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29화
2부 29장 1화 모든 것을 잃은 자
만력제에게 수여 받고 17년이 넘게 지난 명나라 관직을 다시 꺼낼 줄은 몰랐는데 일단 비상시에만 사용 가능한 관직이라 통하긴 하겠지.
나의 호위를 자처한 임차손은 오위의 최정예 기병들과 함께 의주를 향해 나아가면서 투덜거렸다.
그의 입장에선 요동을 정상화시킨 독고율이 적잖이 마음에 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독고율이 요동 일대에서 두각을 드러낸 지 십오 년이 넘게 흘렀다네. 지난 무인년(戊寅: 1578년) 일어난 변란이 끝나고 경략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하더군.”
“이미 정보는 들었지만 자네는 요동 일대를 몇 번이고 순시한 사람이 아닌가. 지금 요동의 정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상세히 알고 있는가?”
“지극히 정상일세. 농담이 아니고 딱히 뭐라 간섭할 이유도 없더군. 간혹 도적들이 드나들긴 하지만 이미 명국 변방에는 도적들이 발호(跋扈)하였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별문제도 아닌 것 같더군.”
임차손이 태연하게 말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십 년 이상 태업을 실시한 만력제 때문에 탐관오리가 계속 늘어났고 세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집단으로 도적 떼가 되어버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거정의 법 가운데 그나마 쓸모가 있다는 일조편법조차도 지방 관리와 중앙 관리가 짜고 치는 식으로 막중한 세금을 부과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반쯤 멸망한 요동과 명나라 변방의 상태가 흡사하다니 백성들은 어찌 살아가겠는가.
말은 하염없이 움직여 의주를 넘고 요동의 중심부인 심양을 향해 나아갔다.
호위병을 앞세워 산길을 건너가고 있으니 길 건너편에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이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여기는 요동인데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 어찌하여 이리도 당당하게 움직이십니까. 도적이 출몰하여도 우리가 알아서 격퇴할 것이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나는 조선의 관리이기도 하지만 명국 황상께서 친히 독사(督師) 직위에 임명한 유성룡일세. 근래에 들어 요동 일대에서 불온한 행적이 몇 차례 보고되었으니 이를 조사하러 왔지.”
독사는 명나라 기준으로 종1품 품계이니 경략과 대등하거나 한 단계 높은 품계이다.
이쯤 되면 대등한 위치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만력제가 직접 임명하였고 독고율은 3대에 걸쳐서 경략 직위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중앙관과 지방관이 같은 품계라 하여도 지방관이 무조건 고개를 숙이듯이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더 우위에 있다.
내가 아예 만력제에게 받은 임명장을 건네자 상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술을 질끈 씹고 답하였다.
“요동 일대는 참으로 평온하건만 어찌하여 불온한 행적이 보인다 하시는지 영문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일단 여독을 푸시며 천천히…….”
“여독을 풀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서애 자네도 입신체비를 익혀 여력이 남았을 터! 지금부터 전력을 다하여 심양으로 향한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놈들에게 어영부영 시일을 빼앗겨 증거를 죄다 놓치느니 조금 위험하더라도 전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답이다.
상대가 뭐라 반박하려 하였지만 임차손이 데려온 호분위(虎賁衛) 병력들이 무기를 만지작거리자 아무 말도 못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후에도 몇 번 정도 순찰을 도는 병사들과 마주쳤지만 다들 같은 방법으로 따돌리고 심양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임차손은 갈수록 많아지는 병사들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내가 명나라의 병서(兵書)를 읽은 적이 있다네. 순찰과 탐검에 관하여 기병과 보병을 혼합하여 일대를 순시하라 하였는데 서적의 내용과 요동의 실정이 완전히 일치하는군.”
“그러하면 독고율이라는 자가 지난 세월동안 군사를 다루는 법을 익혔다는 말인가?”
