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27화 (527/573)

근육조선 527화

2부 28장 11화 떡 하나 더 준다

난데없이 주상전하께서 행차하시자 산시양은 물론이요, 장인들 모두가 절을 올렸다.

제법 먼 북한산성 자락까지 행차하였으니 산시양은 아예 식은땀을 질질 흘려대며 창백한 얼굴이 되어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고변하였다.

“전하! 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주상전하께서 드시는 난면을 만들어낼 틀을…….”

“죄를 짓기는 하였지. 자네가 꾀를 써서 승자기를 더욱 빠르게 만들어 낼 방안을 모색했다 하였는데 진작 장계를 올리지 무얼 하였느냐. 죄이지만 용서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갑자기 불경죄에서 장계를 올리지 않은 죄가 되어버린 산시양이 멍하니 있다가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주상전하와 짜고 산시양을 엿 먹이는 중이니 그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달려가 파스타 틀을 매만졌다.

“전하, 산시양이 지나치게 긴장하여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사오니 신이 시험해 보겠습니다. 거기 뭘 하는가! 미리 말해둔 대로 난면 틀에서 밀어낼 반죽을 가져오게!”

다들 영문을 모르고 있어서 내가 직접 움직였다.

장식을 만드는 데 쓰는 목아교(아라비아 검) 점토를 파스타 틀에 욱여넣고 젊은 장인 둘과 힘을 합쳐 이를 뽑아내었다.

생각보다 빡빡하긴 했지만 밀가루 반죽이 밀려 나오는 얇은 구멍, 현대로 따지면 스파게티 면과 흡사한 두께의 구멍으로 점토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젊은 장인들은 이 길쭉한 점토를 손으로 들어 매만지면서 감탄하였다.

“난면 틀이 해답이었군요. 강한 힘으로 밀어내니 좁은 틈을 통과하며 기포도 빠져나가고 반죽의 질감도 단단해져 마음대로 가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전부이겠는가? 내 자네들이 꽃을 만드는 과정을 보았는데 이 길쭉한 반죽이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어서 시험해 보도록 하게나.”

젊은 장인들이 꽃을 비롯한 장식을 만드는 방법은 대부분 비슷했다. 한 손에 쥐면 적당한 크기의 반죽을 뜯어내 움켜쥔 뒤, 손가락 끝으로 누르고 밀어내며 부품을 만든다. 특히 꽃잎은 한 장을 만드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수백 개의 꽃잎과 암술 혹은 수술을 비롯한 꽃을 구성하는 부품을 탁자 위에 깔아놓은 뒤, 여러 송이의 꽃을 단번에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평상시라면 모를까 급한 와중에는 오차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자네들이 실수가 빈발하는 이유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점토를 밀어내는 양의 차이가 생겨서라네. 엄지손톱보다 작은 꽃잎을 만들어야 하니 약간의 오차는 크게 드러나게 마련이지.”

사람의 눈과 손은 의외로 부정확하다. 아무리 장인이라도 약간의 오차는 생기게 마련이며 작업을 반복할수록 커진다.

첫 꽃잎의 크기를 100이라 했을 때 다음 꽃잎은 101의 크기가 되고, 백 번째 꽃잎은 140 정도의 크기가 되게 마련이다.

여유가 있다면 꽃잎의 크기가 110쯤 될 때에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100으로 크기를 줄이지만 급한 와중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리라. 장인들도 이를 알고 있었으니 홀가분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지나치게 많은 물량을 만들어야 하니 눈앞의 일이 급급해져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균질한 두께로 나오는 반죽이라면 실패할 이유가 없습니다. 역시 우상대감님이시군요.”

“산본 이 친구가 자네들이 절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방법을 마련해 두었으니 내 공이 아닐세. 이 정도의 두께를 가진 반죽이라면 꽃잎을 실수 없이 만들 수 있겠는가?”

