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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539화 (539/573)

근육조선 539화

2부 30장 1화 호부견자(1)

오늘도 조선회사는 정신없이 돌아갔다.

연금이 점점 쌓이는 것은 당연하고 본차이나 거래수익으로 내수사에서 빌려온 자금을 착실히 갚아나가며 이제 본격적으로 돈을 빨아먹을 작업에 착수하였다.

장식을 만들던 젊은 장인들은 경험이 쌓여 도자기 몸체를 만들었고 이들의 뒤를 이어 각지의 도요(陶窯)에서 보낸 어린 도제들이 장식을 만들었다.

어린아이들이 혹사당하지 않을까 염려해 철저히 관리하는데, 고란이 불쑥 찾아와 인사를 올렸다.

“서애 대감께서 조선회사라는 곳에 머물고 계신다 해서 짬을 내어 찾아와 보았습니다. 얼마 전 왜국에서 귀환하였는데 통제사 대감은 도저히 만나지 못하겠고…….”

“고만도 자네가 여기 오다니 별에 별 일이 다 있군. 그나저나 작년에 고생을 좀 했다는 서신을 보내왔는데 대체 뭔 고생을 했나?”

고란은 일본에 머물며 기후가 습해서 별로라는 둥 매번 소를 도축해야 한다는 둥 불만을 담은 서신을 보내댔다.

그러더니 작년에는 이런 고생을 할 줄은 몰랐다고 푸념까지 늘어놓았다.

고란은 고생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답하였다.

“왜국을 통치하는 이달정종(다테 마사무네)이 군문과 연관된 일을 하지 않아도 좋다며 저와 휘하의 북인기병을 모조리 풍도(豊島: 현 도쿄)로 보내더군요. 그러더니 덮어놓고 물골을 막고 제방을 쌓으라 하였습니다.”

“거절하면 어떠하였나? 자네들은 군문의 일을 행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지 습지를 개척하라고 파견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는데 말이 운동을 하지 않아 군살이 올라와 말의 군살을 빼내고 힘을 붙이려고 잠시나마 일을 도와주기는 했습니다. 그러더니 이달정종이 이런저런 포상을 내리며 사람들 사이에 경쟁을 시키는지라 저도 만류하지 못하였습니다.”

전쟁은 더럽게 못 하면서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틀린 방법은 아닌 것이 북인들은 엄연히 소규모로 나누어진 여진족들이 연합한 형태이기에 자존심 대결이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면 내수린이라거나 고의는 아니지만 간혹 일어나는 살인 내수린 같은 것, 혹은 각 마을 간의 씨름을 빙자한 집단 구타대회 같은 것이다. 입신체비가 아니라면 아직도 서로 내전을 벌이며 살고 있겠지.

고란은 말을 마치더니 본차이나 그릇을 매만지며 말하였다.

“참으로 가볍고 화려한 그릇이로군요. 왜인 포로 가운데 고령에서 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깨우친 이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이 만든 그릇은 이것과 비교하면 개밥그릇 수준입니다.”

“개밥그릇이라 하니 너무 심하…… 지는 않군. 이게 백자라고 만들었는가?”

“이달정종이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었다고 휘하 영주들에게 나누어줬는데 직강겸속(直江兼続: 나오에 카네츠쿠)이라는 자는 개를 기르지 않아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그릇으로 쓴다더군요.”

일본제 백자는 경력이 일천한 장인들이 만들어서 붉은빛이 도는 유약을 사용했음에도 일그러진 형태가 보일 지경이었다.

이걸 본차이나와 경쟁시킨다면 정말 개밥그릇 수준이 될 것이 아닌가.

고란은 어느새 차를 따라 마시며 말하였다.

“이달정종은 싸움은 지독히도 못 하지만 예사 인물이 아닙니다. 습지를 삽시간에 개척하여 삼십 만 결의 농토를 만들어냈으며 이를 각 영주 사이에 분배하고 자신의 땅으로 십만 결을 가져가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십만 결에 불과하다고? 그러면 기껏해야 삼백만 석을 생산하지 않는가. 내가 알기로 왜국에서 명국으로 보내는 미곡의 양이 백만 석에 달하는데 대체 왜국의 세금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군. 사람이 오기는 하는가?”

“세금이 왜국에서 가장 낮은 삼 할에 불과하며 출신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왜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왔으니 자신의 이득은 생각지도 않고 모든 곡식을 명국에 팔아 채무를 갚는 중이지요.”

아무리 보아도 전쟁 말고는 다 잘하는 놈이 분명했다.

본래 저런 농토를 가지고 쌀을 찍는 상황에 무력을 키우지 않으면 다이묘들에게 협공당해 농토를 모조리 뱉어버리게 마련이다.

결국 군사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세금은 늘어나고 최소 세율 5할을 유지하는 법이다.

