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45화 (545/573)

근육조선 545화

2부 30장 7화 신소설

조선에 퍼트릴 신소설의 내용이야 현대에서 보아왔던 수많은 영화와 소설이 있었으니 넘쳐났지만, 맨 처음 퍼트릴 소설로 복수자설을 택한 이유는 백성들의 글공부를 위해서이다.

물론 이런 경박한 소설을 영의정이 썼다고 하면 훗날에 문제시될 가능성도 있기에 나름 비밀리에 처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철이 작업하고 있는 글을 보며 슬쩍 제안하였다.

“자네가 쓰고 있는 글은 미주로 사람들을 이주시킬 계기가 될 미주별곡이 아닌가. 이는 주상전하께서도 확인해 보겠지만 나 또한 확인해 볼 것이니 앞으로 의정부로 자주 나와 주게.”

“영상대감께서 제가 쓰신 글을 친히 검토하신다 하시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은 주상전하께 글을 올리기 전에 며칠이고 심사숙고하다 실책을 저지른 적이 있었지요.”

주상전하께서도 많이 알고 계실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백성 계몽을 위한 출판 프로젝트이며 수익을 거둘 생각조차도 없었다.

정철이 제시한 필명(筆名)으로 소설의 초판본을 쓰고 이를 인맥을 동원해 적자를 보지 않는 선에서 소설을 찍어내 뿌릴 테니까.

다음 날부터 의정부에 잠시 나온 정철은 내가 제시한 소설 줄거리를 확인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서애 자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군. 서두는 각 호걸들의 이야기를 전기(傳記)의 형식을 빌려서 쓰면 충분하네. 예전에 명국에서 불티나게 팔리던 서유기도 이런 방식을 택하였지.”

이 시대의 소설인 서유기는 나도 대충 읽어보기는 하였다. 오승은이라는 사람이 내놓은 원본은 아니고 어느 정도 검열되거나 첨삭된 판본이지만 정철의 말대로 초반부는 인물 묘사에 힘을 썼다.

반면 내가 제시한 소설은 각 히…… 아니, 호걸(豪傑)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후 바로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전개가 빠를수록 내용이 줄어들고 백성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몰입할 계기가 되리라.

이를 설명하니 정철은 한참을 고민하고 말하였다.

“생각해 보니 옳은 말이로군. 각 호걸의 이야기만 따로 떼어놓고 읽으라 하면 기상천외한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겠으나 이 신소설의 주인공은 예맥(濊貊: 부여, 동예, 고구려의 통칭) 대장이라는 장수이니 몰입하기는 쉬울 것이네.”

“나도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일세. 글로만 묘사할 수 있는 애급(이집트)의 기암괴석, 솔로몬국의 벼락이 내리는 호수 그리고 미주의 대협곡과 같은 경관은 회화로 묘사하기도 힘들 것이네. 반면 백두산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법이지.”

정철의 글재주가 부족할까 염려하였는데 문제는 그 글재주 때문에 벌어졌다.

그는 내가 딱딱하게 기본 내용만 적은 줄거리를 머릿속에서 살을 붙이고 상상해 가며 소설을 구체화하였다.

업무를 하다 짬이 나는 대로 글을 쓰라 하였는데 업무를 빠르게 마치고 의정부에 마련된 별실에서 소설을 집필하니, 이쯤 되면 주객전도가 될 지경이라 중간점검을 겸해 제지하려 하였다.

그는 아직 완성이 덜 되었다는 말투로 소설을 건네주며 말하였다.

“지금 막 호걸들이 집결하여 자신의 사연을 풀어대는 구간을 쓰고 있었다네. 아직 글이 덜 정리되었지만 어서 보게나.”

정철 특유의 만연체가 적나라하게 빛을 발하였다.

인물의 외모부터 그가 걸어오는 풍경은 물론이요, 본인은 근육이 없으면서도 크고 아름다운 대흉근부터 발목에 어렴풋이 보이는 장딴지 근육의 형태까지 묘사하였다.

