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44화 (544/573)

근육조선 544화

2부 30장 6화 태평성대(2)

동지가 끝나고 해가 지나 조선의 가장 큰 명절인 정월 대보름 무렵이 될 무렵 근정전이 완성되었다. 서양 기준으로는 새로운 백 년이 시작되었으니 온갖 축사가 이어졌다.

불교 승려들은 물론이요, 천주교 신부들까지 축성을 하며 조선의 안녕을 기원하였고 주상전하께서는 이를 모두 받으신 다음 문무백관이 모인 앞에서 엄숙히 말하였다.

“가까스로 경복궁으로 돌아와 참으로 기쁘고 또 기쁜 일이건만 내가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일이 있다. 영의정인 이이는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라.”

“신 이이, 영의정으로서 부모에 효를 다 하지 못하였고 스승께도 효를 다 하지 못하였으며 주상전하께 불충과 불효를 저질렀사오니 이 불충을 엄히 꾸짖어주시옵소서.”

소문이 늦은 신료들은 알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미주에서 돌아온 정철과 허균이었는데 둘은 눈을 멀뚱멀뚱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썼다.

이이의 말이 끝나자 주상전하께서는 한숨을 쉬시며 말하였다.

“젊은 나이부터 나라에 이바지하고 종묘사직을 위해 힘쓴 바가 있으니 불충이 아닌 충심이 아니더냐. 그리 젊은 시절부터 애썼으니 병이 엄습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 모든 관원들은 필히 진맥을 받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이제는 건강보험까지 생길 판국이다.

사실 이이의 병을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했다면 천천히 치료해 64세의 나이에 은퇴할 이유가 없었겠지.

이이는 벌써부터 간 손상의 영향이 왔는지 꺼멓게 변한 얼굴로 답하였다.

“신의 불충을 은혜로 돌려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이 사력을 다하여도 조정에서 몸을 둘 수 없이 병에 시달릴 것이오니 부디 내쳐 주시옵소서.”

“퇴직을 윤허할 것이니 앞으로 도성에 머물며 탕약과 시침으로 몸을 다스리고 후계를 양성하도록 하여라. 자네의 학문이 후계를 찾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보다 아쉬운 일은 없다. 우의정 유성룡은 앞으로 나오도록.”

당연히 나에 대한 공치사가 이어졌고 내 직급은 영의정으로 상승하였다. 57세의 나이에 영의정이라면 평범하지만 우의정을 거쳐서 올라왔으니 사실상 조정의 중핵은 내가 된 것이다.

우의정에서 영의정으로 진급하였으니 업무가 당연히 변경되었다.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영의정은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인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니, 이이는 인수인계를 위해 나를 안내하며 말하였다.

“제사는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네. 애초에 예진원 대제학인 하성군 대감이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영의정으로서 해야 할 일 가운데 천주교도들을 가르치는 일도 있다네.”

“불자와 천주교도라 하였습니까? 제가 알기로 승려들은 나라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지만 천주교 승려들은 구주에서 건너온 이들이니 그럴 의무가 없다 들었습니다. 하물며 가르치다니요?”

“의무는 없지만 교황이라 불리는 이가 천주교의 교리를 일부 개정하여서 가르치게 되었다네. 설명하기 난해한 일이라 직접 만나보면 알 것이네.”

직접 볼 필요도 없었다. 천주교 신부들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기 전에 머무는 성균관 부설 기관인 서학(西學)관은 동지에도 열기가 그득하였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육체를 활용한 선교활동이라니 교황께서 잘못 판단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의압(벤치프레스)을 죽어라 하는 신부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나에게 가르침을 받은 신부들이었다.

세스페데스의 선교방식이 동방 선교의 기준이 되었다 하는데 모두가 고통받는 아름다운 시대가 되다니.

이이는 모든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에게 당부하였다.

