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43화
2부 30장 5화 태평성대(1)
스페인 사절단은 돌아가며 산더미 같은 선물을 챙겼다.
대다수가 사치품이며 그나마 내가 거듭 강조해서 천연두 예방접종에 필요한 우두 고름을 챙기기는 했는지 궁금해서 이들을 배웅하고 온 이순신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돌아가는 이들에게 선물로 동의보감에 기재된 두창 예방법에 대하여 소상히 이야기를 하여 보았네. 이들이 영창 고름을 챙기기는 하였는가?”
“웬 유리병에 핏자국과 고름자국이 묻은 헝겊이 잔뜩 들어 있어서 의심하였는데 자네가 내어준 영창 고름이었는가. 챙기기는 하였지만 허투루 다루거나 아예 다른 물건을 담으려고 유리병의 봉인을 헤치는 일이 있어 제지하였네.”
종두법에 필요한 우두 고름은 헝겊에 적신 뒤, 바짝 말려 유리병에 넣고 밀랍으로 봉인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유지한다. 아마 멋대로 다룬 유리병의 봉인이 깨지고 유럽에 가면 죄다 삭아서 쓸모가 없어지리라.
솔직히 말해 별 기대도 안 했지만 그 기대조차 무참히 무너트려서 할 말이 없었다.
이순신도 한숨을 내쉬더니 짜증과 분노를 억누르며 말하였다.
“알고 보니 참으로 한심하고 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군. 왜국도 두창을 멎게 한 명약이라 하여 영창을 접종한다던데 자네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도 이를 거부하다니.”
“왜인들이 영창을 접종한다 하였는가? 분명 구암(허준의 호)이 왜국에서 영창을 퍼트리긴 했지만 왜인들이 영창을 접종할 줄 몰랐는걸.”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영창 고름을 복용하거나 상처에 바르는 방식을 택한다네. 그래도 효과가 없지는 않으니 조만간 왜국에서도 두창이 옛날에 사라진 병이 될 지경이네.”
하여튼 천연두에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이제 급한 건도 처리하였으니 당분간은 정말 큰 문제가 없으리라. 명나라 사방으로 퍼진 대연군이 발호하려면 아직 시일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이순신은 예정에 없던 배가 돌아왔는지 망원경으로 한참을 살펴보다 말하였다.
“자네가 업무를 위임한 산본(山本: 산시양의 호)이 돌아오는 것 같군. 본래 일 년 동안 솔로몬국에서 피뢰침을 시험하기로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 알겠는가?”
“나야 모를 일이…… 지만 자칫 잘못하면 풍토병으로 앓다 돌아왔겠군. 잘못하여 흑질(황열)에 걸리면 사람이 대번에 죽어 나가지 않는가.”
불행 중 다행으로 산시양은 흑질에 걸리지 않았다. 본래 일 년을 머물며 피뢰침을 종류별로 시험하려 했지만 의원이 제지했다 하던가.
결국 절반의 기한만 채우고 돌아오게 되었다는데, 그는 주상전하께 보고를 올리기 전에 하소연을 하였다.
“정말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이거나 불자는 아니지만 악귀나찰이 나이로비 호수(빅토리아 호)에 다가간다면 모기 떼에게 온몸의 피가 쪽 빨려 나가 절명할 것입니다!”
서류 뭉텅이를 내 앞에 턱 하니 내려놓는 산시양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의 몰골을 보고 말이 안 나왔다.
입신체비를 어느 정도 했던 몸이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 되었는데 그는 팔뚝을 걷어 보이면서 말하였다.
“모기와 각다귀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저녁이 되면 모기가 날아올라 하늘이 시커멓게 변할 지경입니다! 계핏가루요? 계핏가루를 숙소에 한 근을 뿌려대도 모기가 방충망을 일그러트려 방 안으로 기어들어 오더군요.”
“그것참 딱한 일이로군. 설마 모기에 물린 상처가 곪아서…….”
“모기에 물린 상처 일백여 개 가운데 단 한 개만 곪아도 이런 꼴이 됩니다. 기후는 지독하게 덥고 비가 쏟아져 내려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거나 좀 드셔보십시오!”
“이게 대체 뭔가? 혹시 개똥인가?”
뭔가 시커먼 덩어리를 내미는데 얼핏 보고는 개똥으로 착각했다. 하주도 출신이라 욕지거리랍시고 똥이나 먹으라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나에게 개똥을 내어주지는 않았겠지.