“아닌 것 같다네. 병법은 버릇처럼 남으니 젊은 시절에 처음 배운 것을 잊기 어려운 법이지. 어린 시절에 병서를 탐독한 자가 아니라면 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법이라네.”
임차손의 말이 딱히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의 버릇은 어린 시절부터 생겨나며 지식의 기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올린 틀을 벗어나기가 지독히 힘들다.
심양을 향해 나아갈수록 점차 온전한 생활상이 눈에 들어왔다.
기후가 추운 지역이라 밭작물을 기르지만 제대로 가축을 동원해 밭을 일구고 마을에서 품앗이까지 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내 심양성에 당도하자 천여 명에 달하는 보병들이 길을 막고 우리를 맞이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우회해 지나가려 하였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군대가 있었다.
“삼수병(三手兵)이 아닌가? 아국에서 즐겨 다루는 삼수병과 흡사한데.”
“삼수병은 보통 조련으로는 만들어낼 방법이 없는 병사들이라네. 서반아는 물론이요 아국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장비를 지급하고 봉급을 퍼부으며 훈련에 임해야 하지.”
스페인에서는 테르시오라 부르고 조선에서는 삼수병이라 부르는 군대의 특성은 명확하다. 창병을 앞세우고 창날 아래로 파고들 검병을 예비대로 배치한 뒤 나머지를 보총병으로 채운다.
워낙 돈이 많이 들어 조선도 유지비에 허덕이고 명나라는 척계광 휘하의 척가군이 무너진 이후 재편성할 엄두도 나지 않는 군대였다.
그러나 독고율 휘하의 군대는 보총병의 수가 적을 뿐 엄연한 삼수병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어설픈 삼수병일 뿐 제대로 된 군대는 아니니 오위 수준의 정예병을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이들을 상세히 알아보고 싶으니 말에서 내려 임명장을 보여주고는 말하였다.
“황상께서 임명하신 독사의 권한으로 이 자리에 왔다네. 심양 일대를 시찰하고 싶으니 경략에게 어서 소식을 알리도록 하게. 대접은 바라지도 않으니 서둘러 안내하도록.”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라…….”
“내 독단으로 판단하면 충분하겠군. 저 멀리서 병졸들을 훈련시키는 소리가 들리니 직접 시찰하려 한다네. 화포까지 쏘아대니 참으로 대단한 훈련이로군.”
상대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사람을 보내려 하였지만 나는 거리낌 없이 임차손과 함께 말을 타고 화포 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향하였다.
인도에서 초석을 수입하는 조선이라면 모를까 화포를 쏘아대면 실전 직전의 훈련을 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이다.
아니나 다를까 천자총통에 준하는 화포 십여 문이 포연을 사방으로 흩날리며 방포되고 있었다.
우리의 방문을 눈치챈 사람들이 달려왔는데 개중 한 명은 백인이었고 내 얼굴을 똑똑히 알아보았는지 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당신은 조선 관료 아니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자네 혹여나 로베르토 휘하에 있던 선원이 아닌가?”
기억이 떠올랐는데 경진만란 당시 로베르토 휘하에 있던 스페인 선원 중 한 명이었다. 황윤길의 예상대로 북원에 팔려간 스페인 선원과 기술자들을 독고율이 사들인 것이다.
가만히 보니 화포 형태가 스페인에서 사용하던 컬버린이라는 화포와 흡사하였으니 분명 스페인 선원 출신들이 화포를 제작하는 데 공헌했으리라.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춤거리자 다른 사람이 나와 인사를 올리고 답하였다.
“왜 이런 하찮은 일에 관심을 보이시는지 알 길이 없지만 경략님께서는 달자들에게 가족을 잃어 복수심에 불타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홍이포(紅夷砲)를 쏘아 달자 놈들을 짓뭉개 버리실 작정이라 하더군요.”
“홍이포라 하였는데 아국의 천자총통에 비견할 화포로군. 자네는 이걸 어디에 쓰는지는 알고 있는가? 명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커다란 화포란 말일세.”
