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48화
2부 30장 10화 열 끝나고 서른
다른 사람들이 볼지도 모르니 나는 그저 진흥왕의 순수비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간단하게 올리며 말하였다.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연 정복군주이자 수많은 치적을 쌓았으니 이 정도 인사는 드려도 되겠지.
“진흥왕께서는 신라의 중흥을 여신 분이시며 도읍을 정비하신 분이니 주척을 스스로 세워 나라의 본을 다스리셨을 것이라 믿겠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제가 척관법을 만드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제발 진흥왕의 영혼이라도 나타나서 나에게 표준 미터법을, SI단위계의 표준 척도를 내려줬으면 하는 심정이라도 있었지만, 죽고 나서 천 년이 흐른 사람이니 당연히 답이 없었다.
애초에 이건 내 욕심에서 비롯한 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건물을 설계하며 무심코 현대에 정립된 영조척, 30㎝를 한 자로 삼았으나 이 시대의 표준 자는 조금 더 크기가 커서 약간씩 비대한 건물이 되었다.
이걸 염두에 두고 있다 말년에 명성을 쌓고 진흥왕 순수비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척도를 만들려 하였다.
지구의 둘레를 명목으로 삼아 모든 단위를 통합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33.33㎝의 표준 자를 만들고 3자를 모아 매다(每多: 빈번하고 많다)라는 명칭으로 미터를 만들고, 100으로 나눠서 세치(細致: 가늘고 빽빽하다)라고 센티미터까지 만들려는 하였으나, 시작 단계부터 틀어져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흘 동안 신주랑이 측량한 지구 자오선의 길이와 이를 이현전에서 역산한 길이를 확인해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지구 자오선 둘레는 약 4만 ㎞인데 이 시대의 기록은 당연히 오차가 심했다.
“표준 황종척(黃鍾尺) 기준으로 1억 1,924만 자라. 애초에 이 시대 황종척 길이를 내가 알 리가 없지. 세종대왕 시절에 정립되어 현대까지 내려오지도 않은 길이잖아. 이걸로 계산했다가는 오차가 곱해져서 더욱 심해지겠는걸.”
나는 황종척의 길이를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저 내 감 하나에 의지하여 34㎝보다 조금 크고 35㎝보다 조금 작은 길이라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이 수치를 내가 기억하는 지구 둘레 4만 ㎞와 대입한다면?
지구 둘레는 최소 1억1,422만 자에서 최대 1억1,765만 자에 달하는 오차가 생겨난다. 애초에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 지구 둘레의 측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하나만 입증한 꼴이다.
결국 다 포기하고 염두에 둔 작업을 시작하였다.
“진흥왕 순수비가 파손이 하나도 안 되어서 길이 측정이 안 된다면 조선 팔도에 널린 유물을 수집하여 박물관을 만들어 버리면 충분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복수자설 판매로 유물에 대한 관심이 제법 많아지고 있잖아.”
복수자설의 주 전개는 힘을 점차 되찾으며 영향력을 넓혀가는 성길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호걸들이 각지의 문제를 해결하며 옛 영웅들의 유물을 모아 힘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예맥대장은 본인의 힘을 기르려 백두산 천지에서 백 일 동안 혹독한 수련을 하다 아무리 보아도 김시습이 분명한 역사를 잘 아는 신선을 만나 고구려의 창시자 고주몽이 남긴 활을 물려받는 방식이다.
덕분에 저잣거리에서는 고서점이나 옛 유물을 거래하는 이들이 제법 늘어나기 시작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늘어나는 이 시점이니 주상전하에게 청해도 될 일이라 여겨 청을 올렸다.
“신 유성룡 아뢰옵나이다. 근래에 들어 복수자설이 저자에 퍼져나가며 백성들이 주인을 잃은 옛 물건을 수집하고 이를 사고파는 일이 잦아졌사옵니다.”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닌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백성들이 전조와 옛 고려를 비롯하여 수많은 나라의 역사를 스스로 깨우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오나 예전부터 내려져 오던 물건을 오로지 부호들이 수집만 하면 아니 되는 법이옵니다. 궁궐에는 고(庫: 왕실에서 수집한 물건을 두는 곳)를 마련하여 진귀한 물건을 모아두지만 그렇지 아니한 물건은 여럿이 보아도 좋을 일이옵니다.”
