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26화 (526/573)

근육조선 526화

2부 28장 10화 미운 관원

조선회사의 도제조로 일하고 9개월이 지났다.

사상 최초로 국가 상단을 경영하는 조선인지라 이래저래 미숙한 점이 많았지만 현대의 상업구조를 일부나마 이해하고 있는 내가 개입하고 많은 점이 바뀌었다.

조선회사는 비대한 자금원과 부족한 경영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 자금원을 동원하여 수출하는 상품이 아닌 다른 품목도 취급하려 하였다.

지금도 한 부서를 해체하여 다른 부서로 편입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점취(点翠) 관련 부서는 좀 더 확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비녀나 다회(끈 종류의 장신구)는 통합하도록 하여 불편을 막도록 하세나. 점취야 여송도에서 기르는 앵무새 깃털로 마음대로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저잣거리에 드나드는 물건 가운데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 다회이니 장인들을 고용하려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이 좋은 물건을 만들려 하지 않으십니까?”

“조선상회의 상품은 아국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구주를 비롯한 전 세계에 판매하는 물건이라네. 내가 구주에 직접 다녀왔지만 다회같이 끈을 이용한 장신구는 거의 없더군. 큰 이문을 얻을 수 없으니 어서 해산시키게나.”

기껏 모아놓은 장인들을 돌려보내게 되자 아쉬운 표정을 지은 관원들이지만 이 자리에서 선을 그어둬야 한다.

조선회사는 국영 상단이자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수출 상단이지 내수용 상단이 아니다.

덮어놓고 팔릴 만한 물건만 취급하면 현대의 대기업처럼 문어발식 확장을 할지도 모르니 이 품목을 정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창고에 쌓여가는 본차이나 찻주전자처럼 아주 필수적인 품목 말이다.

정기 보고가 들어왔는데 9개월 만에 제법 많은 물량이 쌓였다.

“대감께서 예측하신 수량을 채우고 일 할가량이 남았습니다. 이번 달이 지나면 찻주전자가 도합 구천이백여 개, 상자로는 일천이십 상자 정도가 쌓이게 되겠군요.”

펠리페 2세에게 본차이나 찻주전자를 보내며 다른 소문도 퍼트렸다.

얼마 뒤인 1598년경에는 이와 동일한 대신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은 찻주전자를 팔 것이니 주문을 받는다 했고 슬슬 소식이 도착할 때가 되었다.

본차이나 상품을 처음 팔아치울 장소는 가장 이문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유럽이지만 조만간 물량이 늘어나면 거래처를 더욱 확보할 예정이다.

몇 개를 확인해 보니 품질이 거의 균등하였기에 장인들을 독려하려 말하였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언제나 여유를 가지게나. 일단 구주에 승자기를 팔아치우고 물량이 남으면 천축이나 오사만국에 팔아치우면 충분하겠지. 그때가 되면 자네들 모두 부자가 될 것이네.”

“저희가 만든 승자기가 명나라의 도공들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욱 많은 물량을 만들어 명국에 수출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훗날의 일이라네. 지금 명국에 승자기를 수출하였다가는 장인을 열 배 이상 고용하여도 힘에 벅찰 것이 아니겠는가.”

“열 배 이상의 장인을 고용한다면 한 명의 장인이 벌어들이는 돈이 적어지겠군요. 저희가 바짝 일해볼 것이니 후일이 되어 명국에 승자기를 수출해 주십시오.”

명나라의 인구를 고려하면 지금 조정에서 본차이나를 찍어내는 수량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한 달에 천 개 정도를 찍어내는 데 상인들의 자문으로 명나라의 수요를 예측해 보니 한 달에 일만 개 이상을 소화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니 유럽을 시작으로 큰 이익을 내서 차츰차츰 규모를 확대해야 하는 법이다.

장인들도 이해했는지 실실 웃으며 답하였고 나도 의정부로 돌아갔다. 어느 정도 부서 통폐합이 진행되었으니 우의정으로서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이다.

삼정승은 왕의 의견을 보좌하는 자리이자 정책결정에서 경험에 의거한 조언을 하는 직책이라 겸직을 해도 되지만 본업이 중요한 법이다.

의정부에 도착하니 율곡 이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본래 업무인 정책 결정을 진행하려 돌아왔다.

그는 영의정이자 학문 통합 기관인 학무원의 영사(領事)였으니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 긴장을 해소하려고 대화를 나누었다.