“구경이 커다란 화포이니 한 발만 쏘아도 대여섯 명씩 짓뭉개져서 날아가지 않겠습니까? 달자들이 아무리 날래다 하여도 포탄보다 날래진 않습니다.”
상대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을 하였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고 조목조목 짚어가며 따질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니 이마를 짚으며 임차손에게 말하였다.
“자네도 군문에 오랫동안 있어 보았으니 알 수 있을 것이네. 북원과 같이 대다수가 기병인 적을 상대할 때에는 저런 화포가 쓸모나 있던가.”
“성을 끼고 방비할 적에는 쓸모가 있지만 회전(會戰)을 벌일 적에는 오히려 독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병을 상대로는 적당히 작은 화포가 좋다네.”
명백한 공성용 화포의 실전 사격을 하였으니 목표물은 무조건 산해관이다.
화포사격이 중단되자 임차손은 말을 타고 나아가 사격 목표 주변의 땅을 훑어보았고 자그마한 납덩어리를 가져오고는 말하였다.
“보총에 쓰이는 탄환이 분명하다네. 나름 바닥을 헤집어 납을 수거하였겠지만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은 근래에 들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한다는 뜻이지. 참으로 난처하군.”
이제는 아예 실전 사격훈련까지 하였으니 두말하면 입이 아플 수준이다. 수많은 장병들이 오가며 다져진 거대한 벌판은 모래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거대했으니 명백한 전쟁 준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차손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그러하면 자네가 보기에는 요동의 군대 수준이 오위와 비교하면 어떠한 경지에 이르렀는가.”
“오위보다는 못하지. 삼수병을 사용함에도 보총수의 수가 지극히 적고 군기가 제법 들어찼지만 지방군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라네. 굳이 따지자면 왜병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겠군.”
제법 염려했지만 지나치게 강하지 않고 오히려 적당할 정도로 강해서 좋다. 요동의 군대 수준은 조선을 침략하면 의주나 점령하고 몰살당할 수준이지만 명나라 기준으로는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준이다.
임차손은 전쟁이 일어나면 벌어질 손해에 초조해했지만 나는 주상전하의 밀명을 받은 사람이니 이들이 산해관을 뚫고 북경을 박살 내는 수준에서 끝나길 원하고 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독고율 본인이 달려왔다.
“염병할 놈. 도적 우두머리 주제에 출세해서 저런 꼬락서니를 하다니.”
“경략으로서 위엄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해 보세나.”
임차손이 투덜거릴 만큼 독고율의 복식과 갑주는 화려하다 못해 장수로서의 수위를 넘어설 지경이었다.
금실을 수놓은 새하얀 두정갑이 번뜩거리고 어디선가 구한 황토색 준마까지 타고 있었다.
여기에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날아간 코를 대신해 눈 아래부터 입 위까지 황동으로 만든 가면을 착용한 독고율이었는데 말에서 부드럽게 내리더니 우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조선 사람들이 당도한다 하여 내쫓을까 하였지만 황상께서 임명한 독사를 뵙게 되니 한미한 분토를 파먹으며 사는 사람으로서 영광이 따로 없습니다.”
“한미한 분토를 이만큼 일구었다 하면 명신 중의 명신이니 내가 고개를 숙여야겠지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잘 알아볼 수 없었는데 명신이라는 말을 듣고 입술이 어색하게 씰룩거렸다.
독고율은 공개적인 자리에 있어서인지 다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이토록 요동 일대를 다스린 이유는 달자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가족과 친척은 물론이고 다른 경략들 모두가 살해당하였는데 복수의 깃발을 휘날리지 않으면 뭘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보총병을 시작으로 한 삼수병은 이해할 수 있는데 공성용 화포는 왜 준비했단 말인가.
임차손이 대놓고 코웃음을 치자 독고율은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애를 쓰며 말하였다.
