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49화 (549/573)

근육조선 549화

2부 30장 11화 서른이 넘네(1)

관원의 보고를 듣고 예삿일이 아니라 생각하였다.

북인들은 조선에 귀부한 여진족의 후예이자 지속적으로 실시한 교육 덕분에 자신들을 고구려의 방계라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다.

예전부터 이어져 온 과격한 문화에 조선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부터는 두려움이 거의 없는 민족 전체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들이 되었다.

밖에서 함성이 들려와 창문이 덜덜 떨려서 관원을 바라보니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를 이어갔다.

“닷새 전에 박물관에 방문하였던 북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고 퍼져 청을 올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합니다. 지금 박물관의 관장(官匠)으로 재직하시는 율곡 대감에게 오십여 명의 북인들이 청을 올렸다 하더군요.”

“하필 율곡 대감에게 청을 올렸다고? 대감께서는 어찌하셨나?”

“이미 칠순을 바라보고 계시는지라 더 이상 북방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결국 이들은 의정부에 청을 올리고 돌아갔는데 일단 청을 들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정부는 삼정승과 찬성 그리고 참찬이라는 최소 정2품 대감들이 즐비한 관청이지만 5명 정도의 하급 관료와 각 관청에서 보내온 파견 관리인 녹사(錄事)가 이들을 보조한다.

내 앞에서 보고를 올리는 이는 친구인 김성일의 조카로 기억하는데 정8품밖에 안 되어서 경력이 일천하다 못해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르고 있다.

북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는 모피 옷을 챙겨 입으며 말하였다.

“자네가 잘못 생각했군. 북인의 행적을 보아 도성 전체의 북인들이 모일 것이며, 수효가 오천 명이 가볍게 넘어갈 것이네. 당장 사설 역참을 경영하는 이들 대다수가 북인이 아닌가!”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다급히 밖으로 나가니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축제 분위기가 된 육조거리에는 조선 기준으로도 덩치가 우람한 북인들이 빼곡히 도열해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여 청을 올려댔다.

“주상전하께 청하옵나이다. 부디 옛 고려(고구려)의 성을 발굴하고 유물을 찾아내시어 조상의 얼을 살리시며 제사를 올려 요동에 잠든 수많은 고혼을 달랠 기회를 주시옵소서!”

“옛 고려의 후예로서 가까스로 되찾은 고토에 뼈를 묻을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나이다. 저희를 초개와 같이 험히 다루어 주시어도 누대에 걸쳐 이 은혜를 전하겠사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북인들은 단순히 유물을 찾아달라는 청원을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반드시 요동으로 보내달라는 둥 뼈를 묻겠다는 둥 각종 미사여구를 덧붙여 요동에 거주하고 싶다는 욕구를 드러내었다.

점점 소빙하기가 다가오고 북인들도 풍요로운 삶을 이어갈 수 없는 판국이라 요동으로 진출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핑곗거리가 생긴 시점이다.

조용히 육조거리를 우회해 궐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한 북인이 나를 지목하며 말하였다.

“영의정 대감께서 궐로 들어가려 하시지 않는가! 내가 저분과 내수린을 행해 보아서 아는데 명재상이 될 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서애 대감님! 저희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잠깐! 잠깐! 나는 한낱 신하에 불과하며 주상전하께 청을 올려야 하네!”

“지력상소가 무슨 소용인가! 영의정 대감께서는 십만 대군을 막아내시고 여송과 미주를 개척하신 분이라네! 당장 영의정 대감을 이용하여 상소를 올리세!”

“자네들 이 손 놓지 못하겠는가! 당장 손 놓으라아아아악!”

과격한 북인이라도 골격이 쇠해지는 50세 이후부터는 내수린을 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북인들의 무수한 내수린 요청에 온몸의 뼈가 박살 났을지도 모른다.

북인들의 손길에 잡힌 나는 순식간에 대열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 미친놈들은 나를 이용해 헹가래를 치며 궐 앞까지 움직였다.

그들은 서애! 서애! 서애! 라 외치며 자신의 할 말만 지껄이고 있었다.

“저는 허도령으로 분장하여 내리찍은 오성와락(파이브스타 프로그 스플래쉬)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복근이 찢어질 줄 알았는데 멀쩡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애 대감께서는 사막 한가운데 던져놓아도 거대한 도시를 세울 분이라 하였습니다. 사막이 어딘지는 복수자설을 보아서만 알고 있지만 아무튼 대단한 분이 아닙니까!”

“주상전하께서는 부디 보아주시옵소서! 이대로 근정전 지붕 위에 영의정 대감을 올릴지도 모르옵나이다. 저희에게는 그럴 힘이 있사옵니다!”

