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41화
2부 30장 3화 호부견자(3)
미주에서 들어온 장계를 확인하니 내가 실수를 했나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준이었다.
민방위를 창설하고 미주인들에게 산탄총의 사용법을 익히게 했는데 스페인 탐험대를 문자 그대로 진멸(殄滅)시켜 버렸다.
비록 어중이떠중이가 주력에 지휘관만 장교 출신인 오합지졸을 자신들이 유리한 환경에서 상대했다지만, 이 정도 전투력이라면 정규군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오히려 정규군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라 문제인데.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피해를 입는다면 스페인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지만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서 자존심이 박살 났겠군. 하긴 조선도 자존심이 박살 나면 이성이 사라지지.”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타격을 입으면 이성이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지금까지 화약병기를 앞세워 원주민을 사냥하고 다니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땅으로 떨어져 박살 난 격이 아니겠는가.
주상전하께서도 사태를 파악하시고 바로 의정부 관원들과 외조 관원들 그리고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 장수들을 합쳐 논의를 시작하였다.
장계를 보고 한참을 고민하던 주상전하께서는 허탈한 듯이 말하였다.
“본래 승리를 치하함이 마땅하나 서반아는 아국과 엄연한 동맹인 국가일세. 사소한 국경분쟁으로 동맹이 끊어질 리는 없겠지만 분쟁을 시작하였으니 이를 수습할 방도가 필요하구나.”
“신 구사맹 아뢰옵나이다. 우의정 유성룡이 관찰사로 재직하며 미주를 온건히 통치하고 온갖 방비를 다 하였사오나 아직 미주의 인구가 부족하옵니다. 한 해 일만여 명 이상이 미주로 이주하오나 구주 각국은 더욱 많은 이를 보내고 있사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서반아가 한 해 칠천여 명의 사람을 미주로 보내며, 영길리와 불란서, 심지어 라마국까지 합치면 한 해 이만여 명 이상의 사람이 이주한다 하였다.”
조선의 인구는 1,700만 명인데 유럽 각국의 인구를 합치면 조선의 추정치로 6,500만 명에 달한다.
조선이라는 한 개 국가만 따지면 유럽 인구의 1/4에 달하는 괴물 국가지만 전체로 따지면 유럽이 네 배나 많은 것이다.
지금이야 미주인을 포섭해 이 격차를 메꾸지만 인구가 곧 군사력이니 장기적으로 군사력이 밀린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이지.
주상전하께서는 한숨을 내쉬다가 이순신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순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영길리의 해적을 격퇴하고 천축 일대의 평안을 되찾았으니 혹여나 가늑비(加勒比: 카리브)해로 나아가 서반아 함대를 압박할 수 있겠더냐.”
“주상전하께서 명하시면 수행하겠사오나 어려운 점이 실로 많사옵니다. 가늑비 해는 아국에서 당도하려면 희망봉을 넘고 다시 대서양을 넘어가야 하는 바다이옵니다. 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당도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보급이 문제이옵니다.”
“천하를 진동시키는 강군이라 하여도 보급을 받을 길이 없다면 사방을 떠돌다 고립당해 분쇄당하는 법이지. 하물며 여섯 달 넘게 항해하여 보급을 이어갈 방도 또한 없구나.”
이순신의 전략은 철저히 정석을 지키며 성립된다. 보급을 도외시한 기동이나 무계획적 진군을 하는 멍청한 행위는 일본군이라는 사람 거죽을 쓴 초식동물들이 하는 짓이다.
물론 이순신이니 주상전하께서 명하면 정말 카리브 해로 나아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물론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지목하며 질문을 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구주 전역이 힘을 합쳐 아국을 압박할 경우 견딜 수 없을 것 같구나. 성형요새는 물론이요 민방위를 설립하여 전력을 보강하였지만 민방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지 않더냐.”
“민방위는 서반아의 삼수군(테르시오)과 교전을 벌일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목숨을 잃는 지름길이 될 것이옵니다. 이번 승리는 군대도 아닌 협잡꾼을 내쫓은 수준에 불과하옵니다. 하오나 서반아의 삼수군은 미주로 오지 않을 것이옵니다.”
