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32화
2부 29장 4화 천명(2)
이여송의 예상과 달리 진린은 부패하였지만 제대로 된 장수였다. 전령을 끊어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던 별동대는 명나라 군대에 발각당해 해안가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닷새만 더 몰아세웠다면 별동대를 완전히 몰살시킬 수 있었던 진린이지만 전방 요새에서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보고를 듣고 병력을 되돌렸다.
이윽고 이틀이 지나자 이여송의 본대가 도착하였고 진린은 성벽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닷새만 느리게 도착하였으면 별동대를 모조리 격멸하고 놈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거늘. 애초에 요서회랑의 머저리들은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내 힘으로 해결해야겠군.”
“놈들의 병력이 최소 오만 이상에 달합니다. 정녕 홀로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산해관의 병력은 정군만 따져서 이만여 명이 조금 넘지 않습니까?”
“요동 도적에 불과한데 병력이 오만이건 십만이건 무슨 상관인가! 산해관을 지킬 병사가 조금이라도 더 많았다면 좋았겠지만 썩어 문드러진 놈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내가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이 옳겠지.”
하필 두 달 전에 만력제가 남경으로 향한 덕분에 일이 틀어졌다. 만력제는 남경으로 내려가며 호위 명목으로 일만 오천 명에 달하는 정병(正兵)을 함께 데리고 내려갔다.
그렇다고 북경에 남은 일만오천 병력을 산해관으로 옮겨올 수도 없었다. 이들은 북경을 수호하는 이들이니 자신이 통솔할 방법도 없었으니까.
진린은 이여송의 대연군을 확인하며 명령을 내렸다.
“내가 육주성에서 배운 바가 있지. 요새를 지키는 것은 화포와 충분한 준비라는 것이다! 산해관이 경사요새는 아니지만 화포는 잔뜩 준비했으니 마음대로 쏘아라! 조 부장은 무엇을 하는가! 어서 명령을 전달하라!”
육주성에서의 참극은 진린을 제대로 된 군관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였지만 탐욕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지키기 위한 힘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왜변 당시 만력제의 명령을 받아 제법 많은 탐관오리를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 일부를 포상으로 받은 진린은 이를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유성룡의 전투 기록을 확인하고 이를 산해관에 일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도독께서 명하신 바를 이행하라! 천자총통에 화약을 넣고 놈들을 마구 몰아쳐라!”
부관 조승훈(祖承訓)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천자총통의 장전 상황을 확인하였고 평상시에 훈련을 거듭하던 포병들은 이를 철저히 이행하였다.
화포 중 가장 위력이 강한 천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자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수십 명의 대연군이 허공으로 솟구치고 사지가 찢겨 나갔다.
진린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내가 축적한 재산을 모조리 화포에 쏟아부었다! 화포가 오십여 문에 달하고 하나같이 네놈들을 도륙하기 좋은 화포로 구성하였으니 어디 덤빌 테면 덤벼보아라! 구경(九經: 진린의 아들)이는 어서 비격진천뢰를 준비하라.”
“아버지! 상대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돌격을 준비하지 않고 오히려 화포를 쏘기 좋은 거리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혹여나 화포를 준비하는 것일지도 몰라 심히 염려됩니다!”
“설마 요동 도적들이 화포를 쏘겠느냐? 저놈들이 기괴하게도 대연국이라는 깃발을 휘날리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요동의 도적…….”
서른 문에 달하는 홍이포가 불을 뿜으니 거대한 산해관의 성벽이 타격을 입고 외곽부터 부셔져 내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진린은 조승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화포의 충격으로 깨어진 벽돌 조각에 맞은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건 말…… 응사하라! 너희들은 훈련을 거듭한 군대가 아니더냐! 든든한 요새 안에서 화포를 쏘아대니 어지간해선 무너질 일이 없다! 어서 쏘아라!”
거의 세 배에 달하는 화력차를 접한 진린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어지간해서 무너질 일이 없다 말했지만 홍이포에 계속 직격당한 망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포격이 계속 교차하자 결과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24자(7.2m, 명나라 척도 기준)에 달하는 두께로 위엄을 뽐내는 산해관의 성벽이지만 망루는 기껏해야 벽돌로 쌓은 것이 전부이다.
흙먼지를 휘감은 장교들이 계속해서 보고를 올렸다.
“사 번 망루가 무너졌습니다! 화포 두 문이 병사와 함께 매몰당했습니다!”
“일 번 망루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 버팁니다!”
