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24화
2부 28장 8화 금의환향(2)
조선으로 돌아가는 항로는 태평양을 통과해야 하니 넉 달이 걸렸지만 해추선이 워낙 빠른 배인지라 석 달이 조금 덜 걸렸다.
87일 만에 도성으로 돌아오니 저절로 눈물이 솟구쳤고 언제나와 같이 이순신이 나를 맞이하였다.
“주상전하께서 명을 보내 내가 자네를 맞이하게 하였다네. 실지로는 회(이회)가 오랜만에 아국으로 돌아오니 해후를 나누라는 것이겠지만.”
“자네의 명성이 사해에 진동하고 있음을 서신은 물론이요, 머나먼 영길리의 사람이 와서 증언하였다네. 내 자네가 군관으로 대성할 거라 말하였는데 그 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이순신은 비슷한 연배임에도 옛 체격을 고스란히 유지하였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슬슬 지방이 늘어나고 근육량이 감소하는데 무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던가.
배에서 물건을 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순신이 지난 세월 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그 덤덤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협력조차 아니고 길안내만 시켜서 세 배에 달하는 적을 몰살시켰다는 말 가운데 수군을 훈련하여 마음이 놓인다는 말을 듣자, 양심에 찔려 미주에서 저지른 일을 이야기하였다.
“자네에게 조금 미안한 이야기를 할 것 같다네. 영길리국의 군관들이 아국의 수군이 강성한 연유를 찾기 위하여 첩자를 보내더군.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수군의 훈련을 견학하게 하였다네.”
“수군 훈련을 견학하게 하였다? 그게 왜 미안한 이야기인가? 이미 호주에 영길리와 서반아의 북부(현 네덜란드, 조선은 스페인과 동맹이라 네덜란드를 스페인으로 인식 중) 사람들이 당도하였는데 이들이 이미 아국 수군 초모에 응시하였다네.”
“수군 초모에 영길리와 서반아 사람을 모집하였다고? 주상전하께서 허가하신 일인가?”
“환종대왕께서 남기신 방침을 잊으셨던가. 호주가 비록 외방이지만 아국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기로 정하였으니 주상전하께서도 개의치 말라 하셨네.”
아국의 말을 쓰고 아국의 풍습을 따르면 받아들이라는 뜻이지만 그게 군대에도 통용될 줄은 몰랐다.
이순신은 오히려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을 거듭하다 퉁명스럽게 답하였다.
“분명 내 초모에 응한 영길리와 서반아 북부 사람 가운데도 첩자가 있을 것이네. 그러나 아국의 훈련을 익힌다 하여 무엇이 문제가 생기겠는가? 장수의 자질이 넘쳐나는 이가 아니라면 훈련을 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법일세.”
“참으로 맞는 말이지. 입신체비가 쉽게 늘어나던가? 모든 사람이 수양자라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을 소집하여 입신체비를 실시하면 십 년이 지나야 성과가 제대로 나오는 법일세.”
“내 생각도 그러하다네. 오히려 영길리에서 더욱 발전한 훈련을 만들어 아국의 수군을 강화할 비책을 마련해 줄지도 모르지 않은가. 다만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영길리 사람들 대다수는 초모에 응하고 석 달 만에 그만두더군.”
어쩐지 이회의 훈련에 참가한 갈포드가 계속 식은땀을 흘리고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다른 첩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이 분명하였다.
이순신과의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오 년 만에 입궐하니 대소신료들이 우리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회가 열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를 포함하여 미주에 파견된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정전 앞마당에 대소신료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주상전하께서는 단에서 내려와 내 손을 맞잡으며 말하였다.
“보고를 들을 때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머물 터전을 개척하라 하였는데 기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머무를 땅을 만들고 수많은 부족을 복속시키지 않았더냐.”
“신이 주상전하께서 하명하신 바를 충실히 이행하려고 과도한 욕심을 부렸나이다. 신의 과욕이 주상전하의 기휘를 어지럽혔으니 이는 명백히 신의 실책이나이다.”