거의 세 장이나 이어지는 묘사라 글을 막 배운 사람은 도저히 못 읽을 수준이라 말리려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자를 안 썼다는 건데, 국한문 혼용체를 썼다면 나도 읽기 힘들 수준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백성들이 읽을 소설인데 지나치게 힘을 쓰는군. 책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가격이 올라갈 것이니 대충 다섯 권으로 묶어서 내놓을 정도면 족하다네.”

“다섯 권이라 하였는가? 내 기준으로는 스무 권으로 엮어내도 모자랄 것이네. 당장 일곱 호걸들에 대한 묘사도 필요하며 이들의 힘을 나타내는 글귀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묘사야 좋은데 아무리 읽기 쉬운 정음(正音)이라 하여도 이쯤 되면 백성들이 질겁하여 읽으려 하지 않으리라.

그는 내 표정을 확인하더니 아쉬운 말투로 말하였다.

“하필 백성들을 위해 글을 쓰니 더욱 문제일세. 서애 자네도 알다시피 한자로 서너 자면 충분한 묘사가 정음으로 풀어 쓰면 스무 자가 넘어가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렇다 하여도 한 문장에 세 쪽을 넘게 이어가는 것은 옳지 않은데.”

“지금 집필이 완료된 미주별곡도 주상전하께서 관여하시어 묘사를 줄였지만 복수자설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호걸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싶을 뿐이네.”

순간 분통이 치밀어 올랐으나 꾹꾹 눌러 참았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이 고통스러웠던 이유가 정철의 관동별곡을 비롯한 작품 때문이다. 하나같이 문장이 길어 외우기 힘들었고, 선생님은 언제나 몽둥이찜질을 하셨지.

결국 정철의 화려한 문체를 수정할 사람이 필요한데 좋은 사람은 없을까.

정철도 자신의 문제를 알아차리고 입술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리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말하였다.

“듣자 하니 자네 장남이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재주가 탁월하다 하였네. 조만간 미주로 발령될 것인데 발령되기 전에 소설을 집필하는 데 손을 보태게 하면 어떠한가?”

“녀석은 가르치는 재주가 있는 것이지, 글재주가 있는 것은 아닐세. 그리고 여(유여)의 글재주는 아는데 자네와 같은 만연체일세. 이래서야 참 답답해서 문제인데.”

“도승지입니다. 영상대감에게 주상전하께서 내린 명을 전하려 합니다. 계시는지요?”

지금 도승지는 이항복인데 주상전하와 주거니 받거니 죽이 잘 맞는 사이라 조만간 정승 자리가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안으로 들어온 이항복은 주상전하께서 내린 글을 나에게 전하였고 나는 인사를 올리고 이를 품속에 넣었다.

이항복을 점잖게 돌려보내려 하였지만 시선이 정철이 집필 중인 글에 닿아 있었다.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이항복이 보는 내용이 보통 부끄러운 내용이 아니다.

[나 성길마왕! 여덟 부하와 함께 하늘 아래 다시 나왔으니 세상을 다시 세우리라! 내가 세상의 사분지 일 할을 정벌하고 명을 다 하였으니 이는 세상이 너무 커서 벌어진 문제이다!]

“성길마왕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까? 세상이 너무 커서 문제라니요?”

“백사(白沙: 이항복의 호) 자네는 그리 물끄러미 보지 말게나. 내가 짬이 나는 틈에 썼던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말이니 지금 보기에는 부끄러울 뿐이군.”

복수자설 첫 부의 결말은 무덤에서 일어난 성길마왕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처음에는 칭기즈 칸의 음차인 성길사한(成吉思汗)을 그대로 쓰려 하였지만, 북원에서 암살자를 보낼지도 몰라 앞의 두 자만 따서 성길(盛吉)마왕이라 조금 뒤틀었다.