북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대충 나를 지붕 위로 올려보낼 정도로 거세게 헹가래를 치며 궐 앞으로 향하였고, 영의정이 납치는 아니고 상소의 도구가 된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내금위가 나서서 나를 가까스로 구출하였다.

의복을 정돈하고 잠시 기둥에 기대어 서서 정신을 고쳐 잡으니 북인들은 영의정에게 손댄 죄로 포승줄로 묶이면서 아직도 나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상대할 기력도 없어서 주상전하에게 나아가니 주상전하께서는 심히 걱정하듯 말씀하셨다.

“자네가 고생이 참으로 많았군. 환갑이 다 되어가는 사람을 잡아다 헹가래를 치다니 대체 뭘 원하는지 파악하였는가?”

“상소 안에 뼈가 있사옵니다. 하나같이 유물을 발굴해 달라는 명분과 함께 요동에 뼈를 묻고 싶다는 상소를 올리니 이는 북인들의 삶이 점차 피폐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바이옵니다.”

“일대에 눈보라가 몰아치며 가축들이 얼어 죽기 시작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군. 생각해보니 성정이 과격한 북인들은 기회가 생기면 바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네. 내가 보고를 들었지만 대책을 세우지 않아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

관원의 업무량이 늘어날 때마다 주상전하의 업무량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관찰사에게 자율을 줘도 자율과 방종은 한 끗 차이이니 결국 지방 관리가 소홀해지지 않으려면 업무량은 무조건 증가하리라.

조정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통솔하지 않으면 아무리 충성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비뚤어지게 마련이고, 잘못하면 임사홍 같은 놈이 나타나는 법이다.

주상전하께서는 깊은 한숨을 쉬시고는 말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네가 잠시 영의정 자리를 내려놓고 심양으로 나아가 요동관찰사 이덕형을 대신하여 업무를 통솔하고 요동을 정비하도록 하게.”

“하오나 신은 영의정이옵니다! 신이 함부로 나아가면 의정부의 업무가 진행되지 않을 것이옵나이다.”

내가 복수자설부터 각종 외전 집필하고 있는 것은 까먹으셨나요? 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말았는데, 주상전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다 내관을 불러 거대한 철제 상자를 가져오게 하였고, 여기에는 서양에서나 보이는 자물쇠까지 있었다.

이걸 왜 가져 오나 했는데 요동에 가서도 복수자설을 비롯한 신소설 집필을 계속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상전하께서는 이를 나에게 내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근래에 궁궐에서 사용할 자물쇠를 비륜제(피렌체)에서 수입하였다.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백 분의 일치만 치수가 달라도 열리지 않으니 이 상자와 자물쇠로 필수적인 서류를 주고받도록 하게나.”

“하오면 신을 대행하여 간단한 업무를 처리할 사람도 필요하옵나이다.”

“근래에 들어 업무에 매진하며 두각을 드러내는 산시양을 우찬성으로 두고 영의정 자리를 대행하게 할 것이다. 내가 양위하여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면 모를까 사소한 업무는 산시양 정도면 처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산시양은 휴가가 끝나고 어차피 퇴직을 못 할 바에는 차라리 영의정이 되어서 최대한 뽕을 뽑다 나가기로 작정하여 하루 14시간을 일 한다고 하였던가.

물론 그의 퇴직보다 주상전하의 양위가 빠를 것이며 의정부서사제가 재가동되면 영의정 자리에 오른 그는 더욱 오랫동안 퇴직하지 못하리라.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으니 나는 주상전하에게 얻어낼 것은 모두 얻어내기로 하고자 청하였다.

“주상전하의 심계가 지극히 깊사오나 신은 능력이 부족한지라 요동을 정비하며 유물을 찾아내는 업무를 동시에 진행할 수 없사옵니다. 하오니 관원을 많이 동원하여 주시옵소서.”

“관원을 많이 보낸다면 입신체비사가 많은 배가 산으로 가듯이 일 처리가 원활하지 않을 것인데 얼마나 많은 관원이 필요하단 말인가.”

“각지에서 근속 중인 공무원 가운데 오 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이들이 필요하옵니다. 이미 지방 아전의 팔 할이 공무원으로 선발되기에 이르렀으니 참하관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급료는 갓 관직에 진출한 새내기보다 낮은 형편이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상피제(相避制: 관리가 고향에 근무하는 것을 피하는 제도)로 공무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요동이라 하면 모든 공무원에게 상피제를 적용할 수 있겠군. 이덕형에게 이를 미리 보내줬으면 좋았으련만 생각이 짧았다네.”

