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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534화 (534/573)

근육조선 534화

2부 29장 6화 천명 붕괴

도성에서 언제쯤 변란이 일어날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음력 4월 초하루, 마침내 산해관을 지키던 진린이 다급하게 보낸 전령이 아예 강화도를 통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신을 전하였다.

“조선의 국왕에게 진 도독의 장계를 전하옵니다. 작금에 이르러 요서회랑이 돌파당하고 산해관이 경각에 달할 적도가 엄습하였습니다. 진 도독께서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계시나 적의 화포가 세 배 이상에 달하는지라 희망이 없사옵니다.”

“병권을 거머쥔 도독의 요청이니 거절할 수 없구나. 또다시 아국의 병졸들이 상국을 위하여 피를 흘린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명을 달리할지 두렵고 또 두렵다.”

주상전하께서는 바라마지 않던 일임에도 일부러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대전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요동을 먹어치워야 하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수단을 강구하리라.

그러자 전령은 어떻게든 조선군을 참전시키려 좋은 정보를 털어놓았다.

“황상께서 도적을 격멸하기 위하여 남경의 병력으로 친정을 행할 예정이옵니다. 산해관을 뚫고 기력이 다한 도적들을 황상께서 격멸하시겠지만 번국으로서 한 손을 거들어주시옵소서.”

“과연 영민하신 분이로구나. 아국의 병졸들만 나서서 싸운다면 피해가 막심하겠지만 그러하면 피해가 적을 것이다. 오위에서 이만 명의 정군(正軍)과 이에 상응하는 보인을 파견하겠다.”

만력제가 토벌군을 이끌고 북상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혹여나 이여송이 완벽하게 패배해 버리면 그 기세를 몰아 만력제가 요동까지 진군할 게 아닌가.

그렇다고 만력제가 패하면 천명이 완전히 무너져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리라.

주상전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예측하였는지 한참을 고민하다 나와 임차손을 바라보시면서 명을 내렸다.

“이번 원병에는 우의정 유성룡을 도원수에 임명하며 오위 도총관 임차손은 유성룡을 보좌하여 군관들을 통솔하도록 하라. 오위의 정병 가운데 파견이 가능한 이들을 엄선하도록.”

예상대로의 인선인지라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고개를 깊게 숙인 임차손이지만 요동을 뚫으면 만력제가 모든 일을 끝낸 다음에야 도착하지 않을까.

이를 감안해 질문을 하였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하오나 당장 출병하지 아니하면 요동을 돌파하는 시일을 감안할 때 황군과 합을 맞추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옵니다.”

“염려하지 말도록 하여라. 어차피 요동 도적을 재차 토벌해야 함이 마땅하니 이순신의 수군과 함께 작전을 진행하도록 하라. 보름 뒤 당도하는 수군이 보급과 정비를 마치는 시점이 곧 출병일이다.”

이순신의 수군은 이미 상륙작전을 실시할 정도로 훈련이 되어 있어 어중간한 도적들의 방어체계 따위는 피해 없이 격멸할 수 있는 수준이니 손해도 보지 않으리라.

주상전하께서는 다시금 나를 바라보며 진중하게 말하였다.

“황군과 합을 맞추어 도적들을 격멸하는 일이니 황군을 언제나 존중하여 일을 진행하라. 쉽게 물리칠 도적들이라 하면 괜히 끼어들어 공을 노리지 말고 전후처리에 힘을 쓰도록 하여라.”

“합당한 명이오니 신 유성룡 반드시 이를 받들어 황군의 위명을 사해에 진동시키는 데 힘쓰도록 하겠사옵니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지금까지 진행한 이야기가 있으니 숨겨진 뜻은 명백하다.

만력제가 이길 싸움이라면 잔당 처리나 하고 대등한 싸움이면 관망 후 개입하며 만력제가 진짜 위기에 처할 때에 구원하라는 뜻이지.

예정대로 보름 뒤 도착한 이순신의 수군은 즉각 산해관으로 향하여 상륙을 실시하였다.

