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47화 (547/573)

근육조선 547화

2부 30장 9화 하나 끝나고 열

다시 이철의 이름을 빌려 복수자설 삼천 질의 인쇄를 주문하였는데 내 예상대로 꼬리가 달라붙었다.

유허 이철이라는 유생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고자 하는 이가 도성에 넘쳐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고용한 사람 뒤에서 멀찍이 따라가니 도성에 있는 사설 출판사에는 힘 좀 쓰는 사람 여럿이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고, 이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즉시 출판사로 들어가 소란을 일으켰다.

“당신이 유허라 하는 유생이 맞소? 우리 어르신께서 꼭 찾아뵙고자 하니 어서 따라오시오.”

“저는 유허라는 분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외모가 출중한 나리께서 자신이 필히 부탁을 받았다 하여 이를 대행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손 어서 놓으시지요!”

“당장 그만두게나. 내가 부탁을 받아 사람을 보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네.”

내가 심부름을 시킨 사람을 덩치가 큰 왈패들이 아예 납치하다시피 잡아가려 하여 앞을 막았다. 아무리 보아도 유허 이철이 쓴 책을 독점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왈패들은 웬 덩치도 작은 유생이 끼어들었다 생각해 무시하려 하였는데 도성 천지에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겠는가.

상황을 수습하려 뛰쳐나온 출판사 직원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하였다.

“여…… 영의정 대감님을 뵙습니다! 이런 곳에 어떠한 일로 오셨는지요!”

“내가 부탁을 받은 사소한 일이라 조용히 처리하려 하였는데 자네 덕분에 일이 틀어졌네. 사소한 문제는 뒤로하고 당장 그 험한 손을 놓지 못하겠는가!”

내가 누군지 알아챈 왈패들이 납죽 엎드려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였다.

이미 주변 사람들은 영의정이 왔다는 말을 하며 수군거렸고 나는 아예 문제를 크게 키울 작정으로 말하였다.

“몇 달 전에 의정부에 은자와 함께 서적이 왔다네. 처음에는 뇌물을 주어 관직을 얻으려는 한량이 보낸 줄 알아 내치려 하였건만 참으로 괘씸하게 생각하여 의금부에 보낼 생각으로 이를 확인해 보았지.”

본래 조선을 비롯한 이 시대에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있었지만 역사는 영직이 덕분에 변했다.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이 청렴결백을 표방하며 오로지 성의(誠意)를 담은 값싼 선물, 예를 들면 각 지역의 토산품을 약간 보내는 수준이 전부가 되었다.

관직이 없는 이들은 아직도 뇌물을 보낸다지만 그건 뇌물이 아니고 수수(授受)에 해당되는 것이니 넘어가야지.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고 말이 전해지도록 조용해질 때까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어갔다.

“안에는 책을 출판하는 데 필요한 은자와 책의 원본이 담겨 있으며 나에게 전하는 서신도 있었네. 자신은 한낱 유생일 뿐이며 자신은 물론이요, 벗들이 여러 세상을 돌아보고 본 것을 글로 정리하였는데 재주가 부족하여 이런 불순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였지.”

“하오면 영의정 대감께서 이를 먼저 읽어본 것입니까?”

“처음에는 삿된 글이라 생각하였지만 백성이 읽기 쉽도록 정음과 한문을 혼용하였고 주석까지 첨부한 책이라 이 부탁을 받아들였다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이들은 한문을 배울 수 있다 생각하여 나쁘지 않다 여겼다네. 그런데 이럴 줄은 몰랐군.”

나지막하게 말하며 왈패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들은 내 눈치를 보고 있다가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머리를 쾅쾅 박기 시작하였다.

이들이야 적당히 형무소를 들어갔다 나오면 되니 그들을 일으켜 주며 말하였다.

“당장 의금부로 나아가 죄를 고변하도록 하게. 심문이 벌어지기 전에 자네들을 보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상회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말하도록 하게나. 그러면 벌이 감해지지 않겠나.”

“영의정 대감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희가 스스로 죄를 청할 것입니다.”

이들이 의금부로 나아가 증언하면 어떤 상인이나 부호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꼬리를 자르며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 하겠지만 의금부는 아예 상회를 철거해 버리게 압박을 넣어버리리라.