잘했지만 너무 잘해서 문제라는 말을 들었으니 말한 대로 답해야지.
내가 한 행동은 아무리 사실상 주상전하께서 부여한 자치권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지 않은 수준이다.
아무리 조정이 업무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과로에 빠트리려는 훈훈하다 못해 과도한 상호 업무공세, 너도 일에 죽고 나도 일에 죽자는 사상이 기본이라도 참작할 수 있는 수준이 있는 법이었다.
내가 철저히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니 주상전하께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심지어 서반아와 맺은 협정을 교묘히 이용하여 영토를 늘리고, 역적 윤가의 자손에게 중요한 업무를 일임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하니 사람을 보내 행적을 조사토록 하였으니 나와서 보고를 시작하도록.”
내 행동을 감시하려고 암행어사를 보냈다는 말을 하였지만 그러려니 하였다.
미주는 지나치게 먼 땅이라 관찰사가 독단을 저지를 경우 즉각적인 대처가 불가능하고 이미 윤원형이 저지른 사건으로 감시의 손길이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가문이나 조상의 허물을 벗겠다고 미주에 와서 훈도 생활을 자처한 이들과 첫 발령지를 대범하게 미주로 자처하였던 이들까지 포함해 대략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내 뒤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상상도 못 한 사람이 암행어사의 대표로 가장 앞으로 나왔다.
내 아래에서 꾸준히 일한 박승종이었는데 그는 무릎을 꿇고 주상전하에게 감탄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신 박승종 어사들을 대표하여 조사한 바를 보고하겠나이다. 관찰사 유성룡의 행적은 한 치의 앞길을 알 수 없는 머나먼 미주에서도 한사코 아국의 번영을 위하여 투신하였사옵니다. 오히려 신의 자질이 부족하여 여러 가르침을 얻을 지경이었사옵니다.”
이후에도 여러 어사들의 보고가 이어졌는데 하나같이 박승종의 방식으로 보고하거나 간혹 자원이 많다고 사치를 조금 부린다는 말 정도는 하였다.
이런 보고를 들을 때마다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감싸듯이 말하였다.
“자고로 근력이 부족하면 삿된 반동(反動)을 주어 억지로 중량을 올리는 일을 누구나 경험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을 것이니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재주가 없는 이들이 이를 올바른 것으로 볼까 염려할 뿐이다.”
결론은 내 행동은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지 않았으며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기 위한 방법이니 평범한 이들은 따라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주상전하께서는 나에게 명을 내렸다.
“천고의 기재이자 만고의 충신이니 나를 믿는 만큼 유성룡을 믿었고 성과를 거두었구나. 이미 품계는 정1품에 달하며 의정부의 자리가 비어있으니 유성룡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하여 국정의 중핵으로 삼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드디어 삼정승이다. 나도 최전선에서 업무만 하고 살 사람은 아니고 어느 정도 관리직에서 사람을 굴리는 재미로 살아봐야지.
주상전하께서는 내 손을 잡고 일으키더니 다른 관직도 내리려 하였다.
“후일 세자가 보위에 오른다면 모르겠지만 작금은 십조 직계제를 실시하고 있으니 의정부의 정승들이 업무를 그리 많이 진행하지 않는구나.”
“신을 마소와 같이 험난하게 다루셔도 주상전하에 대한 충심은 변치 않을 것이옵나이다. 오히려 품계가 낮아져도 좋을지니 신을 필요한 자리에 임명하소서.”
“실로 마땅한 태도이니 다른 신료들이 본받아야 할 지경이로구나. 자네가 미주에 가 있는 동안 이전에 제안하였던 연금(年金)과 회사(會士)와 관련한 기초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연금은 이미 적용되었는데 회사는 아직 시동을 걸지 않을 법도 하였다. 실제로 연금이 쌓여야 국가주도의 상업행위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데 아직 연금이 쌓이려면 시일이 부족하다.