문화재 보수 업무를 하며 문화재청 직원들이나 보수업체 직원들과 만나 제법 지식을 쌓은 전적이 있다.
이 시대 서양에는 박물관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갤러리’라 칭하며 부자들이 자기 집에 초대한 손님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돈을 자랑하는 용도로만 쓰인다.
동양은 당연히 이런 개념이 없으며 각 왕조는 자신들이 모아둔 보물을 역대 왕들이 계속 관리만 하다 근대화가 진행되고 나서야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시대를 뛰어넘은 공공 박물관의 개념을 설파하기 위해 말하였다.
“서적이나 회화는 본을 떠서 판매하는 방식을 택하면 될 것이오며 아국에 넘쳐나는 석조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으면 금석학(金石學: 고고학)을 깨우친 이들과 역사에 관심이 있는 백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눈이 즐거워질 것이옵니다.”
“옛 물건을 백성들이 볼 수 있다면 역사를 더욱 깨우치기 쉬워지는 법이다. 다만 미신이 횡행하여 아직도 수많은 백성들이 불상을 갈아서 약재로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더구나. 약으로 사용하다 죽는 이가 발생하여도 계속 행동을 반복하더구나.”
현대에도 문화재 파괴 원인 중 하나인 미신은 이 시대에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길거리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은 약으로 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부스러기가 되어버린다.
나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으니 오히려 설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왕실에서 불상을 모아둘 수는 없지만, 석탑 정도는 허용범위 이내이니 당당하게 말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도록 조처를 취할 것이옵니다. 불씨(불교)의 흔적이 깃든 석불은 도성에 세워진 사찰에 모아둘 것이오며 손상되기 어려운 석물들을 모아두는 박물관(博物館)이라는 관청을 설립할 것이옵니다.”
“그 박물관을 설립한다면 오로지 백성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용도는 아닐 것 같구나. 옛적 도원군은 비석을 보고 옛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신도 그러한 마음을 품었사옵니다. 몸이 불편하여 퇴직을 청하는 관리들을 박물관의 관장(官匠)으로 두시어 금석문을 연구하고 백성들이 온전히 박물관을 관리할 수 있게 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 박물관이 차츰차츰 쌓이면 더욱 큰 결과가 나올 것이옵니다.”
본래 박물관은 사람들이 유물을 보라는 목적도 있지만 유물을 보존, 관리하며 원본 유물을 최대한 분석하고 연구하여 연구 자료를 뽑아내는 목적도 있다.
퇴직을 앞둔 고위 관료들이면 각종 비석을 연구하고 석탑의 양식을 분석하여 연구 서적을 써낼 수 있으며 이들이 감시하는 데 문화재를 훼손할 간 큰 사람들은 없으리라.
주상전하께서는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박물관의 관장은 정1품 관원을 두어야 마땅하겠구나. 유성룡 자네가 몸이 불편하여 퇴직을 청하더라도 박물관 관장으로 충분히 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청이 있사오니 신을 십 년 넘게 박물관에 두지 마시옵소서. 박물관에서 명을 달리하면 혹여나 애급(이집트)에서 간혹 출토되는 목내이(木乃伊: 미라)가 되어 박물관의 유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영상은 농담 한번 잘하는군. 자네가 목내이가 되더라도 서책을 들고 꼿꼿하게 앉은 목내이가 될 것이니 후세에 길이길이 모범이 될지도 모를 일이네. 일단 박물관의 건립을 허할 것이니 세부 사항은 알아서 정하도록 하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서니 목내이라니! 영상이 목내이가 될 사람이던가? 라는 주상전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내 은퇴 장소를 스스로 치워 버린 시점이라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렇다 하여도 뭘 어떻게 하겠는가.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문화재를 하나하나 찾을 준비를 하였다.
영의정이 진행하는 사업이니 제법 많은 이들이 의정부로 와서 나와 업무를 도왔다.
“자네들은 내가 목록에 적은 유물들의 소재와 주인을 파악하도록 하게. 여기에 적힌 서른 건은 내가 도성에 두어 눈을 즐겁게 하면 좋을 거라 미리 점찍어둔 유물이라네.”
본래 역사에서 내가 설계에 개입하거나 도면을 참조한 적이 있는 유물이지만 이 시대 기준으로는 마음대로 찍어 고른 수준이리라.
