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525화 (525/573)

근육조선 525화

2부 28장 9화 한정 판매

아홉 개 단위로 상자에 포장되는 본차이나 주전자를 보니 의아한 점이 있었다.

중학교 미술시간에 도자기를 만들어본 적은 있지만 점수를 더 얻으려고 섬세한 장식을 만들려 했다가 실패한 기억도 떠올랐다.

얇은 고령토는 수분이 증발하는 수축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모조리 바스러져 버린다. 더군다나 고령토보다 더욱 약한 순두부와 흡사한 본차이나 반죽이니 난이도는 더욱 높겠지.

비결이 궁금해서 도자기 위에 피어난 국화꽃 장식을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내가 승자기의 초안을 만들었지만 저러한 장식을 만드는 방법이 참으로 궁금하군. 섬세한 모양을 만들 수 없다 여겼거늘 어찌 저런 꽃잎을 만들었는가?”

“산본(山本: 산시양의 호) 대감께서 이를 창안하시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공을 인정받아 집현전 대제학으로 임명되셨으니 주상전하께서 어여삐 보시는 관료가 되었습니다.”

“산본 그 친구는 내가 알고 있는데 어느새 대제학이 되었고 승자기를 창안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참으로 궁금하니 어서 안내해 주게나.”

산시양은 애단현에 근무할 적에 내 후임자로 부임한 하주도 출신 관원이기는 했다.

행적을 보니 한직만 전전하며 적당히 당상관에 올라 영감 존칭 한 번만 받고 내려가기로 한 것이 분명한데 업무의 구렁텅이 정 중앙에 빠져들다니.

장인들도 자랑하고 싶었는지 본차이나의 장식을 만드는 자리로 나를 안내하였다.

그곳에는 평범한 반죽이 아닌 연한 회색이 맴도는 반죽을 치대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저희가 승자기를 연구하며 가장 고난을 겪었던 것이 균열이었습니다. 말리는 과정에서 반죽에 균열이 생기기에 뼛가루를 구워내는 방법부터 고령토를 수비(水飛: 물을 통해 찌꺼기를 제거함)하는 방법까지 수백 가지의 방법을 연구하였지요.”

“자네들 홀로 이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주먹구구로 일에 매달리면 효율이 떨어지는 법이니 반드시 이를 지휘하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네.”

“그야 화공원에서 일하시던 산본 대감께서 작업을 진두지휘하였기에 형편이 나았습니다. 당시에 산본 대감은 물론이요, 저희 모두가 피를 말려가며 연구에 몰두하였지요.”

나야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넘겨짚었는데 화공원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어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화공원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장인들은 기묘한 누런 덩어리들을 건네주며 말하였다.

“마침 화공원의 또 다른 과제가 있었으니 구주(유럽)와의 협정에서 들여온 수많은 약재에 대한 분석이었습니다. 결국 과도한 업무에 지친 산본 대감께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과감한 결단이라?”

“솔로몬국에서 근래에 약재로 양산하여 분석에 들어간 목아교(木阿膠)를 모조리 갈아서 반죽과 섞어버리시더군요. 새벽에 숙소에서 불현듯 뛰쳐나와 똥이나 먹으라는 험한 소리를 하시며 섞었기에 몰랐는데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마 고의로 업무를 망쳐서 징계를 먹고 지옥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했으리라.

목아교라 불린 누런 덩어리가 약이라는 말에 입안에 넣어보니 끈적끈적하면서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단 맛은 없지만 이건 현대에 우표 뒷면에 발려있는 접착제. 아라비아 검(Gum arabic)의 감촉과 매우 흡사하다.

이게 왜 솔로몬 제국에서 약재로 팔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장인들은 나에게 보여주려는 듯 작업을 재개하였다.

젊은 장인들은 뼛가루와 고령토를 섞은 분말에 목아교 반죽을 부어 넣고 치댔는데 물 같은 반죽이 아닌 단단한 밀가루 반죽 같은 질감이 되어버렸다.

나는 호기심에 반죽을 한 조각 뜯어내 얇게 펼쳤는데 반죽이 손의 열로 굳어버렸는데도 균열이 일어나지 않았다.

“참으로 놀랍군. 본래 이렇게 얇은 반죽을 만들어내면 순식간에 바스러지기 십상인데…….”

“거의 한 섬이 넘는 고령토를 버리기엔 아까워서 이를 치대고 모양을 잡아 구워내 보았고 장점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몸체를 만들기는 힘들지만 장식을 만들 때에는 이보다 편한 반죽이 없더군요.”

