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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535화 (535/573)

근육조선 535화

2부 29장 7화 요동 획득

음력 5월의 북경은 건조하다 못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날씨이지만 날이 밝고 전장이 정리될 무렵 잔잔한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임차손은 십 년은 늙은 얼굴로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내 생전 그렇게 독한 놈들은 처음 봤다네. 수십 놈을 두들겨 박살 내었지만 장수가 사력을 다해 내 편곤을 움켜쥐어서 비상용으로 품에 넣어두었던 나팔총을 쏘아버렸지 뭔가.”

“이미 본진으로 돌아와 부상을 치료한 기병들의 이야기를 들었네. 그나마 자네가 후방으로 돌격한 덕분에 황상께서 무사하시지 아니하였다면…….”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지만 만력제의 병력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5만여 명에 달했다.

우리가 끼어들지 않아도 재정비하여 제대로 싸웠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으리라.

어디까지나 만력제가 제정신을 차리고 지휘권을 각 장수들에게 일임하였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저 멀리 북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제정신일 이유가 만무하였다.

임차손과 함께 부상병을 치료하는 막사로 들어왔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어찌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사방에 부목을 대고 지금도 뒤틀린 뼈를 맞추느라 재갈을 문 채 비명을 참아대는 명나라의 태자 주상락이었다.

그는 치료가 끝나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태연하게 나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유 독사의 공이 크고도 막대하니 가까스로 비루한 목숨을 건졌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구원을 받게 되니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구려.”

“은혜라 하시니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말씀을 하고 계시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어서 건강을 되찾으시고 황상께 인사를 올리시옵소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한 주상락이지만 위기를 넘겼으니 다행이다.

우리를 따라온 허준은 명나라 태의들에게 보낼 처방을 정리하더니 한숨을 쉬며 나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태자 전하께서는 아마 불구가 되실 것입니다. 도적놈들이 어찌나 잔혹한 고신을 하였는지 하초(下焦)의 골격이 뭉그러질 지경이 되셨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우리는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제대로 된 시설에서 치료를 받게 하시오.”

임차손도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위로하다 한숨을 내쉬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이슬비로 얼굴을 훔친 임차손은 질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다시는 이런 전투를 하지 않을 작정일세. 주상전하께서 위기에 처하셨다면 나 홀로 돌격하여 초연히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지금은 상국의 일이 아니겠는가.”

“여부가 있겠나. 나도 이런 황망한 일을 겪게 하여 참으로 유감일세.”

전장을 가로지르다 이여송으로 추정되는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기억력이 워낙 뛰어나니 산탄에 맞아 함몰된 얼굴 위쪽이 아닌 턱의 선만 보아도 얼굴이 떠오를 지경이 아닌가.

임차손은 아직도 편곤을 움켜쥔 그의 몸을 걷어차 편곤을 빼내면서 말하였다.

“이놈이 혹여나 독고율이 아닐까 의심해 보았는데 얼굴에 이미 상처가 있는 데다 한밤중이라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었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복식이 제법 화려하지만 독고율은 아니로군. 황제라 망령되이 칭하는 자가 전선에 서서 자네와 싸웠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정 마음에 걸리면 머리가 박살 난 기병 시신을 독고율이라 칭해도 될 것이네.”

“악다구니 하나는 차고 넘치는 놈이었는데 독고율이 아니었다니. 하기사 황제를 자처하며 죽으려고 달려드는 놈이 진짜 황제일 리는 없었으니 별 기대도 안 하였네.”

“이미 독고율이 명을 달리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다네. 아마 오위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이 그의 목숨을 끊었을 것이니 결국 자네의 공이 아니겠는가?”

임차손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여송과 맺은 약속은 지켰다.

여름 무더위에 시체를 매장하는 수고를 감안해 볼 때 이여송을 비롯한 사망자들의 시신은 한 곳에 묻어서 대충 화장할 테니 그의 시신이 모욕당한 일은 없겠지.

