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33화
2부 29장 5화 천명(3)
안타까운 표정으로 주상락이 구타당하는 건물을 바라본 이여송은 고개를 들어 머나먼 남쪽에서 돌아오는 부하들을 확인하였다.
하나같이 거대한 수레를 끌고 왔으니 자신의 생각이 옳았으리라.
황후를 비롯한 황족들은 병사들의 필사적인 호위를 받아 무사히 피난했지만 재물을 가지고 움직여서 발길이 늦었던 관료들이 대다수 사로잡혔다.
다시 구덩이를 파고 불을 지피라는 명령을 하달한 이여송은 이제 만력제를 상대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자신은 반드시 실패하고 목숨을 잃겠지만 불구가 된 태자와 함께할 명나라를 최대한 망가트려 놓아야 하는 법이었다.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철저한 준비만이 가능성을 높이는 법이었다.
부패한 관료들을 확인한 이여송은 이미 알고 있던 정보를 늘어놓았다.
“북경을 함락하였지만 천자는 이미 남경으로 향하였다 하더구나. 짐이 보건대 주익균이 함정을 파놓거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남경에서 정무를 보았을 두 경우가 있다.”
“함정을 파놓았다 하였습니까? 어느 머저리 천치가 북경을 버리고 함정을 파둡니까?”
“주익균은 보통 멍청이가 아니다. 십 년 넘게 정무에도 임하지 않고 태업을 일삼은 멍청이 중의 멍청이이다. 그런 놈이 어찌 저런 자식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자고로 광인(狂人)의 생각은 현명한 자가 알 길이 없는 법이다.”
자신이 진정한 미치광이였지만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이여송이었다.
이윽고 부패한 관리들을 불구덩이 앞에 집결시킨 이여송은 손수 한 명씩 걷어차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고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개중 심유경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외쳤다.
“독고율 네놈! 네놈은 반드시 황상께서 능지형을 집행할 것이다! 황상께서 친히 남경으로 내려가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오신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닥쳐라! 삼십만 대군이라 하였느냐! 그런 군대가 어디서 튀어나오느냐!”
“남경 일대의 질서를 바로잡은 황상께서는 삼십만 으아아아아악!”
불길에 휩싸인 심유경의 절규 가운데 삼십만 대군이라는 소리를 들은 병사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재물을 공평하게 나눠 받은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자 이여송은 다시 연설을 시작하였다.
“방금 전 죽어버린 심유경이라는 놈의 말대로 주익균이 함정을 파놓았다면 대연의 명운이 경각에 달렸음을 명심하여라. 혹여나 조선군과 함께 대연을 분쇄하려 작정하였다면 내 목숨은 물론이고 너희 모두가 몰살당할 것이다.”
“조선군이라니요. 조선군이 아무리 빨리 당도하여도 앞으로 한 달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본래 군대를 집결시키는데 한 달, 다시 군대를 이동시키는 데 한 달이 걸립니다.”
“조선군을 여느 군대와 같게 여기지 마라. 짐이 천명을 거머쥐고 모든 힘을 결집한다면 모를까 그 이전에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법이 아니겠느냐. 결국 조선군을 상대하기 이전에 주익균을 처리하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대로 북경을 불태워도 상관없지만 명나라를 확실히 무너트리려면 더욱 많은 반란세력이 필요하였다.
마침 명분도 생긴 와중이라 이여송은 없는 재주를 쥐어짜 내 명나라를 완벽히 무너트릴 수 있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에는 군자금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부터 모든 부호들의 저택을 수색하여 재물을 얻어내고 벽을 무너트려 안에 숨겨둔 은괴를 꺼내도록 하여라.”
도적 출신이니 약탈 명령은 언제라도 마다하지 않는 대연군은 북경에 있는 부호들의 저택을 말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정군과 보인을 합쳐 7만여 명의 병력이 움직이니 북경의 재물은 삽시간에 비어버렸다.
여기에 가정제가 잠든 영릉(永陵)까지 도굴해 버리고 가정제의 유골을 불태워 버리자 재물이 쌓이고 넘쳐 과장을 조금 보태 커다란 방을 하나 가득 채울 지경이 되었다.
다른 능을 도굴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쌓인 재물을 확인한 이여송은 지엄한 황명을 내렸다.
“은과 구리를 비롯하여 가치가 부족한 물건은 군자금으로 쓸 것이다. 대신 금과 보석을 비롯하여 가치가 큰 물건은 한 명당 무조건 이백 냥 어치씩 나누어 주도록.”