만연체답게 화려한 필체로 적힌 글귀를 확인한 이항복은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손뼉을 쳤다. 이윽고 종이 한 장을 옆에서 꺼내 정철의 문장을 고쳐 쓰기 시작하였다.

묘사를 최대한 줄이고 간략하게 만드는 재주는 있어서 양이 확 줄어들었지만, 대화문은 한참을 고민하다 정철이 제시한 대화문을 그대로 써버렸다.

이항복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저도 이런 소설을 좋아하는데 서유기 이후에 이런 재치가 넘쳐나는 소설을 접해본 적이 없었지요. 세상이 너무 넓어서 문제라니, 참 멋진 인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백사 자네도 이 소설을 집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인가? 이건 내 사소한 욕심이 아닌 백성을 위하여 집필하는 소설일세.”

어차피 알게 된 상황이니 이항복에게 이리저리 설명을 하였다.

이항복은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정철이 집필하던 소설을 읽어보며 말하였다.

“저도 한 손 거들고 싶지만 대화를 제 마음대로 쓰다 보면 어느덧 사심이 들어가 농담을 주고받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부족한 대화문을 잘 쓰는 사람을 알고 있지요.”

“대화문을 잘 쓰는 사람이라? 대체 누구인가?”

“두 분께서 잘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 예빈시에서 미주의 물산을 퍼트리는 데 힘을 쓰는 교산(蛟山)이지요. 그 친구는 누이인 난설헌(蘭雪軒)의 작품의 대화를 정갈한 문체로 고쳐 쓰는 재주가 뛰어나더군요.”

“그 애송이가 간결체의 재주가 있다 하였는가? 생각해 보니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미주인들에게 잘 줄여서 전달하기는 하였는데 그런 재주를 가지고 있다니?”

내 입장에선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허균의 소설인 홍길동전은 호부호형 같은 간단한 한자 단어가 들어가서 이 시대 기준으로 간결한 편이다.

이항복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 정철을 슬쩍 바라보다 나에게 말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역어(譯語)체를 조금 풀어 쓰는 격이지요. 교산이 손을 대면 백성들이 읽기에는 조금 까다로운 단어가 들어가겠지만 주해(註解: 주석)를 달면 오히려 간단한 한문을 익힐 계기가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반박하려 하였지만 책에 주석을 달 수 있다면 오히려 좋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허균까지 불러와 집에 모여서 간단한 술자리를 열고 소설에 대하여 논하였다.

백성을 위하여 사심을 담지 않은 신소설을 집필하기에 서로 개탄 없이 의견을 내놓았다.

허균이 만들어낸 칵테일이 목을 적셨고 나는 흥이 돋아 올라 글을 보여주며 말하였다.

“허균 자네가 보기에 이 대화는 어떻게 고쳐 쓰면 좋겠나?”

“저라면 그의 등골에 솟아오른 근육은 반근착절(盤根錯節: 구부러진 나무뿌리 뭉치)이 생각난다고 할 것입니다. 근이나 절 정도야 백성들도 접하기 쉬운 한자가 아닙니까?”

“아무렴! 근육(筋肉)에 쓰이는 근은 여섯 살 아이만 되어도 쓸 줄 알아야지!”

안주는 허균이 새로 창안한 겸암식 닭갈비, 형과 내가 창안한 철판 닭갈비 대신 석쇠에 구운 닭갈비였다.

닭갈비를 한 점 뜯어 물고 글을 확인하니 셋 다 글재주는 뛰어나서 삽시간에 소설에 살을 붙여갔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 잔을 들어 올리고 말하였다.

“가장 먼저 내가 주제를 정하여 소설을 쓰면 송강 자네가 만연체로 수려하게 풀어 써주게. 이후 대화를 교산이 정돈하고 묘사를 백사가 정리해주게나. 이후 내가 다시 받아 송강과 함께 주석을 달고 최종 판본을 만들 것이네.”

“그러하면 영상대감은 물론이요, 글재주가 있기로 소문난 사람이 모두 끼어드는 격이군요!”