“요즈음 미주인들을 가르치느라 애쓰신다 하였습니다. 제법 거친 미주인들이 가르침을 받으려 복속하였는데 혹여나 문제를 일으킨 이가 있었습니까?”

“없었다네. 자네가 근력으로 미주인을 제압했다 하던데 내가 자네를 가르친 적 있다 하니 대전사의 스승이라 하면서 아무런 미혹도 보이지 않더군. 운성산(雲盛山: 구름 낀 산)이라는 친구는 나이가 마흔에 달했음에도 더욱 열심히 배우고 있다네.”

새벽부터 조선에 복속하여 세상 물정을 배우는 호인(호주인)과 미주인을 가르치니 고생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나를 가르쳤다는 소리에 찍소리도 못할 줄은 몰랐다.

이이는 평상시 쓰던 찻잔 대신 본차이나로 만든 찻잔을 건네면서 말하였다.

“주상전하께서 조선회사라는 관청을 개설할 때에는 적잖이 반대하였지만 자네가 이 자리에 있으니 마음에 놓이는군. 이전까지는 은자를 쌓아만 둔다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다네. 이런 귀중한 기물을 만들어 내다니.”

“제가 세상을 돌아보면서 부족한 점을 이리저리 깨우친 덕분이지요. 주상전하께서 저의 뜻을 믿어주시니 그에 부응하는 것이야말로 신하로서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다네. 처음에 입신체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자 말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네가 아국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당시에 제가 별다른 것도 모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자 하지 않았습니까. 쉬운 일일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소굴로 들어간 것 같더군요.”

당시의 멍청한 행동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고 이이는 사상 처음으로 입신체비의 동조자를 얻은 시기를 떠올리며 기쁜 웃음을 지었다.

차가운 녹차를 다 들이켠 이이는 본론에 들어가려는 듯이 나를 매섭게 보며 말하였다.

“다른 일은 추억이지만 잠시 자네가 진행하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네. 조선회사에 자네가 부임한 이후 상인들을 불러서 조언을 얻는 일이 잦다 들었네.”

“국가가 경영하는 상회이니 상인에게 조언을 얻는 일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상인들은 그리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네. 국가와 얽힌 일이야 언제 자신들의 목숨이 달아날지 몰라 항상 고개를 숙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패악을 일삼는 경우도 잦다네. 이러한 이들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면 훗날 해악이 될 걸세.”

이이가 평상시 태도대로 깐깐하게 나섰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 시대에 상인을 좋아하는 국가나 권력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상인의 지위가 높은 유럽도 상인들이 노력하여 권리를 쟁취하긴 했지만 쟁취한 수준에서 끝이다.

지금 조선에서도 상인들이 각종 비리를 저지르다 발각되는 사례가 간혹 적발되니, 이이의 염려는 틀린 말이 아니다.

나도 이 생각을 해두어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소집하였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답하였다.

“제가 소집하여 자문하는 이들은 전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논어에서도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이라 하였으니 큰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혹여나 제가 잘못된 길을 걷는다면 영상대감께서 엄중히 책문하여 주십시오.”

“자네가 올곧은 뜻을 가지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다네. 다만 이문을 내는 일에 매진하여 위신(威信)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함을 명심하게나.”

이이가 옳은 말을 하였기에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시하였다.

이문에만 지나치게 얽매이기보다는 신의를 지키고 조선이라는 국가의 위신을 지키며 이익을 챙겨야 함이 마땅하리라.

다음 날이 되어 내가 소집한 상인들이 다시금 조언을 시작하였다.

미주에서 큰 이익을 챙기지 못하였지만 율도상회에 새로운 지부를 개척한 고니시도 이 상인들에 끼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자고로 상인의 도리라 함은 고객이 원하는 물건을 적재적소에 납품하는 것에 있습니다. 비록 힘에 부치면 납품을 미루어도 될 일이지만 조선회사는 이미 평범한 상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옳은 말일세. 나라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회사이니 세상에서 으뜸가는 상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취급하는 품목부터 물량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어야 하네.”

조선회사의 기본 방침도 현대인인 내가 개입하면서 다소 수정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품목을 취급하려 하였으나 현대에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대기업이 생각나서 자원과 노동력을 집약해야 하는 상품 위주로 노선을 변경했다.

자개장 같이 겹치는 분야는 기존의 부역노동 대신 임금고용 체계를 정식 도입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장인들은 자개장에 매달려 협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다들 구슬땀을 흘려가며 일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해졌다.