하지만 다테 마사무네는 이 모든 것을 상국인 명나라에 곡식을 댄다는 명분으로 무마하였다.

땅을 빼앗겨 식량 공급이 중단되면 만력제의 북경 복구공사에 차질이 생긴다. 당연히 만력제는 조선과 왜국에 서신을 보내 압박을 가할 것이요 땅을 되돌려 받을 수 있겠지.

고란은 괜히 힘을 쓴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제 호인 만도(滿都: 모든 도시)라는 호가 무색하게도 명성이 널리 퍼지지 않아 고민입니다. 경진만란이나 왜변 시절에는 재미를 좀 보았지만 이제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 가는데 재미를 볼 곳이 없군요.”

“그러하면 자네의 명성을 퍼트릴 수 있도록 미주 발령을 자처해 보게. 조만간 미주에서 영토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거기서 서반아에 자네의 명성을 떨쳐봄은 어떠한가.”

“저를 외방으로 돌아다니게 만들려는 마음을 품으셨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미주에 나아가 서반아와 교전을 벌이라. 이거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말이로군요.”

고란이 돌아가고 다시 업무에 돌아왔다.

오늘도 쌓인 보고서 가운데 외교 관련 보고서가 있는데 업무를 볼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을 찔러대는 건수가 있었다. 멋대로 미시시피 강까지, 영토를 조금 내어주어 양보한다 하여도 텍사스까지 확보한 미주 영토이다.

조약의 허점을 파고들어 얻어낸 영토이지만 언젠가는 스페인에 들통날 것이며 외교 분쟁이 시작되리라.

변명거리도 많고 미리 교섭 여부도 정해뒀지만 유능한 왕 펠리페 2세를 상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이놈의 펠리페 2세는 하루에 최소 12시간 이상 업무를 보면서도 환갑이 넘어서 정정하다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대체 언제쯤 죽나 했는데 필리핀에 파견해 외교 업무를 보게 하였던 이이첨이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서반아의 왕 펠리페 2세가 노환으로 명을 달리하여 그의 사남인 펠리페 3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미 주상전하께서 조문(弔問)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마침내 펠리페 2세가 세상을 떠났다!

순간적으로 환호성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사람들이 보고 있기에 혹시나 올라갈지 모르는 입가를 손으로 가린 다음 한참 동안 고민하다 말하였다.

“조금 부족한 것 같군. 구주는 군주 아래에 모든 신료들이 집결한 체계가 아닌 전조 고려와 흡사한 봉건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네. 각 신료들이 간단한 조의를 표하면 더욱 좋을 걸세.”

동양이라면 왕에게 임명받은 일개 관료가 하늘 같은 제후(諸侯)에게 조의를 표한다 하겠지만 서양에서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봉건체계로 각자 권한을 쥐고 있으니 옳은 판단이겠지.

유능한 군주인 펠리페 2세가 세상을 떠나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들인 펠리페 3세를 스페인에서 접견한 적은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자존심은 아버지와 대등한데 능력은 아버지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혹시나 무능력과 막대한 자존심이 결부해 쓸데없는 짓을 벌일까 의심되어 이이첨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이이첨은 뭔가에 씹혀 일그러진 것 같은 상처를 어루만지더니 태연하게 말하였다.

“혹여나 제 얼굴에 생긴 상처가 궁금하십니까? 아시다시피 새로운 점취를 만들기 위하여 여송일대에 앵무새를 기르지 않습니까? 놈들이 좀 자라니 날아다니는 가위나 마찬가지더군요.”

“자네가 제안한 일이니 자네가 담당함은 마땅하지. 그나저나 외조로 돌아갈 첩보나 좀 확인하고 싶군. 혹여나 외조에서 판가름하지 못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경진만란 당시 스페인이 처음 상륙한 민다나오 섬 남부의 만, 그들의 명명하기를 모로 만이라는 장소는 미주와 교환하여 영토로 삼게 하였다.

문자 그대로 씨를 말려 버린 장소이기에 인력 중 상당수를 조선에서 빌려 항구를 경영하고 있다.

당연히 외조의 입김이 닿은 사람들도 있어서 제법 많은 정보가 입수되었고 장계를 읽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친과 함께 정치를 행한 대신들을 모조리 포도아의 도읍인 리스본으로 쫓아내 분조(分曹)를 창설하였다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군.”

“포도아는 지금 서반아의 속국이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대신들을 쫓아낸 다음 요직에 친분을 가진 지인들을 임명하였으니 호부견자가 따로 없군. 엽관(獵官: 돈과 지위로 벼슬을 얻음)을 고용하는 구주의 풍습이 있다지만 이는 너무한 처사인데.”

호부견자라 하여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을 비꼬는 말이 있는데 펠리페 3세가 딱 그 꼴이었다.

