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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523화 (523/573)

근육조선 523화

2부 28장 7화 금의환향(1)

새로운 설계도를 받은 덕분에 나대용의 작업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졌다.

나도 한때 전함사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에 업무에 잠시 관여하였는데 나대용은 잉글랜드 선박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길리는 목재가 부족하여 최대한 효율적인 선박을 만들려 하였지요. 결국 민간 업자들이 적은 목재를 두고 배를 만들며 더욱 효율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아국의 선박이 훨씬 크지만 후일이 되어 영길리도 큰 배를 만들면…….”

뒷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 조선 함선들이 거대한 몸집을 바탕으로 한 막대한 화력으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지만 상대도 몸집을 키운다면 이점이 사라지는 법이다.

오히려 크기만 키워대던 조선의 함선을 효율성을 추구하며 크기를 키운 잉글랜드의 함선이 뛰어넘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나대용은 선박의 설계를 계속 수정하며 말하였다.

“관찰사께서 협상을 하여 영길리의 함선 설계도를 받아오신 덕분에 필요한 요소를 여러모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아국으로 돌아가 더욱 발전시킬 것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 선박 설계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자네의 경지가 너무 높아 잘 모르겠군. 이 배가 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내부 갑판에 층을 두어 가운데의 평평한 갑판에는 뇌력포를 비롯한 대형 화포를 올릴 수 있게 하고 선수와 선미에는 지자총통을 비롯한 소구경 화포를 올리게 하였지요.”

그러고 보니 이순신도 딱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새 배를 받으면 약간 개수하여 화포 배치를 변경한다 하였다.

배의 중앙부에 대구경 화포를 밀집시켜 화력을 집중시키고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했는데 나대용의 새 설계안이 이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수군 사령관으로서 설계 자체의 지식은 없어도 본능적으로 최적의 설계를 찾아 나간 이순신도 대단하지만 이런 설계를 공식화시킨 잉글랜드의 수준도 대단하였다.

나대용은 기본 도면을 그리고 나무 모형을 만들며 말하였다.

“선박의 세장비를 늘리고 선수와 선미를 치켜들어 물살을 더 세차게 밀어냄과 동시에 흘수선(吃水線: 배가 잠기는 한계선)을 깊게 두면 속도와 안정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네가 창안한 새로운 돛을 배치하면 속도 하나는 빠른 배가 되겠군.”

“옳은 말씀이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영길리의 설계는 전투에 특화되어 있으니 많은 화물을 옮기기에도 벅찰 것입니다. 대략 기존 설계의 오 할 정도의 화물이 한계일 것 같군요.”

“그러하면 훈영제식법을 익힌 군관과 입신체비를 익힌 유생처럼 배를 두 종류로 분할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동일한 체격이라도 근육의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네.”

영국식 설계를 적용한 배는 화물을 많이 옮길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속도가 빠르고 전투력이 출중하다.

그러하면 무관처럼 전투에만 나서면 충분하고 간혹 연락선으로 쓰면 되리라.

나대용은 내 말을 듣더니 오히려 난처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예산에는 한도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종류의 설계로 배를 만들어 내구연한이 지난 군함을 수리하고 상선으로 팔아서 예산을 벌충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군함을 이십 년 이상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시대의 선박은 나무로 구성되어 있으니 수명이 10여 년에 불과하다. 군함으로는 기껏해야 7년을 사용할 뿐이며 남은 3년은 상선으로 불하되어 사용되다 폐기된다.

새로운 설계를 적용할 경우엔 상선으로 불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오로지 적재량만 따지는 상선으로 적재량이 부족한 배를 팔아치우면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아 예산에 구멍이 생기리라.

그러나 나대용의 말 안에 해답이 있으니 선체 하부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현전에서 올라온 장계를 본 적이 있다네. 지금은 구리가 부족하여 실시할 수 없지만 새로운 구리광산을 찾으면 선체 하부에 구리판을 달아 목재가 썩지 않게 만들 예정이라더군.”