“나는 재주가 부족하여 도성의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칠 방법을 딱히 모색하지 못하였지만 자네라면 가능할 것 같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부디 좋은 방법을 마련해주게.”

“목표가 오 할의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는 것이라 하였지만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룰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사력을 다하여 노력해 볼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음 업무는 세자시강원을 총괄하는 일일세. 자네 정도면 쉬운 일일 테니 염려하지 않고 돌아가 보겠네. 그럼 가끔 들러서 차나 마시도록 하세나.”

이이는 사대문 밖에 집을 마련하여 제자를 가르치기로 하고 완전히 퇴직하였다.

다음 날 새벽부터 세자저하를 가르치려 동궁으로 향했는데 나이가 24세라 학문적 지식은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세자저하께서는 책을 읽다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중용에 나온 ‘군자는 방 안에 있어도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 존경을 받는다’라고 하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소이다. 자고로 군자라 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하니 방 안에서 학문만 익히면 심히 부끄러운 일이오.”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세자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군데 고여 있으면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썩기 마련이고 아무리 담대한 근육이라 하여도 쉽사리 쇠하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익힌 학문과 관련된 지식을 확인하고 응용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으니 다행이지.

내가 동의하자 세자저하께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한곳에 고여 있으면 아니 되는 것이 또 있소. 아직 아바마마께 청하지는 않았지만 돈이라는 물건은 고여 있으면 아니 되는 법이오. 돈이 고여 있던 명국이 어떤 일을 겪었소이까?”

“당시의 비극은 독고율이 명국을 무너트리기로 작정하여 벌어진 일입니다. 상례(常例)가 아니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늘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여도 언제나 대비는 필요한 법이오. 조정에서 조선회사를 세워 녹봉을 굴려 교역을 행하며 중인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투자하여 수익을 거두지 않소. 그러하니 백성들의 찬장에 잠든 돈도 굴릴 방법을 모색해 볼 거요.”

백성들의 찬장에 잠든 돈을 굴린다? 현대라면 채권도 있고 주식도 있으며 그놈의 코인인지 뭔지도 있으니 조금 염려스러운 말이 아닌가.

세자저하께서는 한참을 생각한 듯 여러 번 고쳐 쓴 종이를 내밀며 말하였다.

“내가 창안한 방법은 증권(證券)이라는 것이오. 최소한 은자 일백 냥 단위로 투자를 받는 상인들에게 뭇 백성들이 증거가 되는 문권을 구매하는 대가로 소액을 투자하는 법이오.”

“세자저하께서 전념을 다하여 제안한 방식이니 신이 한번 상세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자저하께서 틈틈이 작성한 증권에 관한 문건은 좀 더 다듬으면 현실에 적용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회사에 투자하기 힘들면 각 품목으로 나눠서 투자하는 선물(先物)개념까지.

이이는 세자저하께서 국익을 지나치게 탐한다 하였는데 이 정도면 지나친 수준은 아니다.

다만 현대인이라 걸리는 점이 있었다. 현대에도 회사가 도산하면 수많은 이들이 알거지가 되는데 이 시대에는 그런 제동장치가 없다.

현대라면 파산신청을 하고 최소한의 재산을 보존하여 어떻게든 재기의 발판을 노리겠지만 이 시대에는 온 가족이 노예로 팔려갈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알고 있으니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세자저하께서는 모든 사람이 공정하고 공평한 마음을 품으신 것을 전제로 삼아 증권이라는 제도를 창안하려 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신이 세상을 돌아본 결과 세상 사람들 가운데 태반은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나라가 보장한 제도를 쉽사리 어기는 이가 그렇게 많이 생기겠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입니다. 독고율과 같은 광인이 세상천지에 널린 마당에 어떠한 비극이 일어날지 감당조차 아니 되겠지요. 일이 잘못 돌아가면 수많은 이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노비 신세가 될 것입니다.”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시기는 모르지만 조만간 네덜란드에서 튤립 파동이 일어나고 가짜 주식회사 거품이 일어나 수많은 이들이 강물에 몸을 던질 시기이다.

