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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520화 (520/573)

근육조선 520화

2부 28장 4화 태평성대

가을이 깊어질수록 요새 건설현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미주인들은 더 이상 흙을 옮겨오지 않고 머리통보다 커다란 돌을 운반하여 축성 작업을 도와나갔다. 이들 대다수가 돌을 다루던 사람들이니 기본기는 익히고 있어서 일을 가르치기가 편했다.

나도 조선시대에 와서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 두 번째 요새는 특별히 신경을 썼다.

성형요새의 뿔 바깥쪽에 삼각형 모양의 포루를 두 겹으로 설치하고 상황이 불리해지면 이 포루를 포기하고 안쪽 구획으로 후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렇게 하면 정석의 극한이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가장 바깥쪽 요새는 포격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데 이걸 좀 다르게 쌓는 방법이 없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현대에는 자주 사용했던 방식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시험 삼아 포루 하나를 만들되 외축내탁 방식을 활용하지 말도록. 자연석에 구멍을 내어 구리로 만든 쐐기와 사슬을 엮어두게. 이 쇠사슬 위에 흙을 올리고 다지게나.”

“관찰사님께서 뭘 염두에 두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실시하여 보겠습니다.”

현대에 가장 값싸고 빠르게 옹벽을 쌓는 방법 중 하나가 보강토 옹벽이다.

옹벽을 구성하는 석재에 합성섬유로 만든 노끈이나 그물을 엮고 이 위에 흙을 다져서 마찰력으로 지탱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옹벽을 만들면 지진이 아니고서야 잘 버틴다.

아직 합성섬유도 없는 시대이며 쇠사슬을 사용하면 수십 년 이내에 부식되어 요새가 무너지겠지만 청동이나 구리는 잘 녹슬지 않는다.

시험 삼아 축조한 전근대식 보강토 옹벽이 완성되어서 군기시 장인들을 불러 화포 시험사격을 시작하였다.

“새로 쌓은 성벽에 마음대로 화포를 쏘아보게. 어차피 화포의 최종 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니 더 말해 무엇을 하겠나? 지금 가져온 화약을 모조리 쏟아부어도 되고 아국에서 가져온 화포를 쏘아보아도 괜찮다네!”

김지와의 대결에서도 증명되었지만 천자총통(컬버린급 화포)이나 그 이상의 위력인 뇌력포가 적중하면 외축내탁 방식으로 쌓은 성벽은 쉽사리 무너지게 마련이었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성으로 들어가는 경사로가 생겨난다.

반면 내가 창안한 보강토 옹벽 방식의 성벽은 흙의 마찰력으로 지탱하는 성벽이니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포탄이 적중하면 돌이 박살 나고 흙이 튀어나왔지만 사람이 기어 올라갈 경사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 성벽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데 참으로 기이합니다. 보통 성벽보다 두 배는 내구력이 좋으니 마지막으로 천용포를 쏘아봐도 될 것 같습니다.”

장인들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요새에 감동하여 조선에서 가까스로 수송한 천용포를 가져왔고 나도 그 위력을 알고 있으니 침이 넘어갔다.

각도를 제대로 지킨 성형요새라면 모를까 일반 요새는 단숨에 박살 내는 괴물 화포이지.

구경이 21㎝에 달하는 천용포가 발사되고 충격에 속이 뒤틀리며 머리가 멍해졌다. 임시로 만든 포루가 충격으로 붕괴하며 귀에 이명(耳鳴)이 솟구쳤지만 요새는 먼지를 피우며 형상을 유지하였다.

“이런 세상에! 천용포를 맞고도 버티다니? 외축내탁 성벽은 아예 구멍이 뚫리거늘!”

“심지어 판축다짐으로 쌓은 성벽보다 더 잘 버티는 것 같지 않습니까? 판축으로 쌓았다면 흙이 마구 무너져서 경사로가 생기는데 흙이 많이 무너지지도 않았군요?”

합성섬유 대신 구리 사슬을 사용하였는데 이게 더욱 확실하게 흙을 잡아둔 것 같다.

사격이 이어지자 성벽이 무너졌지만 대략적으로 계산해도 보통 성벽 내구력의 두 배는 되었고 장인들은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성벽입니다. 외형은 돌로 쌓은 성벽과 흡사한데 특성은 판축다짐으로 만든 성과 흡사하군요. 포격을 당하여도 흙이 쉽사리 밀려 나오지 않습니다. 이 성벽의 비밀이 궁금하니 제발 알려주십시오.”