“그리고 새로운 구리광산은 여기 미주에 있으니…… 충분히 됩니다! 아니, 되다 못해 당장 새로운 설계를 적용해 보고 싶은 마음이 넘쳐날 지경입니다!”

예전에 하주도 백성들을 전라도로 이주시키면서 만들었던 건물들이 차례로 해체되고, 선체 하부에 구리판을 덧대 목재 부식을 막는 작업에 대한 연구가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했다 하였다.

다만 구리가 부족하여 이 작업을 진행하지 못했을 뿐인데 내가 발견한 빙요 광산은 구리 생산량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나대용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 임기가 일 년 남았으니 도성으로 돌아갈 때에는 자네의 신형 선박을 반드시 탑승해 보고 싶다네. 예산과 목재를 충분히 지급할 것이니 영길리의 설계를 적용한 군선 열 척을 만들어 개중 빼어난 다섯 척을 선발해 두게.”

“관찰사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본래 조선으로 귀국할 때에는 넉 달 넘게 배 위에서 시달릴 작정을 했지만 속도가 더욱 빠른 배를 타면 석 달이면 충분하겠지.

그러고 보니 임기가 일 년 남았다는 생각에 신주랑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내가 금주에서 일할 것이니 자네는 당분간 후성부에 머물며 업무를 주관하게. 또한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니 짬이 날 때마다 이 땅의 둘레를 측정하게나.”

“이 땅의 둘레를 측정하라 하셨습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연유가 궁금합니다.”

신주랑의 수학과 측량 솜씨는 이현전 휘하 기관에서 꾸준히 일한 경력을 기반으로 월등하게 발전하였다.

고등학교 수준에서 멈춘 내 실력으로는 지식이면 몰라도 현장 실무에서는 신주랑을 따라잡지 못하리라.

이미 기대승이 다시 정의한 삼각함수, 팔선을 기반으로 한 측량법의 달인이 되어 북인들이 사용하는 도로를 닦는 데 공헌했으니 지구의 둘레 정도는 대략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리라.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각국에서 사용하는 자를 보여주고는 말하였다.

“아국에서도 척의 근본이 되는 황종척과 영조척(營造尺: 건물용 도량형)의 크기가 달라 사람 간의 혼동이 생기지 않는가. 심지어 서반아와 영길리, 그리고 포도아의 척이 모조리 다르고 각 군현마다 다르니 교역을 실시하며 여러 논쟁이 빗발친다네.”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서반아의 척이 조금 작아 영길리가 물건을 팔 적에 손해를 보기도 하며 포도아의 척은 북부와 남부가 달라 각 지역이 마찰이 심하다 하더군요.”

“그러하니 모든 척의 근본이 되는 이 세상의 둘레를 제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척을 만들려 한다네. 대부분의 나라는 산세가 험하고 평원이 좁아 이를 잴 수 없었지만 미주는 동요현의 북쪽으로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다네.”

미주는 한반도가 다섯 개 이상 들어가고도 남을 대평원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땅이다. 경도를 재려면 복잡한 산출이 필요하지만 위도(緯度)를 재려면 육분의만 사용해도 정밀 측정이 가능하다.

물론 이 시대의 자오선 측정은 오차가 넘쳐나겠지만 오차를 보정할 수단은 나에게 마련되어 있다.

신주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지도를 확인하며 답하였다.

“제가 미주에서 태어나 관료로 일한 인생도 꿈결 같지만 온 세상의 둘레를 측정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막중한 책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오차가 발생하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네. 자네는 오로지 측정 자료만 잔뜩 모아서 건네주면 된다네. 이후에는 내가 아국으로 돌아가 수많은 학자들과 논의를 거쳐 둘레를 명확히 확인해 볼 것이네.”

“정확한 측정으로 새로운 주척을 만드는 데 제 이름 석 자를 남겨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주랑을 동요현으로 보내놓으니 집 안으로 옮겨둔 북한산 순수비가 떠올랐다.

사실 신주랑이 조사한 자료는 어디까지나 근거자료로 쓰일 뿐이고 실제로는 내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주척을 만들어낼 예정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치수를 기준으로 하여 1미터를 역산하면 오차가 거의 없으리라.