“미주로 오지 않는다 하였느냐? 서반아의 왕이 진노하여 구주의 각국을 설득한다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겠느냐. 서로 협력한다면 하나로 합쳐진 힘을 아국이 감당할 수 없는 법인이다.”
주상전하의 말이 틀리진 않은 것이 지금 조선의 수준은 대충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고 잉글랜드를 세 국가를 합쳐서 반으로 나눈 수준이다.
한 개 국가 정도는 압도할 수 있지만 두 개 이상이 연합하면 대등하다.
하물며 지리적으로 불리한 미주에서 싸운다면 연합군이 결성된 순간 성형요새를 끼고 방어전을 벌여야 하리라.
그러나 유럽의 연합이라는 전제조건이 성립될 이유가 없으니 예전에 생각해 둔 대로 답하였다.
“서반아의 왕으로 즉위한 펠리페 3세는 기존의 대신들을 모조리 내쳤사옵니다. 아국에서는 새로운 신료를 등용하여 외교를 이어갈 수 있사오나 구주의 풍습은 각 가문의 인연을 중시하는 법이오니 외교적 단절을 행한 것과 같사옵니다.”
“소문은 들었지만 일개 제후(諸侯)가 국정에 관여하며 군왕을 대행하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구나. 그러하면 구주의 각 국가들이 연합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더냐.”
“당장은 연합하지 아니할 것이오나 아국이 물러서지 않으면 서로의 이득을 챙기기 위하여 연합할지도 모르옵니다. 신이 예전에 조언한 대로 선심을 쓰는 척 미주의 강역을 다시 정하시고 조약을 맺으시옵소서.”
상대가 펠리페 2세였다면 이 사건 하나로 조선은 어마어마한 곤욕을 치렀으리라.
그는 자존심과 능력이 정비례하는 인물이니 잠시 자존심을 접고 각국과 화해를 한 뒤 유럽 전체의 국가의 뜻을 결집해 조선을 압박할 것이다.
반면 지금 상대는 펠리페 3세이다. 능력은 부족하고 자존심이 충만하니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는 육군,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해군을 자존심 때문에라도 빼내지 못한다.
신료들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아예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말하였다.
“이미 서반아의 왕위에 오른 펠리페 3세를 만나보았으나 그는 군주라 불리기에는 능력이 일천하고 왕족이라 불리기에도 자만심이 비대한 이입니다. 둘 가운데 갈등하다 결국 아국과의 협상을 재개할 터이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펠리페 3세 따위가 네덜란드와 영국을 비롯한 적대세력과 화해할 가능성이라도 있겠는가.
기껏해야 누에바 에스파냐의 영토를 조금 더 내어주겠다고 선심을 쓰는 척 와서는 영토를 돌려달라고 애걸복걸하겠지.
이후의 일은 미시시피 강 유역을 내어주고 일대의 미주인들을 받아들이며 미주리 강을 경계로 삼은 영토를 획득하면 충분하다.
이대로 계속 알을 박으면 훗날 유럽 연합군과 싸울지도 모르니 한 발자국만 후퇴하면 충분하다.
* * *
유성룡의 예상대로 스페인의 대응이 시작되었다. 펠리페 3세는 조선은 믿을 수 있는 나라이지만 혹시나 모를 분쟁의 싹은 치워야 한다며 사절단을 급파하였다.
사절단이 오추세로 파견되었고 다시 오추세에 머물고 있던 함선과 함께 다짜고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였다.
마침내 음력 4월이 되어 유성룡이 건립한 후성부에 사절단이 도착하였다.
“관찰사님! 서반아 함선 스무 척이 강 하구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절단이 방문하였다 하니 어서 맞이하라는 일방적인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올 사람들이 왔군. 후성 시가지로는 안내할 수 없으니 성형요새에서 이들을 맞이할 것이다. 고란 자네도 나를 따라오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관찰사님의 말 들었는가? 대전사의 명령이니 가장 덩치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미주인 전사들 열 명이 나를 따라오도록!”