대연군의 화포 세 개를 침묵시키는 대가로 산해관의 망루들이 일제히 타격을 입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유성룡이라면 첩보를 접한 순간 천자총통을 양산했겠지만 진린은 유성룡처럼 영민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전술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가 배운 수성전은 적의 본진을 천자총통으로 유린하고 적이 접근하면 현자와 황자를 비롯한 소구경 화포에 포도탄을 담아 최대한 많은 적을 격멸하며 성벽에 근접한 적을 비격진천뢰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사거리가 짧은 화포들이 배치된 산해관이라 화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진린은 이를 악물고 명령을 내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버티는 것 하나였다.
“놈들에게도 화약이 한정되어 있으며 근본이 도적이니 조만간 요새로 엄습하려 할 것이다! 한껏 인내하여 때를 기다려라! 비축된 화약이 오만 근에 달하지 않더냐!”
“그때가 언제쯤 올지는 모르겠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도주하여 북경의 백성들이 유린당하는 꼴을 지켜보겠다는 뜻이냐! 뭘 하느냐? 망루에 묻힌 천자총통을 꺼내 성벽 위로 올려라! 어서 성벽을 보수하고 끝까지 산해관을 사수하라! 또한 배를 띄워 조선에 전령을 보내라!”
조선에서 보낸 지원군이 아무리 빠르다 하여도 배가 도착하는 데 삼 일,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이동시키는 데 한 달이 걸려 최소 30일 이상이 걸릴 상황이었다.
퇴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진린이었지만 퇴각하여도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북경이 유린당하면 도독의 자리에 오른 자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것이며 잘해야 교수형을 당하리라.
* * *
포격전이 12일 동안 이어지자 산해관의 병사들의 눈이 공포로 물들고 도주를 택하는 이들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반면 이여송의 대연군도 초조함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여송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는 화약을 확인하며 한숨을 쉬었다.
“싸울 줄 아는 자로군. 평범한 장수라면 문을 박차고 나와 전면전을 벌이겠지만 이토록 버티다니 북경을 함락시킬 때 화포를 쏠 수 없겠는걸.”
“일개 지방요새가 이렇게 거대하다니 정말 뒷일을 감당할 수 있으신지요. 저희야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일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화포를 담당하는 스페인 출신 선원들은 일개 지방 관문에 불과한 산해관의 크기에 질겁하였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유성룡이 과장하여 알려준 명나라의 능력, 정확히는 전성기 명나라의 위력이며 십만 대군을 몇 번이고 잃어도 버틸 수 있는 괴물 국가이니까.
어차피 스페인 선원들을 더 동원해 보았자 화약도 없는 상황이니 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여송은 붓을 놀려 조선에 보낼 서신을 작성하여 스페인 선원들에게 내어주며 말하였다.
“이 서신은 자네들을 달자들에게서 사들인 대가로 단 한 번의 전투에 참전하여 화포를 쏘았음을 증명하는 서신일세. 전투가 끝나면 우리가 온 길을 따라 돌아가 조선에 가서 항복하게나. 조선왕 이연은 자네들을 추방하는 선에서 처분을 마칠 거라네.”
오로지 이연의 판단에 달린 일이지만 듣자 하니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는 국가이니 대놓고 죽여서 입을 막지는 않으리라.
이윽고 포탄이 발사되며 마침내 마지막 망루가 무너지며 대연군 진영에서 환호성이 치솟아 올랐다.
당장에라도 돌격하자고 외치는 부하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이여송은 천천히 대열을 앞세워 화포를 전열에 세우고 더욱 많은 포격을 실시하였다.
화약이 부족한 것을 숨기려는 허세였지만 진린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는지 산해관의 문을 열고 돌격을 실시하였다.
“이틀만 더 버텼다면 네놈이 이겼겠지. 앞으로 남은 화약이 하루 어치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따로 없구나. 화포를 뒤로 물려라! 삼수군을 앞세워 놈들을 치워 버려라!”
더 이상 떨어지는 사기를 견디지 못하고 몇 없는 진린 휘하의 기병과 아직 사기를 유지하고 있는 척가군 출신 고참병들이 한 몸이 되어 돌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병법은 테르시오와 흡사한 삼수군이 아닌 옛 명나라의 병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진린의 병사들이 두꺼운 장창대열을 마주하여 저항하였지만 한 조씩 격퇴되며 병력들이 점차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미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진린이 거듭 훈련한 병력들이니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이여송은 이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졌다면. 혹여나 조금만 더 나에게 대한 대비를 하였다면 이렇게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겠지. 악명이 자자한 장수였건만 졸장은 아니고 아낄 가치가 있구나.”
“네? 저놈을 아낄 가치가 있다니요? 우리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기존에 싸운 요새와 같은 수준이었다면 닷새 만에 함락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평범한 장수는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일신의 무력 또한 제법이로군.”