“황상의 크나큰 성은에 이 비루한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옵니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사기가 다시 솟구쳤다. 무게 대비 가치가 높은 금품을 봇짐에 넣은 병사들은 어떠한 전투가 오더라도 자신의 명령을 이행하리라.
이여송은 모든 병사와 보인에게 금품을 나누어 준 뒤 엄숙하게 선언하였다.
“대연의 명운이 경각에 달하는 징표는 조선군의 참전이다. 만에 하나 주익균을 사로잡기 이전에 조선군과 전투가 시작되면 모든 병졸들은 사방으로 도망쳐 금품을 사용해 몸을 숨겨라.”
“싸우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옵니다! 아무리 강한 조선군이라 하여도 머나먼 길을…….”
“조선군이 참전하였다면 상국인 명을 구원하지도 않고 단 한 번만 올 것 같더냐? 나의 목숨을 끊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움직일 것이니 가급적 많은 목숨을 구하는 길을 택할 뿐이다. 너희는 사방으로 숨어 다시금 대연을 일으키도록 하여라.”
7만에 달하는 병력이 거의 몰살당하고 단 1만 명만 도주에 성공하여도 성공이었다.
수백 냥의 금품을 거머쥔 도적들은 지방 관료에게 뇌물을 먹여 각지로 파고들 것이며 사방에서 대연의 후예를 자처하며 난을 일으키리라.
물론 사방으로 숨어든 도적들이 결집하여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도적들이 가르친 인재들 가운데 정말 명나라를 무너트릴 세력이 나타나리라.
여기에 천 명을 철저히 무너트리기 위한 마지막 안배가 시작되었다.
“화약 가운데 품질이 미흡한 것과 기름을 잔뜩 준비하여 북경을 불태울 준비를 하여라. 주익균과 일전을 벌일 때에 놈의 마음을 격동시키기 위해 북경을 불태울 것이다!”
“그러하면 북경을 버린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당연한 말이 아니더냐! 주익균을 사로잡아도 조선을 상대할 병력을 모아야 하니 남경으로 천도할 것이다. 더 이상 거둬들일 것도 없으니 미련을 가지지 말고 모조리 태워 버려라.”
“그럼 태자는 어떻게 합니까? 이 몸으로는 탈출하지도 못하고 불타 죽을 텐데요.”
전신에 멍이든 채로 질질 끌려 나온 주상락을 바라본 이여송은 한숨을 쉬었다. 죽지 않게 하려면 상대를 잘 치료하고 본영 안에 두어야 하리라.
간단한 명령으로 주상락의 처우를 결정한 이여송은 인생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방으로 정찰대를 보내 만력제의 동향을 파악하기를 열흘.
마침내 첩보망에 운하를 통해 끝없이 도착하는 명나라 군대가 진군한다는 소식이 접수되었다.
* * *
급히 북경으로 돌아온 만력제는 대운하에서 군대와 함께 움직여 벌판을 바라보았다.
이미 대운하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령은 북경의 상황을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보고하였다.
“산해관이 함락당하고 북경이 적도에게 엄습 당한 지 스무날이 지났사옵니다! 황후를 비롯한 황족들 모두는 물론이요, 백성들이 수비병의 호위를 받아 피난에 성공하였으나…….”
“태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책임을 짊어진 몸이라 하시며 자금성에 남아 적도를 맞이하였고 장살(杖殺)을 당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되는 처절한 비명이 맴돌았다 하옵니다. 또한 수많은 관료들이 피난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었사옵니다!”
“태자가 참으로 충심이 넘치나 목숨을 잃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백성들 대다수가 살아남았다면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면 그만이다.”
독고율, 실제로는 이여송이 자신이 할 일을 잘 처리했다 여긴 만력제는 억지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진군을 명령하였다.
태자야 책임을 다하였으니 정치적으로 몰락시킬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계속 압박을 가하면 태자의 자리를 내놓으리라.
만력제 휘하의 군대는 질서정연하게 진군하다 마침내 북경으로 올라가는 길목 가운데 하나인 능수하(陵水河)에 이르렀다. 능수하 반대편에는 며칠 전부터 대연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군대의 규모를 확인한 만력제는 코웃음을 치며 명령을 내렸다.
“절반에 불과한 병력으로 공방전을 준비해? 북경을 끼고 수성전을 벌였다면 위태로울지도 몰랐지만 지척에 북경을 두고 벌판에서 공방전을 준비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마귀는 좌군을 담당하고 오유충은 우군을 담당하라!”