이후 일 년 가까이 미주에 이주하는 이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자원을 모아 조선으로 보내고 임기의 끝을 기다렸다.

* * *

일반적인 관찰사 임기는 3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미주와 호주는 새로 개척하는 데다 일관적인 정책이 중요하니 관찰사의 임기가 5년으로 증가한 형편이었다.

물론 이 임기도 거의 다 끝나갔고 내 후임자가 금주에 도착하였다.

“서애 자네의 후임으로 부족한 몸이지만 내가 당도하였다네. 새로운 군관으로 배정된 송 수사(송희립)는 물론이요 수많은 인재들이 자네가 마련한 터전에서 일할 준비를 마쳤다네.”

“명곡(鳴谷: 이산보의 호) 자네가 신임 관찰사로 들어올 줄은 몰랐는걸. 도승지로 일한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험난한 책무를 짊어질 자질을 갖추었는가.”

“자네가 아니었으면 세 배는 험난한 책무였지만 자네가 열심히 일 한 덕분에 미주인들은 물론이요, 이주한 백성들조차 편한 삶을 이어간다는 말에 관찰사가 되기를 자처하였네.”

친구인 이산해의 사촌 이산보는 나는 물론이요, 이산해보다 훨씬 늦은 진급을 밟아나갔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임기를 석 달 남겨두고 방문하였으니 하나하나 인수인계를 하며 사정을 말해두었다.

“일단 빙요 광산은 채굴을 독촉하지 말고 가만히 두게나. 호주에서 옮겨온 유향목이 급속도로 자라고 있지만 이 유향목이 미주인들에게 요긴하게 쓰이니 숲을 좀 더 일구어야 하네.”

“염려하지 말게나. 그나저나 바다에 신형 선박이 떠다니는데 저 배는 대체 뭔가?”

“뭐긴 뭐겠는가. 시망(나대용의 자) 그 친구가 만들어낸 신형 군선이지. 예전에는 배를 날려먹어 문제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배를 만들어냈으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금주 만에서 마지막 점검 작업에 들어간 신형군선은 거친 움직임에도 매끄럽게 선회하며 위용을 뽐냈고 송희립은 그 모습을 보더니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대용이 해추선(海鰍船)이라 명명한 전선들은 적재량은 부족해도 전투력과 속도 하나는 대단한 배이니까.

이산보에게 인수인계를 위해 정보를 제공할 때마다 이산보는 흠칫흠칫 놀라며 미주의 현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이고 살펴보았다.

마침내 앞뒤가 다 맞고 거짓이 없음을 확인하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나는 자네가 과장하여 보고를 올리거나 주상전하께서 자네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감싸신다 생각하였네. 개척을 실시한 지 사 년이 지나지도 않은 땅에서 이토록 많은 소출이 나오다니!”

“소출이 지나치게 늘어나 백성들이 아이를 네댓 명씩 낳을 것이라 하여 나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네. 백성 오만여 명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였는데 작황이 너무 좋아 미곡의 수확만 연간 칠십만 석이 넘어갈 지경이니까.”

미주가 얼마나 풍요로운 땅이 되었냐고?

조선에서는 견물생심이라고 도둑이 생길까 봐 밖에는 귀중한 물건을 두지 않는데 여기는 훈제까지 마친 돼지 뱃살을 처마에 널어두어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

무제한적으로 번식하는 닭과 돼지 덕분에 막대한 단백질이 넘쳐나고, 백성들은 여유가 생기자 글을 익히고 학문을 배우며 나날이 발전해 나갔다.

이미 내가 창안한 승근도를 좀 쉽게 만든 놀이가 동요현의 민속놀이가 되어버렸다.

이산보가 가장 놀란 것은 다른 어느 장소도 아닌 만천서원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만천서원의 완성 예상 모형을 살펴보더니 옛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크기를 확인하고 질겁하여 말하였다.