냄새를 맡아보니 땅콩기름 냄새가 나고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잘 부스러지는데 먹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아주 자그마한 모기 날개가 보여 산시양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고생한 증거라는 말이겠지.
“이건 아무리 보아도 모기를 뭉쳐 만든 음식 같은데 최소한 이 덩어리 하나에만 모기 일만여 마리가 넘게 뭉쳐 있을 것 같다네. 자네의 고생을 익히 알겠군.”
“바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기를 줄여보겠다고 갈대를 엮어 만든 판에 물을 축여 휘두르며 모기를 잔뜩 붙여옵니다. 이를 짓이기고 뭉쳐 고기 경단처럼 튀겨 먹지요! 제가 이런 물건만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하늘에서는 벼락이 쏟아지고 머리 위에서는 수만 마리의 모기가 돌아다니며 땅은 지독한 더위로 끓어오르는 생지옥 중의 생지옥이 아닌가.
산시양은 내 눈치를 보다 의자에 걸터앉아 다시 말하였다.
“솔로몬국 사람들이야 이주학질(아프리카 말라리아)이 번성하는 사람들이니 간혹 금계랍(키니네)을 먹는 수준에서 그쳤지만 저는 여섯 달 내내 금계랍을 먹었고 순식간에 간이 망가지더군요. 당분간 간을 되살리기 위하여 휴가를 청할 예정입니다.”
“고생을 한 덕분에 온전한 피뢰침을 설계하게 되었으니 염려하지 말고 푹 쉬게. 종류별로 많은 시험을 행하였으니 창안한 사람은 나로 하되 이를 개량할 기반을 만든 자네의 공을 반드시 세상에 널리 퍼트리겠네.”
이제는 퇴직 소리를 하지 않으니 진짜 죽을 고생을 한 보람이 있군.
내가 현대의 지식을 바탕으로 피뢰침을 만들어도 되지만 조선의 장점 중 하나인 과학적 사고방식을 기르려면 이런 희생자가 필요하였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사건이 일어나면 철저한 분석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방식의 핵심이다.
나는 시험에 쓰인 피뢰침의 첨단(尖端)을 늘어놓고 산시양이 가져온 서류 뭉텅이를 하나하나 보고서로 개편하였다.
산시양이 약식 보고를 마치고 이번 계획의 총 지휘자인 내가 최종 완성된 보고서를 가져왔다.
현대의 피뢰침과 흡사한 Y 자형 피뢰침을 가져온 채 주상전하에게 보고를 시작하였다.
“일전에 원구단에 설치된 피뢰침을 상세히 고안하여 보았나이다. 피뢰침을 세울 때에 가장 효과적인 형태를 찾아냈으며 벼락을 빨아들이는 범위가 있음을 알아내게 되었사옵니다.”
“장계를 보니 높이가 스무 자(6.8m)에 달하는 피뢰침에서 서른 자(10.4m)를 떨어져 있으면 벼락이 내리친다 하였구나. 더군다나 피뢰침을 나무장대 위에 두면 사고가 빗발치다니?”
“벼락이 피뢰침에 내리치면 금속은 별문제가 없지만 목재나 석재에 만난 순간 양기로 화하여 돌조차 깨어나가게 하였나이다. 하오나 산시양이 실험을 거듭한 결과 가장 효과적인 피뢰침을 만들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현대 건축설계 시간에 배운 피뢰침의 안전범위를 고려해 이 시대에 맞게 피뢰침을 재구성했다.
현대야 철을 사용한 피뢰침의 부식을 막으려고 희생전극을 사용하지만 이 시대에는 철로 뭘 만들면 단숨에 녹슬어 버린다.
내가 제안한 피뢰침은 건물 지붕 위에 설치하는 구리 피뢰침이다. 한옥의 용마루 끝에 설치하는 거대한 취두(鷲頭) 기와 위에 설치하여 구리 사슬로 땅속까지 연결하여 전류를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주상전하께서는 도면을 확인하시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건물 위에 장대를 두면 몰골이 흉한 것은 물론이요, 보수가 힘들 것 같구나. 높다란 지붕 위에 거대한 장침 여러 개가 꽂힌 꼴이 아니더냐.”
“하오나 피뢰침을 사용하려면 모든 관아와 백성들이 자주 오가는 주거지에 여러 개를 설치해야 하는 법이옵나이다.”
“백성들과 지방 관아의 피뢰침은 자네의 제안대로 하되 궁궐의 피뢰침은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터를 잡아 세워야겠구나. 미주의 빙요 광산(빙햄 구리광산)에서 구리가 많이 들어오니 불가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긴 나라의 돈이 들어가지 내 돈이 들어갈 일도 아니지 않은가.