“하지만 독사께서 보신 바가 맞습니다. 저는 요동 경략으로서 침입한 적도를 격퇴할 의무가 있지 먼저 공격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를 불온한 행적이라 하시니 참으로 옳은 말이로군요.”
“본심을 숨긴 것 같으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지 않겠소. 이를테면 아무도 듣지 못하는 독실이나 따로 마련한 가옥에서 진중한 말을 나눠보는 거요.”
주상전하의 밀명을 받은 나는 태연하게 말하였지만 임차손은 그래도 되겠냐는 듯이 염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면 독고율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였다.
“마침 대화를 나누기 딱 좋은 별채가 있습니다. 독사와 경략 양 지휘관이 나서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옳은 방법 같군요.”
독고율과의 대화를 위해 따로 안내받은 별채에는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임차손이 데려온 호위병과 독고율 휘하의 병사들을 섞어 멀리 떨어져 진을 치게 하였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독고율의 정체는 요동에 있었던 군관 중 한 명이 분명하리라.
혹시나 고함을 쳐서 대화가 새어나갈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한 대나무 발을 창문에 겹쳐놓고 원탁에 앉아 독고율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그리 쳐다보십니까. 혹여나 제 가짜 코가 비뚤어졌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다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네. 도적 떼의 소굴인 요동을 부흥시켰으며 제대로 된 병졸을 육성하였다면 군문의 도리에 능할 터. 자네는 분명 군관 출신일세.”
코 부분에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완전히 읽을 수는 없지만 눈 가장자리가 씰룩거리는 것만 보아도 동요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기회를 노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따지고 들었다.
“군문에 있었던 자라면 요동을 잘 통치하여 황상께 전해줬어야지. 그리하면 나라의 복록(福祿)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변란을 준비할 줄은 몰랐네. 자네의 충심!.”
“충심? 자라 대가리 뜯어먹는 미친 소리 하지 마라 머저리 새끼야!”
충심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든 독고율은 내 멱살을 휘어잡았으나 입신체비는 물론 내수린도 익혔으니 손을 풀어내고 발로 걷어차 뒤로 자빠트렸다. 바로 내수린을 이용해 제압하려 하였으나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생전 많은 사람을 보았음에도 저토록 분노와 한에 얼룩진 표정을 본 적은 없었다.
내가 기세에서 밀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독고율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자신의 가면을 풀고 코가 사라진 자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세상 사람을 다 속여도 당신을 속일 수 없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 장거정조차 당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내가 벗어날 길이 어디 있겠나. 나는 전 요동 총병관인 이 자무(子茂: 이여송의 자)이다.”
젊은 나이에 요동 총병관으로 부임하여 도적들의 부하 노릇을 했다는 이여송이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아무도 입수하지 못한 정보를 접해 가슴이 요동쳤지만 마음을 굳게 다잡고 질문하였다.
“분명 독고율과 언쟁을 벌이다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내가 선친의 원수를 갚은 뒤 내 코를 잘라내고 얼굴을 둘둘 싸매 코맹맹이 소리를 내니 다들 속더군. 이후 믿을 수 없는 놈은 몰래 죽이고 믿을 놈을 살리니 그럭저럭 요동을 다스릴 수 있었지.”
이 귀중한 정보를 주상전하께 보내면 후일의 대책을 세우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되기는커녕 애초에 명나라의 신하인데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모를까, 이 반란 준비는 조선이 개입하는 순간 사실상 자폭이다.
주상전하께서 명하신 바는 요동을 병탄할 수 있게 수를 쓰라 하였지만 대놓고 드러낼 수 없기에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며 속내를 알아보려 하였다.
“그러하면 요동을 온건히 통치하면 될 것을 수많은 이들을 수렁으로 몰아넣는 변란을 일으키려 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려. 혹여나 명국에서…….”