“사람은 주머니에 은자가 들어와야 바삐 움직이는 법이라네. 평상시에는 자개장 하나를 만드는 데 장인 여럿이 모여 닷새가 걸리건만, 매일 급여를 지급한다 하니 삼 일 이내에 끝나는군.”

“저희는 고용한 장인들에게 한 달마다 급여를 지급하는데 지금 보니 매일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이지요. 물론 저희가 따라올 방법이 없지만요.”

“연금이라는 막대한 자본금이 있으니 가능한 방식이라네. 보통 상인들은 상품을 팔고 수익을 거둔 이후에야 자금을 지급할 수 있지만 회사에서는 다르지.”

지금까지 조선은 특별한 사업을 벌인다면 모를까 평상시에는 장인들을 3개월 정도 부역(負役)시켜 세금납부를 대체하게 하였는데 이 제도를 완전히 개선하기로 하였다. 아마 몇 년 이내에 부역제도가 사라지고 급여제도로 완전히 대체되리라.

율도상회를 비롯한 각 상회에서 모집한 자문단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제도 가운데 불편하거나 부적절한 요소는 모조리 개선을 제안하였고 반대로 좋은 요소는 도입하려 애썼다.

특히 승자기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장소에 도착하자 눈을 부라리며 장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후일 이들을 고용할 준비를 하였다.

그나저나 승자기가 팔려나가면 이들의 이익이 줄어들지도 모르니 염려를 담아 물어보았다.

“조선회사가 운영을 시작한다면 자네들의 상단들은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한데, 이를 대처할 방법은 마련해 두었는가? 당장 승자기가 대세가 되면 일반 자기는 밀려날 것인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승자기는 틀을 통해 몸체를 만드니 사람 머리보다 큰 물건을 만들기 힘들지 않습니까. 반면 도자기는 마음대로 크기를 키울 수 있으니 품목을 조금 수정하면 될 일입니다.”

“저희 상단도 승자기 시제품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백자 달항아리(白磁 壺)를 주력상품으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이건 승자기로 만들려 해도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니 같이 팔려 나가겠지요.”

달항아리는 두 개의 대접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드는 커다란 백자이다.

그 과정에서 비대칭성과 불규칙한 일그러짐이 생겨나 더욱 예술적인 모양이 되는데 본차이나로는 이걸 재현할 방법이 없다.

한 상품이 유행하면 유사 상품도 모조리 유행하는 법이니 달항아리처럼 경쟁력과 특성만 확보하면 충분하리라.

이래저래 호재만 생겨서 기분이 좋은 와중에 조정에서 웬 수레가 다가왔는데 죄다 서신만 실려 있었다.

“대체 누가 이리도 많은 서신을 보내왔단 말인가. 양으로 보아하니 미주에서 예전 관찰사인 나에게 감사의 서신을 보낸 것 같은데 이 서신들은 죄다 집으로 보내주게나.”

“아닙니다. 구주 전역에서 보내온 서신이며 모두 조선회사와 관련된 서신입니다. 이미 통상원(通商院: 외교통상 관할부서)의 관원들이 기본적인 해석을 끝낸 서신이지요.”

과장 안 하고 수레 한가득 서신이 실려 있었는데 미리 서신을 검수하였는지 밀랍 봉인이 뜯어져 있었고 나름 외조 관원들이 서신 내용을 정리했는지 한지로 만든 두루마리까지 있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여 두루마리를 펼치고 자연스럽게 손의 힘이 풀렸다.

“이게 말이나 되나? 정녕 구주에서 들어온 승자기 주문이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나는 일천여 상자를 예상했거늘 이천칠백 상자를 구매하겠다 하다니!”

“그마저도 많이 줄어든 겁니다. 개중에 외조에서 정보를 입수하지 않은 작은 상단이거나 한 번에 열 개가 넘는 승자기를 주문한 사례는 모조리 제외하였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사천 상자가 넘는 승자기가 주문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납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준비한 물건의 세 배에 가까운 물량을 주문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상인들마저 난색을 표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조선회사를 버리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고로 모든 상인의 신용은 첫 거래에서 생겨나는 법인데 이대로 거래 물량을 맞추지 못한다면 신용이 바닥을 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처음 승자기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으니 후일이 되어도 승자기의 요구량이 비슷할 지경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일 년 이내에 납품해야 하는데 가능한 일입니까?”

상회가 멀쩡히 돌아간다면 한두 번의 거래는 실패해도 좋지만 첫 거래만큼은 반드시 완벽하게 성공해야 하는 법이다. 거래를 성사하면 신뢰가 생기지만 아직 조선회사는 어떠한 신뢰도 쌓아 올리지 못한 상황이다.