허균이 방정맞게 끼어들었는데 누가 몰라서 말을 안 하는 줄 아는가.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태도를 좀 고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안 고쳐져서 역시 허균다웠다.

이항복은 한숨을 깊게 쉬고 허균을 노려보더니 닭 뼈를 버려두는 사발을 가져와 술을 맘대로 부어 섞더니 이를 허균에게 건네며 말하였다.

“당연한 말을 왜 하는가? 자네의 혀가 참으로 방정맞게 돌아가니 술이나 한잔 더 받게.”

“이건 잔이 아닙니다!”

“내 기준으로는 잔일세. 내 잔을 받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으니 술병을…….”

허균은 방정맞게 행동하다 이항복이 따라준 폭탄주 한 사발을 받고 격침되어 고개를 휘청거렸다.

영의정이건 뭐건 가리지도 않지만, 도승지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는 꼴이 우습지만 저런 성격이니 잘 통제해야겠지.

나는 잔을 높이 들어 이 자리를 기념하며 말하였다.

“아국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릴 수 있으니 나 또한 천지신명께 제사는 아니더라도 건배(乾杯)를 올리겠네. 모든 백성들이 글을 깨우칠 날이 올 수 있기를 기원하겠네!”

“그러하면 피…… 필명은 어떠케 합니까? 께윽!”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허균은 자신의 이름을 넣어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옆으로 들어서 치워놓고 생각해봤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이지만 대놓고 내 이름을 쓸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도 문제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자의 필명은 서로의 성에서 음만 따내어서 지으면 어떻겠는가? 성명은 이철(李鐵)이요 자는 유허(遺墟)라 하면 가장 좋을 것 같군.”

“거 정항이라 지으면 아니 되겠나? 글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나인데.”

“젊은 사람에게 양보하면 좋을 것 같으니 자네가 조금만 양보해 주게. 나는 아예 자에 가서 달라붙었으니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지.”

이 자리에서 조선의 신소설을 처음 써내는 가상의 작가, 전주 이씨의 철이라는 사람의 필명이 완성되었다.

이후 두 달 동안 의정부에 머물며 복수자설의 초판본을 작성하였고, 마침내 1600년 3월 초. 이항복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주상전하께서는 영의정 대감께서 삿된 글을 쓰신다며 호되게 꾸짖으려 하였지만, 복수자설을 읽으신 뒤에 크게 웃으시며 이를 반드시 널리 알려지지 않게 수를 쓰라 하셨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뜻을 알아차리셨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나저나 사관들에게 들키지 않게 어찌 뜻을 전하였는지 궁금할 뿐이네.”

“처소에서 읽으시는 서적 중 몇 권에 복수자설을 끼워 넣었고 주상전하께서는 이 서적에 길(吉)이라는 글귀를 남기셨지요. 후일 저를 부르시더니 크게 웃으시며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상전하의 허가도 떨어졌으니 이제 서적을 인쇄할 차례였다.

사람을 고용해서 이철이라는 선비가 책 일천 질을 인쇄하라는 주문을 하였고 사설 출판사가 가동되는 도성에서는 이 물량을 고작 보름 만에 처리하였다.

이후 선금을 지불하여 인쇄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득은 필요 없으니 잘 판매하라는 주문을 하였고, 복수자설은 거의 원가에 가까운 가격, 신품의 기준가격인 한 질 10권에 은자 2냥의 절반인 은자 1냥에 각지의 서점으로 팔려나가기에 시작했다.

* * *

닷새 정도 지나 의정부에서 업무를 진행하다 조금 일찍 퇴근해 도성을 돌아다니니 백성들의 관심사는 복수자설에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 서로 읽었는지 소설 내용을 논하는 이들이 보였다.

“나는 나이로비 호수라는 곳에 다녀온 적이 없는데 그곳에 번개가 그리도 많이 치는가? 피뢰침을 반포하신 주상전하라면 몰라도 솔로몬국의 호걸이 번개를 다루다니 말이 안 된다네.”