“네가 내 인생에 대하여 뭘 알기를 하냐! 어린 시절부터 조부께서 도적 떼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휘하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간 것을 상상이냐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이여송은 당장에라도 북경으로 달려들고 싶었는지 깨문 입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으며 눈에는 핏줄이 치솟아 올라 있었다.
그는 숨을 훅훅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금 울분을 토해냈다.
“조정에 소식을 보내도 답신이라고는 도적에게 뇌물로 돌아갈 약간의 지원금이 전부였으며 그마저도 거의 오지 않았다! 그나마 병사들과 백성들을 지키려면 철광석을 캐내 도적 떼들의 병장기를 만들어 줘야 했다고!”
“차라리 아국으로 도망치면 나은 형편이 아니었겠는가. 자네의 조상은 분명 고려의 전객부령 이천년이니 아국에서 별문제 없이 받아들였을 거라네.”
“나에게 딸린 식솔이 몇 명인데 쉽사리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선친께서는 경략을 암살하여 혼란을 부추긴 뒤 탈출하려 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갔지. 정작 그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독고율 놈의 거죽을 뒤집어쓴 꼴이 되었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이여송이 머리를 감싸 쥐고 흐느꼈는데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진 사람을 어르고 달랠 방법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한참을 침묵하자 이여송은 내가 가장 바라고 있던 제안을 시작하였다.
“나를 여섯 달 정도만 내버려 두지 않겠나. 조만간 내 이름으로 국가를 창설하고 명나라에 공세를 퍼부을 거라네.”
“목적이 무엇인가. 대체 뭘 원하기에 그런 자살과 같은 행위를 하느냔 말일세.”
“살아봤자 의미도 없지. 내 친인척들은 달자들을 달래려는 도적놈들에게 살해당해 전리품으로 넘겨졌으며 머나먼 친척들은 북경의 부패한 관료들이 짜고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심문을 빙자하여 장살(杖殺: 매를 쳐서 죽임)하였지.”
그나마 머나먼 친척들이 살아 있었다면 이여송도 함부로 명나라를 공격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그는 한참을 씩씩거리다 방 한구석에 있던 술을 모조리 들이켜고 말하였다.
“많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네. 산해관을 뚫고 북경을 공략하여 조부님과 선친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먼 친척들을 살해한 윗대가리들의 모가지를 모조리 따낼 걸세.”
“그러하면 황상은 어찌하겠는가. 내가 알기로 황상께서는 자네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네. 지금이야 태업을 일삼는 분이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네.”
“목숨만은 부지할 길을 열어둘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다만 주후총 그 자라 새끼는 무덤을 뜯어내 유골을 바스러트릴 거라네. 이후에는 조선이 편한 대로 하되 내가 전장에서 죽거든 시신을 불태워 조리돌림 당하지 않게 도와주게나.”
이여송이 주상전하께서 원하는 만큼 명나라를 박살 낼 마음을 품었으니 이대로 두면 알아서 잘하리라.
그는 내가 답하지 않자 오히려 미안한 듯이 말하였다.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면 조선이 적잖은 고난을 겪을 것이네. 애석하겠지만 조선의 국왕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하거든 조선과 일전을 벌여 끝까지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겠지.”
“일단 주상전하께 보고를 올리겠네. 또한 자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자네가 이여송임은 절대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네.”
“참…… 참으로 고맙군.”
애초에 발설할 수도 없고, 이걸 이야기했다간 사관의 귀에 들어갈 것이요 실록에 ‘성상께서는 명국의 변란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였다’라고 적혀 훗날 욕을 먹으리라.
내가 조정으로 돌아가도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경략 독고율은 북원과의 일전을 준비한다며 심상치 않은 행동을 보이고 있으니 황상께 알려서 이를 무마하십시오!’라고.
하지만 태업을 일삼는 만력제가 반응할 이유는 없으리라.
#작가의 말
임차손 : 아무리 보아도 수상하다네. 이렇게 되면 북경이 함락당하고...
성룡이 : 싫은가?
임차손 : 오히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