주상전하께서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대업을 이룩할 적에는 기초를 세우고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하는 법이다. 이미 미주를 개척하며 수많은 방향을 제시한 적이 있는 유성룡은 조선회사(朝鮮會士)의 도제조를 겸임한다.”
“하오나 전하. 조선회사는 아직 물산을 만들어 쌓아두기만 할 뿐 내수사가 무역을 주도하고 있사옵니다. 처음에 손해를 보면 후일까지 오명이 남는 법이니 뜻을 신중히 정하시옵소서.”
“뜻을 처음에 정하여 상소문을 올린 사람이 자네이니 많은 심사를 거듭했을 것이다. 어차피 조선회사를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몇 년 동안 자금을 비축해 두기만 하는 법이다.”
결자해지라고 연금과 회사의 설립을 제안한 사람이 첫 단추를 끼우라는 말이다.
나도 현대인답게 감각은 부족하지 않으니 주상전하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하였다.
“신의 상소를 받들어 제도를 정립하였으니 이 제도를 신에게 내려주신 뜻이 너무나 크고 막중하옵나이다. 신이 사력을 다하여 아국의 국호(國號)를 본뜬 기관을 부족함이 없이 경영해 보겠나이다.”
신주랑이 수집한 측량자료는 일단 이현전으로 넘겨두었다.
당장은 시급한 일이 아니니 짬이 날 때마다 계산하라 하였지만 결국 계산이 많이 틀어질 것이며 내가 최종적으로 수정을 보아서 거의 완벽한 1미터를 만들어야 하리라.
당장 완료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내가 저질렀던 일을 다 수습할 차례가 되었다.
주상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우의정 생활의 첫 시작은 내수사를 개수한 국영 상단, 조선회사의 최종 관리직이었다.
조선회사는 사대문 밖인 인왕산 기슭에 마련되었는데 아마 보안과 도난 방지 목적이리라.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군기시는 물론이요, 북한산성이 근처에 있는 여기를 도둑질할 염려가 없겠지.
내가 들어오자 관리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우의정께서 조선회사의 도제조를 겸임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팔아치울 수 있는 모든 물산을 소집하여 보았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연금제도가 정착한 지 삼 년이 지났으나 아직 많은 자금을 비축할 수는 없더군요.”
“연금은 고작 삼 년 가지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네. 최소한 이십여 년은 비축하여야 교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하면 현재의 예산은 어떻게 되는가?”
“내수사에서 불하한 첫 자금을 포함하여 대략 은자로 이백십만 냥 정도를 비축하였습니다. 이론상 연금제도가 온전히 돌아가면 은자 일천만 냥에 달하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겠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군요.”
조선의 세수는 나날이 번창하여 명나라의 4할인 은 900만 냥을 넘어 이제는 5할에 가까운 1,100만 냥에 근접하였다.
연금제도가 온전히 돌아간다면 세수와 버금가는 자금을 국가에서 마음대로 융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지금은 무역을 주도할 수는 없고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며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전부일 것일세. 자고로 아국의 인삼무역에 들어가는 비용은 칠백만 냥에 달하고 이문이 이백만 냥이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야 대감께서 도제조를 하신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지만 이전까지는 기초 자금이 쌓이지 않아 다른 상단에 물건을 넘길까 고민하였습니다.”
장사를 잘못하면 이백만 냥 가운데 상당수가 날아가니 타격이 보통 수준이 아니리라.
보고서를 확인한 뒤 돌려주고는 준비한 상품을 확인하려 창고로 향하니 도자기 가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관원은 찻주전자 하나를 건네주며 말하였다.
“여기에는 새로 양산한 승자기의 시제품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승자기를 단순한 그릇으로 팔아치우려 하였는데 의외로 쓸 곳이 많아서 다른 방식을 활용해 보았습니다.”
“이건 찻주전자를 비롯한 다기(茶器)가 아닌가? 나는 그릇을 마음대로 찍어낼 줄 알았는데 참으로 기묘한 일이로군.”