주상전하께서 각 관아에 피뢰침 표준 설계도를 전달하라는 명을 내린 주상전하께서는 밖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더 이상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방법을 알아냈으니 이제 근정전을 새로 만들 차례이다. 유성룡은 진해대군을 도와 근정전을 새로 짓는 일을 관할하여라.”
“신이 사력을 다하여 근정전을 올곧게 세울 것이나이다.”
1599년 9월, 근정전에 사용할 재목들이 모두 마르고 정리되어 더욱 확장된 근정전 공사가 시작되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건축의 대가가 된 진해대군은 공사를 총괄하고 있었다.
“벼락이 절대 근정전을 범하지 않을 것이니 금속을 마음대로 올리게. 구리로 기와를 만들었으니 기와가 무너지거나 내려앉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네.”
도성 곳곳의 전각에는 지붕 위에 설치하는 저가형 피뢰침이 올라갔고, 나는 근정전이 더 이상 벼락에 맞지 않게 하려고 네 방위를 잡아 근정전을 보호할 수 있는 36m 높이의 피뢰침을 설치하였다.
근정전은 진해대군의 사심(私心) 아닌 사심이 가득 담긴 건물이었다.
기둥의 크기가 자금성보다 조금 작을 정도로 어마어마한데 이 기둥은 죄다 세상 건너에서 온 수입산 목재이다.
이를 다듬는 목수들은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세상에 이리도 연하고 거대한 나무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향이 아주 그윽하며 벌레도 먹지 않으며 옹이도 생기지 않으니 연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디에나 쓸 수 있겠군요.”
“미주에서 가장 큰 고을인 금주(캘리포니아)의 숲에서 베어온 미주 측백나무라네. 일백여 자(34m)가 넘고 지름이 열 자(3.4m)에 달하는 거목들이 많으니 염려하지 말고 마음대로 다듬게나.”
미주 측백나무는 세콰이어 계열 나무이다.
현대에는 목재를 많이 사용하지 않으니 가로수로 쓰이거나 휴지용 펄프로 사용하지만 이 시대에는 선박 용골로 쓰일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만능에 가까운 나무이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는 좋은 나무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수준에서 끝났지만 인구를 잔뜩 받아 인력을 충원하였으니 이런 거목을 잘라내 조선까지 운반할 여력이 생겨났다.
진해대군은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다 나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려 하였지만 지름이 지나치게 두툼한 목재를 사용하면 근정전의 벽보다 기둥이 더 많을 지경이 되어 욕심을 거두게 되었소.”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저 목재에 주칠(朱漆)을 하여 붉은빛을 입히면 기둥이 더욱 비대해져 보일 것입니다. 그나저나 여기에 쓰인 예산이 어마어마할 것 같습니다만.”
“은자로 팔십만 냥에 달한다 하였으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듣자 하니 조선회사에서 거두는 수익이 오 년 뒤에는 매년 이백여 만 냥에 달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지 않소이까.”
돈을 무턱대고 비축한다고 답이 아니다. 비상시를 대비한 자금은 축적하되 나머지는 굴리면서 나라에 부족한 물자를 충당하는 게 조선회사의 건립 이념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기둥과 대들보만 세워진 건물에 각종 목재가 추가되고 벽이 세워지며 건물의 형태가 잡혀 나갈 무렵.
이이가 평상시 근무하던 의정부가 아닌 근정전 앞에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자 하였다.
마침 몇 달 동안 이이를 보지 못해 말이라도 해볼 찰나, 이이는 피로가 올라왔는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근정전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말하였다.
“얼마 전에는 잠시 요동에 다녀와 향교와 서원을 세우기 전에 아국의 글을 가르칠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네. 자네에게도 주어진 책무가 많지만 근정전을 세우는 일도 겸할 줄은 몰랐군.”
“저야 진해대군께서 사소한 실책을 저지를 때에만 개입하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이도 요즘 바쁘긴 하다. 영의정은 암묵적으로 나라의 교육과 제사를 담당하는 예조 업무를 관할하는데 요즘 국가의 중책사업 중 하나가 문맹 퇴치이다.
듣자 하니 도성 사람들 가운데 오 할이 글을 깨우쳐야 성공이라 하던가.
그런 중책을 담당한 이이가 영토가 된 요동의 교육문제까지 해결하게 되었으니 63세에 달하는 나이에 고생이 많다.