현 요동관찰사는 이덕형이다.

장남인 유여의 친구이자 내가 조금 가르쳤던 녀석이라 서신을 주고받으며 요동의 상황에 대해 이리저리 보고를 하는데, 요동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이나 마찬가지라 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하였다.

이런 요동에 힘 하나는 대단하고 말 네 마리를 기본으로 끌고 다니는 북인 수천여 명과 공무원이 잔뜩 파견되면 최소한 초기 체제 하나만큼은 확실히 잡을 수 있으리라.

이미 정해진 일이니 주상전하에게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신 또한 환갑이 다 되었는지라 업무를 신속히 진행하여 요동의 기반을 만들고 유물을 발굴하여 북인들이 새로운 터전으로 삼게 하려는 일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옵니다. 부디 신을 요동에 오래 두지 마시옵소서.”

“영의정의 청을 받아들이겠으니 요동 순변사(巡邊使: 변방을 점검하는 임시 관직)로 임명하겠다. 가급적 업무를 순탄히 진행하여 원하는 바를 성취하도록 하라. 또한 몸이 지치고 피로하다면 언제라도 도성으로 돌아와 휴식을 실시하도록.”

“신을 요동에 오래 두지 않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궐을 나오기도 전에 소식이 전해졌는지 의금부로 압송된 뒤 정신 좀 차리라고 치도곤(治盜棍)을 엉덩이에 두들겨 맞았을 북인들이 함성이 들려왔다.

“순변사! 순변사! 순변사! 순변사! 순변사!”

일 하나를 시작하려다가 열이 되었고 열을 다 처리했나 싶었는데 서른이 되었다.

이 참담하고 암담한 심정을 분노로 해소할까 하다가 이성을 되찾고 다시 육조거리로 몰려든 북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내가 호명하는 가문에 당장 서신을 보내도록! 요동을 개척하려면 제대로 된 기술을 갖춘 이들이 필요한 법이니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다!”

내가 가문을 하나씩 호명할 때마다 그 가문과 인연이 있는 북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얼싸안고 내 호인 서애를 연호하였고, 다른 이들은 물자를 댈 것이라며 혈안이 된 상황이었다.

기왕 요동으로 가게 되었으니 아주 뽕을 뽑아낼 작정으로 필요한 북인 가문들은 모조리 불러 버렸다.

두 달이 지나 1602년 3월이 되었고 전국에서 소집된 공무원과 인부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가축을 끌고 온 북인들과 함께 의주를 넘어 요동으로 향하였다.

* * *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온 심양성은 예전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나마 관찰사로 임명된 이덕형이 사력을 다하여 정비하였지만 인력부족이 여실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이래서야 말이 제대로 다닐 수도 없지 않습니까? 길거리에 진창이 왜 이리 많습니까?”

“아국의 팔도는 예전부터 도로를 꾸준히 정비하였고 자네들이 거주하는 북방은 왜인들을 부려 제대로 된 도로를 만들었으니 형편이 나아진 것이네. 시골 도로는 다 이런 꼴이네.”

조선의 도로는 끔찍한 기후 탓에 제대로 된 포장도로를 만들 수 없다. 설령 로마에 있는 가도를 요동에 가져와도 10년 이내에 뿌리부터 뒤엎어지며 박살 날 수준이니까.

이 시대의 조선 도로는 그래도 세계 평균 수준은 된다. 흙길이지만 폭우가 내려도 계속 흙과 모래를 끼얹어 평평하게 만들며 양옆에 배수로를 파내어 보존한다.

당연히 주변도 정비하니 도로를 깎아낸 경사면에서 흙이 밀려오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서 정비한다.

반면 요동의 도로는 상황이 처참하였다.

얼마 전에 비가 좀 내렸다고 도로의 절반이 진창이 되었으며 기껏해야 열 명 내외의 부역자, 한때 도적질을 했었을 늙은이들이 어영부영 삽으로 도로를 보수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인구를 확충하여 대규모 정비를 하겠지만 시일이 좀 걸리겠지.

심양성으로 들어가니 예전에 이여송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던 전각에서 이덕형이 보고를 시작하였다.

“제가 조사한 결과 요동 일대의 인구는 대략 백오십만 명에 달합니다. 아직 곳곳의 산골로 숨어든 이들을 파악하지 못하여서 호적은 절반 정도인 팔십만 명 정도를 작성하였습니다.”