“자네 몰랐는가? 얼마 전에 산본(산시양의 호) 영감께서 나이로비 호수에 다녀온 것을 보좌한 친구가 있었는데 피뢰침을 설치하기가 무섭게 벼락이 내리친다더군.”

전 세계에서 모인 호걸들의 이야기이니 전 세계의 풍경을 모두 담아두고 있었다.

심지어 변사들조차 아니고 시장에 좌판을 깔고 복수자설을 이야기하며 돈을 챙기는 이들조차 있었다.

문제는 복수자설에 담긴 주석이었다.

“이보시오, 각주구검이라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이오?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오?”

“주석에 의하면 미련하고 융통성이 없는 말이라던데 앞으로는 주석도 말하겠소.”

허균 덕분에 정음을 제대로 익혀야만 읽을 수 있는 서적이 되어버렸으니 변사가 주석을 풀어서 말하면 이어지는 설명에 지치리라.

대신 읽을 수만 있다면 무한한 상상력과 결합해 무한한 재미를 주는 소설이 되어버렸다.

개중 복수자설을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끼어들어 한 권 구입해 보니 내가 인쇄한 물량이 아니고 어설프게 목판으로 베낀 물건이었다.

“이건 목판으로 인쇄한 소설이로군. 복수자설의 원본은 납으로 만든 활자에 기름먹으로 인쇄하여 글귀가 정갈한데 목판에다 그냥 먹으로 인쇄하여 보기가 영 불편한걸.”

“그래도 이 판본이 가장 올바른 판본입니다. 다른 판본은 주석도 없고 글귀를 대충 베껴서 오자와 탈자가 넘쳐나지요. 그러니 한 질에 은자 한 냥 하고 다섯 문(0.5냥)만 주십시오.”

“내가 알기로 복수자설은 은자 한 냥에 판매되었는데 가격이 그 새에 올랐는가?”

“저도 은자 한 냥 하고 두 문에 받아온지라 이 이하로 내릴 수는 없습니다.”

상권을 풀어줬더니 이렇게 시세를 가지고 장난을 칠 줄 알았다. 사람을 동원해 압박을 가하느니 복수자설에 목말라하는 백성들을 위해 삼천 질 정도 더 찍어내라고 주문해야 하리라.

돌아오며 백성들의 씀씀이를 보았는데 금전적으로 여유가 보여서 좋았다.

은자 한 냥이면 쌀 한 섬이요, 어중간한 서민이 3개월 동안 먹고살 돈이다. 현대로 따지면 대충 300만 원 정도 하는데 이런 비싼 물건을 사들인다면 도성 백성들이 가진 여유자금은 은자 10냥 정도는 되리라.

이쯤 되면 수입산 물품을 살 수도 있을 것이며 필요한 때에는 고기를 먹거나 향신료를 즐길 수도 있으리라.

젊은 시절보다 여유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났으니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에게 여유가 있어야 나라가 발전하는 법이지. 세자 저하께서 나이가 드시고 양위를 선언할 때쯤 되면 정말 부작용 없이 증권과 선물제도를 도입할지도 모르겠는걸.”

복수자설의 판매 속도와 인기를 대조해 보면 아마 이십 년 이내에 도성 백성들의 절반이 글을 깨우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복수자설 하나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고 수많은 소설을 세상에 퍼트려야지.

내가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신소설들이 팔려 나올지는 모르지만 내가 죽어도 젊은 이항복과 허균이 남겨둔 내용에 살을 붙여 새로운 신소설을 이철의 필명으로 만들어내리라.

흡족한 마음에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복수자설을 읽고 있었다.

“낭군께서도 이 소설을 보셨습니까? 오늘 다듬이질을 하는 날인데 아침나절부터 소설을 읽으니 점심 끼니도 거르고 몰두하였습니다. 낭군께서 다녀오신 세상의 풍경이 소설 안에 잠들어 있는 것 같아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있군요.”