“이 성벽을 축조하는 돌은 모두 뒤에 구리로 만든 사슬을 엮어 지탱하게 하였네. 돌이 무너져도 사슬이 흙을 꽉 잡고 있으니 포탄이 사슬을 끊을 때까지는 형상이 유지된 것이지.”

조선에서 구리 사슬로 지탱하는 성벽을 쌓자고 말하면 언론양사는 물론이요 십조 전체의 탄핵이 이어질 돈지랄 중의 돈지랄이다.

일종의 반칙이라 생각했는지 군기시 장인들은 내 앞인데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며 언성을 높였다.

“성벽을 지탱하는 데 구리를 사용하시다니요? 어쩐지 소문보다 구리가 적게 온 것 같았는데 다 여기에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구리를 사용하셨습니까?”

“이 성벽을 쌓는데 구리를 사천 근 넘게 사용하였지. 그래도 내구성이 두 배 이상 증가하였으니 큰 문제는 아니지 않겠는가?”

이게 조정에 알려지면 탄핵감은 아니더라도 돈을 허투루 쓴다면서 핀잔을 들을 지경이라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군기시 장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뼛속까지 화포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라 역으로 말하였다.

“그런 것을 왜 저희에게 알려주시지 아니하셨습니까? 아국이라면 모를까 여송도나 미주라면 구리가 넘쳐나는 땅입니다. 화포를 많이 쏘려면 튼튼한 돈대가 필요한 법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돈대를 축조하면 천용포를 외곽에 배치하여 더욱 큰 화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나서서 화포를 올릴 자리를 마련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친구들 모습 좀 보게. 자헌(김지의 호) 어르신의 제자 아니랄까 봐 화포에 미쳐서 사는군. 자네들에게 매달 일만 근 이상의 구리를 보내줄 것이니 마음대로 만들어보게!”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지만 여기는 구리가 넘쳐나는 고장이니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아직 구리 생산이 한 달에 일만 근 내외이지만 각지에서 소규모 광산이 계속 발견되며 특히나 캐내기 쉬운 구리와 주석이 민간인 탐광자를 통해 다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요새 설계 수정을 지시하고 관아로 돌아오니 허균이 평상시의 뻔뻔한 모습은 보여주지도 않고 당황한 모습으로 나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는 구리로 만든 술잔을 건네주면서 말하였다.

“관찰사님께 보고를 올립니다. 백성들이 구리로 잔을 만들고 있으니 지나친 사치가 염려됩니다. 관찰사님께서 사치를 줄이라는 지시를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는 지난 몇 달 동안 외부에 머무르느라 백성들의 생활을 잘 보지 못하였나 보군. 그럴 줄 알았으니 나와 함께 마을이나 돌아보고 오면 어떻겠나?”

허균은 자기 멋대로 밖으로 뛰쳐나가 마음대로 음식 재료를 찾아보고 돌아왔으니 변화한 생활상을 모르고 있으리라.

허균과 밖으로 나가니 길거리에서는 소줏고리를 올리고 즉석에서 소주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여러 번 증류하여 소독용 주정을 만드는 이들까지 보였다.

이들의 소줏고리는 죄다 구리로 만들어졌는데 허균은 이를 보며 기겁하고는 말하였다.

“수양자께서 구리로 소줏고리를 만들고 주정을 처음 만들어 내셨을 적에 가산을 죄다 털어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여기서는 부농(富農)들이 죄다 구리로 소줏고리를 만들다니요!”

“소줏고리면 말을 다 하였지. 저기 엿을 쑤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가? 엿을 쑤는 솥도 다루기 편한 구리 솥이라네.”

조선을 포함한 평범한 고장에서 조청이나 엿은 제법 희귀한 물건이다.

첫 단계가 아주 진하게 식혜를 만들어내는 걸로 시작하는데 이걸 무작정 졸이고 또 졸이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조금만 실수하면 타들어 간 엿이 되는데 구리 솥을 사용하면 열전도율이 좋아 이론상 엿을 만들기 쉽다.

허균은 이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며 말하였다.

“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만들어진 엿만 따져도 쌀 한 말이 넘는 양인데 길거리의 꼬맹이들도 엿을 씹어대지 않습니까. 도성에서도 이런 풍족한 생활을 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자네가 외부에서 일거리를 찾아 방황하던 중에 생활이 모조리 변하였다네. 잠시 동요현 일대에 마련해 둔 축사로 가보세나.”

조선에서 닭을 기를 때에는 닭에게 먹일 썩은 곡식이나 음식물 찌꺼기의 양을 감안하여 번식시킨다. 일반적인 농민들은 3~4마리의 닭을 기르는 것이 한계라 이후에는 계란을 팔아치우는 수준에서 그쳤다.

