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36화
2부 29장 8화 천제사(天祭祀)
만력제와 헤어져 주상전하께 장계를 올리고 요동으로 진로를 잡으니 독고율, 정확히는 이여송이 저지른 파괴의 행적이 곳곳에 보였다.
처참하게 무너진 산해관과 요서회랑의 요새들을 지나치며 도적 잔당을 소탕하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거 싸울 맛도 나지 않는 놈들이 도처에 깔려있군. 북경에서 싸웠던 놈들은 독하기가 그지없었는데 여기 있는 놈들은 적당히 두드려 패면 죄다 항복이라 하네.”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독고율을 따라 북경을 함락한 이들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일국의 수도를 약탈한 이들일세. 그들은 연이은 승전과 북경에서 얻어낸 수많은 재물로 충성심이 마음속 깊숙이 박혀 버렸다네.”
세상 어떤 사람이 이런 경험을 하겠는가. 이여송의 군대의 주축인 20대 요동 청년은 일개 변방의 촌부(村夫)의 아버지를 뒀으리라.
아버지라는 이들이 흙이나 파먹고 일이 좀 힘들어지면 칼을 빼 들고 주변을 약탈하는 도적질이나 해왔겠지만.
그런 판국에 어린 시절에 북원의 침입으로 일대가 쑥대밭이 되고 다시 조선의 별동대가 순시 겸 도적 소탕을 한답시고 날뛰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요동 경략을 자처하는 독고율 외에는 없었으리라.
독고율의 통치 아래에서 성장하고 훈련을 거듭하여 마침내 천명을 무너트리는 대업을 이룩한 이들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재물을 받았다면 충성심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리라.
앞으로 벌어질 난리에 한숨을 쉬니 임차손은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혹여나 후일이 되어 황제가 태업을 하면 북경을 보수하는 일을 자네가 할 것이라 걱정하고 있는가? 황상께서는 무얼 그리 고민하시는지 모르겠군. 나 같으면 남경으로 천도할 걸세.”
“남경으로 천도하면 당장의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후일에 더욱 큰 문제가 벌어진다네. 도읍이 화재로 파괴되었다고 방치하면 명국의 체면은 무엇이 되며 천명이 어찌 되겠는가? 황상께서는 억지로라도 북경을 복구해야 할 처지일세.”
뭘 해도 명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북경을 보수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대연의 잔당들은 이를 천명이 무너진 뜻이라고 주장하며 사방에서 발호하리라.
그렇다고 북경을 보수한다면? 십 년 동안 은자 천만 냥의 추가 세입을 거두어야 하는데 이미 명나라의 세금제도는 엉망이 되었다.
일부 계층에 국한한 과도한 세금부과로 백성들이 도적으로 탈바꿈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도적이 사방에서 발호하리라.
그나마 명나라의 명줄을 오래 붙여놓으려면 만력제가 최대한 검약하고 세입을 정돈하며 자신의 내탕금을 모조리 내놓아야 하는데 이걸 해도 잘해야 50년을 버틸까 궁금한 수준이다.
어느새 요동의 중심지인 심양으로 향하니 이순신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북경에서의 일은 서신을 통해 받았다네. 참으로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나. 나는 그동안 조금 힘을 써서 도적들을 물리치고 심양성을 되찾았다네.”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군. 도적들이 죄다 명국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피해가 얼마나 되는가?”
“도적 삼천여 명을 무찌르고 오십여 명 정도 명을 달리하고 이백여 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네. 그나저나 서애 자네와 승우(임차손의 자)가 꼭 봐둬야 할 것이 있으니 잠시 나와보게.”
이순신은 이미 전장 정리가 끝난 상황이라 약간의 호위 병력만 데리고 심양 일대를 순시하였다.
이전에 시찰할 때도 보았지만 요동은 이여송의 통치 이후로 사람이 사는 것 같은 지역이 되어 있었고 한 노인이 우리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새로 부임하신 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듣자하니 조선 분들이라 하셨는데 저희가 모시던 경략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독고율에 대해서 저렇게 묻는 이들이 넘쳐나고 그의 치적을 칭송하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네. 나는 따로 답해줄 수 없으니 자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한때 칼을 잡고 도적질을 하였는지 노인의 몸에는 쭈글쭈글한 주름과 함께 날붙이로 인한 흉터가 제법 보였다.
이런 흉포한 도적을 어찌 교화하였는지 모르겠는데 조선이 요동을 통치하게 된 시점에서 답할 수 있는 것은 답해줘야지.
“요동경략 독고율은 세상을 떠났네. 그 휘하의 병사들은 황군과 맞서 싸우다 아국에게 후방을 기습당해 대다수가 죽거나 도주하였고. 혹여나 친인척을 찾으러 가길 원하는가.”