조선군이 전장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적 잔당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사방으로 도주하였고 3만5천에 달하는 대연의 정병(正兵) 가운데 포로로 잡히거나 죽은 이들은 1만3천에 불과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병사들이 패잔병이 되어 도주한 것과 지금처럼 사방으로 빠져나간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으로 파견한 병사들이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피난민과 실랑이를 벌이던 도적 십여 명을 추포하였습니다. 반면 흔적이 길가에서 사라진 도적들도 있으니 성공적으로 피난민의 대열에 합류한 모양입니다.”

“나루터까지 흔적을 추적하였지만 나루터의 배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도적들이 배를 타고 상류로 올라갔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계속 추적할 수 없어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소득을 거두지 못해 난색을 표하는 병사들도 있었고 간혹 떼로 뭉쳐 움직이는 패잔병을 사로잡은 병사들도 있었다.

그래 보았자 얼마나 빠르게 달아났는지 새로 추가된 포로가 2천 명에 불과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네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추격하였는데 고작 이천여 명밖에 잡아들이지 못하였다고?”

그나마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인들은 뒤늦게 도주하여 대부분 사로잡았지만 정군과 보인을 합쳐 7만에 달하는 대연군 가운데 2만이 도주하였다.

포로를 만력제에게 보내라 명령하니 전장을 정리하던 장교가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도원수께 반드시 보여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도적놈들의 시신을 살펴보십시오.”

“포탄 파편에 맞아 두개골이 박살 난 시신이 아닌가. 보기 흉하니 당장 태워…… 품 안에 뭐 이리 많은 금을 숨기고 있는가? 혹여나 북경에서 약탈한 금이란 말인가?”

피와 진흙에 범벅된 시체를 이리저리 들춰보니 몸에서 금과 진주 심지어 조선에서 수입한 삼한석(탄자나이트)까지 발견되었다.

대충 은자로 250냥 정도의 재물이어서 약탈을 잘했나 싶었는데 다른 도적들의 시체도 대동소이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놈도 저놈도 그냥 이 벌판에 있는 모든 도적들이 거의 같은 양의 재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주하지 못한 보인들을 잡아두었는데 옷을 벗기니 금은보화를 모두 가지고 있더군요.”

광기에 찬 돌격을 불사한 대연군의 본진과 모두가 평등하게 나눠 가진 것 같은 금품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여송이 정말 명나라를 뿌리째 뒤흔들 작정인 것 같으니 심문해 볼 작정으로 군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포로로 잡힌 도적 가운데 황군에 보내지 않은 도적을 데려와 심문할 준비를 하게. 아니, 내가 직접 심문하는 장소로 향하겠네. 등 지휘동지께서는 어디에 계시나?”

마침 나와 인연이 있는 등자룡이 포로로 잡힌 대연군을 심문하고 있었다.

등자룡은 내가 찾아왔다는 보고를 듣고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게 따로 마련한 막사로 나를 안내하였다.

“한창 도적들을 심문하고 있었지만 고신(拷訊: 고문)을 하여도 입을 다물고 있더군요. 몇 놈을 즉석에서 처형해 보았는데도 따로 말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대체 도적들이 어떠한 생각을 품었기에 이리도 독하단 말입니까.”

“도적이 망령되이 대연이라는 국호를 칭하였지만 국호를 칭한 시점에서 충심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제가 잠시 심문을 행해보겠습니다.”

누가 가혹한 형벌로 유명한 명나라 아니랄까 봐 곤장을 시작으로 채찍이나 살가죽을 벗겨내는 도구까지 다채로운 고문도구가 막사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조선은 죄인을 형무소에 투입해 최대한 많은 이득을 챙겨야 하니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지만 여전히 대명률을 적용하니 별 방법이 있나.