점진적 교체도 아니고 기존 세력을 단번에 내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펠리페 3세의 나이는 21세에 불과하니 애송이들로 내각을 구성한 수준이다. 설령 그들의 부친이 있다 해도 기존 관료가 아닌 이상 능력도 경험도 부족하겠지.

잠시 머리를 굴리니 발칙한 생각이 떠올랐다.

외교는 국정운영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다. 외조도 정보를 수집하고 간단한 업무만 처리하되 중대한 판단은 주상전하와 삼정승 같은 노회한 관료에게 일임하지 않는가.

능력과 경험이 부족하면 복잡한 고려가 필요한 외교를 대충 처리하게 마련이다. 미주 영토 분쟁이 지금 일어난다면 막 즉위한 펠리페 3세는 대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리라.

이를 계산하고 주상전하를 알현하려 입궐하였다.

* * *

현 플로리다, 스페인 개척자들이 오추세라 명명한 땅에는 이미 사만여 명이 넘는 개척자가 자리를 잡았다. 개중 극소수는 퇴역 군인이며 대다수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건너온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이딴 놈들을 데리고 개척을 나선다니 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지만 지원자의 대다수가 이런 놈들이라니 방법이 있을까. 다들 짐은 챙겼는가!”

“챙겨 두었습니다! 원주민들을 몰아낼 총도 챙겼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군사에 관련된 어떠한 일도 경험하지 않고 그저 아르케부스를 몇 발 쏘아본 경험만 있는 애송이들을 확인한 퇴역 군인들은 한숨을 쉬며 그들의 장비를 점검하였다.

애초에 탐험대는 노련한 이들로 구성해야 하는 법인데 이들은 필요한 물자를 빼먹거나 대충 챙겨오는 경우가 있었기에 정강이를 걷어차며 쫓아내는 일이 필요한 법이었다.

삼백여 명에 달하는 탐험대에서 서른 명이 쫓겨난 다음에야 탐험대가 출발하였다.

그럭저럭 몸을 단련한 이들이었기에 행군은 거침이 없었다.

끝없이 동쪽을 향해 육로로 나아간 탐험대는 어느새 숙영을 실시하였고 이들은 일확천금에 부풀어 대장에게 다가가 질문을 퍼부었다.

“세바스티안 대장님이 보시기에 이번 탐험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내 직급은 대위이니 정정하도록. 탐험에 답은 없는 법이다, 방구석에 머물고 있는 학자들에게 우리가 금은보화를 떠먹여 주어야 가까스로 제대로 된 탐험으로 인정받는 법이지.”

“대자…… 아니, 대위님! 제가 예전에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학자들이 탐험에 나선다 하였습니다. 학자는 물론이고 양반이라 불리는 귀족들도 험난한 산을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더군요.”

“그런 헛소문을 믿는가? 조선인이 아무리 체격이 거대하고 헤라클레스의 후예처럼 활과 무술에 능숙하여도 엄연한 푸른 피(귀족의 상징, 살가죽이 타지 않아 드러난 정맥)가 흐르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네.”

탐험대의 대장 세바스티안은 별 같잖지도 않다는 소리를 듣고 콧방귀를 뀌었지만 이는 조선과 유럽 각국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말이었다.

조선은 새 영토를 발견하면 얻어낼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찾아내기 위해 기존 원주민을 가급적 포섭하고 많은 정보를 확보한다.

수많은 관원들을 보내 상세히 땅을 파악해 천연자원을 획득하는 탐구(探究)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유럽은 아직도 탐험(探險)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들에게 진정한 가치는 자신들이 힘을 들여 캐낼 천연자원이 아닌 위신을 확보하기 위한 영토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귀금속이 전부였다.

세바스티안은 모포를 덮으며 말하였다.

“한 달 동안 나아가 위대한 에르난도(에르난도 데 소토, 미시시피 강을 발견한 탐험가)의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강 하구에서 배를 통해 보급을 받고 더욱 서쪽으로 나아갈 예정이다.”

“거기에 가면 뭐가 있습니까? 듣자 하니 세스페데스라는 신부가 무작정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하였는데요.”

“세스페데스 신부를 만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니 죽었을 것이다. 혹여나 유해를 거둘 수 있다면 수습하도록 하며 주변 원주민들을 압박해 금광의 위치를 알아내도록 하지.”

한창 원주민에게 문명을 가르치는 조선 관원들과 입신체비를 배우고 있는 세스페데스가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말이지만 모두 당연하다 여겼다. 이런 변방에서 목숨을 잃은 성직자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오면 어마어마한 명성을 쌓을 테니까.

미시시피 강에 도착한 탐험대는 마중 나온 배에서 보급을 마쳤다.

그동안 야생동물을 사냥하여 소모된 탄환을 보충하고 보급품을 챙긴 탐험대는 강가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하였다.