주식을 먼저 만들어 이런 사고도 먼저 경험하기보다는 선례를 보아서 문제점을 수정하고 안전을 보장한 투자를 해야 하리라.

세자저하께서는 한참 동안 내 눈을 바라보다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니 그렇소. 백성의 삶이라 하여도 기껏해야 삼 년 전에 잠행을 다녀올 때에 잠시 돌아본 것이 전부이건만 내 너무 재주를 과신하였소. 생각하여 보니 글도 제대로 모르는 백성들이 가짜 증서를 받아도 알 길이 없잖소.”

이이와 나, 영의정 두 명에게 반박을 당했으니 실망감이 큰 것이 분명하였다.

첫날부터 이렇게 세자저하의 기가 죽어버리면 스승으로서 면목이 없으니, 세자저하가 기뻐할 만한 제안을 하였다.

“그러하면 잠행을 다녀오심이 어떠하십니까? 요즘 매일 새벽별을 보며 입궐하여 저녁별을 보며 퇴궐하니 신 또한 백성의 생활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간혹 내수린을 보러 나가거나 강무(講武)를 다녀온 경우를 제외하면 백성들을 본 적이 없기는 하오. 내 아바마마께 청을 올리겠소.”

굳이 청을 올릴 것도 없었다. 얼굴이 들키지 않도록 힘쓰라 하였는데 나는 57세가 되어도 40대 후반으로 보일 외모이니 하얗게 변한 머리색만 먹으로 물들이면 충분하였다.

근처에서 평복을 입은 군관이 호위하기로 했으니 나는 세자저하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세자저하께서는 얼마 전 평양에서 내려온 진 생원이며 신은 굳이 예의를 저버릴 마음이 없사오니 신을 재종질(손아래 7촌)인 박 진사로 부르시면 될 것입니다.”

“그럼 영…… 아니, 박 진사는 도성으로 올라온 재종숙(손위 7촌)을 안내해줌이 어떠한가.”

“저 또한 오랫동안 뵙지 못한 재종숙을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현대에도 까다로운 집안은 50세 이상 차이가 나도 종숙이나 당숙으로 호칭하며 존댓말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당연한 일이다.

까마득하게 어리다 하여도 나보다 촌수가 높으면 존대를 해야지.

세자저하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백성들의 생활을 보았는데 도성을 확장하고 신도시를 만들어서 청계천은 깔끔하고 새로 만든 하수도도 그럭저럭 잘 가동되었다.

돈이 남아도니 도성에는 두 자(70㎝) 깊이로 자갈을 깔아 도로를 개편하였으며 내가 어린 시절 창안한 인력거는 수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든 것을 뜯어고칠 수는 없어도 차츰차츰 여유를 두고 개량해 나간 덕분이다.

젊은 시절 도성의 시장에는 명나라 물건을 제외하면 수입품이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교역량이 늘어났으니 이제는 인도에서 들여온 물건도 보였다.

세자저하께서는 길거리에서 팔리는 음식을 보며 말하였다.

“박 진사가 말하기로는 도성 백성들은 먹는 것부터 다르다는데 허언이 아니었군. 등뼈탕이라는 음식을 한 솥 가득 끓여 저리도 게걸스럽게 먹다니. 저건 또 무슨 음식인가? 틀에 넣어 찍어내는 밥 같은데.”

“왜인들이 자주 만들어 먹는 곽밥이라는 음식입니다. 강화도에서 막 잡은 생선을 바로 소금과 식초에 절여 안의 벌레를 모조리 죽이고 밥 위에 얹고 눌러서 한 몸으로 만들어 먹지요.”

현대인인 나는 이게 초밥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곽밥이라니.

예전에 일본에 있던 원시적인 초밥을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이주자들이 개량해 일본에 소개했다던가.