그러나 내가 내놓은 목록을 확인한 하급 관료들과 조언을 위해 방문한 승려들을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법천사에 있는 현묘탑은 엄연히 법천사의 소유입니다. 조정에서 내놓으라 하시면 내놓을 수는 있지만 불자들이 많이 곤란해할 것입니다.”
“허어, 한명회가 남긴 저서에는 탑이 너무나 아름다워 하루를 지켜보았다 하였는데?”
“그야 유생들이 보고 눈을 즐기고자 하면 하루 정도는 지켜볼 수 있는 법이지요.”
가장 큰 문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아 대다수의 사찰이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보존을 도운 석조 문화재는 주인이 없이 방치되어 파손이 심각한 석탑이 대다수였다.
더군다나 조선 말기나 근대시절 발굴조사를 통해 찾아낸 유물들은 지금은 발굴조사가 필요한 물건들이다.
그렇다고 이 시대의 사람들로 대충 발굴조사를 하면 문화재 파괴와 같으니 이를 악물고 결단을 내렸다.
“아국이 세워진 이후 억불(億佛)을 실시하여 폐사가 된 봉업사(奉業寺)라는 사찰이 있다네. 주인을 잃은 유물들을 도성에 모아둠이 마땅하니 이 폐사지에 직접 나아가 발굴을 실시하겠네.”
참 미친 짓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현대식 발굴조사를 배운 사람은 나 이외엔 없었다. 그나마 금석학의 대가라는 도원군도 땅을 파서 찾는 수준이다.
내가 아는 것도 전공은 아니고 전공자와 협업하며 배운 수준이라 젊은 시절 산성을 발굴하던 때의 기억까지 되살리며 의정부 관원들과 함께 봉업사의 발굴을 시작하였다.
현대의 정비된 폐사지가 아니고 흉물스럽게 버려진 거대한 사찰 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다 쓰러져 가는 석물들이 즐비하였다.
다른 관원들은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였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명령을 내렸다.
“이 땅의 기준점을 잡아야 한다네. 명주실을 길게 늘어트려 본(本)을 세우고 사방에 규준틀을 세워 높낮이를 분별할 수 있도록 만들게!”
“이런 일을 왜 하는지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유물을 발굴할 것이면 그저 삽을 놀리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산사태가 일어난 땅이라면 모를까 폐사지가 되었다면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며 땅의 기반은 평평하게 만들어두지 않았겠는가. 시일이 많이 흐르지 않아 기단(基壇)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신속히 움직이게!”
봉업사는 도성 인근에 세워진 사찰이기도 하지만 현대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시작한 사찰 가운데 가장 유물이 많이 튀어나온 사찰이다.
사람들을 많이 가르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최고난이도 발굴을 바로 시작한 격이다.
현대에서 십오 년 넘게 일하며 같이 참관한 발굴조사만 여섯 건에 달하고 직접 확인한 보고서만 서른 권이 넘는다.
내가 명령한 대로 규준틀이 세워지고 시굴조사를 하여 깊이를 산정한 이후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기준 높이에서 한 자 아래부터 옛 땅이 나오고 두 자 아래로 들어가면 전조(고려시대) 이전의 신라시대의 땅이 나온다네. 한 자 아래부터는 유물이 나오니 조심스럽게 발굴하게.”
일을 시켰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역시나 발굴조사라는 개념이 없다.
유물이 중요한 줄 모르니 삽으로 땅을 콱콱 찍어서 파헤쳤고 화들짝 놀라 인부의 삽을 빼앗아 숟가락을 들려주며 말하였다.
“지금 규준틀에서 한 자 깊이로 파고들었는데 여기는 옛 유물이 묻힌 땅이라 하지 않았는가! 숟가락으로 땅을 조심스럽게 파내고 뭔가 단단한 물건이 닿으면 황동으로 만든 붓으로 쓸어내라 내 그렇게 말했다네!”
“옛 유물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여기 보게! 아무리 보아도 자네가 깨트린 물건은 청자 같은데 이 청자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다면 얼마나 보기가 좋았겠는가! 이제는 아교로 붙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네!”
인부에게 타박을 했지만 형태를 보아하니 예전에 깨어진 것이 분명한 청자 파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높이 들어 올리니 인부들은 물론이요, 관원들도 움찔거리며 삽 대신 숟가락과 황동 솔을 들고 두더지처럼 땅을 헤집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아마 봉업사가 폐사지가 되고 500년이 넘게 지난 현대와 150년이 지난 지금은 유물의 손상 정도에서 차이가 생긴 것 같았다.