이들이 한 번에 밀어내는 반죽의 크기를 눈짐작으로 봐두었는데 대충 파스타 면 형태로 밀어낸 반죽 세 가닥과 같은 양이었다.

젊은 장인들은 이 반죽을 잠시 매만지다가 꾹꾹 눌러서 꽃잎을 만들어내며 즉석에서 개선을 시작하였다.

“반죽 세 가닥을 반 치 길이로 잘라 밀어내면 저희가 항상 만들어내던 꽃잎과 같은 크기로 빚어낼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만 응용하면 모든 부품을 만들 때에 쓸 만할 것 같군요.”

“백합꽃잎은 다섯 가닥을 뭉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복숭아의 수술을 표현하려면 더 얇은 반죽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런 물건은 없습니까?”

“염려하지 말게나. 난면은 각기 형상과 두께가 다르니 자네들이 원하는 반죽은 모조리 만들어낼 수 있다네. 설령 만들어낼 수 없어도 틀을 새로 만들면 충분하지.”

형님이 들여온 파스타 틀의 끝부분은 교체가 가능한 철판이다.

이 철판에 뚫린 구멍은 각기 속이 빈 마카로니, 아주 가느다란 카펠라니, 그리고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우동 굵기의 파스타조차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정 두께로 밀려난 반죽을 받아간 장인들은 대나무 칼로 이를 잘라내 양을 정했다.

양이 정해졌으니 오차가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기존 속도의 두 배에 달하는 작업 속도임에도 검수 과정에서 큰 오차가 발생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쌀알보다 섬세한 복숭아꽃의 수술은 아주 얇게 잘라낸 반죽의 끄트머리를 슬쩍 뭉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포도송이는 우동 굵기로 두껍게 밀려 나온 반죽을 잘라 살짝 손으로 다듬은 포도알 수십 개를 뭉쳐서 완성하였다.

산시양의 표정은 작업이 진행될수록 창백해지다 아예 시체처럼 거무죽죽해졌고, 주상전하는 산시양의 양손을 잡고 크게 웃으며 공을 치하하기 시작했다.

“과연 산시양이로군. 자네가 승자기를 만드는 일에 가장 중요한 과정을 모조리 꿰차고 있으니 승자기를 창안한 이는 유성룡이지만 실질적인 제조자는 자네일세.”

“아…… 서! 성은이! 퇴직이…… 성급하옵니다!”

“퇴직? 누가 지금 퇴직 소리를 내었는가? 자네의 품계를 조만간 한 단계 올릴 것이니 괘념치 말도록 하라. 승자기를 더욱 빨리 만들 방법을 마련하였으니 난면 틀을 멋대로 가져간 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주상전하의 미소 안에 뼈가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산시양이 퇴직을 청하는 날 이걸 공론화시켜 박살 낼 것이라는 뜻이었다.

졸지에 품계가 오른 산시양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도 한 손 거들었다.

“처음에는 자네의 깊은 뜻을 몰라 난면 틀을 가져온 자네를 매몰차게 대하였으나 자네는 역시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일세. 이다지도 뛰어난 사람이 하주도에서 나다니 하주도 최초의 정승이라도 오르면 어떠하겠는가?”

아예 울 것 같은 산시양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지만 작업속도는 더더욱 빨라졌다.

아예 인근에 있는 군기시에 특별 주문을 넣어 파스타 틀을 열 개나 더 만들어두라 하였으니 예상 작업속도를 재계산한 장인이 화색을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삼천 상자는 만들기 힘들겠지만 앞으로 일곱 달이면 이천 상자를 만들고 여력이 조금 남을 수준입니다. 이제는 살았습니다!”

“앞으로 매년 삼천 상자를 만든다고 가정하고 업무를 진행하면 되겠군. 주상전하께 아뢰옵나이다. 앞으로 조선회사에서 만드는 승자기의 수익은 최소 은자 육십만 냥에 달하옵나이다.”