이보다 더 많은 사료를 요구하는 돼지를 기르려면 백정이거나 부유한 농민이라 잔반으로 돼지 사료를 감당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미주의 농장은 상식을 초월한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얘들아 밥 먹어라! 아니, 쌀 먹어라!”

허균과 말을 타고 동요현에 잠시 방문하니 외곽에 마련한 농장에서 수백 마리의 닭들이 꼭꼭 소리를 내며 농장에 마음대로 돌아다녔고 인부들은 쌀가마니를 풀어서 바닥에 마구잡이로 모이를 뿌려주었다.

심지어 닭 사이에 어디서 들어왔을지 모르는 야생 칠면조들이 대장 노릇을 하며 모이를 주워 삼켰고 병아리부터 반쯤 자란 닭까지 섞여 있었다.

내가 방문하자 농장주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관찰사님 오셨습니까! 작년부터 작황이 너무 좋아 알을 가져가지 않고 모조리 병아리로 만들어 키우기 시작했는데 얼마 전에는 대략 칠백여 마리가 되었습니다.”

“칠백여 마리라고? 명확한 수를 세지는 않았는가?”

“이 일대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몰골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알을 까서 병아리가 태어나니 수를 적어보다 제풀에 지칠 지경이지요. 저 멀리 있는 돼지농장에서도 돼지가 새끼를 치는 숫자를 대략 적어두기만 합니다.”

여유분의 식량이 없어질 무렵이 되면 이 증가 추세도 꺾이겠지만 증가 추세가 꺾인다는 말은 닭의 소비가 시작된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관원을 불러 농장의 현황을 물어보았고 관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저희도 명확하게 가축의 수량을 조사하지 못하였지만 닭은 동요현 일대에만 최소 이만 마리가 넘게 기르고 있으며 돼지는 이천오백 마리가 확실히 넘어갑니다.”

“여기에 가져온 돼지가 이백여 마리에 불과하였는데 일 년이 지나서 이천오백 마리라 하였는가? 돼지를 대체 어떻게 다루기에 이런 몰골이 되었는가?”

“저도 모르고 있었지만 돼지는 음식이 풍족하면 마음대로 새끼를 치고 바로 새끼를 배더군요. 심지어 아국에서는 한 배에 서너 마리만 장성하지만 여기서는 여섯 마리 이상이 장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하니 이백 마리가 열두 배로 늘어…….”

조선에서는 짐승이 많이 먹는다고 사료의 양을 무제한적으로 늘리는 경우가 없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두지만 짐승들이 스스로 번식 속도를 줄일 정도로 압박을 가하는 격이다.

반면 식량이 넘쳐나는 미주에서는 이런 제한이 완전히 풀렸다. 음식을 썩히느니 차라리 동물 사료로 마음껏 주기를 택하였고 그 결과가 무제한적 번식으로 돌아왔다.

허균은 돼지농장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아이들은 길거리를 쏘다니며 엿을 씹는데 이제는 돼지 귀로 만든 편육과 삶은 달걀을 먹으며 돌아다니겠군요. 농민들도 매일같이 흰쌀밥과 돼지고기를 즐길 것이니 태평성대가 따로 없습니다.”

“자네의 말이 맞으니 이 땅은 요순의 통치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태평성대가 분명하다네. 아쉬운 점이 있으니 이런 소문이 아국에 퍼져 나가지 않았다는 점이지.”

결국 미주에 부족한 점 하나를 따지자면 정보이다.

이런 생활상을 퍼트려 더욱 많은 이주민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나는 글재주가 좀 부족한 편이라 이런 일은 못 한다.

조정에 사람을 보내줬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주상전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이후 1594년 12월이 되어 잠시 금주로 돌아가 조정의 일을 처리하려는 와중에 내가 원하던 사람이 찾아왔다.

먼저 인사를 올린 이항복을 시작으로 아직 멀미에 시달리는지 사지를 휘청거리는 중늙은이가 인사를 올렸다.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시어 미주에서 복속한 각 부족의 풍습과 문물을 기록하고 이를 후대에 남기기 위하여 당도하였습니다.”

“송강 자네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는걸. 일전에 호주에서 죽을 고생을 하였다는데 머나먼 미주까지 오게 되다니 앞으로 고생이 더욱 넘쳐나겠군.”

정철은 내 요청으로 백과사전인 개원요람을 만든 이후 인생이 대차게 꼬여 버렸다. 평상시 성격은 더럽고 오만하지만 외부를 돌아다니게 하고 술만 공급하면 온갖 아름다운 글을 써대는 기괴한 능력자로 인식되어 버렸다.