“아…… 아닙니다! 제 둘째 손자 녀석이 보인으로 참가하여 행방을 묻고 있었습니다. 싸워서 패배하였다면 저희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 것만 하여도 천만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여 보니 연좌제를 적용할 수도 있기는 하군.”
연좌제라는 말이 나오자 노인과 함께 밭일을 하던 사람들이 움찔거렸는데, 그야 당연한 것이 이들의 친인척은 죄다 명나라를 향해 칼날을 돌린 반역자들에 속한다.
만약 요동이 명나라의 땅이 되었다면 이들은 모조리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 조선의 영토가 되었으니 일종의 유예(猶豫)를 받은 셈이지.
이들은 모조리 절을 올리면서 우리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제 손자가 죽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이제야 사람답게 먹고살 길이 열렸는데 이 비루한 목숨을 내버려 주십시오! 아무 말도 없이 마소처럼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나겠습니다!”
임차손은 도적 주제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편곤으로 두들겨 패려 하였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요동의 인구는 대략 140만이요, 군대로 참여한 이들이 정군 4만에 보인 4만에 달하니 연좌제를 대충 적용해도 대략 30만가량을 처형해야 한다.
심지어 연좌제를 피해갔다 하여도 모든 재산을 갈취당하고 노비 신세가 되거나 형무소행이 되는 실정이다.
사실상 요동 인구의 대다수는 언제라도 벌을 내려 목숨을 거둘 수 있게 된 꼴이 아닌가.
나는 모두가 듣기 편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엄숙하게 말하였다.
“지금은 호적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인구도 명확하게 판명하지 못하였으니 벌을 내리지 않을 작정이네. 다만 앞으로 변란이 일어난다면 유예한 반역죄를 일괄 적용하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변란을 일으키느니 변란을 일으킬 놈이 생겨나면 먼저 잡아다 바치겠습니다! 다들 들었나! 앞으로 변란의 변자도 내놓지 말게!”
“거참 도둑놈의 새끼들을 잘도 믿는군.”
임차손이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나는 그냥 편히 웃으며 말머리를 돌려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약간의 군관만을 남겨두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명나라 군대가 왔다면 식칼이라도 들고 싸웠겠지만 상대는 조선군이다.
주변에 접근하는 모든 상대를 몰살시키는 화력 덕분에 싸울 엄두도 나지 않으며, 산속으로 숨으면 기괴한 복장(람보복)을 입은 임해도감 병사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박살 내니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리라.
나는 코웃음을 치며 임차손에게 답하였다.
“자고로 힘이 있으면 도적들이 알아서 복속하는 법일세. 지금이야 힘에 억눌려 있지만 온전한 관리를 보내고 제대로 통치하기 시작하면 삼십여 년이 흐를 때쯤 요동은 온전히 아국의 손에 들어올 것이네.”
“틀린 말은 아니로군. 혼란스러운 요동을 경험했던 놈들은 대충 쉰이 되면 골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이며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아국의 말을 배우고 아국의 복식을 입게 되겠지.”
처음은 형벌에 의거하여 기강을 잡고 차츰차츰 온건한 통치로 방향성을 변환하면 충분하겠지.
요동에서 다시 의주를 넘어 개성까지 내려오니 만력제가 그 사이 사신을 보내두었다.
만력제와 함께 남경으로 내려갔던 병부상서 양호가 도착해 인사를 나누었다.
“황상께서는 남경으로 일시적으로 돌아가시어 인력을 충원하고 내탕금을 모조리 털어 처음 삼 년간의 보수비용을 책정하였습니다. 다만 앞으로 갈 길이 머니 제가 죽을 때까지 근면히 일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저희 조선도 번국으로서 많은 일을 돕겠습니다. 우선 요동의 도적들을 다스리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하니 당분간 금전적 지원은 힘들 것 같습니다.”
변명은 미리 해두어야 좋은 법이다.
임차손과 이순신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두 명장(名將)을 알고 있는 양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도성에 돌아와서도 앞으로의 정황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이 어떠한 정책을 펼쳐야 천명이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명나라에서 이득을 챙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데 군관이 다가와 귓속말을 하였다.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시어 명국에 계실 동안에는 소식을 전하지 말라 하였지만 참으로 불민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주상전하께서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기시게 되었습니다.”
“창경궁으로? 창경궁은 상왕께서 머무는 거처인데 어찌하여 옮기셨단 말인가?”
장마가 거세게 쏟아지고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니 승전도 패전도 아닌 어중간한 전투를 벌인 우리를 비꼬는 것 같았다.
양호는 비를 일부러 맞으며 하늘을 올려보며 말하였다.
“이런 비가 당시에 내렸다면 북경이 모조리 불타버리지 않았을 것인데…… 하늘이 무심하고 덧없으니 제 마음이 빗줄기를 맞을 때마다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화재와 동시에 비가 내렸다면 최소한 명나라가 박살 날 일은 모면했으리라.