그리고 다테 마사무네는 이를 더욱 개량해 일본을 복구하는 인부들에게 식사로 지급했다더라.

다테가 개량한 초밥은 만들기도 편했다.

네모난 틀에 밥을 깔고 위에 겨자 같은 향신료를 바른 뒤 식초와 소금에 절여 축 늘여진 생선을 얹어 눌러 단단히 만들고 썰어내면 끝이다.

사람들은 이 곽밥을 열댓 개씩 사서 바로바로 먹어치웠다.

물론 세자저하께서는 입신체비를 행하는 사람이라 간식을 함부로 드시지 못하시니 입맛만 다시고 계셨다.

나도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눈을 질끈 돌렸고 세자저하는 저 멀리 뭉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건 또 무슨 일인가. 도성에는 저런 공터가 여럿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공터에 사람들이 빼곡하니 몰려있을 줄은 몰랐군. 박 진사는 왜 저러는지 알고 있는가?”

“도성에 둔 공터는 인력거를 잠시 거치하거나 일을 마친 사람들이 모여서 쉬라고 간단한 의자를 두고 나무를 심어두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으니 직접 보심이 어떠합니까?”

도심 내 휴게공간으로 관아에서 관리하는 공터에는 서른 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경청하고 있었다.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보니 남녀가 어우러진 다섯 명이 멍석 위에 올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탈춤이라고 보기에는 춤이 없으며 가면들이 하나같이 동물을 형상화한 가면들이라 근래에 창안된 연극이리라.

의자 위에 올라간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변사(辯士) 역할을 하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런 세상에! 꼬리가 두 개가 살랑거리는데 하나는 여우의 복슬복슬한 꼬리요, 하나는 늑대의 짤막한 꼬리로구나! 이리대신이 분통에 차 잘린 꼬리를 세우고 수풀로 날래 뛰어드니!”

“고자 남편이 체면도 모르고 들어왔는가! 고자가 되었으면 내시나 할 것이지 체면도 모르는 자로다! 배신락(백 바디 드롭)이나 받으시게!”

늑대 가면을 쓴 여인이 남자를 잡아채 대번에 매쳐 버렸고, 그는 멍석 위에 널브러져서 고통을 호소하다 꼬리를 만 늑대처럼 네 발로 달려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버렸다.

사람들이 박장대소하고 나와 세자저하도 체통을 잊고 낄낄대며 웃어댔다.

상스러운 내용이지만 이런 내용이 사람들에게 팔리는 법이지.

탈춤이라고 볼 수도 없고 연극이라 볼 수도 없는 새로운 연극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변사는 가면을 벗으며 말하였다.

“오늘의 극은 여기서 끝이오! 불란서에서 들여온 호(狐: 여우) 서방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 자리에서! 매일 신(申: 15~17시)시에 열릴 예정이니 많이 오시구려!”

“극이 이렇게 짧아서야 한 이야기를 듣는 데 한 세월이 걸릴 걸세.”

“그러시면 글을 배우시면 괜찮겠지요. 어서 돈이나 내십시오!”

사람들 대다수가 동화 한 문(文: 은자 1/10냥)을 냈고 이보다 작은 단위인 한 푼의 동화 여러 개를 던지듯 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잔돈이 없어서 잠시 고민하다 세자저하와 함께 은자 한 냥을 냈다.

변사 역할을 하던 사람은 팔이 불편한지 한 손만 배에 대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다 화들짝 놀라며 나와 세자저하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니 스페인까지 가서 공연을 했던 남사당패 일원이었는데 상대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아서 조용히 타일렀다.

“저쪽에 조용한 다점(茶店)이 하나 있으니 가서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하세나.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아니 될 일이라네.”

여기서 스페인 사절단에 포함되었던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이것도 인연이고 물어볼 것도 많으니 차나 한잔해야겠다.