한참을 두들겨 맞았음에도 눈을 부라리는 도적에게 점잖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독고율은 전장에서 명을 달리하였는데 충심을 보낼 사람도 없지 아니한가.”

“폐하의 휘를 망령되이 늘어놓지 마라! 대연의 명운은 다하지 않는다! 내가 곧 대연이며 우리 모두가 대연이다! 네놈은 폐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한다! 어서 죽이란 말이다!”

“혹여나 독고율이 자네들에게 금은보화를 나눠주어 패전 이후에 대연을 재건하라 하였는가.”

혹시나 했는데 포로의 안색이 굳어지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도 뭐라 답해야 하는데 이여송의 흉악한 생각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한이 어찌나 깊었는지 명나라를 뿌리부터 뒤엎을 짓을 저질러 버렸다.

이미 천명이 무너지고 위신이 바닥을 쳐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날 명나라에 금은보화를 짊어진 도적들이 합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스페인 테르시오와 흡사한 제대로 된 훈련을 실시한 도적이며 가지고 있는 재물은 최소 은자 이백 냥 이상에 달한다. 거의 4인 가족의 12년 생활비인데 이걸로 끝이 아니다.

불만을 품은 농민 이십여 명에게 창과 갑주를 구해다 줄 수 있는 능력과 이들을 어설픈 군인으로 훈련시킬 능력을 갖춘 이들이다. 이만 명의 도적은 조만간 오십만 명으로 늘어나리라.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하였는데 등자룡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달려들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패전 이후 대연을 재건하다니요! 그런 황망하고 참담한 말을 거리낌 없이 하다니 독고율은 대체 제정신이란 말입니까! 네놈은 똑바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어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라!”

등자룡은 내 말을 듣더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징이 박힌 몽둥이를 들고 포로를 후려치려 하였다.

내가 일단 손을 내밀어 등자룡을 제지하자 포로는 끅끅거리며 흐느끼다 미치광이처럼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뭐라 하였느냐! 내가 대연이며 우리 모두가 대연이다! 황제폐하께서 대연의 진정한 후예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두에 서셨는데 그 자리에서 죽거나 도주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어서 나를 쳐라! 몽둥이로 쳐서 폐하의 곁으로 보내란 말이다!”

“닥쳐라 이 망종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몽둥이를 휘둘러 포로의 머리통을 후려친 등자룡은 몽둥이를 떨어트리더니 손과 발을 바들바들 떨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황상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입을 다물어주십시오.”

“우리 둘이 입을 막는다 하여도 소문은 퍼지는 법입니다. 지금 당장 사방으로 퍼진 독버섯을 짓밟아 조금이라도 참극을 막을 생각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이라면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다.

한양이 불타고 오위가 패배하려다 명나라 지원군이 위기를 구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정해야 하지만, 일단 사방으로 2만여 명의 도적이 퍼졌다 가정해도 압도적인 행정력으로 무마할 수 있다.

그래 봤자 끝없는 두더지 잡기 놀이와 마찬가지지만, 호적을 통해 새로 유입된 사람을 찾고 지방관이 지휘하는 병력들이 사방으로 소탕작전을 벌여야 하니 10년 이상이 소모되리라.

반면 이갑제가 붕괴된 명나라의 행정력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사태를 수습하려면 변란이 일어난 다음에 군대를 움직여야 한다.

나와 같이 이 끔찍한 상황을 예상한 등자룡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항복하듯 답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저희를 구원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이지요. 조선군을 대표하여 황상께 인사를 올리고 전후 처리에 대하여 논하여 봅시다.”

만력제가 과연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기나 할까. 밖으로 나오자 조선의 오위가 전리품으로 삼을 포로와 시신, 그리고 대충 치료한 명군의 중상자를 옮기기 시작하였다.

기세가 삼엄한 오위군이지만 명나라 군대의 상황은 개판이 따로 없었다.

“도적놈들의 몸에 금은보화가 있다 하였다! 어서 시신을 발가벗겨라!”