나는 체면이고 뭐고 무시하고 장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인맥을 동원하여 승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나 손재주가 좋은 도공들을 가리지 말고 소집하게. 귀천이건 뭐건 가리지 않고 소집하도록 하게나! 당장 조정에도 사람을 보내…… 내가 직접 가겠네!”

이 거래를 성사할 수 있다면 순이익만 따져도 은자 삼십만 냥이 넘어가겠지만 성사하는 과정 자체가 문제였다.

순식간에 도성 일대의 장인이란 장인은 모조리 소집되었고 본차이나를 만드는 데 관여했던 이현전 관원들도 줄지어 조선회사로 달려왔다.

* * *

첫 물량을 덮어놓고 보내 버렸지만 다음 물량이 문제다. 아직 주문량은 1,700세트가 남았고 지금은 1597년 7월이다.

사람들의 인내심이 바닥나는데 일 년 정도 걸리니 물건이 운송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1598년 2월까지 주문량을 맞춰야 한다.

“이게 가능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모두가 매달려도 아무 장식이 없는 승자기 일만 오천여 개, 도합 일천칠백 상자를 만드는 데 다섯 달이 걸립니다. 더군다나 주문한 승자기는 모두 장식이 잔뜩 달린 승자기가 아닙니까?”

“어떻게든 업무를 빠르게 진행할 방법이 없겠는가?”

“열심히 해보긴 하겠습니다만 저희도 힘든 점이 많은지라…….”

나이가 많은 장인들이 말끝을 흐리는 이유가 있었다. 규조토 틀로 찍어내는 본차이나 몸체야 덮어놓고 찍어내면 충분하지만 그놈의 장식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보통 본차이나 찻주전자를 만드는데 나이 많은 장인 두 명이 몸체를 가공하고 젊은 장인들이 서너 명으로 한 조를 이루어 장식을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한다.

이 장식을 만드는 과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포도 줄기를 표현한 것이 아니고 구렁이를 표현한 수준이잖은가! 당장 떼어서 다시 만들게!”

젊은 장인이 장식을 붙였지만 내가 나서서 그 장식을 떼어내라 명령하였다. 본래 느긋하게 덩굴을 엮어나가야 하는 포도나무이지만 손이 급하다 보니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음 찻주전자를 확인하니 더욱 가관이었다.

“꽃잎이 하나는 크고 나머지는 작으니 꽃의 형상이 모조리 일그러졌다네. 이래서야 귤꽃이 아니고 꽃으로도 볼 수 없으니 다시 만들어야지.”

“하루에 귤꽃 일백여 개를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그 두 배가 넘는 물량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품질이 조금 부족해도 좋으니 한두 개 정도는 넘어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자네 입장에서는 매일 만드는 귤꽃이지만 이 물건을 받는 부호의 입장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찻주전자에 달린 귤꽃일세! 불량품을 받은 사람이 만족하겠는가?”

이 시대의 상인들도 조언한 바이며 나도 현대를 살아가며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

제대로 된 물건의 소문은 퍼져나가기 힘든 법이지만 불량품의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당연히 지금 만드는 물건의 품질은 예전에 보낸 한정판의 품질과 동일해야 하는 법이다.

밖으로 나가니 산시양을 포함한 이현전 관원들이 가마를 쌓는 일을 독촉하고 있었다. 아예 악이 받혀서 눈을 부라리며 말하고 있었다.

“나도 밤을 새웠는데 자네들도 밤을 새워야 하지 않겠는가! 갑자기 여기에 와서 업무를 진행하라니 내가 속이 타는데 자네들의 속도 타들어 가…….”

“그만두게나. 우리야 서류 업무를 진행하고 입신체비도 실시하니 몸에 여유가 있지만 장인들은 피로가 쌓이니 매일 수면을 취할 의무 아닌 의무가 있다네.”

산시양을 비롯한 관원들은 업무를 이중으로 진행하고 있으니 독기가 올라올 만하였다.

이들을 점잖게 타이르니 산시양은 고개를 숙여 사과하더니 나에게 볼멘소리를 하였다.

“시일이 너무나 촉박합니다. 우상대감께서 말하신 대로 야근을 시키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시일을 벌충해야 하니 답답할 따름이군요. 어떻게든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잠시 고민해 보았는데 휴식시간을 줄이는 방법도 문제고 출근을 너무 빨리 시켜도 문제이다. 장인들은 정신을 집중해서 도자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없는 시간을 쥐어짜 낼 방법이 필요하였다.