삼수군 사이를 파고들어 미친 듯이 날뛰는 진린의 모습을 천리경으로 확인한 이여송은 한숨을 내쉬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더 이상의 병력도 없이 홀로 날뛰는 진린에게 그물과 갈고리가 날아들어 몸을 에워쌌고 바닥에 널브러진 진린은 이여송을 노려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독고율 네놈! 감히 일개 경략 주제에 변란을 일으키다니! 어서 나를 죽여라! 이 나를 죽여서 황상께 대한 충심을 증명하게 하란 말이다!”
“죽이기는 아까운 장수이며 이대로 놓아주기도 아까운 장수이니 이 자를 포박하여 산해관에 가두어라. 후일 내가 제위에 올라 중원을 호령할 때에 장수로 삼을 것이다.”
“이 개놈의 자식! 천자께서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남경에서 올라온 삼십만 대군에게 포위당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네놈! 나를 당장 죽이란 말이다!”
결사 항전을 제창한 진린의 패배 이후 대부분의 병사가 달아난 산해관에 입성한 대연군은 며칠의 정비시간을 거치고 신속히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본래 북경 인근의 평원에서 회전(會戰)을 염두에 두었지만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북경이 지척에 닿을 때까지 다가섰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북경을 포위할 필요도 없이 사실상 무혈 입성하였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대연군은 다시 이여송을 칭송하기 시작하였다.
“황상께서는 천기(天氣)를 타고나신 분이 분명합니다! 이 거대한 도읍에 경비병 몇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니 이대로 천자를…….”
“머저리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라! 놈이 도주하였다면 정녕 이런 몰골이겠느냐? 놈은 남경으로 내려간 것이 분명하니 일단 별동대를 보내 도주한 놈들을 추격하라! 백성들은 털어낼 것도 없으니 탐관오리들을 노리란 말이다!”
이미 만력제가 남경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여송이었기에 약간의 호위병과 함께 자금성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대다수의 백성과 부패한 관료들이 피난한 북경이었지만 궁궐을 지키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자금성은 완전히 비어 있지 않았으며 충성심이 남아 있는 금군과 일부 관료가 사력을 다하여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무의미한 저항에 불과하였고 성문이 부서지며 남아 있던 금군들도 도주하였다.
거대한 태화전으로 이여송이 나아가자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제대로 된 복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아예 전쟁을 준비하였는지 칼마저도 패용한 명나라 태자 주상락이었다.
그는 이여송에게 삿대질을 하며 꾸짖었다.
“네놈이 도적의 수괴인가? 나는 이 나라의 태자이자 황상께서 명하신 대로 궁궐을 지키고 있으니 어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려라!”
“그렇게 하지요. 한때 요동의 경략을 역임하다 대연국을 창건하여 분에 넘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독고율이라 합니다. 명국의 태자를 뵈오니 예를 갖추겠습니다.”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 이여송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부하들이었지만, 이여송 입장에서 태자인 주상락은 자신이 제대로 된 관료였다면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영민한 사람이었다.
병력이 없다는 말은 산해관이 붕괴된 직후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짊어지기로 하고 다른 황족을 피난시키는 데 전념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다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여송의 인사가 끝나자 주상락은 그의 가면에 침을 뱉으며 크게 외쳤다.
“한낱 요동을 거머쥔 도적 주제에 황제를 칭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로구나. 예의를 표하여 어느 정도 참작해 줄 것이니 네놈에게 능지처참만큼은 피하도록 황상께 간언해 보겠다.”
“이거 태자께서는 참으로 대범하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능지형을 본인이 받는다면 참으로 비범한 일이 아닐 수 없겠군요.”
이여송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주상락을 노려보았다. 사람됨은 마땅하며 모든 일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니 아까운 인물이지만 자신은 이 명나라를 무너트릴 작정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죽이자니 아깝고 죽이지 않으면 주상락이나 다른 영민한 후대 황제가 명나라를 다시 올바로 세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여송은 한참동안 갈등하다가 부하들에게 손짓을 하며 명령을 내렸다.
“혹여나 주익균(만력제)을 사로잡지 못할 상황을 대비하여 예비 천자는 마련해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말을 잘 들어야 하니 불구가 될 때까지 마음대로 두들겨 패라.”
“지금 뭐라 하였느냐! 차라리 나를 죽이란 말이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죽이라는 소리는 수 없이 들었으니 절대 안 죽게 잘해드립죠.”
히죽거리는 부하들이 주상락을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가자 두들겨 패는 소리와 비명이 황궁을 가득 메웠다.
사람을 죽이고 폭행하기를 일삼는 요동 도적 출신들이니 불구가 되어 후유증에 시달리며 죽지도 살지도 못할 수준으로 그를 망가트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