“이건 진주가 아닌가! 여기에는 삼한석이 있다네!”

“네놈들은 지금 조선의 원병(援兵)을 앞에 두고 무슨 추잡한 짓거리를 하느냐! 시신을 한군데 모아둬 분류하기 쉽게 하라! 군기를 어지럽히는 놈은 즉각 참(斬)하겠다!”

말 그대로 개판이 따로 없었다. 조선군이야 전리품을 한군데 모아 군자금으로 소모한 비용을 제외하여 장수가 알아서 분배한다. 반면 명나라 군대는 그런 이유가 없이 알아서 전리품을 착복하는 법이었다.

시신을 옮기는 척 더듬어 금을 갈취하는 몰골을 보는 조선군은 황군을 아예 벌레 보는 눈빛으로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독고율의 진영에서 얻어낸 수많은 은, 부피 대비 가치가 부족한 재물들도 속속들이 옮겨졌다.

혼절한 태자도 만력제를 따라온 태의들에게 넘겨두고 드디어 만력제를 배알하게 되었다.

거대한 막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만력제를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신 유성룡, 원병을 이끌고 뒤늦게 도달하여 황상께 폐를 끼쳤사옵니다. 부디 이 죄를 뉘우칠 수 있도록 황제폐하를 알현할 수 있기를 빌 뿐이옵니다.”

평상시에는 태업을 일삼다가도 조선의 사신만큼은 환대하던 만력제였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런 답이 없었는데 환관이 나와 손짓을 하며 나를 안으로 들였다.

만력제는 농담이 아니고 정말 이십 년은 폭삭 늙어버린 채 흐리멍덩한 눈을 굴려댔다.

심지어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심했는지 제관(帝冠) 아래의 머리카락이 거의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마침내 나와 눈이 마주친 만력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사…… 상국에 은혜를 다하였으니 어찌하여 죄라 하겠는가. 그나저나 유성룡 자네는 건축에 소질이 있다 하였는데 짐과 함께 북경의 상황을 파악하라! 이는 황명이다!”

내가 아무리 건축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지만 홀딱 불타버려 그 연기로 비까지 내리게 만든 북경을 복원할 재간이 있겠는가.

만력제는 가까스로 총기를 되찾고 전장을 정리하지도 않고 북경으로 향하였다.

예상대로 북경은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내가 한창 일에 미쳐 살 때 일어난 숭례문 화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불타 버린 숭례문은 북경과 비교하면 상태가 아주 좋았다.

굳이 비교 대상을 찾아보자면 화재로 완전히 전소한 뒤 세월의 흐름에 매몰당한 옛 유적 발굴현장과 흡사할 수준이다.

이럴 수는 없다며 중얼거린 만력제의 뒤를 따라 자금성까지 나아가는데 곳곳에서 파사삭 소리가 나며 비에 젖은 돌이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무너질 것 같이 높게 쌓은 석물의 주변에서 물러나도록 하라! 석회암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석물은 불에 완전히 타버리면 생석회가 되니 절대 건드리지 말도록!”

“나무는커녕 철이 녹아버릴 지경이로군. 어찌하여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가.”

자금성의 상태는 그나마 성벽의 형상이 제대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조금은 나아 보였다.

여태까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움직이던 만력제가 자금성으로 달려가려 하여서 이를 뜯어말렸다.

“황상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화재에 휩싸인 석물은 쉽사리 무너지는 법입니다!”

“아니야! 이럴 순 없단 말이다! 명국과 같은 황궁이 이리도 불타다니 말이 안 된…….”

태화전으로 향하는 황극문(皇極門: 현 태화문) 위의 전각은 온전한 것 같았지만 만력제가 다가가기가 무섭게 콰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황급하게 뒤로 물러난 만력제가 먼지에 콜록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며 말하였다.