“육십만 냥이라 하면 원가의 두 배가 넘는 이득이군. 후일이 되면 더욱 많아지지 않겠느냐.”

“실로 그러하옵니다. 장식을 줄인 승자기도 개당 은자 열 냥 이상에 판매할 수 있으니, 승자기 제작이 정상궤도에 오르면 매년 일백만 냥이 넘는 순이익을 거둘 수 있사옵니다.”

이마저도 명나라에서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은 제외한 수량이다.

주상전하께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아예 장인들이 일하는 장소를 시찰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승자기 하나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며 아국의 이름을 널리 떨칠 것이니 모두가 보배와 다름없도다. 후일 자네들의 이름도 세상에 퍼트릴 수 있도록 더욱 힘을 써보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생들은 제대로 만든 작품에 자신의 낙관(落款)을 찍게 마련인데 이들은 평민인지라 낙관을 딱히 찍지는 않는다.

이 낙관 대신 국가가 이름을 보증하는 제도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였으니 충성심이 더욱 높아질지도 모르지.

주상전하께서는 모든 공정을 확인해 보다 한 귀퉁이에 놓인 시제품 찻주전자에 눈길이 돌아갔다.

장인들이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찻주전자이지만 주상전하께서는 이걸 들어서 상세히 살펴보시고는 염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자네들이 사용한 찻주전자를 확인하여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구나. 찻주전자에 붙여놓은 꽃잎이 너무나 세세하여 하나씩 떨어지고 부스러지는구나.”

도자기를 마음대로 찍어내는 장인들이니 시제품 도자기 정도는 멋대로 움켜쥐고 차를 거칠게 따라댔으니 꽃잎이 손아귀 힘에 짓눌려 바스러지게 마련이었다.

주상전하께서는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갔다.

“이 물건을 얼마나 사용하였느냐. 내가 알기로 새로운 찻주전자를 만들었다는 장계를 작년 초에 확인하였는데 기껏해야 일 년 하고 여섯 달이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에 찻주전자가 있는지라 거칠게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일 년에 미치지 못하옵나이다.”

“대략 오 년 정도 사용하였을 경우에는 흉물이 되겠구나. 이미 팔아놓은 판국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만 이는 후일 문제가 될 것이다. 우상은 무슨 생각으로 이를 권하였는가.”

“신의 생각보다 내구성이 좋으니 마음이 안타까울 지경이옵니다.”

내구성이 지나치게 좋기는 하지. 내 말을 들은 주상전하는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현대의 부자들이 어떻게 물건을 쓰는지 알기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다.

예시를 들기 위해 내 관복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신이 아직 젊은 관원일 적에는 모친께서 만들어주신 비단 관복을 매양 아끼고 보살피며 때가 타지 않게 노력하였사옵니다. 하오나 고작 여섯 달 만에 관복이 해져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모친의 은혜가 담긴 관복을 버렸습니다.”

“나도 그러한 일은 많이 듣기는 하였다. 그러나 비단 관복과 찻주전자는 다르지 않더냐.”

“품계가 오르고 집안에 여유가 생겨 관복 여러 개를 돌려가며 입으니 한 관복이 해질 무렵 새로운 관복을 사들여 계속 벌충하였사옵니다. 찻주전자도 이와 마찬가지이옵니다.”

어중간한 사람들이 명품을 사면 자랑하기 위해 매번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계속 거치며 내구성이 다해 순식간에 폐품이 된다. 예를 들면 내가 현장에 차고 다니던 시계처럼 말이지.

대신 부자들은 명품을 아예 쌓아놓고 매일 마음에 드는 물건으로 갈아치우며 한 개가 폐품이 되면 새로운 명품을 다시 쌓아놓는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니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였다.