상황을 정리하니 주변 백성들은 복수자설의 저자가 영의정 유성룡이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집필자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미리 세 사람과 합의한 대로 백성들이 들을 수 있게 말하였다.

“유허 이철이라는 유생은 제대로 된 글이 아닌 한낱 소설을 쓴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하고 있다네. 나 또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어서 돌아가게.”

이제 주상전하께서 나서실 차례이다. 조정에서는 변방인 미주와 호주를 개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기념이자 새로 지어진 근정전을 자랑하려고 백성 가운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거나 적극 협조한 이들을 궐로 불러들여 상을 내리기로 하였다.

상을 내리기로 한 사람 가운데는 아파치 대전사인 운성산, 옛 이름은 구름 낀 산이 있었다.

그는 어느덧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빈공과(賓貢科) 준비를 한창 진행하고 있어서 대표로 나오게 되었다.

그는 나를 마주하더니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영의정 대감님을 뵙습니다. 아니면 옛 대전사님이라 해야 합니까?”

“마음대로 불러주게나. 자네를 처음 만났을 적에는 어떻게 설득하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이제 어엿한 유생이 되었군. 자네는 요즘 사는 것이 어떠한가?”

“조선에 복속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자 저희 부족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동방의 여행자들이 퍼트리는 병 가운데 상당수를 막아낼 수 있게 되었지요.”

“당연한 일이고말고. 혹여나 불편한 점은 있는가? 듣자 하니 미주에서도 정음을 익힌 이들이 늘어나서 자네들도 서신을 주고받는다 하였는데?”

운성산은 잠시 고민하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미주에서 전해온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는 나에게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 조금 고민하다 말하였다.

“듣자 하니 주상전하께서는 미주의 대추장을 겸하시며 대전사를 임명할 권한이 있지 않습니까. 조선에서 임명한 대전사가 대결 끝에 패하여 조선과 연관이 없는 미주인이 대전사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지내는 고란이라는 친구가 대전사로 임명되었는데 그 친구가 패하였다고?”

“대전사에게 미주인 전사 한 명이 도전하였고 둘이 머나먼 황야로 나아가 이틀 내내 격전을 벌였는데, 결국 미주인이 승리하여 대전사가 되었다더군요. 이름도 참 특이하게 코만도라 합니다. 어느 부족 출신인지 저도 궁금하군요.”

내가 고란에게 부탁한 것이며 주상전하께서도 허락한 사항이 있으니 미주인을 노예로 삼으려는 서양 탐험대를 원주민이 피신하기 전까지 기습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고란은 자율성을 추구하고 싶었는지 자신의 호를 사용해 코만도라는 대전사를 만들어 버렸다.

조정에서도 알고 있는 사항이니 고란이 부상으로 인해 칩거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을 것이며, 그는 얼굴에 분칠을 하여 위장한 뒤 대전사 행세를 하며 마음대로 날뛰고 있으리라.

내가 눈치를 주자 운성산은 서신의 내용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이미 수백여 명에 달하는 동방의 여행자를 기습하고 도륙하며 삽시간에 스무 부족을 통솔하게 되었다 합니다. 심지어 아국 최전방 요새의 화약고를 기습했다 하더군요.”

“뭐? 아국의 화약고를 기습하였다고? 참으로 오만한 이로군!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오천 근이나 되는 화약이 도난당했는데 이 사용법도 숙지했다 합니다. 듣자 하니 숲속에서 작렬신기전이라는 무기 네 개를 엮은 흉물을 한 번에 쏘아 수십 명을 분쇄하여 대열을 흐트러트리고 도끼로 머리를 모조리 박살 낸다 하더군요.”

이건 주상전하께서 지시하신 사항이 분명했다.

고란이 아닌 대전사 코만도 휘하의 부족은 조선에서 제공한 물자를 받고 제대로 된 장수이자 기습과 백병전의 달인 고란의 지시에 따라 유럽 탐험대를 각개격파하며 날뛰고 있으리라.