상부가 무너져 어중간한 요새가 된 일대에 스스로를 대연국의 병사라 칭하는 도적들이 있었지만 이순신의 상대는 될 리가 만무하였다.

이대로 이순신까지 상륙하여 육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을 진행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사전 정리가 끝난 이순신은 병력을 내려보내며 나에게 작별 인사를 겸한 보고를 하였다.

“주상전하께서는 서애 자네를 돕는 것보다 요동 도적들의 지원군을 보낼지도 모르니 이들을 요동 안에 가둬두도록 심양 일대를 공격하라 하였네. 나 또한 자네를 믿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황군을 도와 도적을 토벌하게나.”

“이것 참 대단한 일이로군. 자네가 심양을 타격한다면 황군과 함께 북상하여도 도적들이 진멸한 뒤라 산책과 같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나. 그러하면 후일 도성에서 다시 보세나.”

이순신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북경을 향해 진군하려 하였는데 엉뚱한 보고가 들어왔다.

산해관에 부설된 지하 감옥 중 하나에서 포로로 잡힌 명나라 장수를 찾아냈다 하였는데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인 진린과 그의 아들들이 아닌가.

“진 도독! 도독께서 어찌하여 도적놈들의 포로로 잡혀 계셨던 거요! 의원은 뭘 하는가? 어서 도독의 환후를 살피고 다른 장수들도 보살피도록!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독고율 그놈이 어찌나 철저하게 준비를 하였는지 결사 항전을 거듭하다 포로로 잡혔소. 이대로 살아봤자 황상의 진노에 처형당할 것이니 군에 합류시켜 주시오. 선두에 서서 적도를 분쇄하여 조금이라도 목숨을 벌어볼 작정이오.”

“도독께서는 저희와 함께하신다니 천군만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북경 일대의 지형을 저희가 알 방도가 없으니 기력을 되찾는 대로…….”

“이미 주검이나 마찬가지인 몸이니 기력이 뭔 소용이 있겠소. 도적놈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으니 회전을 준비할지도 모르겠구려. 서둘러 진군하지 않겠소?”

진린은 뭔가 촉이 잡혔는지 진군을 독촉하였다.

일대에 임해도감 출신 병력과 기병을 파병해 정보를 수집하게 하고 본대가 진군을 거듭하기를 삼 일.

진린도 정보를 많이 털어놓으며 우리를 필사적으로 도우려 하였다.

“놈들의 기세는 육주성에서 싸웠던 왜군과 흡사하고 전력 또한 화포를 제외하면 비슷한 경지요. 그놈의 화포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그런 전력이라면 황군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정면으로 회전을 벌이면 압살당할 것이니 어떻게든 북경에 머물며 수성전을 준비할 것이 분명하군요.”

“물론이오. 북경에서 헛되이 수성전을 벌이는 놈을 황군과 합친 십오만 대군으로 격멸하면 모든 사태를 종료할 수 있는 법이오. 비록 북경이 상하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겠지.”

이여송의 생각을 알고 있으니 거짓말을 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명나라를 무너트리려고 작정하였다면 최대한 위신에 타격을 입힐 수 있도록 수많은 안배를 끝내놓았으리라.

어디까지나 독고율이자 망령되게 대연이라는 국호를 표방한 도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북경을 향해 진군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북경에서 하루 거리에 닿았을 무렵. 숙영을 위해 진지를 편성하는 와중에 정찰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대연이라 칭하는 도적들의 진영을 포착하였습니다. 놈들은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삼십여 리(12㎞) 떨어진 능수하라는 강을 끼고 진영을 차렸습니다.”

“황군으로 보이는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남서쪽으로 사십여 리 떨어진 장소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군대의 진군을 명하는 풍악 소리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보고를 위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여송 이놈이 뭔 생각인지 몰라도 만력제와 벌판에서 회전, 혹은 강을 끼고 공방전을 벌일 생각이 분명하였다.