“땅은 참 넓은데 인구는 보잘것없다 못해 한산하기 이를 데 없군. 이 드넓은 요동의 인구가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요동이 붕괴되고 독고율이 제대로 된 세력을 구축하기 이전까지는 북원에서 약탈을 반복하고 사람을 납치해가길 즐겼다 합니다. 그나마 북원의 사람들이 아국에 고용되어 부담이 줄어든 덕분에 상황이 나아졌다 하더군요.”

생각해 보니 조선이 소빙하기의 타격을 간접적으로 입고 있다면 북원은 직격탄을 맞은 꼴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약탈과 폭력이 요동을 휩쓸고 독고율, 실제로는 이여송이 이를 가까스로 정상화시켰겠지.

이덕형은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거지꼴이나 마찬가지인 요동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여 끙끙 앓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으니 이덕형이 정리한 요동의 지도를 보며 하나하나 명령을 하달하기 시작하였다.

“주요 도로의 정비는 북인들이 알아서 할 것이네. 말과 소를 잔뜩 끌고 왔으니 공무원을 각 도로에 파견하여 북인들이 이동할 때마다 구덩이를 메우고 부족한 표층(表層)에 흙을 메우면 차츰 나아질 것이네. 어서 움직이게나.”

“사람이 늘어나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나저나 가축이 많아지면 문제가 되는 것이 소금입니다. 이 소금을 만들려면 염전을 더욱 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덕형이 자신이 조사한 해안 일대의 지도를 보여줬는데 요동 일대에는 제법 많은 염전이 있었다.

이걸 팔아 북원과 교역 수익을 거두며 전쟁 자금을 보충한 것이 분명하니 그의 노력을 이해는 할 수준이다. 그러나 이제는 필요가 없다.

“해안을 보니 쓸데없는 염전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데 모조리 치워버리도록 하게. 갯벌이야 간척을 행하여 쌀을 기르면 충분하지만 요동 일대에는 쌀을 기르기 힘든 판국이니 차라리 어획 활동을 벌이면 더욱 소출이 클 것이네.”

“그렇게 되면 요동에서 사용할 소금이 부족해집니다. 개흙과 모래가 섞인 새카만 소금에다 쓴맛이 심하다 하여도 이 일대의 사람들은 모두 천일염을 볶아서 사용하는 상황입니다.”

“이미 호주 관찰사에게 서신을 보내서 암염 수십만 돈(톤)이 도착할 예정이네. 애초에 호주에서 나는 물산이라 하여도 면직물과 금은보화 그리고 암염이 전부가 아닌가?”

호주를 개척하며 생각하지도 못한 자원이 생겨나니 바로 암염이다. 조선에서 접근이 쉬운 호주 서해안에는 지평선 전체가 순수한 소금으로 뒤덮인 암염 지대가 존재한다.

이덕형도 호주를 개척하며 공을 쌓은 사람이니 알고 있었겠지만, 워낙 강직한 사람이니 자신의 문제를 요동 내부에서만 처리하려는 마음을 품었으리라.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니 칭찬을 섞어가며 말하였다.

“본래 외방의 일은 가급적 외방에서 처리하는 것이 방침이지만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네. 이미 여송은 물론이요 아국에서 젓갈을 만드는 상인들은 호주에서 가져온 암염으로 젓갈을 만들고 있지.”

“제 식견이 좁아 좋은 답을 두고 한참을 빙빙 돌아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러하면 염전을 폐한 이후에는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인력을 동원하여 철광을 개발하고 흑토(석탄)를 캐내어 일대에서 사용할 농기구를 만들 생각이네. 농기구를 만든 이후에는 무기를 만들고 후일에는 아국에서 가장 빼어난 병장기를 만드는 병기창(兵器廠)을 둘 생각이지.”

이덕형은 내 덤덤한 말을 듣고는 그냥 입을 벌리고 지도와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거지꼴을 겨우 면한 요동에서 뭔 병기창까지 진도를 나가냐는 소리인데 나는 요동에 대한 정보를 북인들을 통해 입수하였으니 손뼉을 치며 사람을 불러들였다.

“하마 니씨의 사람들은 어서 자리로 들어오시게. 아예 나와 함께 옛 고려의 땅으로 나아갈 준비를 이미 마치지 않았는가?”

“소인을 이리도 중히 여겨주시니 옛적에 인연을 맺은 일을 잊어주시지 아니하셔서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옛 고려의 땅이라 하셨는데 대체 어느 지역입니까?”

“무순(撫順: 현 푸순)이라는 지역이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대에는 철광도 있으며 노천에 흑토가 널려있는 지역이 있어서 옛 고려에서는 이를 철을 벼리는 데 사용했다더군.”

“그럼 저희가 옛적에 터득하였던 흑토로 철을 벼려내는 방식이 옛 조상들이 이미 터득하였다가 실전(失傳)된 방식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벌써 옛 조상의 얼을 하나 찾아내었군요!”