한때 남사당패였던 사람은 우리 앞에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침묵하였고 세자저하가 질문을 시작하였다.

“영상대감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터이니 내 신분을 밝히겠네. 잠행(潛行)을 나왔지만 내 거처가 동궁이니 더 이상은 말하지 아니하여도 알고 있을 거라네.”

“세자저하를 뵙게 되었사옵니다. 소인이 불민하고 천박한 이야기를 저잣거리에 퍼트려 낯을 들 면목이 없사오니 부디 벌을 내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남녀상열지사를 유생이 논하였다면 엄벌을 내리겠지만 백성의 일에는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는 법이라네. 자네를 벌하려 한다면 내수린도 폭력을 빌미로 삼아 벌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자저하의 말이 끝나자 상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국화차를 들이켰다.

세자저하께서는 별말이 없으셨지만 나는 이 사람이 어쩌다가 부상을 입었는지 궁금함이 치밀어 올라 질문을 퍼부었다.

“자네는 서반아의 군주 펠리페 2세는 물론이요 불란서의 군주 앞에서도 공연을 실시한 사람이 아닌가. 제자는 물론이요, 명성이 자자할 텐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오만이 저의 팔을 앗아갔습니다. 돌아온 이후 구주에서 받은 복식과 장신구를 잔뜩 패용하고 남사당놀이를 하였지요.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철봉 재주를 하니 옷자락이 철봉에 엮여 어깨가 뽑혀 나가고 말았습니다.”

기계체조에 준하는 남사당놀이의 철봉 뛰어다니기는 보통 원심력이 걸리는 운동이 아니다. 옷자락이 철봉에 걸렸으니 온몸의 체중과 원심력이 어깨를 잡아 뽑아버렸으리라.

세자저하께서도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팔뚝을 매만졌고 그는 아직도 축 늘어진 어깨를 매만지며 말하였다.

이건 현대에도 회복 불가능한 부상이니 이 시대에는 팔을 절단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리라.

“다른 이들은 저를 보고 교훈이 되어 큰 사고가 없었지만 제가 배운 것이라고는 남사당놀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 알거지 신세가 될 것이 분명하였지요. 그러다 구주에서 역관(譯官) 어르신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야기를 들었다 하여도 자네가 그 모든 내용을 기억할 방도가 없었을 것인데?”

“천주교 승려들이 아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의뢰를 하였습니다. 시주를 하고 구주의 여러 재미있는 글을 떠올려 아국의 글로 번역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여기에 서반아에서 보았던 극을 조합하니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백성들은 유흥거리가 부족하기에 재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기껏해야 명절날에나 열리는 내수린, 남사당놀이 그리고 탈춤을 보면서 즐기고 평상시에는 술을 마시고 화투나 골패(骨牌)를 굴리며 노는 법이다.

그런 백성들에게 유럽에서 전해져온 생소한 이야기와 간단한 몸동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연극이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하리라.

상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찹쌀떡을 시키며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하면 자네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또한 아국에서 전래되는 이야기를 이리저리 퍼트리는 방안을 모색해 본 사람도 있었는가?”

“제가 어느 정도 두각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생겨나 저와 같은 변사가 스무 명가량이 있습니다. 또한 아국에 전래되는 이야기는 인기가 없어 대부분 천주교 승려들에게 의뢰하여 구주의 이야기를 번역해 퍼트리는 실정입니다.”

문화끼리 접촉하니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였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변화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니 단순하게 글을 읽어주면 돈을 벌 수도 없는 법이요, 도성에서 탈춤을 벌이면 장소 임대비용이 많이 들어가리라.

일종의 틈새시장을 노려 만들어낸 방식이니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반면 상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많은 경쟁자가 생기니 제 벌이가 시원치 않아졌습니다. 이야기는 한정되어 있고 사람의 지갑도 한정되어 있지요. 심지어 돈을 더 받으려 하면 책을 사서 글을 읽으려 합니다.”