“이철이라는 선비가 들으면 부끄러울 것이오. 칭찬을 과하게 하지 마시구려.”

아내도 내가 소설의 집필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이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크게 말하였다.

다음 소설은 뭐로 쓰면 좋을까.

혹시나 인기가 좋다면 수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에 출근하여 평상시와 같이 신부들의 입신체비를 관리하였는데 얼마 전부터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었다.

음력 삼월이라 추운 날씨가 아닌데 다들 사지를 휘청거리고 피로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억지로 입신체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교차 때문에 감기기운이 돌아다니나 생각했는데 벌써 열흘째 이 꼴이었다.

다들 만성 피로를 달고 사는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지를 휘청거렸고 결국 사고가 벌어질까 두려워 운동을 중단시키고 엄히 꾸짖었다.

“천주교의 승려라 하면 신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안색이 파리하고 피로에 절어 있는가? 혹여나 사순절(四旬節: 부활절 이전 준비기간)이라 고기를 먹지 않아도 기본을 지켜야 한다네!”

신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는데 개중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자가 있어서 부설된 주방에 의뢰하여 커피를 잔뜩 우려내 마시게 하였다.

신부들이 정신을 차렸지만 이 피로의 원인이 뭔지가 궁금하였다.

“대체 무엇이 자네들을 이렇게 피로하게 만들었는가. 혹여나 문제가 생겼다면 개탄 없이 나에게 고변해 보게나. 대체 무슨 문제인가?”

“이 복수자설이라는 책이 문제입니다. 신자들이 미사 시간에 졸고 있어서 따로 불러내 면담하였는데 책을 주면서 참으로 기이한 책이라 밤을 새워 읽는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다들 밤을 새워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저희가 모르던 세상의 모습과 호걸들이 선보인 이적(異蹟: 기이한 행적, 다른 종교의 기적을 낮잡아 보는 말)에 빠져들었습니다.”

책을 얼마나 읽어댔는지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으니 글을 가르칠 목적으로 퍼트린 소설이 엉뚱하게도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신부들은 내 모습을 보더니 하소연을 하였다.

“소설을 거의 다 읽었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으니…….”

“무언가? 혹여나 소설을 빨리 써 달라거나 금하라 하면 아니 된다네. 나도 저자인 이철을 찾아보려 하였건만 도성에 있는 유생 가운데 하나로 알고 있을 뿐이네.”

서양인들의 마음에도 복수자설이 와닿았단 말인가.

이러다가 전 세계에 퍼진 최초의 소설이 될까 기대감이 차올랐는데 신부들의 주문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방을 붙이셔서 이철이라는 유생에게 전해주십시오. 다음이 아니더라도 훗날 주님의 영광을 담은 소설을 쓰면 저희 모두가 이를 유럽에 퍼트릴 것이니 서로가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종교 내용을 담은 고전 명작 영화들은 유럽에 퍼지면 들불처럼 번져 나갈 내용이 많지.

예를 들면 전차 경주를 하는 영웅의 이야기라든가 로마의 퇴폐를 담은 호민관의 이야기라든가.

당장은 글을 알리는 흥미로운 소설을 써야 하니 먼 미래가 되어야 쓸 수 있으리라.

눈을 초롱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신부들에게 마지못해 답하였다.

“아직은 아닐세, 설령 이철이라는 유생에게 요청을 하여도 그가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익히는 시일을 생각하여 보면 먼 훗날의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가 글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그는 반드시 천주교와 연관된 소설을 쓸 것이네.”

일단은 글을 퍼트리는 데 주목하고 훗날을 대비해 두 영화를 비롯한 종교적 영화의 내용도 간단히 정리해두기로 하였다.

이철이라는 가상의 소설가가 셰익스피어를 넘어선 문학계의 거장(巨匠)이 되지는 않을까?

#작가의 말

이 철 = 철 이 = Steel Lee = (편집됨)

저작권을 준수하였습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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