이이는 잠시 근정전을 바라보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나도 이제 은퇴를 생각할 참이네. 환갑을 넘어 종심(從心: 70세)을 바라보고 있어도 관직에 남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아닌 것 같다네.”
이이가 은퇴를 생각한다고? 본래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지만 몸에 큰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슬쩍 살펴보아도 안색이 멀쩡한데 왜 은퇴한단 말인가.
그래도 비밀스러운 이야기이니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말하였다.
“영상대감께서 관직에서 물러나신다 하시면 후계를 양성하실 목적이신지요.”
“아닐세. 젊은 시절에 퇴계 대감께서 몸이 성치 않을 것이라 경고하였는데 그 대가를 환갑이 넘어서야 치르고 있다네. 그렇지 않아도 구암(龜巖)을 만나고 오는 길인데 입신체비를 관두고 정갈한 음식과 탕약으로 몸을 다스리라 하더군.”
허준이 이이의 진맥을 봐줬다는 말인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할 것 같아서 뭐라 말을 하지 못하니, 이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답하였다.
“젊은 시절 지나치게 많은 육질(단백질)을 먹어 신장과 간이 부담이 심하여 조만간 병이 생길 것이라 하였네. 당시에는 몇 번이고 의식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격하게 날뛰기는 하였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소룡식 입신체비의…….”
“내가 몇 번이고 쓰러진 이후 완성한 것이 소룡식 입신체비라네. 자네와 내 다른 제자들은 소룡식 입신체비를 익혀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준에서 익혔지만 나는 아닐세.”
이이는 젊은 시절부터, 내가 한창 이황 아래에서 배울 시기에도 소룡식 입신체비의 초안을 세워두고 있었으리라.
내가 겪어도 인간의 한계라 생각하는 고난이었는데 당시에는 한계를 넘은 고난이었겠지.
나를 포함한 제자들이야 소룡식 입신체비의 부작용을 겪지 않았지만 창시자인 이이는 부작용을 겪을 수준의 절육을 몇 번이고 하였으리라.
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근정전을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결국 젊은 시절 벌인 치기가 후일 내 몸을 망가트리게 되었다네. 이는 무리한 입신체비로 몸을 망가트려 효도의 뜻을 어지럽히는 삿된 이들이 벌인 행각이 아니겠는가.”
“삿된 일이라 하여도 모르고 행한 일이 아닙니까. 오히려 근육이 붙지 않는 몸에 오롯이 효심을 새겨냈으니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예순이 넘으면 알게 모르게 병이 들게 마련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닐세. 의도가 좋았건 좋지 않았건 부모께서 물려주신 몸을 험하게 다루어 입신체비를 더 이상 행할 수 없게 되었다면 이는 부덕한 일이라네.”
이이의 성격이 워낙 완고한지라 입신체비로 인한 부작용을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며 책망하고 있었다.
하긴 부덕이라 탓하면 한없이 부덕하고 넘어가려면 그냥 넘어가는 일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질병과 근손실이다.
이 시대가 아무리 입신체비가 일상화되었어도 사람의 성격이나 학풍마다 질병과 근손실에 대한 대처가 다르다.
성격이 털털한 사람이라면 50쯤에 근육이 쇠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고 관절염은 당연히 걸리는 병이라 생각한다.
반면 이이처럼 완고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근육이 쇠하는 것은 더 이상의 효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병은 자신의 몸이 쇠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 탓이라 생각한다.
이이는 내 심각한 표정을 보았는지 슬쩍 웃으며 말하였다.
“조만간 아국은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며 주상전하와 세자저하께서 이를 대대손손 이어갈 분이니 염려하지는 않는다네. 다만 내 뒤에 영의정에 자리에 오를 사람은 자네이니 백성들에게 글을 퍼트릴 방안을 마련하게나.”
“이 좋은 시대라 하시면 즐기셔야지 어찌하여…….”
“이미 구암에게 진맥을 받았으니 주상전하께서 내 병에 대해 알 것이 아닌가. 병을 다스리며 태평성대를 원만히 다스릴 제자들을 마련하는 것이 나에게 남겨진 책무일세.”
가장 좋을 시기가 찾아오는데 은퇴를 생각하는 이이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가지는 않아도 기껏해야 도성 근교에 머물며 나라에 급한 일이 생길 때 자문 역할을 하겠지.
이이에게 인사를 올리자 그는 억지로 웃으며 자신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가 언제 은퇴하여 어떠한 형태로 나라를 위해 일할지는 모르지만 꿈만 같은 퇴직을 받았으니 다른 이들은 그를 부러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