당장 개입하고 싶었지만 날이 서서히 저무는 와중에 일단 진지를 펼치고 숙영을 실시하였다.

당연히 진린은 잔뜩 흥분하여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아마 전투는 내일 낮에 치러질 것이오. 황상께서 능수하를 넘어 적도를 몰아붙이는 동안 조선군이 후방을 공격하면 도적들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압살당할 것이 분명하오. 이제 모든 일이 끝났소.”

진린만 아니라면 진격을 조금씩 늦춰가며 만력제가 실책을 저지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지만 진린이 있으니 진격을 늦출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이여송을 압살하고 만력제가 정권을 거머쥐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나?

임차손이야 손을 쥐락펴락 하면서 언제라도 말에 올라 적을 유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일이 틀어지는 것 같이 속이 불편했는데 갑자기 전령들이 뛰어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보고 드립니다. 북경 일대에서 불기운이 치밀어 오르며 이를 확인한 명군은 야음을 틈타 도하를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오나 대연이라 칭하는 도적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야음을 틈타 도하를? 북경에 불을 질러? 놈들이 제정신인가! 왜 북경에 불을 질러!”

이 시대의 중국에서 도읍을 불태우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민족이라면 도읍을 불태울 수도 있지만 중국 내부의 분쟁이라면 도읍을 약탈하는 선에서 끝나게 마련이다.

이여송의 한 수를 예측하지 못한 나도 멍하니 있자 임차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여해도 정찰을 게을리하는 상대에게 야습을 실시하지 명백히 진영을 갖춘 적에게 덮어놓고 도하와 야습을 실시한다고? 뭔 일이 일어나겠나?”

“당장 진군해야지! 황상의 체면이고 뭐고 이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결과는 불 보듯 분명하네!”

모든 병법에서 절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 만력제의 행동에 다들 기가 차올랐지만 솔직히 말해 이해할 수는 있었다. 북경이 불타 버리면 만력제가 사태를 수습해도 희망이 사라질 수준이다.

병사들과 함께 신속하게 진군하며 머릿속으로 북경의 보수비용을 계산해 보았다.

자금성은 경복궁의 1.3배 크기에 높이는 2배가 넘으니 인건비와 목재를 제해도 대충 은자 800만 냥의 보수비용이 나오리라.

대충 기와집 4만 채를 새로 짓는다면 나무가 부족한 북경의 특성상 건축비는 개당 은자 200냥, 칸수가 많은 저택은 열 배에 달하니 대충 2,000만 냥이 넘는다.

천문학적으로 올라가는 비용에 저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미 명국의 피해가 예산을 초월하여도 한참은 넘어섰군. 건물을 중건하는데 최소 사천만 냥이 들어갈 것이요. 성벽을 보수하고 기물을 다시 세우는 데 같은 비용이 들 것이네.”

“뭔 계산을 하는가! 제정신인가 서애? 황군이 몰살당하면 천자가 적도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꼴이요! 놈들이 황상을 포로로 잡아 황명을 내리면 명국 모두가 적이 되는 격일세! 어서 명령을 내려주게나!”

“자네에게 마음대로 기병을 놀릴 권리를 주겠으니 어서 돌격하게!”

“도원수께서 내린 명을 들었는가! 호분위 기병은 모두 돌격하라! 적도들의 후방을 유린하여 황군을 구하도록 하라! 신호탄을 발사하여 황군이 알아챌 수 있도록 하라!”

명령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임차손이 이끄는 호분위 기병 3,000여 명이 대열 앞으로 치고 나갔고 가장 화려한 주황색 신호탄을 허공으로 발사하며 이를 알렸다.

만에 하나 우리의 도착이 늦어 만력제가 포로로 잡히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리라.

* * *

임차손과 진린을 선두에 세운 호분위 기병들은 한밤중의 평원에 요란한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진군하였다.

임차손은 저 멀리서 점점 크게 들려오는 전투의 소리를 들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냐고! 황군의 수가 세 배는 많다지만 훈련도가 뒤처지니 한낮에 전투를 벌여 숫자로 압살해야지! 이래서야 우리가 당도할 때쯤 결판이 나 있겠는걸.”