“진정한 부호들은 자랑할 거리가 넘쳐나고 간혹 다회(茶會)를 열 때에만 찻주전자를 사용하니 한번 구매하면 백 년은 사용할지도 모르옵니다. 그러나 명사나 권신이 되려는 어중간한 이들은 주상전하가 보신 대로 몇 년을 사용하면 새로 사들여야 할 것이옵니다.”

자신의 재산을 거리낌 없이 자랑하려는 서양인들의 심리를 노린 상술이다.

진짜 부자들은 찻주전자 한 상자를 구매하고 이를 가끔 꺼내 쓰는 방식으로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으리라.

반면 어중간한 부자들은 찻주전자를 자랑하려고 손님 앞에 꺼내놓고 연회에서 주구장창 사용하다 부스러진 꽃잎을 부끄러워하며 남몰래 새 찻주전자를 사들이겠지.

주상전하도 내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아니다, 오히려 더 바람직한 일이로구나. 진정한 권세가들의 손아귀에서 간혹 쓰이는 동일한 찻주전자가 멀쩡히 쓰이고 있다면 관리에 소홀한 자신을 책망할 것이다.”

“실로 옳은 말씀이옵니다. 물론 지나치게 내구성이 부족하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니 후일에 만드는 물건이나 장식을 줄이고 단가를 낮춘 물량은 좀 더 튼튼히 만들고자 하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본차이나 찻주전자의 내구성을 탓하기보다는 한번 구매하면 계속 사들일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리라.

주상전하께서 궐로 돌아가시자 나는 장인들을 독려하기 위해 말하였다.

“자네들 뭘 하나! 산본 대감이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자네들을 도와준 사실을 잊었는가? 사력을 다하여 물량을 만들고 후일 천축과 오사만국에도 물량을 팔아넘길 수 있도록 하게!”

산시양은 어느새 구석에 웅크리고 퇴직이라 중얼거렸는데 퇴직은 뭔 퇴직이냐.

내가 퇴직할 때까지 괘씸죄를 적용해 네놈이 절대 퇴직하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 * *

의정부의 업무 가운데 내가 가장 예의주시하는 사항은 스페인과 관련된 문제였다.

혹시나 스페인에서 탐험대를 보내 미주의 영토를 파악한다면 외교 분쟁으로 번질 수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펠리페 2세의 병세가 깊어지며 이런 움직임을 보일 여력은 없는 것 같았다.

오늘도 단순한 외교 업무에 대한 자문을 이어가는데 김성일이 쭈뼛거리며 장계를 들고 다가왔다.

“학봉(김성일의 호) 자네 안색이 영 좋지 않군. 혹여나 서반아에서 미주의 강역을 두고 공식으로 항의라도 보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또 영길리의 해적들이 날뛰었는가?”

“머나먼 외방은 아주 평온하건만 요동 일대에서 변란의 조짐이 보인다네. 아직 다른 관원들은 모르고 있지만 내가 일전에 명을 달리한 우송당(友松堂: 황윤길의 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심히 염려하고 있을 뿐일세.”

황윤길은 현대의 임진왜란 매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임진왜란을 정확하게 예측하였던 사람이고 아예 조총까지 가져온 사람이라 하였던가.

이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따위도 없었으며 조선이 워낙 강력한 덕분에 병조참판 자리에 오르고 소일거리나 하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노환으로 죽었는데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 궁금하였다.

“내가 미주에서 근무할 적에 병조판서로 부임했다 하였는데 우송당이 무슨 이야기를 남겼는지는 기억하고 있는가? 나는 안면은 튼 적은 있어도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잘 모르네.”

“내 기억력이 자네보다는 못하여도 중요한 이야기 정도는 기억할 수 있다네. 십팔 년 전 경진만란이 벌어졌을 당시 포로로 잡힌 이들 가운데 명국으로 끌려간 이들을 기억하는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네. 황상께서 진노를 담아 이들을 북방의 달자들에게 팔아치웠지. 이미 강산이 두 번 변할 시일이 흘렀으니 대부분 죽어 나가지 않았겠는가.”