니당개를 비롯한 하마 니씨에 속한 북인들은 벌써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간 듯이 펄쩍거리며 뛰어다녔는데 이들의 기술은 고구려를 추월하고 천 년이 지난 뒤이다.

애초에 야금술은 시간과 돈을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발달하는 고된 학문이다.

여기에 석탄을 살짝 쪄내 불순물을 빼내고 정련하여 연료로 사용하는 일종의 코크스 기술까지 합치면 청출어람을 넘어서도 한참 넘었겠지.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괴성을 질러대며 북인들을 인솔하여 바로 무순으로 향하였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무순은 명나라 시절까지 버려졌다가 무순천호소(撫順千戶所)라 칭하여 성채를 쌓아두어 대충 관리하는 지역이었다. 이후 요동 붕괴 이후 소규모 촌락이 되었고.

기껏해야 이백여 호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이 지역은 난데없는 북인들의 출현으로 들썩였다.

당장 촌장은 기세가 흉흉한 북인들을 보며 절을 올리고 나를 맞이하였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이리도 많은 분들이 오시니 저희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변방인 무순에 무슨 일이 있다고 오셨습니까?”

“무순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오기는. 일대에 불을 붙이면 타오르는 돌을 캘 수 있으며 질 좋은 철광석이 나오는 지역도 있다 하였네. 일대를 개발하고자 하니 심양으로 이주할지 일대에서 철을 캐낼지 둘 중 하나를 고르게나.”

촌장은 물론이요, 주민들은 한참을 고민하다 흉흉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북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나게 보복전을 벌였어도 북인들의 원한도 다 풀리지 않았고 요동 도적의 후예들도 마음이 찔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촌장은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저희 모두가 심양으로 이주할 것이니 비어버린 마을을 마음대로 사용해 주십시오.”

“좋은 결단이니 마음이 놓이는군. 거기 뭘 하는가! 당장 사람을 보내 노천 탄광을 찾고 광맥을 찾아내게. 겨울이 되기 전에 마을을 만들고 유적을 발굴해야 하지 않겠나!”

영의정이자 순변사인 내가 호령하자 북인들은 고함을 지르며 개미떼처럼 도끼를 들고 숲으로 달려갔다.

좀 조용하게 일을 진행하자는 말을 하려 했는데 요동 일대에 서식하는 호랑이를 만났는지 고함과 총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마을을 철거하는 작업을 지시하고 있었는데 해가 지고 임시 천막을 설치할 무렵 북인들이 숲에서 돌아왔다.

개중 한 명은 얼굴에 호랑이 발톱자국이 났음에도 자기가 잡은 호랑이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하였다.

“역시나 요동은 험한 땅이군요! 오히려 험할수록 좋으니 더욱 마음이 놓입니다!”

“순변사님! 저 사십 리 밖에서 계곡을 발견하였는데 물을 얻으러 가보니 물은 없고 흑토가 가득하였습니다! 옛 고려에서 흑토를 캐내어 철을 벼려낸 흔적이 분명합니다!”

대충 네 시간 정도 흘렀는데 사십 리 밖에서 계곡을 발견하였다면 사실상 숲속을 말을 타고 달려가는 미친 짓을 저질렀으리라.

나뭇가지에 충돌해 이마에 혹이 생긴 북인은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나에게 석탄 한 덩어리를 내밀었다.

놀랍게도 이 석탄은 연변이나 경원 일대에서 소출되는 역청탄보다 더욱 묵직한 무게였으며, 손에 타르 성분이 조금씩 묻어나오는 것을 보니 최상급 역청탄이리라.

생각 외로 일이 빨리 진척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이러니 옛 고려에 저희의 조상들이 귀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산 위에서 옛 성터로 추정되는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성이 가로로 다섯 리에 달하는데 더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방금 전 그 생각은 때려치우자.

대체 무슨 성인지는 몰라도 초거대 산성이 발견되었으니 빨리 진척해도 일 년 이상은 걸리리라.

#작가의 말

성룡이 휘하의 북인들이 발견한 산성은 고구려의 요충지 중 하나인 목저성(木底城)입니다.

고국원왕이 전연군과 격전을 벌인 방어 요충지 중 하나이며 만 명 이상의 병사가 머무를 수 있는 거대 산성이지요.

애초에 현재의 푸순, 이 당시에는 무순 일대는 고구려의 주요 방어선 중 하나로 일대에 최소 여섯 개 이상의 산성이 있습니다. 일을 빨리 진행하려면 난이도가 높아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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