미주 파견과 동시에 대전사로 임명된 고란은 관찰사 이산보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유성룡이 필사적으로 만들어둔 삼중 성형요새, 이연이 영준관(英俊關)이라 명명한 요새 최상단으로 안내받은 스페인 사절단은 요새를 돌아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조선과의 영토 조약을 맺으며 콜로라도 산맥의 동쪽에 있는 첫 강을 조선의 땅으로 정했는데 이리도 멀리 나와 거대한 성형요새를 쌓다니! 여기까지 최소한 조선 거리로 일천 리(400㎞)나 되는데 유역이 없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는 조약 위반이오!”
“조약 위반을 일방적으로 말하지 마시오. 덮어놓고 함대를 끌고 와 아국을 겁박하며 큰소리를 치니 내 귀가 아플 지경이구려. 조금이라도 이성을 가지고 말하시구려.”
“이성이라 하였소! 그럼 내 조선의 영토를 시찰해 보아 첫 번째 유역을 판가름할 생각이니 나를 어서 안내하시구려. 바다로 향하는 모든 강을 조사해보고 유역을 판단하겠소.”
이산보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바락바락 우겨대는 스페인 관료를 보며 상대를 잠시라도 돌려보낼 변명거리를 생각하였다.
그는 유성룡의 후임으로 미주를 다스리며 이런 상황을 대비하였으나 당장은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혹여나 스페인에서 조사대를 파견하면 강물이 줄어들어 건천(乾川) 수준이 되는 겨울에 시찰하게 하며, 추가로 강 상류에 임시로 쌓아둔 보(堡)를 완성하여 강이라고 볼 수 없는 개천이라 설득하려 하였다.
문제는 지금은 음력 3월이라 한창 모내기를 실시하는 시기라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고란이 성큼성큼 걸어와 역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였다.
“조약 위반? 너희들도 조약을 위반하였는데 뭔 행패냐! 여기는 아국의 강역이며 너희는 아국과 동맹을 맺어 위기에 처한 상황이 아니라면 무장을 거두고 방문해야 하지 않느냐! 저 선박은 아국을 겁박하기 위한 방법이더냐!”
“이제는 위반을 넘어서서 아예 무력으로 협박할 작정이오? 애초에 건설하고 십 년도 지나지 않은 성형요새에 화포가 있어봐야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구려!”
“그 말은 선전포고라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으나 서반아는 아국과 동맹을 맺은 국가이니 내 참도록 하겠다. 여봐라! 대전사의 명이다! 모든 화포를 동원하여 연습 사격을 실시한다!”
고란의 태도를 확인한 스페인 사절단은 코웃음을 쳤다. 건축의 달인인 유성룡의 명성을 알고 있었지만 이 성형요새는 크기만 거대하고 아직 실속이 갖춰지지 않은 빈 수레에 불과하리라.
중앙에 세운 성형요새는 국력을 동원하여 화포를 만들 수 있지만, 조선 기준으로 가장 먼 변방에 세운 성형요새에 화포를 채우려면 함대를 동원해 운반해야 한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조선의 선박은 이 일대에 기껏해야 서른 척 정도만 드나들었다.
기껏해야 서양 기준으로 컬버린 몇 문과 셰이커 수십 문만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그 자신감은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저건 또 뭐야! 웬 바실리스크(Basilisk: 거점 수비용 초대형 화포)냐고!”
“이 요새에 배정된 천용포만 하여도 여섯 문에 달하는데 화력시험 한번 신나게 하겠구나! 화약을 아낄 필요가 없으니 최대 사거리로 방포하라! 잘못하면 서반아 선단이 휩쓸린다!”
김지의 역작이자 구경이 21㎝이며 무게가 구천 근에 달하는 천용포 여섯 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절단은 할 말을 잊었다.