“독고율! 이 흉적 같으니! 세상 어느 누가 도읍을 불태우느냐! 이 도읍을 네놈이 사용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았더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불가하단 말이다!”

상대의 목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정석적인 대처만 했으니 이런 꼴을 당하지.

문화재가 모조리 날아가 내 기분도 참담해 표정이 일그러졌고, 만력제는 내 표정을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얼굴로 울음을 섞인 말을 토해냈다.

“자네라면 가능할 것이네! 내 어떠한 힘을 써서라도! 내탕금을 모조리 내놓을 것이니 북경을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태주게나!”

“신의 능력으로는 불가하옵니다. 정녕 불가한 일이오며 설령 조선의 모든 재물을 털어낸다 하여도 이십 년 이상 전력을 다하여야 가까스로 가능한 일이옵니다.”

“짐의 앞에서 태…… 태…… 태업을 하려 하다니!”

내 멱살을 잡으려 하였지만 태업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만력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였다.

나 또한 어떻게든 만력제를 위로하려 했지만 딱히 뭘 할 방법이 없었다.

대충 자금성 복원에 은자 800만 냥, 북경의 시설 보수에 은자 1,200만 냥, 그리고 북경의 각 건물과 민가를 복원하는 데 은자 2,000만 냥 정도가 들어간다.

여기에 화재로 갈라진 성벽을 다시 쌓는데 같은 비용이 들어간다.

전체 세입의 5할에 해당하는 1,000만 냥의 추가 세금을 10년 이상 걷어야 가까스로 북경을 복원할 자본을 마련하리라.

이건 어디까지나 명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때의 이야기이다. 이를 머릿속으로 계산한 만력제는 피를 토하듯 머리를 찧으며 말하였다.

“짐의 명령 한마디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다. 독고율 놈이 겁에 질려 북경으로 도주한 이후 황군의 손에 목숨이 달아날 줄 알았단 말이다! 이게 무슨 비극이냔 말이다!”

“황상께서 마음을 굳게 다잡으셔야 합니다. 번국으로서는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이 이상 관여할 수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만력제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추태를 모조리 확인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미 상국의 위신이 박살 날 대로 박살 난 상황이라 강력한 번국 조선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입지가 박살 난 만력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반정(反正)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태자를 갈아치우지도 못하고 평생을 일하고 또 일하며 북경을 복원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리라.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나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당혹스러운 말이지만 조선에 자금을 내어줄 수는 없으니 영토를 하사하여 전비를 대체하도록 하겠다. 금주(錦州: 요서회랑 최북방의 요새) 동쪽의 땅을 조선에 내어줄 것이니 이를 전비로 삼도록 하여라.”

“번국에 지나친 은혜를 내리시니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옵나이다. 부디 지나친 은혜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내 명을 거절하지 말라. 아직 요동에는 도적들이 남아 있으니 북경을 재건할 적에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다. 부디 요동을 평안하게 다스려 후일의 변란을 막아내도록 하여라.”

만력제도 보고를 들었으니 훗날 벌어질 수많은 반란을 머릿속에 계산하고 있으리라.

조선을 믿지 못하여 대립한다면 반란으로 인해 속으로 곪아버린 명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질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요동을 내주어 북방의 안정을 찾고 조선이 요동의 통치에 힘을 쏟는 동안 어떻게든 체제를 정비할 작정이리라.

다른 신료들도 여러모로 고려해 보았는지 만력제의 뜻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이미 친조선 관료들이 대다수이니 반박할 이유도 없었고.

이 자리에서 명나라의 시한부 선언과 오랜 고토 요동의 수복이 결정되었다.

이후에는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전리품으로 얻은 금은보화도 모두 만력제가 북경을 복구하기를 기원하며 내어주기까지 하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작가의 말

만력제가 할 수 있는 일 : 일하기, 세금걷기, 북경 재건하기, 그리고 반란군 막기.

만력제가 할 수 없는 일 : 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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