“이거 소 뒷걸음에 쥐 잡는단 소리처럼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발명이로군. 산본 그 친구는 어떻게 말하던가? 혹여나 자랑스럽게 말하던가?”

“소스라치게 놀라시더니 멍한 표정으로 똥이나 먹으라고 중얼거리시더군요. 아마 반죽의 갈라짐을 흉적(凶賊)으로 여겨 똥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과감한 결단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관직이고 뭐고 업무지옥에서 탈출하려는 심정으로 저지른 짓이지만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발견을 하였기에 품계가 오르고 더 많은 업무가 주어졌으리라.

아직도 업무지옥에서 탈출하고 싶겠지만 내가 승자기를 더욱 많이 팔아치울수록 자동적으로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격이 되어 잘만 하면 정승 자리에도 오를 수 있으리라.

나는 완성된 찻주전자 가운데 장식이 좀 부족한 하나를 챙기며 말하였다.

“하나 정도는 내가 가져가서 사용해 보겠네. 혹여나 사용 중에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염려하지 말고 가져가십시오. 저희도 승자기 하나쯤은 집안에 갖추고 있으며 간혹 당상관 이상이신 분들에게도 승자기를 나누어 주라 하시더군요.”

어차피 조정 사람들이니 큰 문제는 없겠지. 오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가 나의 귀환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주름살이 피어나는 아내는 물론이요, 벌써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손자까지 한 몸이 되어 나를 맞이하였다.

이순신과 권율, 그리고 임차손을 비롯한 친구들이 모여들어 술잔을 기울였지만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다들 50대가 넘었으니 절제하고 몸을 조심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아내는 여기에 내가 가져온 찻주전자로 차를 우려내 따라주었다.

“낭군님께서 처음 승자기를 만들 때에는 분통이 치밀어 견딜 수 없었지만 몇 년이 지나 완성된 물건을 보니 마음이 풀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신묘한 물건을 어찌 만들었는지 궁금하군요.”

“그야 수많은 이들이 내가 던진 화두에 몰두하여 발전시킨 덕분이 아니겠소. 아국의 장기는 업무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즐비하며 이들이 각기 공헌을 하는 점이오.”

“이제는 정승이 되셨는데 앞으로 더 많은 업무를 진행하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내가 싸늘한 미소를 짓자 이순신을 비롯한 친구들은 심히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앞으로 저지른 일만 수습하면서 좀 조용히 살아보려 했으니 아내의 말에 홀가분하게 답하였다.

“국난(國難)이 발생한다면 모를까 앞으로는 정시에 퇴근하겠소. 작금에도 이 승자기를 구주에 팔아치우는 업무를 진행하였지만 정시에 퇴근하지 않았소?”

“차라리 내가 담배를 끊지, 자네가 야근을 끊을 가망은 없는데.”

“이보게 승우!(임차손의 호) 국난이 당장에라도 일어나겠는가? 정승쯤 되면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며 후계자를 키우는 교육을 하는 법일세! 내 스승께서도 그리하셨네!”

“내가 보기에도 마찬가지인걸. 자네가 야근을 끊는 것보다 내가 공좌를 끊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라네.”

임차손은 물론이요, 이순신과 권율까지 맞장구를 치자 얼굴에 열기가 돌 정도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국난이 쉽게 일어나나?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모를까 앞으로 내 인생에 야근이란 단어는 없다니까!

이렇게 말은 해놓고 다음 날 어스름이 걷히기 무섭게 출근하였다. 야근을 안 한다는 말을 했지 조기출근에 대한 말은 없었으니까.

아내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것 같이 나를 배웅해 줬다.

내가 조선회사의 도제조라지만 구백 개나 되는 찻주전자를 공짜로 팔아치운다면 말이 안 나올 이유가 없었다.

새벽부터 주상전하에게 올릴 장계를 작성하고 자개장에 포장된 찻주전자를 가져와 보고를 시작하였다.

“신 유성룡 아뢰옵나이다. 승자기로 만든 찻주전자가 지나치게 귀중한 물건이라 이를 아무런 고려 없이 팔게 되면 부호들의 방을 장식하게 될 뿐이라 사료되옵나이다. 하오니 첫 물량을 무상으로 판매하여 널리 퍼트릴 것을 간언하겠나이다.”

“처음 물건을 무상으로 구주에 퍼트린다 하였느냐. 장계를 보니 승자기로 만든 찻주전자 하나에 최소한 은자 스무 냥은 할 것이니 선뜻 손을 내미는 이가 없을 것 같구나.”