“황상의 명을 받들어 사력을 다하여 적도를 토벌하겠사옵니다!”
폭이 30m에 불과한 능수하를 끼고 대치한 양군은 규모 차이가 두 배 이상으로 벌어질 수준이었다.
남경의 수비병력 그리고 인근에서 즉석으로 징집한 병력을 합쳐 정병(正兵)만 9만에 달하는 만력제와 달리 대연군의 정병은 3만5천에 불과했다.
도하를 진행하면 손해를 제법 입겠지만 그 손해를 보충하고도 남을 병력 차이였다. 만력제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으니 화포가 부족하다는 점 하나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코웃음을 치며 선언하였다.
“짐의 병사들도 화포를 지참하지 아니하였지만 적도들도 화포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계속 들어오는 첩보를 들으니 산해관과 북경의 화약을 모두 태워 없앴다 하더구나. 기껏해야 서로 보총을 사용할 뿐이니 수가 앞서는 짐이 유리하다.”
애초에 부패한 관리들이 착복한 불량품 화약이라 불을 지피는 용도로 쓸 수밖에 없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병력들이 나룻배를 준비하고 뗏목을 만드는 와중에 해가 저물고, 대연군의 진영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저놈들이 설마 야간에 도하를 실시하려 하는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미친 짓을 벌이는군. 역시 요동의 도적들이…… 저쪽은 북경 방향이 아닌가?”
만력제가 보라는 듯이 대연군 진영에서 횃불이 자취를 감추고 어스름과 함께 머나먼 북서쪽에 있는 북경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는 북경이 불타는 불꽃이 머나먼 벌판에서 아른아른 보이기 시작하였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수도를 점령한 세력이라면 수도를 아끼고 보살피며 시설을 사용할 생각을 하는 법이었다.
정말 북경이 불타 버린다면 만력제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자금성은 물론이요, 각종 시설과 수많은 백성들이 거주할 주택까지 합친다면 북경의 복구비용은 만력제의 내탕금을 아득히 초월하여 최소 일억 냥에 달하리라.
만력제는 식은땀을 흘리는 등자룡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북경이 불탄단 말이다! 능수하 건너에 보이는 북경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더냐!”
“소장 또한 보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지 않았사옵니까? 저렇게 멀리서도 불길이 일렁거린다면 당장 달려가 진화하여도 잿더미만 남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런 불충한 말을 입에 담으면 목을 치겠다! 어서 도하를 실시하라! 당장에라도 놈들을 격멸하고 북경을 구원해야 한다!”
“아니 되옵니다! 소장의 목을 치시고 황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심야에 적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도하를 실시하면 모든 병졸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옵니다!”
등자룡의 필사적인 진언에 잠시 흔들리던 만력제의 눈이었지만 점차 붉어지는 북서쪽의 북경을 노려보다 아예 천리경을 들어 확인해 보았다.
솟구치는 연기를 확인한 만력제는 등자룡을 무시한 채 명령을 내렸다.
“전군! 도하를 실시하라! 도적들을 모조리 격멸하고 북경의 화재를 진압하라!”
만력제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군사적 지식이 있는 자는 절대로 내려서는 안 될 최악의 명령이었다. 애초에 도하작전은 적이 도하 지역을 알고 있는 순간부터 희생을 감수하는 작전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한밤중이다. 이순신과 같은 명장이라면 모를까 상대보다 부족한 숙련도로 야간 전투를 벌인다면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황제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명나라이니 지엄한 황명은 지켜져야 하는 법이었다.
“당장 도하를 실시하라! 능수하는 얕은 강이니 뗏목을 머리 위에 올려 놈들의 탄환과 화살을 막아내라! 도하를 하지 않으면 황명을 거부하여 요참(腰斬)을 당하지만 도하를 하면 살 수도 있단 말이다!”
“그냥 죽으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도저히 갈 수 없습니다!”
“황상께서 이리로 오고 계시지 않느냐! 우리가 도하하지 않는다면 황상께서 선두에 서서 도하할 것이다! 당장 움직여!”
조금이라도 북경의 상황을 보고 싶은 만력제가 앞으로 나선 것이지만 끔찍한 형벌을 두려워한 일선 지휘관들은 죽을 길임을 알면서도 병력의 도하를 독촉하였다. 심지어 만력제를 보좌하는 오유충과 마귀 두 장수조차도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였다.
능수하를 헤집으며 나아가는 병력의 머리 위로 화살과 몇 없는 보총 탄환이 날아들었다.