“내 도독의 입장이지만 부탁을 하겠소. 황상께서 적도에게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히시면 명국의 명운이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제발 황군을 구원해 주시구려.”

“그런 말씀 하지 아니하셔도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황군을 구원할 작정입니다! 도독께서 말씀하신 바를 못 들었나? 더 빨리 진군하라!”

이미 신호탄을 터트렸으니 조선군이 후방을 기습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삼수병의 진형을 한 채 어떻게든 후방을 방비하려는 대연군의 모습을 본 임차손은 콧방귀를 뀌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전열의 병사는 먼저 치고 나가 작렬신기전을 십여 발 쏘아붙여라! 입지(立之: 신립의 자) 녀석이 왜장에게 당한 일을 잊지 말고 놈들의 진영 깊숙이 쏘아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놈아! 작렬신기전 나가신다!”

히데요시의 숨겨진 한 수에 피해를 입은 신립의 사례는 조선군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작렬신기전을 발사하는 순간에 대열이 급격히 느려지는 것을 적이 이용하여 집중 공격을 하는 경우가 생겼으니 이는 약점으로 불릴 만하였다.

덕분에 작렬신기전이 제식병기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임차손은 사용방법을 개편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가장 먼저 치고 나간 기병들이 속도를 늦추어 작렬신기전을 발사하지 밀집대형인 삼수병이 큰 타격을 입으며 수십 명의 대연군이 폭연에 휩싸였다.

“놈들이 작렬신기전 맛을 보았으니 경계할 것이다! 다들 작렬신기전을 발사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속도를 늦추어라!”

“도총관께서 말씀하신 대로 속도를 늦추어라! 위장이니 속으로 서른을 크게 센 다음 말을 전력으로 몰아 돌격하라!”

새로 택한 전술은 작렬신기전을 발사하려는 척 속도를 늦춰 적의 화약병기를 대열 앞으로 내세운 뒤 재차 돌격하는 방식이었다.

속도가 느려진 기병들을 요격하려고 대연군이 보총병을 앞세우자 임차손은 맨 앞으로 돌진하며 외쳤다.

“전군 적도를 유린하라! 장창진이 뒤로 물러났으니 앞이 훤히 드러나지 않았느냐!”

대연군의 보총이 불을 뿜었지만 마갑과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호분위 기병들 가운데 스무 명가량만 낙마하였을 뿐 나머지는 전력을 온존한 채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장창이 진열을 갖추기도 전에 임차손의 편곤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먼저 두 놈!”

한때 남명 조식의 허리에 매달려 있었던 대역기봉 토막은 오늘도 적의 피를 휘감으며 전장을 가로질렀다.

어설픈 장창진영을 갖추지도 못한 대연군의 후방은 삽시간에 쪼개지며 붕괴하였고, 뒤이어 오위의 핵심 보병인 의흥위와 충무위가 전장에 합류하였다.

“전 포는 방포하라! 호분위 대열을 넘어 적도들의 진영 중앙을 타격하라!”

하주도 전역과 왜변을 거친 병사들이 어느덧 장교가 된 충무위에서는 모든 화약병기를 동원하여 대연군의 진영에 무차별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집중된 화력으로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유린당한 대연군의 진영은 모두 혼돈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포병과 기병의 동시공격은 잔뼈가 굵은 도적들조차 절망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폐하! 이미 틀렸습니다! 조선군이 야음을 틈타 후방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있사옵니다!”

“틀리긴 뭐가 틀렸느냐! 오로지 내 명운이 다한 것이며 대연의 명운은 다하지 아니하였다!”

독고율의 거죽을 뒤집어쓴 이여송은 더 이상 살 필요도 가치도 없다 여겼다.

무차별적으로 도륙당한 황군, 이미 불타 버린 북경, 그리고 이를 구원하려고 달려든 조선군까지.