“저희도 처음에는 그릇을 만들려 하였지만 승자기의 독특한 장점을 발견하여 진로를 변경하였습니다. 이미 양산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 수량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현대에서야 영국산 본차이나가 대부분 찻잔이나 찻주전자로 쓰이지만 이 시대에도 이럴 줄은 몰랐다.
창고 옆으로 향하니 장인들이 내가 발견한 규조토 틀로 찻주전자를 만드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몸체에 뼈로 만든 칼로 미세한 구멍을 뚫는데, 물이 빠져나가되 찻잎이 자동적으로 걸러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는 것 같았다.
여기에 주전자 주둥이를 붙였는데도 공정이 이어졌고 장인들은 이미 능숙한 경지에 달했는지 설명이 이어졌다.
“승자기는 수분이 날아가 바짝 말라도 잘 줄어들지 않더군요. 더군다나 약간의 물만 만나면 예전부터 한 몸인 것처럼 달라붙으니 수많은 장식을 마음대로 붙일 수 있었습니다.”
“저건 국화로군. 손가락보다 작은 국화 수십 개를 주전자 표면에 붙인다면 보통 공임이 아닐 텐데. 저 꽃과 잎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직 경험이 일천한 도제들입니다. 자고로 모든 것을 배울 적에는 작은 물건부터 섬세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본차이나를 창안했을 때에는 기술부족과 세공 난이도로 인해 백자보다 못한 녀석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선 전국에서 수집한 장인들은 이를 기존의 백자보다 한 단계 끌어올리기에 이르렀다.
대신 열 개의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네 개 정도는 형태가 어그러지거나 조립 실수로 못 쓸 물건이 되었다.
이를 검수한 장인들은 혀를 쯧쯧 차면서 물 반죽에 쑤셔 박았는데 저래도 되나 궁금하였다.
“형상이 어그러진 녀석을 바로 부숴서 반죽 속으로 밀어 넣다니. 저렇게 하여도 괜찮은가?”
“괜찮다마다요. 보통 자기를 만들 때 쓰는 진흙은 수분이 빠지고 마르면 성질이 변하여 다시 뭉치면 품질이 떨어지지만 승자기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이현전에서 만들어낸 유약과 안료를 입히면 이런 모습이 되지요.”
찻주전자이지만 형상이 다채롭다 못해 예사롭지 않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는 뚜껑과 금과 은으로 상감(象嵌)된 호화로운 주전자 몸체 위에 하얗게 피어오른 국화는 화룡점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인들은 한 잔 마셔보라는 듯이 방금 전 만든 것이 분명한 국화차를 따라 주었는데, 도자기가 아름다운 덕분에 맛 또한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도자기를 쓰다듬으니 뜨겁지 않고 따스하여 장인들을 칭찬하려 하였다.
“이런 바쁜 와중에도 나를 위하여 차를 우려낼 줄은 꿈에도 몰랐네.”
“차를 한참 전에 우려냈습니다. 대략 한 각 이전에 우려낸 차의 맛인데 어떠하십니까?”
“농담하지 말게, 겸손도 지나치면 무례가 되는 법인데 한 각 이전에 부어 넣은 찻물이 혀가 데일 정도로 뜨겁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여야지.”
“신비하게도 승자기에 얼음을 넣으면 쉽사리 녹지 않으며 차를 우리면 물이 계속 뜨겁더군요. 찻물의 뜨거움을 유지할수록 차의 맛이 좋아지는 법이니 세상 어느 물건보다도 차를 마실 때 쓸모가 있습니다.”
본차이나에 보온성이 있다고? 어쩐지 현대에서 아내가 본차이나 찻잔에 차를 담아 마실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런 특성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쯤 되면 사소한 그릇 대신 찻잔과 찻주전자만 찍어내도 불티나게 팔리리라.
장인들도 두서없이 도자기를 만들며 물량을 쌓아 가는데 이걸 당장 배에 올려 유럽에 퍼트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손이 멈추며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겉의 무늬가 아홉 종류에 달하는군, 국화를 시작으로 복숭아꽃은 물론이요 심지어 포도와 산수화를 표현한 것까지 있으니 각자를 한 종류씩 분류해 두게. 어서 다음 장소로 향하세.”