주상전하께서는 내 장계를 곰곰이 읽어 내려가면서 생각을 거듭하였다. 이 시대에 한정판이라는 개념이 있을 리가 만무하였지만 최소한 마음이 동하기는 하리라.

장계를 내려놓은 주상전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로구나. 장계를 보아하니 처음 백 상자를 가장 값진 녀석으로 만들어 명사들에게 값을 매기지 않고 넘긴다면 이들은 자랑스럽게 승자기를 사용할 것이다. 이후 일 년이 지나면 나머지 구백 상자를 몇 배의 가격에 넘길 수 있겠지.”

“군왕(君王)이 쓰는 물건을 부호들이 넘보지 않을 이유가 없사오며 값이 부담된다 하여도 서로의 위신을 뽐내기 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사들이려 혈안이 될 것이옵나이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로구나. 수량을 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팔아치우는 찻주전자는 가격에 대비하여 차츰 장식과 상감을 줄인다 하였으니 구주 일대의 군왕부터 대소신료들 심지어 부농까지 승자기를 사들이려 혈안이 되겠지.”

현대 상업의 악랄함을 모조리 담은 수단이다. 최상위 계층에게는 한정판을 판매하고 어중간한 상류층에는 한정판과 똑같지만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은 고가 제품을 팔아치운다.

상류층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어중간한 부호들에게는 적당히 비싼 가격에 장식이 좀 줄어든 중간 가격 제품을, 마지막으로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돈을 뽑아먹기 위해 장식이 거의 없는 저가 제품을 찍어내 판매하는 것이다.

본차이나를 만들 대엔 장식을 붙이는 과정에서 공임이 많이 들어가지 도자기 본체를 만드는 데는 별다른 수고가 들어가지 않는다.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하였는데 주상전하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씀하셨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구나. 귀한 물건을 보낼 적에는 무언가를 기념하여 보내야 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승전 기념으로 보낸다는 말을 하여야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지 않겠느냐. 마침 서반아와 동맹을 맺은 지 십 년이 지났으니 이를 기념하면 충분하겠구나.”

그게 더 희소성이 넘치겠네! 동맹 십 주년이면 기념할 만한 일이 분명하니까.

주상전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양국 동맹 십 주년 기념이라는 한자를 적어나가시더니 이를 관원들에게 건네주며 명하였다.

“이 아래에 구주에서 널리 쓰이는 글로 양국 동맹 십 주년 기념이라는 말을 적고 본으로 삼도록 하여라. 금실과 은실로 자수를 놓아 위를 덮을 비단 덮개를 만들고 금박으로 눌러 봉인하면 충분할 것이다.”

주상전하께서도 얼마나 많은 승자기를 팔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쾌속선을 타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면 넉 달 뒤에는 스페인에 닿을 물건이 아닌가.

* * *

항시 모든 업무에 관여하며 매사를 스페인의 발전에 투신하던 펠리페 2세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조선 사절단이 머무를 당시부터 조짐이 보이던 당뇨병을 시작으로 각종 질환이 그의 몸을 좀먹어갔다.

그럼에도 하루 12시간 이상 업무에 투자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질병을 더욱 부추기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이미 당뇨로 인한 백내장으로 약시(弱視)가 생겨 두꺼운 안경을 쓴 펠리페 2세는 궁전에 부속된 성당에서 나오며 한탄하였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주교가 된 것도 모자라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람 일만여 명을 이끌고 조선의 땅으로 향했다니 믿기지 않는군.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그 신자들을 모두 스페인의 품에 담아둘 수 있었을 것이네.”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책을 새로 세우시어 원주민들을 신앙의 품으로 거둬들이면 될 것입니다. 어차피 조선의 땅으로 넘어간 이들을 되찾을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시종장 자네의 의견이 옳다네. 조선이 신앙의 형제가 되었으니 신자들을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랄 뿐이네. 그나저나 조금 이상한 생각도 드는군. 조선의 영토는 산맥 인근의 유역일 텐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어떻게 그 머나먼 길을 이동했을까.”

스페인의 식민지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지만 아직까지 후성부(현 휴스턴)를 비롯한 조선의 영토에 대한 탐사에 나서지 않았다. 간혹 탐험대를 보내도 국가 주도가 아닌 개인이 주도한 무계획적 탐사가 대다수였다.

인근의 부족들에게 귀금속을 갈취하고 금광이나 은광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들 리가 없었다.

펠리페 2세는 의문을 품으며 지도를 확인하려 하였지만 다른 소식이 이 의문을 잠재워 버렸다.