“글을 읽으려 한다면 요즘 책값이 얼마나 하는가. 제대로 제본된 책 말고 목판으로 대충 제본한 책 말일세.”

“한 질 십여 권을 기준으로 은자 한 냥 정도입니다. 제대로 인쇄한 책은 이보다 두 배가량 비싼 형편이지요. 물론 책을 대여하는 상인도 있어서 한 권에 두 푼 정도로 빌려줍니다.”

이제는 책 대여점까지 생길 정도로 책이 흔해지다니 감개무량할 지경이다.

어린 시절에는 책 십여 권의 가격이 은자 석 냥에서 다섯 냥 사이였고 회화가 첨부되어 온전히 인쇄할 수 없는 책이 권당 은자 두어 냥 정도 하였다.

아는 사이이니 은자 열 닢 정도를 주어 형편을 피게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 공터에 와서 연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내용이 시원치 않았는지 사람들이 돌아가며 말하였다.

“에라! 내가 글을 모르지만 글을 배우고 책을 사서 읽고 만다! 호 서방 이야기는 재미있었는데 개구리가 뭔 왕이라고 말하나! 더군다나 몸을 놀리는 방법이 답답해서 말이 안 나오네!”

“실력이 없으면 저리되는 법이 아니겠나. 그나저나 박 진사는 왜 멍하니 서 있는가?”

“세…… 재종숙께는 실례를 저질렀지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계기를 주어야 발전하는 법이다. 까다로운 운동도 취미 삼아 익히고 즐기면 순식간에 지식을 축적하여 발전하니 지금 연극을 본 사람들의 말에 답이 있었다.

세자저하와 함께 궐로 돌아가서 바로 홍문관에서 글을 작성 중인 정철을 찾아갔다.

정철은 내 표정을 보더니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짜증을 숨기지 않았고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제안하였다.

“내가 생각은 많지만 글재주가 없어서 문제이니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당분간 내가 제안하는 글의 흐름대로 자네가 살을 붙여 정음(正音)으로 만든 소설을 만들어주게나.”

“영상대감께서 뭐라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홍문관의 부제학과 영의정이 모여서 한낱 정음으로 쓴 잡기에 가까운 소설(小說)이나 만든다 하셨습니까?”

“삼십 년 이내로 도성 백성들의 절반이 글을 깨우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정 마음에 걸린다면 자네의 이름이 아닌 다른 필명(筆名)을 사용하면 충분할 것이네!”

나는 현대에서 수많은 영상매체를 보았고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글을 읽었다.

개중에 이 시대에 어울릴 만한 내용으로 변형한 글을 남긴다면, 일종의 신소설(新小說)을 정철의 힘을 빌려 퍼트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연극을 하는 이들이 개입해도 한계가 있다.

어느덧 목마른 백성들은 알아서 나와 정철이 작성한 소설을 읽으려고 글을 배울 것이며 서로 책을 돌려보며 글을 깨우치리라.

정철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하였다.

“다른 필명을 써도 된다 하시니 제 마음이 놓입니다만 영상대감께서는 대체 무슨 소설을 쓰기를 원하십니까? 전조 말엽의 남녀상열지사(고려 가요)를 논하신다면 아니 됩니다.”

“첫 소설의 제목은 복수자설(復讎子說)일세. 패악을 일삼은 영길리의 해적을 벌하기 위해 온 세상 각지에서 모인 이들이 복수를 천명하는 것이지!”

어느 정도 현실을 감안하되 상상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를 잔뜩 창안해야겠지.

예를 들면 붉은 갑주를 패용한 조선 무사라든가 거암(巨巖)을 한 손으로 집어 던지는 하와이 사람 같은 이야기를.

현대라면 저작권에 걸리겠지만 이 시대에 저작권은 없다!

#작가의 말

복수자전의 마지막 상대는 무덤에서 여덟 명의 장수와 함께 일어난 성길(편집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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