“이런 거대한 성당을 만들 줄은 몰랐는걸. 심지어 사찰과 서원마저도 아국의 것의 몇 배에 달하는군.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기에 이렇게 건물이 많은가? 성균관보다 곱절은 클 것 같은데.”

“사실 건물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네. 사람이 넘쳐나고 계속 번성하니 조만간 수천여 명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입신체비를 즐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금의환향(錦衣還鄕)이 따로 없군. 자네야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아국의 입장에서 자네가 미주에서 보낸 오 년은 금의환향과 같다네. 오히려 금을 캐내는 밭을 만들고 돌아와 버린 것과 같군.”

조정에서 원한 수준은 몇만 명 정도가 가까스로 생활할 땅을 개척하라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수천만 명이 머물러도 좋을 땅을 마련해 버렸으니 금의환향이 맞네.

이산보도 부족한 사람이 아니니 예정보다 빠르게 인수인계도 마치고 나대용이 창안한 해추선의 훈련도 끝나 귀향길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

1596년 음력 4월, 나를 포함하여 미주에서 머물던 사람들은 해추선에 올라타 귀향길에 올랐다.

창고 크기가 작아서 짐을 많이 올릴 수 없는 해추선이지만 구리를 비롯한 귀중한 물자와 미주인들이 내놓은 공물들이 차곡차곡 실리기 시작하였다.

측량 작업을 진행하다 가까스로 늦지 않은 신주랑은 마지막 인사와 보고를 동시에 올렸다.

“관찰사님의 지시대로 팔선측량법에 의거하여 미주 일대의 초원을 측량하여 보았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하였지만 이 세상의 둘레가 대략 십이만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네. 그나저나 대략 십이만 자라 하였는데 완전히 측정하지는 못하였는가? 자네가 나보다 수학을 잘하니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제힘으로는 각 측량지점의 위도를 측정하며 각 점 사이의 각도와 거리를 산출한 자료만 쌓아둘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예상하고 있었던 수치에 끼워 맞춘 형편이지요.”

이 시대의 부족한 측량기술로 제대로 지구 둘레 계산이 가능할 리 만무하였다. 어처구니없는 오차가 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리라.

남명 조식을 통해 알게 되어 이현전의 후임자로 배정된 신주랑을 많이 아끼고 배려하였던 나도 더 이상 신주랑을 볼 수 없게 되어 안타까운 심정이지만 신주랑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현전에 처음 근무할 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저를 돌보아주신 바를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조선으로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제 후손들은 대대로 조선을 위해 충심을 다할 것입니다.”

“이미 미주는 조선의 땅이 다 되었으니 염려하지 말게. 혹여나 모든 과업이 끝났다면 혼자라도 좋으니 아국에 방문하도록 하게. 내가 언제라도 맞이할 것이네.”

“그날이 언제쯤 올지는 모르겠지만 홀가분하게 도성을 유람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군요.”

이제 신주랑도 50줄에 가까워졌으니 손자가 자라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리라.

아직 임기가 끝나지 않아 미주에 남아 있을 다른 관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정철은 평소와 다르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주변을 좀 살펴보다 편하게 말하였다.

“내 임기는 지금 종료되었으니 내 품계가 높든 낮든 우리 사이는 벗으로 돌아왔다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지금이 아니라면 털어놓기 힘들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자네가 붙여준 교산이라는 녀석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미각이 출중하고 오성이 발달하여 참으로 마음에 놓이더군. 이 술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가?”

“무엇인지 뻔히 보이는군. 내가 준 주정을 여기까지 챙겨왔으니 배에 오르기 전에 독한 술 한잔이나 해 볼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 내가 자네에게 온전한 술 한 잔을 주기 위해서 멀리 회주(밴쿠버) 북쪽에서 거둬온 얼음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네.”

정철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주석 잔에 얼음을 몇 덩어리 담더니만 주정 뚜껑을 따고 술을 흘려보냈다.

시커먼 색과 기름이 조금 번들거리는 모습이 불안하였지만 못 먹을 물건을 주지 않을 테니 차가운 주석 잔을 들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놀랍게도 정철이 준 술은 주정의 독한 맛이 남아 있었지만 조금 도드라지는 단맛과 진한 커피 향기가 농축된 녀석이었다.