유럽에서도 결국 대규모 원정대를 보내겠지만 그럼 조선 영토로 돌아오면 끝이다. 이후 고란이 자신들의 영토로 도망친 코만도를 죽였다며 범죄를 일으켜 처형당한 미주인의 목을 몇 개 보내면 끝이겠지.

내가 깊이 생각에 잠기자 운성산은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행사가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감께서는 어서 자리로 나가시지요.”

“자네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벌써 때가 되었군. 자네가 가장 먼저 상을 받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논공행상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조선으로 건너와 가르침을 받은 미주인들이 도포자락을 흩날리며 상을 받고 절을 올렸으며 그 뒤에는 미주인과 호주의 소규모 부족들이 상을 받았다.

그다음에는 각지에서 올라온 이들이 상을 받기 시작하였다.

“창원에 거주하는 노비 양선은 베틀을 개량하여 사람이 손을 놀려 씨실을 보낼 필요가 없이 줄을 잡아당기면 씨실이 가로지를 수 있게 고안하였다. 삼베를 짜는 속도가 두 배로 늘어나게 하였으니 이런 고안을 한 연유가 궁금하구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모친께서 노비로 일하시며 관절이 상하시어 양팔을 놀리기 힘들 지경임에도 삼베를 계속 짜내어 불효자의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사옵니다. 부족하지만 모친을 편하게 하려는 마음 하나로 주인에게 청하여 이런 고안을 하여 보았사옵니다.”

“참으로 마음에 닿으니 양선과 그의 가족을 면천할 것이며 양선에게는 정9품 종사랑(從事郎)의 봉작과 은 이백 냥을 하사한다. 성씨로 양(楊)씨를, 명으로 우현을 내릴 것이고 새로운 베틀을 우현틀이라 명할 것이니 공조판서는 어서 베틀을 가져가도록 하여라.”

양우현을 포함해 조선 전역과 외방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이들이 주상전하께 절을 올리고 각자 포상을 받아 갔다. 그리고 나와 인연이 있는 젊은이가 나서서 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올라오자 주상전하께서는 푸근히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옛적에 역적 윤가놈이 미주에 두창과 홍역을 퍼트려 수많은 사람을 고난에 처하게 만들었다. 윤가놈은 처형당하였고 그 가솔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개중에 파평 윤씨에 속하는 양자 한 명이 누명을 덮어쓰게 되었구나.”

족보를 확인해 보니 윤광영의 아버지와 윤원형의 친척 관계는 9촌이라 이 시대에도 같은 성씨라 인사만 나누는 수준이다.

그저 돈을 많이 벌어 고아를 거둬들인 윤원형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주상전하는 이를 확인하듯 거듭 말하였다.

“시일이 지나도 이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적의 후손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은 사람이 미주에 거대한 성당을 짓는 일을 솔선수범하니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신(臣)은 그저 조상이 쌓은 악명을 덜어내고자 하는 일념으로 한사코 업무에 매진하고 있사오니 기특한 일이 아니옵나이다.”

“이는 어명이니 새겨듣도록 하여라. 윤광영은 역적의 자손이 아니며 이를 탓하는 이는 국법으로 엄히 벌을 내릴 것이다. 또한 명문가에 속한 이이니 당분간 아국을 주유(周遊)하고 학문을 익혀 명문가 사람으로서의 자질을 채우도록 하여라.”

이미 공무원 생활을 하고 오 년이 넘게 지난 윤광영이니 관직이나 봉작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예조 휘하 관리들의 도움을 얻으라는 언질을 하고 포상이 끝나는 것 같았다.

주상전하께서는 나와야 할 사람이 있다는 듯이 관리들에게 엄중히 말하였다.

“이 자리에서 포상을 내려야 할 사람 중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 애초에 나오지 않기를 바랐으며 나올 필요도 없구나. 혹여나 이 자리에 있다 하여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말을 듣기만 하여라.”

주상전하께서는 비밀리에 진행되는 국책사업이 마음에 드셨는지 복수자설 한 권을 들어 대소신료들 앞에 보여주시며 말하였다.