현대에는 다 소실된 철기와 목탑의 파편,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분명한 청자파편, 그리고 온전한 고려청자까지 발굴되어 수레 네 대를 가득 메울 정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다들 어마어마하게 쌓인 유물을 보며 감동에 젖어 울먹거리며 말하였다.
“저희가 보름이 넘게 고생하였는데 옛 물건을 이토록 많이 찾아낼 줄 몰랐습니다. 예전 기록을 보니 한량들이 할 일이 없으면 옛 폐사지에 나아가 삽으로 아무 장소나 들쑤셔 진귀한 보물을 캐냈다 하였는데 그들은 대체 뭔 일을 한 겁니까.”
“그러한 자들은 도자기를 삽날로 깨트리고 사금파리라 여겨 침을 뱉었을 것이네. 아국은 역사를 존중하며 옛사람들의 행적을 길이길이 남기도록 노력하니 앞으로 이를 본으로 삼도록 하게나.”
혹시나 후대에 다시 조사할지도 모르니 이 발굴지의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였다. 현대라면 유물 발굴지를 표시하고 위를 합성섬유로 덮어 보존하지만 여기는 그럴 기술이 없으니 조금 원시적으로 보존하였다.
“하얀 조약돌을 모아두어 유물이 발굴된 장소 주변에 박아두고 위를 고운 모래로 덮도록 하게. 또한 번호를 새긴 돌을 넣어두어 어디서 유물이 출토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하니 이는 모두 후대를 위한 것일세.”
후대를 위한다는 말에 관원들은 손수 조약돌을 깔고 지층이 흐트러지지 않게 고운 모래를 채우고 가볍게 다져 마무리하였다.
이제 가르칠 만큼 가르쳤으니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할 차례이다.
관원을 한 명씩 지목하여 명령을 내렸다.
“자네는 충주의 미륵대원지에 나아가 발굴조사를 시작하게. 분명 인근에 석탑이 있을 것이며 절 안에는 옛적부터 내려져 오던 오층석탑이 있었다 하였네. 사소한 유물도 놓치지 말고 꼭 가져오게나.”
“오층석탑이라 하시면 돌 무게만 따져도 십여 돈(톤)에 달하지 않습니까? 이를 도성까지 옮겨오려면 입신체비사 스무 명은 필요할 것이 아닙니까? 이들이 응하긴 하겠습니까?”
“삿된 불씨의 행적을 지방에서 지워버리고 도성에 옮겨 가둬둘 것이라 하면 응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네는 경주의 용강동이라는 옛 호수 터에 나아가 석탑을 찾아오게.”
일단 내 기억에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 기록이 남아 있는 폐사지에 사람들을 하나씩 보냈다. 내 아래에서 현대적 발굴조사의 기본은 배운 사람들이니 지층을 흐트러트리거나 문화재를 멋대로 파손시키지는 않으리라.
마지막으로 봉업사에 있는 오층석탑을 분해해 옮겨와 도성으로 가져왔다.
이 석탑의 치수는 알고 있지만 아직 풍화가 덜 된 물건이니 본으로 삼을 물건은 아니다.
흙투성이가 되어 도성으로 돌아오니 다들 경악하며 나를 맞이하였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
“자네들은 무얼 하는가. 유물을 보존하고 석탑에 피어난 이끼를 걷어낼 것이니 어서 사람들을 소집하게. 손재주가 빼어나고 석물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네.”
목적은 새로운 치수를 정리할 수 있도록 내가 치수를 기억하는 석탑을 수집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문화재를 수집해 박물관을 만드는 일이다.
도성에서 소집된 도공(陶工)들은 온전한 고려청자를 깔끔하게 닦아내고, 각 도자기의 파편을 맞추어 아교로 붙이는 작업을 하였으며, 석공들은 수집한 석물들의 표면을 물로 세척하고 솔로 닦아 온전한 형태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봉업사에서 발굴한 유물이 다 정리될 무렵 새로운 유물들이 도성으로 들어왔고 거의 일 년 가까이 작업이 계속 진행되었다.
이 동안 나는 복수자설의 외전격인 예맥대장전 전편 후편과 마우이전 세 편을 비롯하여 스무 편의 소설의 줄거리를 쓰며 복원 작업을 지휘하였다.