“조선에서 필리핀령에 자개라 불리는 물건을 일백여 개나 보내왔습니다. 모두 전하 앞으로 보낸 물건인데 하나같이 크기가 거대하며 일부터 일백까지 조선 숫자로 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

“자개를 일백여 개나 보내왔다고?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는 있는가?”

“파손에 절대 주의하라는 말과 함께 서신이 같이 전달되었습니다. 사신을 보내지 않고 화물만 보내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세비야에서 막 올라온 자개장 일백여 개를 확인한 펠리페 2세는 유성룡이 작성한 서신을 읽어보았다.

처음에는 국가 간의 협정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 기대한 서신의 내용은 오로지 펠리페 2세에 대한 찬사만 적혀 있었다.

[조선 국왕 이연이 삼가 스페인의 군주인 펠리페 2세 전하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서반아와 아국이 공식으로 동맹을 맺고 영토를 분할한지 어언 십 년이 되었습니다. 강산이 변할 세월이 지났으니 이를 기념하며 유럽의 명사(名士)들에게 선물을 보내려 합니다.]

[본래 사신을 보내 선물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사치를 피하시고 검약하신 펠리페 2세 전하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 선물을 전하의 것처럼 온 유럽에 퍼트려 주십시오.]

뒤에는 선물을 전달할 사람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1번부터 10번까지 10상자는 펠리페 2세의 것이지만 나머지 90상자는 각국의 명사들에게 동맹을 자랑하기 위해 보내달라 하였다.

상자 위를 아로새긴 비단을 확인한 펠리페 2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조선의 군주는 사치를 즐기는 성품이 아니지만 금과 은으로 자수를 놓은 화려한 선물을 보내다니. 과연 씀씀이가 크다 못해 베풀 줄 아는 사람이로구나. 무슨 물건인지 궁금하니 어서 뚜껑을 열어보도록.”

자개장의 뚜껑이 열리자 은은한 찻잎의 향기가 퍼졌고 시종들이 물건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시종장이 찻잎을 빼낸 찻주전자를 건네자 펠리페 2세는 이를 매만지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내 눈이 침침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침침한 눈임에도 화려함이 돋보이는구나. 금과 은을 상감하여 색채도 화려한 데다 표면에 새겨진 꽃은 내 궁정에도 피어 있는 오렌지 꽃이 아닌가?”

실제로는 조선 장인들이 붙여 넣은 귤꽃이었지만 같은 과에 속하는 꽃이니 형상이 거의 비슷하여서 모두가 오렌지 꽃이라 생각하였다.

펠리페 2세의 쪼글쪼글한 손이 표면을 쓰다듬더니 다음 찻주전자를 확인하였다.

“이번에는 포도고 다음에는 백합이로군, 총 아홉 가지의 찻주전자가 모조리 이렇게 화려한 색채를 뽐내다니 동맹 십 주년을 기념하기에는 흡족한 물건이로군. 이런 물건 일백 개를 오로지 나를 믿고 보내다니 조선은 믿을만한 동맹이었어.”

펠리페 2세의 머릿속에서 조선의 영토에 대한 의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단순한 금품을 주었다면 의심할 법하였지만 천금의 가치가 있는 화려한 물건을 자신을 믿고 보내온 것이다.

상대가 나를 신뢰하는 만큼 상대를 신뢰해줌이 마땅하다 여긴 펠리페 2세는 나머지 90상자에 대한 배송을 실시하였다.

이윽고 전 유럽의 명사(名士)들이 스페인에서 배송된 본차이나 찻주전자를 사용하였고 조선의 신비한 백자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얼마 전 여왕께서 받으신 찻주전자에 대한 소문은 들었나? 월터 롤리 경이 이 찻잔으로 우려낸 홍차를 마시더니만 눈물을 흘리며 시를 두 편이나 썼다 하더군.”

“받은 사람들 가운데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있다네. 최근에 프랜시스 경의 증언을 듣고 동방의 해룡이라는 소설을 집필하다 찻주전자에 반하여 원대한 연극으로 고쳐 쓰기로 하였다더군.”

스페인과 엄연히 적대관계인 잉글랜드에도 본차이나의 소문이 퍼져나가며 각지의 명사들은 스페인을 통한 서신을 보내 조선에 이 찻주전자들에 대한 구매 의사를 표하였다.

유성룡의 예상을 몇 배나 초월한 요구서가 조선에 전달된 것이 1597년 6월경이었다.

#작가의 말

산시양 : 공이 하나... 공이 둘... 출세가 하나... 출세가 둘... 퇴직이 없어...

성룡이 : 기껏해야 첫해에는 오백 세트 정도 팔리겠지. 한 구천 개로 천 세트쯤 준비하면 넉넉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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