세바스티안은 날카롭게 잘린 통나무를 보며 주변을 살펴보다 명령을 내렸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철제 도끼로 베어낸 목재로군. 뗏목을 만들었다가 실패한 모양인데 혹여나 조선 탐험대가 여기에 도착했을지도 모르겠군. 어서 화약을 터트려 신호를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총 준비해! 조선 탐험대와 분쟁이 생기면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적막한 미시시피 강에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저 멀리서 호응하듯 총성이 울리니 탐험대 모두가 영문을 몰라 지휘관을 바라보았고, 세바스티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 선언하였다.

“인근에 조선 탐험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으니 소수로 분열하여 주변을 헤집고 다니겠군. 원주민들과 분쟁을 하던 중에 우리가 개입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원주민과 조선 탐험대가 싸움을 벌인다니요?”

“탐험대의 앞길을 막으면 모조리 쏘아 죽여야지 뭘 하겠나. 상대적으로 총성이 적게 울리고 있으니 조선군이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잘만 하면 이득을 더 챙기겠어.”

탐험대 입장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몰아내야 할 적에 불과하였다. 자신들이 접근하기만 하면 다짜고짜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니 아무런 부담도 가지지 않고 총을 쏘아댔다.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 입장에서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약탈과 살육을 일삼고 질병을 퍼트려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탐험대는 조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적으로 여겼다.

이를 알 리가 없는 세바스티안은 명령을 내렸다.

“서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으니 한 몸으로 뭉쳐 다닐 수 없다. 지금부터 삼십 명 단위의 소대로 분열하여 나아가도록. 조선 사람들이 보이면 가급적 온전하게 대하고 원주민은 소탕하여 숲 건너편에서 만나도록 하자.”

“손이 근질거렸는데 참 잘되었습니다! 그나저나 놈들이 수백 단위로 몰려온다면 어떻게 합니까? 놈들이 아무리 총을 두려워해도 수 앞에서는 답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근에 총소리가 울리게 마련이다. 진격을 중단하고 즉각 주변의 소대를 지원하여 뭉쳐서 싸우도록 하라. 놈들은 기껏해야 어설픈 석제 무기만 사용하니 절대 지지 마라!”

혹시나 숲속에서 조선군을 잘못 쏘아도 오인사격이니 사과만 하면 충분할 것이라 여긴 세바스티안은 조선군을 염두에 두며 자신의 소대와 함께 숲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세바스티안의 움직임은 조선에 가르침을 받은 미주인들에게 모조리 포착되었다.

사방에서 울린 총성은 미주인들이 신호를 보내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원주민들은 탐험대가 도하를 실시하는 동안 숲 한가운데에 집결하여 전투를 준비하였다.

“동쪽의 여행자들이 다시 나타났다! 놈들이 우리를 보고 가만히 있다면 모르겠지만 먼저 공격한다면 놈들을 죽여야 한다. 다들 먼저 공격하지는 말고 먼저 모습을 비추어라!”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보이면 다짜고짜 총을 쏘아대지 않습니까? 사명대사께서 가르치신 대로 탄압(彈壓)하라! 탄환으로 놈들을 벌하라!”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이 숲을 놈들의 시체로 비옥하게 만들어라!”

미시시피 강 인근에 있는 숲속에 주변 부족의 전사들이 모조리 집결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영향을 받아 입신체비를 익히고 사명대사에게 산탄을 가득 담은 장총통의 사용법을 숙지한 전사들이었다.

다짜고짜 선제공격을 가하면 조선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미주인 전사 중 가장 서열이 높고 현명한 이가 세바스티안의 본대 앞에서 맨몸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세바스티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복식이 화려하니 저놈이 대장 같구나! 쏘아라!”

“이 미친놈들 이럴 줄 알았지!”

아르케부스에 화약과 탄환을 넣는 것을 확인한 전사는 쏜살같이 도망쳐 깊은 숲속으로 파고들었다.

세바스티안이 한참 동안 주변을 주시하며 확인해 보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전원 총에 화약을 넣은 채 행군을 실시한다. 혹시나 주변에 원주민들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장전을 끝낸 총은 화약이 흘러내려 가지 않도록 위로 꼿꼿이 세워야 하는 법이었다.

가슴에 총을 품고 숲을 가로지르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경계가 흐트러지게 마련이었고, 철저히 훈련받은 미주인들은 이런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작은 관목이 빼곡히 자리 잡은 구역으로 세바스티안의 소대가 나아간 순간 대열이 가늘게 늘어졌고 수풀 사이에서 장총통의 총구가 튀어나오며 불을 뿜었다.

역사 최초로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용한 화약병기가 유럽인의 목숨을 앗아간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펠리페 2세에게서 자존심을 두고 능력을 빼면 펠리페 3세가 됩니다. 호부견자의 이상적인 표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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