저런 초거대 화포는 국가의 명운을 건 요새에 한 문 정도를 배치해 위엄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게 전부였다.
저런 초거대 화포에 직격당하면 군함도 한 방에 전투불능이 되고 공성용으로 축조한 참호는 아예 소멸해 버린다.
장전을 마친 천용포가 포대를 움직이며 미세 조정이 끝나자 이산보는 귀를 막고 충격에 대비하였으며 고란도 귀를 막으며 명령하였다.
“순차적으로 방포하라! 천용포 주변에 선 이들은 고막이 찢어지지 않게 각별히 유의하라!”
“대전사님의 명을 받들어! 방포!”
여섯 발의 굉음이 순차적으로 울렸고 천지가 화포의 충격으로 요동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포탄 가운데 한 발이 스페인 선단 근방에 떨어졌고 돛대 높이로 치솟아 오를 정도로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키자 선단은 모조리 먼 바다로 도주하였다.
스페인 사절단은 이명(耳鳴)에 시달렸지만 빙요 광산에서 채취한 구리를 마음껏 사용한 화포들이 줄지어 발사되었다.
뇌력포는 물론이요, 근접전을 대비한 비격진천뢰까지 쏟아지니 요새 전체가 희뿌연 연무로 뒤덮였고 고란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역시 화포를 쏘아야 전쟁에서 이기는 법이 아니오. 내가 예전에는 로베르토라는 사람의 팔뚝도 잘라보았는데 전쟁에서 결국 화포를 쓰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더군.”
“이게 말이나 되나! 조선에 구리가 얼마나 많기에 이런 외지에 저런 막대한 양의 화포를 설치하는 거요! 화약은 또 어디서 나왔소!”
“글쎄올시다? 아국의 강역이라면 이 정도의 화포는 당연히 있어야 하며 화약을 마음대로 사용함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탐구정신이 투철한 조선은 획득한 영토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기에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도 이런 거대한 요새를 유지할 수 있지만 스페인은 달랐다. 그들은 식민지를 만들고 수십 년이 지나야 이런 성형요새를 제대로 다룰 수 있었다.
식민지 파견군의 힘으로 공격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난 스페인 사절단은 황급히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세계 최고의 곡창지대인 동요현은 물론이요, 제대로 된 텍사스의 실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들이었지만 성형요새 한 건으로도 충분한 장계가 완성되었다.
장계가 도착한 마드리드의 엘 에스코리알 궁전이지만 펠리페 2세의 집권 시기와 달리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수많은 노신(老臣)과 고위 관료들은 온데간데없고 어중간한 젊은이들과 그들의 친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펠리페 2세 시절에는 서류가 산을 이루었던 집무실에는 몇 장의 간소한 서류만 널브러져 있었다.
보고서를 읽은 뒤 양피지에 작성된 조선과의 조약문을 확인하던 펠리페 3세는 젊은 치기를 드러내듯 분통을 터트리며 말하였다.
“이럴 수는 없다! 선친께서 어찌하여 이런 애매한 조약을 맺었는지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조선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멋대로 침탈하였는데 이를 멋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성형요새에 바실리스크 포라니!”
“실로 애매한 조약이오나 일단 산적한 문제를 처리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에스파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레르마 공작(프란시스코 드 산도발) 자네는 무엇이 중요한가. 당장에라도 테르시오를 연대를 파견하고 아르마다를 동원해…….”
자존심만 비대한 펠리페 3세는 국내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텍사스 일대를 공략할 준비를 하였다.
계획이야 아무나 세울 수 있지만 현실성을 가지려면 능력이 필요한 법인데 그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었으니 장광설(長廣舌)에 불과한 계획이었다.
“컬버린과 캐논을 잔뜩 올린 대형 갤리온 열 척 정도면 바실리스크 여섯 문과 대등한 화력전을 벌일 수 있겠지. 강이 제법 크다지만 서른 척 정도의 배로 파상공세를 펼치면…….”