일단 군대가 돌아왔으니 장졸들을 북한산성으로 보내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장수들과 일부 장교만 남긴 채 도성으로 들어왔다.
양호는 한사코 주상전하를 만나 지금의 사태를 전하고 싶었는지 내 뒤가 아닌 앞으로 나설 듯이 말을 거칠게 몰았다.
무의식중에 경복궁으로 방향을 정했는데 멀리서 경복궁의 모습을 보자마자 주상전하께서 왜 거처를 옮겼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세상에! 경복궁은 조선의 본궁(本宮)이 아닙니까? 저게 대체 뭔 몰골이란 말입니까!”
양호는 체면도 무시하고 손가락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가리켰는데, 중층 건물인 근정전의 지붕 중 우측 지붕이 완전히 박살 나 흉한 몰골을 가리려고 거적을 덮어 임시 조치를 취했다.
내가 문화재를 제법 복원해 보았지만 저런 형태의 붕괴는 흔하지 않다. 목조 건물은 기본적으로 조립식이며 못과 철사로 부재를 엮어두니 무너지면 한 번에 박살 나는 법이었다.
대체 왜 저런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였기에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북경이 도적들의 참화로 불탈 무렵에 근정전에 벼락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저렇게 파손되려면 벼락이 떨어져서 양기(陽氣)가 스며들어 젖은 목재를 부숴 버린 것이 분명하지요.”
“벼락이 떨어졌단 말입니까? 자금성이야 나무가 외곽에만 약간 심어져 있으니 벼락이 자주 내리치지요. 반면 경복궁에는 자금성과 달리 수많은 나무가 벼락을 막아내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영락제의 편집증적 태도로 건축한 자금성은 벼락을 직격으로 맞지만 경복궁은 보수하는 비용 때문에 나무를 많이 심어둔다.
이마저도 낙뢰가 많으면 힘을 못 쓴다지만 본래 피뢰침 역할을 하여 벼락을 막아냈을 나무는 모두 멀쩡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는데 왜 벌어졌을까 원인을 분석하는 와중에 양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한탄하였다.
“화기(火氣)가 천명을 범하였으니 번국 또한 화마에 침습당할 일을 겪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 참담하고 암담한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니 서둘러 움직입시다.”
북경에 난 화재가 조선의 궁궐을 박살 냈다는 소리를 하는 양호였는데, 이 시대에는 상국이 덕으로 번국을 다스리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창경궁으로 돌아와 보고를 올리자 주상전하께서는 내 손을 맞잡아주시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후들거리는 손은 상체를 한 후유증이 분명하며 목소리는 억지로 쉰 소리를 내는데 일단 입신체비로 피폐해진 얼굴로 말하니 양호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미 장계를 통해 정황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며 하늘이 무심하기 그지없구나. 아예 명국과 합의하여 일을 진행하였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이 부족하여 천기(天機: 중요한 기밀)를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며 도적 독고율의 황망한 행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북경이 불타게 되었나이다. 부디 신을 벌하여주시옵소서.”
“아니다, 황군이 패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수습하였으니 이를 벌한다면 세상 어떠한 사람이라도 벌할 수밖에 없구나. 다만 본인이 처벌을 원하니 당분간 우의정의 업무를 중단하며 근신토록 하여라.”
말이 근신이지 사실상 휴가나 마찬가지이지.
내 이야기가 끝나고 논공행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출장비 정산이 끝나자 양호의 차례가 되었다.
고개를 깊게 숙인 양호는 서두를 벼락을 맞은 근정전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상국이 독고율이 저지른 화마에 피해를 입었으니 이 화가 머나먼 번국 조선에까지 미친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의 왕께서는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양호는 이 시대의 논리로 옳은 말만 골라서 했다.
아직 미신이 횡행하고 있으니 천기, 즉 날씨가 하늘의 뜻이며 왕이나 황제는 하늘이 노하여 벌을 내리지 않도록 덕을 가지고 통치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다.
물론 조선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사실상 사문(死文)에 가까울 정도로 약화되기는 하였다.
본래 역사에서 단종, 여기서는 세조라 불리는 왕이 치세 말엽에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해 사림파와 언쟁을 벌인 일화가 떠올랐다.
-근래에 들어 구풍(颶風: 태풍)이 아국에 엄습하여 전라도의 농경지가 침수되고 수많은 이들이 가옥과 농토를 잃고 떠돈다 하옵니다. 부디 덕을 가져 나라를 통치하시고 군대를 상당수 폐하여 이를 벌충할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병사를 보내 피해를 보수할 것이니 예산은 줄일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참으로 좋은 의견을 내었다. 내 마음도 편치 않으니 지방에 은거한 유생들을 모두 불러 모아 덕에 대하여 논해보자꾸나.