그나마 좋은 방법이 떠오르긴 했다.

“내일부터 점심은 모조리 국수로 때우도록 함세. 콩국수건 메밀국수건 한 그릇만 나오는 국수는 만들어두기도 쉽고 먹기도 쉽지. 자네는 당장 돌아가 궁궐에 남는 국수틀을 가져오게나.”

젊은 시절에 회사에서 악착같이 일 할 때 점심시간도 아까워하는 데다 식대를 줄이려는 짠돌이 사장이 매번 국수 계통 음식만 먹인 적이 있었다.

아직까지 조선은 국수가 귀한 물건이니 장인들의 불만이 크게 쌓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다음 날이 되어 새벽같이 조선회사로 출근하니 제대로 된 국수틀 여러 개가 있기는 했다. 너무나 제대로 되어서 주상전하가 사용하는 국수틀이 설치되어 있었다.

형님이 파스타를 만들려고 강철로 주문한 이 파스타 틀도 엄연히 국수틀 중 하나였다.

산시양이 주상전하의 식사를 만든 물건을 가져온 의도를 뻔히 알고 있었기에 그의 멱살을 잡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자네 지금 뭔 짓을 하였는가! 구주의 난면(卵麪: 파스타)을 밀어내는 틀은 형님께서 사옹원에 만들어 둔 틀이며 주상전하께서 사용하는 물건일세! 다섯 개를 모조리 가져오다니!”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국수틀은 지나치게 커서 작은 녀석을 찾다 이게 나왔습니다.”

“그 입 닥치게! 주상전하께서 난면을 드시겠다고 하시면 여기까지 찾아와서 수라를 드신다는 말인가! 나는 국수틀을 가져오라 하였지 난면 틀을 가져오라 한 적이 없다네!”

이 미친놈이 정말 퇴직이 고프다 못해 나와 척을 지고 퇴직하려고 애를 쓰니 어떻게 족쳐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되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괘씸하다 못해 울화통이 북받쳐서 찬물을 들이켜고 곰곰이 생각했다.

형님이 만든 파스타 틀은 강철로 만들어져 단단한 파스타 반죽을 밀어내고도 여력이 남는 물건이었다. 가느다란 스파게티는 물론이요, 현대에도 먹는 파스타 대다수를 밀어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마카로니 같은 녀석도 포함된다.

더군다나 파스타 반죽과 본차이나의 장식용으로 쓰이는 반죽의 굳기는 거의 일치한다.

구석에 앉아서 실실 웃어대고 있는 산시양을 제대로 엿 먹이기 위해 파스타 틀 다섯 개 중 네 개만 챙겨서 궁궐로 돌아가 주상전하에게 보고를 올렸다.

“구주에서 수많은 승자기를 일제히 주문하여 도공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물량을 맞추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이현전 대제학 산시양이 좋은 방안을 모색하였나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불민한 일이 벌어졌사옵니다.”

“좋은 방안이라 하였는가. 내 이야기를 들으니 새벽같이 달려와 난면 틀을 모조리 가져가 사옹원이 발칵 뒤집혔다 하던데 그런 행적을 왜 저질렀는지 심히 궁금하구나.”

“산시양은 철저히 업무만을 생각하다 기이한 행동을 하였사옵니다. 난면의 반죽과 승자기에 쓰이는 반죽의 성질이 거의 일치하니 난면 틀로 이를 밀어내려는 궁리를 하였지만 생각이 급하여 다섯 개 모두를 가져왔을 뿐이옵니다.”

주상전하도 불경죄를 저지른 산시양에 대한 분노를 품으시고 그를 책망할 생각이 가득하였는데 내 표정을 읽으시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예 주상전하께서는 행차를 준비하시며 말씀하셨다.

“내 직접 산시양의 행적을 보고 싶구나. 난면 틀로 승자기의 반죽을 밀어낼 수 있다면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음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만약 성공하면 품계를 또 올려야겠구나.”

성공하면 산시양의 품계는 올라가고 더욱 막중한 업무의 수렁으로 끌려갈 것이요, 실패하면 괘씸죄만 적용하여 더더욱 막중한 업무가 부과되리라.

기대 반 염려 반으로 주상전하와 함께 조선회사로 향하였다.

#작가의 말

산시양이 가져온 국수틀은 중세 유럽에서 쓰이던 수동 파스타 제면기입니다. 황동이나 철로 만든 틀에 나사를 조여서 파스타를 밀어내는 도구이지요.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orchio_da_pasta_manual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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