“전하, 크나큰 문제가 있으니 테르시오가 빠져나가면 저지대의 전선이 순식간에 위축될 것입니다. 당장 프로테스탄트의 침략을 받는 저지대(현 네덜란드 남부)의 상황을 잊지 마십시오.”
“저지대 놈들도 누에바 에스파냐의 끄트머리에 식민지를 만들었는데 놈들을 설득할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돈을 좀 쥐여주고 휴전을 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
그 왕에 그 신하라고 대신으로 임명된 레르마 공작은 사치를 즐기고 복잡한 업무를 기피하는 상황이었다.
각지의 영주들과 세력들을 설득하는 수고를 계산하던 그는 계산조차도 귀찮았는지 아예 딱 잘라 말하였다.
“저지대의 이단자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휴전을 약속한 직후 바로 배반을 실시할 것이 아닙니까? 설령 그들을 설득하여 조선과 전쟁을 벌인다 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펠리페 2세의 유산이자 펠리페 3세도 애지중지하는 본차이나 찻주전자. 1번이라 번호가 매겨진 최초의 찻주전자를 들어 올린 레르마 공작을 바라본 펠리페 3세는 한참을 고민하였다.
그의 입장에서도 이런 복잡한 외교 문제를 통솔할 자신이 없었다.
외교업무를 주선할 사람은 펠리페 2세 휘하에 있는 노회한 신하 외엔 없었지만 이들을 리스본에서 불러오는 것도 자존심을 긁는 행위다.
더군다나 조선에서 들여오는 물품을 독점적으로 유럽에 보내며 위신을 챙기고 있었다.
여기에 레르마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원정 비용도 문제입니다. 최소한 삼백만 두카트에 달하는데 인삼과 승자기라는 기물을 비롯한 조선 물품의 수입이 끊기면 손실이 오백만 두카트가 넘어갈 지경입니다.”
레르마 공작의 설득이 이어지자 펠리페 3세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한참을 생각하며 자신의 자존심과 국익 가운데 저울질을 하였다.
그러더니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손해가 크다 하여도 저 거대한 땅을 조선이 멋대로 먹어치우는 꼴을 보고만 있을 셈인가? 이를 내버려 두면 스페인은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거라네!”
“전하. 자고로 조선은 동방의 강국이며 뒷배로 명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두고 있습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이니 조선을 설득하여 미시시피 강 유역을 우리의 땅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이후 우리가 누에바 에스파냐를 양보하였다 하면 될 것입니다.”
“누에바 에스파냐를 양보한다고?”
“그렇습니다. 펠리페 2세께서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영토를 재정의하였으나 전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양국의 관계를 존중하기 위하여 숨통을 틔워주었다 하면 될 것입니다.”
세력 사이의 구도를 정립해야 하는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이후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는 전쟁을 일으키면, 업무가 폭주할 지경이니 레르마 공작을 비롯한 경험이 부조한 관료들이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 양국의 관계를 존중한다는 말 몇 마디를 나누고 지도를 주고받으면 충분한 협정으로 처리한다면, 레르마 공작은 어떠한 업무도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거대한 지도를 가져와 펠리페 3세에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조선이 차지한 영토가 거대해 보여도 일대에 금은보화가 넘쳐날 리는 없습니다. 땅을 양도받으며 흉포한 원주민들을 모조리 조선으로 보내 버리시면 확고한 영토가 될 것이 아닙니까.”
“금광이나 은광이 있었다면 조선 측의 시세가 크게 변동되었을 것인데 오히려 시세가 소폭 상승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네. 그런 땅은 필요하지 않은 법이지.”
어떠한 금은보화보다 귀중한 텍사스 일대의 흑토지대의 중요성을 알아차릴 방법이 없는 펠리페 3세와 레르마 공작은 무능한 군주와 태만한 신하답게 가장 편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작가의 말
펠리페 3세의 성격을 요약하면 자존심이 어마어마한데 강한 상대에게는 함부로 싸움을 걸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약한 상대에게만 성질을 부립니다.
문제는 약한 상대에 자국민도 끼어있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나라를 착실히 말아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