이러다가 고구려의 성이란 성은 다 발굴해 버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