대부분 선원 출신이고 어느 정도 수준이 높은 기술자도 있었지만 조선 기준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조선에서도 만력제와 척을 지기는 싫어 북원에서 다시 사들일 수 있음에도 방치하였으니까.

설령 이들이 북원에서 기술자로 두각을 드러낸다 해도 한계는 명확하다. 철을 비롯한 금속의 대부분을 조선과 명에서 수입하는 북원이니 뭘 만들어보지도 못했으리라.

내가 시큰둥하게 답하자 김성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였다.

“우송당이 말하기를 이들이 북원에서 모조리 죽어 나갔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요동으로 향하였을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것이라 하였네. 요동에는 철광산도 있으며 구리광산도 있다네. 이들이 가진 기술을 감안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지금 요동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이는 독고율이 아닌가. 옛 도적 출신이라 하여도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아 변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변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사리분별을 하는 적이 있기는 하였는가.”

설마 독고율이 반란을 일으킬까? 지금 명나라의 수준이라면 제대로 된 병사 삼만여 명과 산해관을 정면에서 뚫을 수 있는 제대로 된 포병만 있어도 북경 정도는 함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이기는 하다.

산해관을 뚫고 북경을 함락할 수는 있으리라.

이후 남쪽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명나라 증원군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필사적인 방어전이 시작된다. 그걸 막아낸다고 끝이 아니다.

조선은 돈줄인 명나라의 목숨을 붙여주기 위해 전력을 다해 독고율을 토벌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니 김성일의 지나친 염려를 넘어가려 하였으나 그는 북인들이 작성한 것이 분명한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북인들을 시켜 요동번장(만리장성의 요동 일대 구획) 주변을 정탐하게 하였네. 예전에는 녹이 슬어가던 화포가 즐비하였는데 이제는 화포가 보이지도 않는다더군.”

“화포를 녹여서 장신구…… 잠시만! 구리를 캐낼 수 있는 요동에서 화포를 녹일 정도로 청동을 다급하게 사용하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일세. 녹슨 화포를 녹여 가공하려면 어중간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법인데.”

“나도 보고를 듣고 한참을 고민하다 장계를 올리려는 마음을 먹었다네. 요동번장 일대의 화포를 녹여내 다시 만들었다면 천자총통 수준의 화포 예순 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더군.”

천자총통 60문이면 조선 기준으로는 오위의 일각인 충무위(忠武衛)에서 사용하는 화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화력이지만 명나라에서는 다르다. 내가 알기로 명나라의 북방 관문인 산해관에 배치된 화포 중 천자총통 수준의 화포는 12문에 불과하다.

요동에서 생산한 구리를 감안하면 충무위 화력의 절반 정도는 손쉽게 달성할 수 있으리라. 이 정도면 공성전임을 감안해도 산해관을 함락시키는 데 열흘조차 걸리지 않는다.

김성일은 내 표정을 살펴보면서 말하였다.

“독고율이 군문의 일을 잘 모른다 하여도 문제라네. 십여 년 넘게 북원에서 시달리다 가까스로 사람이 사는 장소로 돌아온 서반아인들이 화포를 만들어내고 서반아 육군을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아국의 입장에선 한 달 이내에 몰살시킬 수 있는 상대이지만 북경을 유린하고도 여력이 남을 수준이로군. 명국 황상께서 칩거하신 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참으로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독고율이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요동에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은 한계가 명백하다. 덮어놓고 오위를 보내 독고율을 단번에 토벌하면 끝이다.

그러나 요동은 엄연히 명나라의 영토이며 멋대로 조선에서 병력을 보내 도적을 토벌하면 엄연한 외교 간섭이자 군사 간섭이다.

제아무리 조선을 좋아하는 만력제라 하여도 격노할 일이다.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 주상전하께 보고를 올려야 하리라.

#작가의 말

이제 이여송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