“영의정 유성룡이 말하기를 기인(奇人)이 의정부에 은자와 책을 보내 자신의 소설을 세상에 퍼트려 달라 청하였다. 소문이 파다한 복수자설이라는 소설이었으며 나 또한 이 소설을 읽어보았지만 마음에 들어 이를 허가하였다. 유성룡은 앞으로 나와 이 소설에 대해 논하여라.”

조정 관리 중에 내가 소설을 집필했으리라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지 주상전하의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건 국책사업이라 들킬 여지가 없다.

주상전하의 생활을 모조리 파악하는 사관들의 눈도 속였는데 의심만 할 수 있지 증거를 잡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앞으로 나아가 복수자설의 장점에 대해 논하였다.

“신이 영의정 자리에 올랐음에도 부족한 재주로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이 소설이 퍼지고 나서 정음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나 춘추관에서 인쇄하는 각종 서적이 동이 날 지경이 되었사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기에 동이 났다 하였는가.”

“오천 부에 달하는 훈민정음 언해가 팔려 나갔으며, 세종대왕께서 집필하신 수기붕우서와 동몽선습을 비롯한 서적도 같은 양으로 팔려 나갔사옵니다. 여기에 야학(夜學)이 성행하고 백성들끼리 정음을 배우려 서로 지혜를 논하는 일이 벌어졌사옵니다.”

실록을 작성하는 기관인 예조 휘하의 춘추관은 실록을 작성하지 않는 평상시에는 이런 교육용 서적의 배포와 교육에 힘쓴다. 그런데 최소한 십 년 동안의 배포한 서적보다 복수자설 발매 이후 배포된 서적이 더 많다.

이를 알고 계신 주상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내가 원한다면 사람을 보내 유허 이철을 찾아내 당장 관직에 올리고 상을 내리고 싶지만 제대로 된 글이 아닌 신소설(新小說)을 쓴 사람이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고 있겠으니 찾지 않겠다. 그저 원하는 대로 신소설을 의정부로 보내 인쇄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주상전하가 유허 이철이라는 선비를 찾을 필요도 없고 찾지도 말라는 말을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설을 독점하기 위해 수를 쓰면 엄벌을 내릴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니 신분의 비밀을 보장받은 상황과 같다.

신료들은 누가 유허 이철인지에 대해 수군거리며 자신이 염두에 두는 사람을 지목하려 하였지만 네 명이 동시에 집필했다는 답은 내놓을 수 없으리라.

주상전하께서는 나에게 복수자설을 건네주며 말하였다.

“혹여나 신분의 비밀을 보장받았다며 삿된 이들이 유허 이철을 사칭하여 의정부에 가짜 신소설을 보낼지도 모른다. 세상 누구를 속여도 유성룡은 속일 수 없으니 영의정은 소설의 진위를 판별하여 가짜 원고를 보낸 이를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여라.”

“주상전하께서 명하시니 필히 따를 것이옵니다. 신 또한 유허 이철의 글재주를 익히 알고 있사오며 재주가 있는 사람을 선별하여 글을 판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겠사옵니다.”

애초에 소설 자체가 의정부에서 완성되니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겠지만, 내가 영의정에서 물러나면 집필진 가운데 한 명이 판별 역할로 의정부에서 근무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내려보내고 아쉬운 듯이 말하였다.

“다만 이 신소설의 가격이 문제로구나. 내가 알기로는 춘추관에서는 수기봉우서를 비롯한 서적을 스무 권에 은자 한 냥으로 판매하건만 복수자설의 가격은 두 배에 달하는구나.”

조선에서 가장 싼 서적을 꼽으라 하면 교육용 서적이다. 춘추관은 국가 기관이니 최신식 인쇄기, 예전의 구단배 인쇄기를 여러 번 개량한 인쇄기를 사용한다.

지금 유럽에서 사용되는 인쇄기나 현대의 출판 방식대로 전지 크기의 판에 16쪽을 단번에 인쇄해 내서 대량 인쇄에 최적화된 인쇄기이다.

속도는 물론이고 종이를 미리 자를 필요도 없이 인건비도 단축되는 셈이다.

일반 출판사는 구형 인쇄기를 사용하는데 이마저도 출판하는 양이 많지 않아 불량률이 꽤 높고 단가도 올라간다.

주상전하께서는 이를 감안하셨는지 춘추관 관리들을 보며 말하였다.