조정에서도 평상시 태업을 일삼는 정철을 가만히 둘 수 없어서 백과사전 집필 전문가로 지정해 버렸다.

자료 수집이 필요할 때마다 정철을 외부 영토로 뺑뺑이를 시킨다던가.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자 입을 내밀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고생이 넘쳐난다 하였는가. 자네의 직급이 정1품이라 내가 존댓말을 해야 하지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벗이니 말을 놓겠네. 고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애초에 첫 단추부터…….”

조선에서는 친구 사이라면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말을 놓지만 여기는 관청이고 아직 근무시간이며 엄연히 공적인 자리이다.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정철이라도 친구이니 뭐라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며 윽박질렀다.

“시작은 나 때문이겠지만 이후로는 모두 자네 탓이지. 이미 만취당(晩翠堂: 권율의 호)에게 서신을 받았는데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자네를 안타까워하던 만취당이 격노한 사건이 벌어졌다 하던가?”

정철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뻘겋게 물들고 두 눈이 옆으로 돌아가며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정철의 도피행위임을 알고 있는 나는 아예 쐐기를 박으려고 윽박질렀다.

“호주에서 요람을 편찬할 자료를 수집한다고 자취를 감추고, 인근에서 수확한 감자를 강권하여 얻어내 술을 만들려 하다니. 덕분에 곤장을 맞는 대신 공좌를 이천 회 넘게 하였다던가?”

“독이 오른 감자로 술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꾀를 쓴 것이네! 알다시피 감자에 독이 오르면 사람이 먹고 탈이 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술로 만들어 내 뱃속으로 들어가야지.”

“독이 오른 감자는 소의 여물인데 이걸 갈취하니 만취당이 더욱 화를 낸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사람답게 지내야지 짐승의 먹이에 손을 대면 어떻게 하겠나? 차라리 메밀로 탁주(막걸리)를 만들었다면 넘어갔을 걸세.”

정철은 문장력도 두뇌도 뛰어나지만 그놈의 술이 신세를 망칠 사람이 분명하였다.

나이를 먹으며 젊은 시절에 죽어라 마셨던 탁주나 청주는 질린다는 명목으로 독한 소주만 마셔댔다.

아마 북인들이 감자를 우려내 독한 소주인 감자주(보드카)를 만들어낸다는 소문을 듣고 감자를 억지로 뜯어내 수작을 부리다 제대로 걸렸겠지.

젊은 시절보다 더 다루기 힘들어진 정철을 보면서 그래도 좋은 말을 해줬다.

“만취당이 개척하였던 호주야 황무지가 넘쳐나 작황이 불안하니 금주령(禁酒令)을 내릴 땅이었지만 미주는 풍족한 땅이라 금주령을 내릴 이유가 없다네. 오히려 자네가 마음대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해줄 것이네.”

정철의 나이도 50이 넘어 60이 코앞이니 아주 화끈한 술을 준비해 줘야겠다.

관청에 쌓여 있는 소독용 알코올을 가공하기 이전 물건으로 몇 병 가져와 꺼내주니 정철은 눈을 흘기며 병을 들어보았다.

“소주가 아니고 소독용 주정(酒精)이 아닌가? 소독용 주정에는 어성초(魚腥草: 쓴맛과 불쾌한 냄새가 난다)를 넣어 사람이 마시지 못할 물건으로 만드는데?”

“역시 술에 능한 사람이니 병만 들어보아도 잘 아는군. 자네에게 어성초를 넣지 않은 주정을 원하는 대로 지급하겠네. 여기에 자네를 위한 안주를 잘 만들 사람을 하나 붙여주면 어떻겠나? 내 형님에게 인정을 받은 교산이라는 친구일세.”

허균이 인사를 올리니 새파란 애송이를 맞이한 정철은 눈을 부라리며 허균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허균도 만만치 않은 성격으로 이를 받아넘겼고 조만간 친해질지도 모를 애매한 예감이 들었다.

정철에 무제한적인 술을 공급시키고 미주를 돌아다니게 만들면 자연스럽게 풍요로운 생활을 소재로 수많은 시와 산문을 창작하리라.

허균이 술을 계속 마실 수 있도록 안주를 만들어 주면 완벽한 조합이나 마찬가지이다.

술을 마시면 시와 산문이 절로 나오는 정철이니 몇 년이 지나면 미주에 대한 소문이 정리되어 한양에 퍼져나가리라.

이 태평성대를 주정뱅이 정철의 힘으로 조선에 알릴 수 있겠지!

#작가의 말

정철의 주요 작품에는 관동별곡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미주별곡만 따져도 12관동별곡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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