명나라의 위신은 바닥을 내리찍다 못해 파묻혀 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명나라를 완벽히 무너트리기 위한 안배를 시작할 차례였다.

대연군의 본진으로 향하는 조선군 기병 대열의 선두에서 기합소리와 함께 한 명의 병사가 사지가 꺾여 날아가니 자신의 최후를 장식하기 좋은 상대이리라.

이여송은 칼을 뽑으며 외쳤다.

“나 독고율의 명운은 다하였다! 도주하여도 언젠가는 추격당해 목숨을 잃지 않겠느냐?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여도 내가 세운 대연의 명운은 다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서 돌아가신다면…….”

“이미 말한 대로 사방으로 도망쳐 후일 대연을 다시 세울 준비를 하여라. 조선의 장수는 들어라! 대연 황제 독고율이 너와 일전을 벌이겠다! 너희는 내가 시간을 끄는 사이 퇴각하라!”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폐하께서 진격하신다! 선두에 서서 조선군을 상대로 진격하신단 말이다! 폐하의 뜻을 받들어 모두 적도를 몰아내라!”

이여송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황제가 최전선에 서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본 대연군의 수뇌부 일동도 임차손과 호분위 기병을 향해 목숨을 불사하고 달려들었다.

거대한 포탄이 흙먼지를 피워 올리고 막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전장을 식혀댔지만 그들의 발악은 끝나지 않았다.

편곤을 거침없이 휘둘러 대연군을 도륙한 임차손조차 쉽사리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 미친놈의 새끼들! 악다구니 하나는 어중간한 내금위 병사보다 더 하구만!”

“대연의 명운은 다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대연의 후예란 말이다!”

“승우! 이놈들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 이런 충심을 보이는 이들이 정녕 도적 떼란 말인가!”

“도독께서도 몸조심하십시오! 이놈들 죽더라도 저에게 칼을 꽂고 죽을 작정입니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도 명령은 일사불란하게 전달되었다.

전방에서 명나라 군대를 몰아붙이던 대연군은 야음을 틈타 능수하를 타고 도망치거나 아예 명나라 군대의 복장을 훔쳐 입어서 병사 사이로 끼어들었다.

반면 잠시의 시간을 번 대연군의 본진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최정예 기병인 호분위는 대연군 대여섯 명을 도륙한 뒤에야 중상을 입어 퇴각하였으며 임차손은 이미 스무 명이 넘는 병사를 때려죽인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호분위 기병 두 명을 죽인 이여송이 화살 두 발이 배에 박힌 채로 임차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가면조차 벗겨지고 얼굴에 흉측한 자상(刺傷)이 생겨났지만 그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광기는 임차손조차 질리게 만들었다.

“대연이여! 영원하라!”

“그냥 좀 죽어!”

한 합에 이여송의 칼이 부러지고 다음 합에 칼을 뽑아내던 이여송의 옆구리를 임차손의 편곤이 두들겼지만 피를 토한 이여송은 편곤을 부여잡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려고 하였다.

목숨조차 도외시한 이여송의 괴력에 질린 임차손은 품을 더듬어 수석(燧石)식 나팔총을 꺼내 발사하였다.

이여송의 얼굴이 수십 발의 산탄에 허물어지며 절명하자 더 이상 저항하는 이가 없었지만 임차손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도둑새끼들이 다 튀었다면 나중에 명나라에서 벌어질 꼴이 선하군.”

전방에 보이는 시체는 대부분 명군의 것이다. 숫자를 대충 가늠하여도 대연군 가운데 최소한 이만여 명 이상이 자리를 감춘 것이 분명하였다.

이번 전투를 수습한다 하여도 한번 약탈을 맛본 도적들이 다시 약탈을 하지 않을 이유가 만무하였다.

그의 평범한 머리로도 변란의 끝이자 새로운 반란의 시작될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위신이 나락으로 떨어진 명나라는 끝없는 반란의 수렁에 휘말리게 되리라.

#작가의 말

이만 도적 양병설(평생 먹고살 돈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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