다음 장소에는 내가 제안한 대로 동남아에서 수입한 재료로 자개장을 만들고 있었다. 거대한 전복의 껍질을 갈라서 번뜩번뜩 빛나는 장롱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개중에는 크기가 딱 찻주전자 아홉 개를 넣기 적합한 녀석이 있어서 이를 지목하며 말하였다.
“분류한 찻주전자 안에 잘 말린 찻잎을 가득 담고 이를 저 자개장에 포장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문양을 유지한 채로 만들어야 하니 각별히 신경을 써주게.”
“과연 대감님이십니다. 아홉 개의 찻주전자를 보통 사람은 사지 않겠지만 구주의 부호들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사들일 작정이군요. 가격은 대략 은자 이백 냥 정도면 충분한데…….”
“은자 이백 냥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이 찻주전자와 자개장은 내가 구주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 가운데 일백여 명을 선별하여 아무 값을 매기지 않고 보낼 것이네. 또한 이 자개장과 주전자 하부에 일부터 일백까지 숫자를 새겨두게.”
아무리 값을 떨구었다 하지만 본차이나 찻주전자와 동남아 재료로 만든 자개장은 엄연히 귀중품을 넘어서서 이 시대에는 부르는 것이 값일 수준인 물건이다. 일종의 명품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현대에서 배운 대로 명품의 값을 올리는 방법을 여럿 알고 있다.
사회적 명사(名士)들에게 일정 수량의 한정판 가운데 상당수를 줘서 일종의 광고를 유도한다. 또한 한정판이니 세상에 극소수만 존재한다는 물건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앞으로 이 자개장과 찻주전자 그리고 찻잔을 한 틀에 묶어 단 일천 개만 팔 것이며 처음 일백 개가 구주로 보내지고 일 년이 지난 뒤 나머지 구백 개를 팔 것이네 그러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감께서 보시기엔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아국으로 따지면 주상전하와 의정부 관원들만 사용하는 기물이 아니겠는가. 물건을 받지 못한 부호들은 일 년 뒤에 이 기물이 풀린다 하면 웃돈을 주며 구입할 것이며 없던 찬사도 스스로 생겨날 것이네.”
현대에도 그렇지만 이 시대에도 부자는 의외로 주머니를 잘 열지 않는다.
사치를 즐긴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명백한 가치를 돌려받을 수 있는 골동품이나 귀금속에 한하는 일이지 도자기는 생각 외로 감가상각이 심한 상품이라 개당 은자 두 냥 정도가 표준 가격이다.
그렇다면 희소성을 부여하면 된다. 인터넷 쇼핑을 할 때 한정판이 보이면 감가상각을 무시하고 충동구매를 하여 아내에게 타박을 들은 적이 많다.
아직 이런 사실을 모르는 관원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하였다.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승자기를 고작 천 개만 만들어낸다면 승자기가 가진 장점과 대치되는 행위가 아닙니까? 더군다나 부호들의 찬장에만 고이 잠들어 있다면 널리 퍼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만 하여도 충분하다네. 어차피 아직 자금을 많이 융통할 수 없어 물량을 쌓아만 두는 실정이 아니었는가. 배가 크지 않아도 좋으니 쾌속선을 동원하여 서반아로 물량을 보내게. 이후에는 내가 적어 내려가는 명부에 속한 사람들에게 알아서 배송될 것이네.”
시일이 좀 더 지나 수익이 쌓이고 연금이 모이면 아예 장식이 없는 본차이나를 어중간한 부호들에게, 장식이 있지만 그리 화려하지 않은 본차이나를 부호에게 팔아치우고 최상위 귀족들에게는 지금처럼 한정판을 팔면 꾸준히 팔려나가리라.
#작가의 말
모든 물건에 한정판이라는 세 글자가 붙으면 지갑을 엽니다. 열고 나서 후회하지만 여는 당시에는 너무나 행복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