삽시간에 핏물이 번지는 강물에 질린 병사들이었지만 장교들은 칼을 휘둘러 도망치는 병사를 베며 도하를 독촉하였다.
강을 끼고 보총과 화살이 어지럽게 오가며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어떻게든 부교(浮橋)를 무너트린 대연군이지만 두 배가 넘는 명군은 도하를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도하를 성공한 병사들이 살길이 열리지는 않았다.
“놈들이 장창을 앞세워 도하를 성사한 병사들을 찔러 죽이고 있사옵니다!”
“병졸들의 손실이 오 푼(5%)에 달합니다! 이대로 도하를 계속한다면 몰살당할 것이옵니다!”
“보총! 보총을 쏘아 놈들을 몰아내란 말이다!”
“도하를 막 시작한 병력이 벽이나 마찬가지로 강가에 밀집되어 있사옵니다! 보총을 쏘면 아국의 병사들이 죽어 나갈 것입니다!”
대연군은 딱히 도하를 막지는 않았지만 부교의 형성만큼은 죽어라 막았다.
보총을 지참한 병사들이 넘어온다면 화력에서 밀리니 몸을 물에 젖게 만들어 강을 넘어온 순간 화약병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력제는 자신이 내린 명령을 후회했지만 강 건너편의 정황이 급변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대연군은 강가를 막아내지 않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창백한 만력제의 얼굴에 다시 핏기가 올라왔지만 등자룡은 아예 흙빛이 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놈들이 횃불을 밝히고 퇴각하는군! 짐의 판단이 옳았으니 놈들이 도하를 더 이상 막아내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적도들은 도하를 절반만 성사하게 하여 병사들을 양면으로 쪼개 격멸하려는 생각이옵니다! 이대로 가다간 삽시간에 진영이 무너질 것이옵니다!”
수를 앞세운 만력제의 군대는 도하를 마쳐 정비조차 하지 못한 병력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도하를 준비하기 위해 강 인근에 머물고 있었다. 비좁은 능수하에 시체가 뒤엉켜 강에 빠지면 시체를 밟고 움직여야 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 건너의 병력이 격퇴당하고 적이 역공을 취하면 진격하는 병사와 도망치는 병사가 엉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게 마련이었다.
이윽고 등자룡의 예상대로 강 건너에서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놈들의 몸에 물이 스며들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마음대로 죽이고 또 죽여라!”
이여송의 명령이 하달될 필요도 없었다. 도하를 위해 복장을 간편하게 하고 병장기를 줄였다는 말은, 스스로의 전투력을 줄였다는 뜻과 같았다.
물에 젖어 화약병기를 쓸 수 없는 명나라 군대는 몇 합을 겨루지도 못하고 밀려났다.
이윽고 삼수군의 체제, 유사 테르시오의 형태로 대형을 갖춘 대연군은 장창을 앞세워 천천히 진격하였다.
능수하로 퇴각하는 군대와 능수하에서 올라오는 군대가 만나 인간의 벽이 되었고 이 벽에 장창의 창날이 천천히 쑤셔 박히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의 단말마와 아직도 겁에 질린 장교들의 독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 명의 병력이라도 더 살리려는 장수들의 고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만력제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모든 참극이 짐의 말 한마디에…….”
“황상께서는 어서 뜻을 정하시옵소서! 신의 소견으로는 퇴각을 실시해야 할 것이옵니다!”
퇴각이라는 말을 하려던 만력제였지만 머나먼 북동쪽에서 울리는 포성을 듣고 눈에 총기가 돌며 다시 천리경으로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를 수놓은 노란색 불꽃은 조선의 신호탄이었다.
마침내 조선군이 여기까지 도착한 것이다.
“이연이 병력을 보냈으니 가장 충성스러운 번국이 아닐 수 없구나! 한껏 버텨라! 대열이 무너지지 않게 유지한다면 조선군이 놈들의 뒤를 쳐서 몰살시킬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로서 부끄럽다 못해 황제의 체면조차 바닥에 떨어질 상황이었지만 조선군의 진격을 알아차린 병사들의 상황이 급변하였다.
붕괴 직전이던 명나라 군대의 사기가 끝없이 치솟고 대연군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대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명나라의 위신을 대략 100이라 가정하면 조선의 위신은 50~60 정도를 오락가락합니다. 이는 번국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이지요.
그런데 북경이 불타며 명나라의 위신이 30 정도 날아갔고 반란군 상대로 도륙당하면서 50 정도 날아갔습니다. 이제 조선군이 명나라 군대를 구원하면서 1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