세조가 제안하자 산림지사라 불리는 사림파들이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와 의견을 내놓았다 하였다.
개중에 제대로 된 의견을 내놓은 사람은 칭찬하였지만 나머지는 따로 모아 세조가 불벼락을 떨어트렸다.
-구풍은 수많은 이들이 증언하기로 머나먼 남양(南洋)에서 생겨나 여송에 피해를 입히고 북상해 아국에 피해를 입힌다 하였다. 그러한 구풍은 여송의 호족의 부덕함이 만들어냈는가? 내 부덕함이 만들어냈는가?
당연히 실무 능력이 없는 사림파이니 뭐라 답할 수도 없었다.
세조가 부덕하다 하면 조선의 영향을 받는 필리핀 호족들이 덤터기를 쓴 것인데 이렇게 되면 조선이 다른 나라를 음해한 꼴이 된다.
그나마 머리를 굴려 필리핀 호족들이 부덕해 일어났다고 변명을 했다더라.
당연히 세조는 극히 격노하여 정말 부덕한 이들이 여송에 있는지 확인해 보라며 모두를 필리핀으로 발령시켜 십 년 동안 죽도록 고생시킨 사건이 있었다.
천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실을 알아차릴 때까지 돌아오지 못한다는 엄포를 한 데다 당시 필리핀은 조선 영향권 끄트머리에 있었으니 이들의 고생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었다던가.
주상전하는 양호의 말을 듣더니 한탄하듯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유성룡을 명국으로 보내고 불길한 징조가 일어나 도성의 모두가 불안해하던 차였네. 전라도와 경상도에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이 시작될 징조가 보였으니 궐을 깨끗이 정돈하여 기를 다잡으려 하였지. 그러던 중 근정전의 기와가 틀어진 것을 발견하였네.”
“그렇다고 그 거대하고 튼튼한 건물이 기와가 틀어져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마가 시작되어 빗물이 스며들면 아무리 거대한 건물이라도 나무가 썩어 무너지는 법이니 관원 가운데 손재주가 빼어난 이산두를 시켜 근정전의 기와를 새로 올리라 하였네. 공사가 신속히 진행되어 소식을 담은 장계가 도달하기 이틀 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네.”
이산두는 토정 이지함의 장남이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 아이디어인 피뢰침을 통한 벽조목 양산으로 여전히 큰 수익을 거두는 사람이었다.
주상전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
“다만 기와를 막 올린 건물은 지나치게 많이 올린 흙이 비에 쓸려 내려가 주변이 더러워지는 법이니 정전에 아무도 들이지 않고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네. 마침 시기가 좋게 비가 내렸는데 하필 벼락이 내리치며 건물이 무너지더군.”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여나 다치거나 손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습니까?”
“마소(馬牛)조차 온몸이 진흙으로 젖는 일은 피해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내가 천기를 읽지 못하여도 철저히 준비한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고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네.”
이건 대놓고 명나라를 엿 먹이려는 주상전하의 수작이 분명했다.
피뢰침의 소문을 들은 분이니 이산두를 시켜 지붕 기와 사이에 금속을 하나 끼우라 해서 근정전으로 벼락을 유도했겠지.
만력제가 승리를 거두면 재앙을 조선이 대신 입었다는 신호가 되며, 아예 북경을 날려먹었으니 명나라가 감당하지 못한 재앙이 조선의 궁궐까지 침범했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아무 희생자가 없다는 더 중요하다.
번국의 왕은 상국으로 인해 일어난 재앙을 막아냈는데 상국의 황제는 대체 뭘 하냐는 정치적 압박까지 겸한 신의 한 수이다.
양호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고 주상전하는 태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답하였다.
“근정전을 뿌리부터 다시 쌓기 전에 화를 몰아내기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릴 작정이네. 당장에라도 근정전을 다시 쌓고 싶지만 재앙이 또 닥칠지 어찌 아는가.”
“근정전을 다시 쌓으시되 격과 형식을 따지지 마시옵소서. 또한 이번 변고로 인해 하늘이 노한 것이 확실하니 조선의 이름으로 제사를 올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에서도 기우제를 올린다지만 이는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것이지 하늘에 주관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
조선은 이렇게 격이 낮은 하급 제사만 올릴 수 있다.
본래 하늘에 주관하는 제사는 명나라 황제의 의무이다. 이제 조선에서 하늘의 뜻을 돌리는 제사를 지낸다 했는데 대놓고 만력제를 비판하는 수준의 강도 높은 행위이다.
양호는 이런 행위를 눈앞에서 보고도 그저 동의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가의 말
이연 : 천명 작살나셨네요? 이제 하늘에 제사 올려도 되죠? 니가 잘못해서 우리가 화를 입었잖아? 아 열받네? 이제 동맹국 콜?
만력제 : (부들부들) 제사 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