“단가를 내리려면 춘추관과 같은 방식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얼마 전에 인쇄된 복수자설 삼천 질이 닷새 만에 팔려 나갔다 하였으니 춘추관에서 사용하는 인쇄기를 민간에 퍼트리도록 하여라. 예산을 배정할 것이니 낡은 물건부터 교체하면 될 것이다.”

예상한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어서 마음이 놓였다.

조선은 아직 출판 기술의 발달에 비해 서적을 구매할 욕구가 부족해서 민간 계층까지 책이 많이 퍼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소설이 불을 붙였다.

유허 이철의 성공 사례를 따라 하려고 다른 유생들도 필명을 앞세워 신소설을 만들어내려 하리라.

출판사에서는 신소설을 대량으로 인쇄하며 규모를 확충하고 단가를 낮추려 노력할 것이며 서로 경쟁이 붙으면 단가는 더욱 내려갈 것이다.

국가 예산을 어마어마하게 투입하여 훈민정음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백성들이 스스로 깨우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좋으리라.

주상전하께서는 나와 정철, 이항복 그리고 허균을 돌아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신소설을 계속 찍어내라는 말이겠지.

정말 평안하고 행복한 나날이 시작될 것 같았다.

다음 소설은 복수자설에서 집결한 각 호걸들의 이야기를 담은 외전(外傳)인데 사실상 이게 본편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조회(朝會)를 올리며 내용을 생각하고 있자니 주상전하께서 나에게 명을 내리셨다.

“생각하여 보니 영의정은 당분간 업무가 줄어들지 않았는가. 백성들을 가르치는 교육에 있어서 복수자설이 큰 기여를 하였으니 다른 업무에 종사함은 어떠한가?”

“다른 업무라 하심은 혹여나 미주에서 측량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 척(尺: 자)을 만들라는 명이 아니옵니까?”

“이미 알고 있으니 더욱 마음이 놓이는구나. 비록 단숨에 해결할 일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진행해야 하는 업무가 아닌가. 얼마 전에 이현전 관원들이 계산을 마쳤으니 이를 확인하도록.”

“명을 받들어 이 세상의 둘레를 기준으로 삼은 척을 새로 정하겠사옵니다.”

이미 답이 정해진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이현전에서 계산을 마친 척 여러 개를 가져왔고 이를 경복궁 구석의 비각(碑閣)에 모셔둔 북한산 순수비에 대조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오차가 심하겠지. 조선이 아무리 수학이 발달하였다지만 프랑스 혁명기의 유럽보다 수학이 발달해 있겠어? 그럼 어디 한번 대볼…….”

북한산 순수비를 매만진 순간 소름이 돋아 올랐다.

가져올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북한산 순수비의 치수는 현대에 보존처리를 거치며 작성된 기록이다.

북한산 순수비는 세월을 거쳐 비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도 깎여 나갔으며 6.25 전쟁에서 총알을 맞아 옆구리가 파괴된 상태였다. 당연히 크기가 작아졌겠지.

반면 지금의 순수비는 글귀가 조금 닳아있는 수준이었다.

1,500년이나 지난 신라 시대의 석물은 손톱으로 긁어도 풍화된 표면이 갈려 나가는데, 이 녀석은 건립되고 1,000년밖에 지나지 않아 손톱으로 긁어도 흠집이 나지 않았다.

“이런 망할! 이걸로 기준을 세웠다가는 얼마나 오차가 심해질지 짐작도 안 되잖아!”

기준이 엉망이 된 순간부터 내가 설정할 척관법도 엉망이 되어버린다. 기존에 사용하던 자로 재보았는데 너비는 현대의 69㎝가 아닌 최소한 70㎝는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답은 하나다.

풍화가 없어 현대에도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석물(石物)들을 잔뜩 가져와 개중 내가 치수를 명확히 기억하는 녀석을 찾아내 대입하는 수 외에는 없다.

결국 자 하나를 만들려고 박물관을 만들게 생겼다!

#작가의 말

아무리 보아도 550화 완결은 힘들 것 같고 약간 더 진행할 것 같습니다. 대략 본편이 555화 앞뒤로 끝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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