마침내 내가 치수를 알고 있는 석탑 중 일곱 개가 도성으로 도착하였고, 나는 기억하고 있는 치수를 최대한 대입하여 석탑의 길이를 산정하고 역산하며 가까스로 1미터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1미터는 온전한 1미터가 아니리라.
“센티미터 단위까지는 맞는다고 자부하는데 밀리미터 단위부터는 오차가 날 거야. 이건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중에 조선이 더욱 발전하면 제대로 된 미터를 창안하겠지.”
새로운 척은 지구의 둘레를 기준으로 하여 1억2천만분의 1을 기준으로 삼은 녀석이었다.
확신은 못 하겠지만 대략 33.34㎝ 정도의 길이라 자부할 수 있기는 한데 이 이상의 정확도를 달성할 방법도 없다.
마침내 1602년 정월 대보름이 다 되어 기나긴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주상전하에게 보고를 올렸다.
일단 새로운 주척과 이를 계산한 방식을 말씀드리기에 이르렀다.
“신이 업무에 종사하며 사력을 다하여 계산한 결과 세상의 둘레는 황종척으로 일억일천오백만 자에 달하는 것을 확인하였사옵니다. 그러하니 새로운 주척은 이를 일억 이천만으로 나누어 자의 길이를 다소 줄이게 되었사옵니다.”
“크나큰 차이는 아니지만 이 세상을 기준으로 삼아 새로운 척(尺)을 도입하였으니 내 마음에 놓이는구나. 본디 척이라 하면 곡식을 수백 개로 모아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니 기후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법이나 이제는 아닐 것이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척을 매만진 주상전하께서는 이를 다른 척과 대조해 보고 흡족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이 척을 지구(地球)척이라 칭하여 반포할 것이니 호조에서는 어서 지구척을 양산하여 널리 퍼트리도록 하여라. 참으로 기분이 좋으니 궐을 나서 박물관을 한번 둘러보러 가야겠구나.”
“신을 이토록 믿어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개장을 앞둔 박물관에는 서른 점에 달하는 온전한 옛 시절의 도자기, 이백여 점에 달하는 파손된 부위를 복원한 각종 자기들. 열다섯 개에 달하는 석탑과 백여 개에 달하는 석조 유물이 전시되었다.
거의 1년 6개월을 고생하여 이뤄낸 위업에 의정부 관원은 물론이요, 한낱 인부들조차도 주상전하가 방문하시니 깊게 절을 올렸고 주상전하께서는 전시된 고려청자를 확인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당장 이 청자를 들어서 확인하고 싶으나 내가 손을 대었다 하면 온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손을 대어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유물에 허가를 받지 않고 손을 대는 이는 종친이라 하여도 엄히 꾸짖을 권한을 내릴 것이다.”
현대의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각 유물을 나무로 만든 단상 위에 정리해놓고 앞에는 명판(名板)을 달아 유물의 명칭과 발굴 위치를 적어두었다.
주상전하께서는 모든 유물을 살펴보시더니 은퇴를 앞둔 하성군을 보며 명을 내렸다.
“자고로 국본(國本)인 입신체비가 없는 박물관이니 마음이 안타깝다. 하성군은 수양대군이 남긴 유품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을 다른 별관(別館)을 두어 정리하도록 하여라.”
“하해와 같은 은덕을 내리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박물관은 결국 내가 발굴한 유물과 대응되도록 수양대군 이후로 정리된 입신체비의 유물들이 대칭을 이루었다. 백성들은 이를 석물관(石物館)과 철물관이라 대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척 하나를 새로 만들려고 온갖 고생을 하였는데 생각 외로 새로운 척은 빠르게 도성에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거의 2년 가까이 고생을 한 보람이 있어서 조금 휴가를 내어 쉴까 했는데 다른 보고가 들어왔다.
“영의정 대감께 청을 하는 이들이 즐비합니다. 듣자 하니 옛 고려(고구려)의 유물들이 북방에 즐비하고 요동에 넘쳐나는데 어찌하여 팔도의 불자들만 배려하시냐는 북인들의 청입니다.”
아무래도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죽도록 굴러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또 요동을 가고! 또 발해의 유물을 발굴하라고!
#작가의 말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현대 기준으로 아마추어가 어설프게 따라 한 고고학 발굴 기법은 혁명 수준입니다.
당장 고고학이 성립된 시기가 19세기 말이며 이 시기 트로이 발굴만 해도 성룡이가 세운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