이걸 어디서 마셨나 했는데 현대에서 마셔본 칵테일 중 하나의 맛과 흡사하다!

정철은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교산 그 친구가 얼마나 대단한지 매일같이 신묘한 음식과 술을 내놓더군. 이 술은 중미국(멕시코)에서 재배하는 가배콩과 당밀을 넣어 우려낸 술이라네. 이외에도 복숭아나 약초 심지어 미주삼(화기삼)까지 넣어 수많은 약주(藥酒)를 만들어내더군.”

“약주라 하였는가? 이런 물건을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술만 마셔도 건강해지는 것 같고 날마다 시구가 절로 떠오를 지경이라네. 새로운 땅에 방문하여 미주인들의 말을 필담으로 정리하고 풍경을 적어나가면 어느새 술과 안주가 생겨나지. 다른 술도 있는데 한 잔씩 마셔보게나.”

정철은 나름 기분이 좋았는지 잔을 여러 개 준비해 두어 술을 조금씩 따라주었다.

약초의 진한 향이 느껴지는 술은 물론이고 각종 과일의 향이 넘쳐나는 걸쭉한 술까지 있었다.

조선에도 약재나 과일을 우려내 먹는 술은 있었지만 그리 많이 마시는 술은 아니다.

과일이나 약재의 맛을 살리려면 순수한 주정만 남겨둬야 하는데 이럴 바에는 소주를 마시지 재료를 우려내는 법이 없으니까.

반면 미주에서는 쌀이 지천에 널려있으니 순수한 주정만 뽑아내는 것이 가능하고 이 덕분에 정철의 말로는 약주, 현대의 분류로는 리큐르라는 술이 탄생하였으리라.

이 리큐르들을 현대의 칵테일처럼 층이 생기도록 숟가락을 통해 천천히 따라 건네주었다.

“이런 좋은 약주를 소개하였으니 약주를 겹쳐서 마셔보지 않겠는가. 각 술마다 농도가 다르니 서로 섞이지 않은 아름다운 술을 만들어 보았다네.”

“오호라. 맨 아래에는 가배약주를 담고 가운데에는 복숭아 약주를 담고 가장 위에는 순수한 주정을 담아뒀군. 간혹 술이 약하다 생각할 때에는 주정을 섞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는데.”

“약주끼리 섞는다면 독특한 맛이 사라지지만 이렇게 층을 만든다면 각 술을 섞어서 즐길 수 있다네. 술이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적당한 술은 문제가 없는 법이지.”

천천히 마시라 했는데 단번에 들이켜는 모습이 참 정철다웠지만 그는 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듯이 감탄을 억누르는 표정을 지으며 주정들을 살펴보고는 말하였다.

“지금까지 교산이 만들어낸 주정이 열다섯 종류에 달하니 이를 겹쳐 섞으면 일백 종류가 넘는 술을 새로 만들 수 있겠군. 자네 덕분에 내 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으니 나를 제자로 받아주지 않겠나?”

“제자는 무슨! 그럼 스승으로서 더욱 많은 술을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영 못 미더운 사이로 시작하였지만 좋게 끝났으니 다행이지.

정철과도 작별인사를 나누고 배에 오르는데 가장 중요한 물건이 올라가고 있었다. 혹시나 모를 파손을 대비하여 세 개나 만든 만천서원의 조립식 모형이다.

수천만 명이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으며 후일이 되어도 이 터전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내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였다.

항구에서 떠난 배가 이회의 지시에 맞추어 바다로 나아가자 오 년 만에 만나게 될 가족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하였다.

#작가의 말

성룡이 : 나에게는 치수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신주랑의 측정이 오차가 많아도 이걸 기반으로 하면 오차가 없어지지!

진흥왕 순수비 : 아직 풍화가 400년이나 덜 되었어. 진짜 날 가지고 기반으로 삼을 거야? 너 400년이면 풍화가 얼마나 진행되는지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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