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15화
2부 27장 11화 해적 소탕(2)
드레이크가 의자에 앉아 착잡한 눈빛으로 이순신의 대장선을 바라보았지만 선원들은 여전히 분노를 담은 채 대장선을 노려보았다.
조선 함대가 앞길을 가로막고 전투를 준비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들의 사기는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선장님의 방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수많은 적을 상대로 용감하게 맞서 싸웠는데 저런 강요를 하였다면 엄연한 적대행위가 아닙니까!”
“조선의 함대가 우리보다 두 배나 많다 하여도 선장님 아래에서 오 년 동안 일하면서 세 배나 많은 적을 상대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생존본능이 경계를 보낸 상대인 데다 어느 한구석도 유리한 곳이 없는 상황이라 꼬리를 내렸지만 선원들은 아예 드레이크를 향해 이를 갈아대며 맞서 싸우자 하였다.
드레이크도 분통이 터진 나머지 칼을 뽑으며 외쳤다.
“선장 명령이다! 지금 네놈들을 모조리 교수형에 처해도 할 말 없다는 것을 잊었나!”
드레이크와 십 년 이상 함께해 온 이들은 그의 판단을 존중하였지만 그런 사람은 이 배에 많지 않았다. 면직물 무역을 위해 사방에서 모집한 해적들은 전설적인 해적 드레이크가 조선 해군을 격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차 있었다.
선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억누를 수도 있었지만 잘못하다가는 명령을 어기거나 아예 선상 반란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드레이크는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생각을 정리하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첫째는 놈들을 몰살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다. 나는 언제나 후환을 염려하여 적을 포위하여 격멸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고 우리의 퇴로를 충분히 확보한 채 전투에 나섰다. 만약 조선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어도 놈들이 달아나면 어떻게 되겠나?”
“별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머저리 새끼가! 네놈의 입은 얼굴가죽이 모자라 뚫어놓은 구멍이냐! 서른 척의 조선 함대 가운데 단 한 척만 달아나도 스페인 아르마다와 대등한 조선 해군이 사방을 쏘다닐 거라고! 그 감당은 어떻게 하겠나!”
차라리 조선 수군만 상대한다면 형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진상을 알아차린 이상 무굴제국과 조선이 연합하여 인도양 일대를 닥치는 대로 휩쓸고 다니리라. 스페인은 조선의 동맹국이지만 이 사태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면직물 무역이 중단되면 가까스로 부흥하던 잉글랜드는 다시 몰락할 것이다. 여기에 동방무역에 타격을 입은 스페인이 동맹 조선의 요청으로 다시 전쟁을 시작할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을 모조리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드레이크는 다음 연설을 시작하였다.
“두 번째는 애송이 캐번디시가 우리와 조선 모두를 농락했다는 점이다. 너희들이 항구에서 모집 계약서를 작성할 때 뭐라고 쓰여 있었나? 다른 사람이 읽어주기라도 했을 텐데?”
“바르바리 해적을 죽이고 사로잡는 위험한 여정, 성과급 제도의 적은 임금, 몇 달간 지속되는 혹서(酷暑), 끊임없는 전투,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 그리고 성공 시 영예와 부를 얻을 수 있음.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바르바리를 소탕하기 위해 여기에 온 바다 사나이들이다! 겁쟁이처럼 민간인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치우는 겁쟁이였나? 아니다! 너희는 진정한 바다 사나이란 말이다! 조선도 우리를 왜 믿었겠나! 진정한 바다 사나이라 믿었겠지!”
노예를 얻으려면 전투 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아치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드레이크도 알고는 있었다. 오로지 해적이자 해군 사령관으로서 쌓아온 명예와 긍지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게 하였을 뿐이다.
거친 해적들도 어느새 침을 꿀꺽 삼키며 드레이크의 의견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였고 드레이크는 점차 변화하는 갑판의 분위기를 읽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조선 수군에게 기회를 주되 패배하면 서로 상잔하여 만신창이가 된 캐번디시를 내 손으로 처단하겠다! 네놈들 앞에 진정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데 뭘 하는가! 나약해진 놈을 물리치면 약탈한 보물과 축적한 금화를 모조리 얻을 수 있지 않겠나!”
약해진 상대를 몰아세워 어마어마한 재화를 얻어낼 수 있다는 말에 해적들은 휘파람을 불어대고 권총을 쏘아대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사기를 올리기 위해 럼주를 마구잡이로 풀어대는 드레이크였지만 앞길이 막막하였다.
캐번디시는 만만한 해적이 아니었으니 조선 함대를 이기고 여력이 남아 자신의 함대와 연전을 벌여도 팽팽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상대였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던 드레이크는 부관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시어도어 겁스! 내 아래에서 십 년 동안 일해 왔으니 놈들의 경로 정도는 알 것이다. 지금 당장 부하들과 함께 조선 수군에 합류하여 길 안내를 시작하라! 또한 놈들의 함대 규모를 상세히 산정하여 정보를 전해주어라!”
그의 눈으로 보건대 이순신이라는 자는 기세가 대단하며 함대 규모가 두 배로 클 뿐, 자신과 비슷하거나 큰 차이가 없는 실력을 가졌다 생각하였다.
공멸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려면 이순신 쪽에 힘을 실어줘야 하니 제법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명령을 듣고 나룻배를 거쳐 이순신의 기함에 오른 시어도어 겁스는 인사를 올리고 바로 선장실로 향하였다.
수많은 지도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선장실 탁자 위에 시어도어는 자신이 가져온 지도를 펼쳤고 이순신의 질문이 쏟아졌다.
“놈들이 영길리로 돌아갈 경로가 필요하다네. 자고로 길목을 파악하고 몰아쳐야 상대를 일제히 격멸할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적하물이 적당한 함선으로 잉글랜드로 돌아갈 때에는 희망봉을 경유하여 북상합니다. 반면 적하물이 많은 함선은 느려지는 데다 보급을 자주 해야 하니 중간 기착지가 있지요.”
“놈들은 매가(메카)를 약탈하면서 얻어낸 금은보화는 물론이며 솔로몬국 사람을 속여 얻어낸 재산이 많을 것이니 중간 기착지에 머무르겠지.”
“저 또한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위대한 항해사 한명회가 발견한 파라다이스 섬(모리셔스 섬)이 기착지이지요. 조선말로는 극락도라 불리는 이 섬에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다 돌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이순신의 눈이 가늘어지며 지도에 표시된 극락도를 살펴보았다.
본래 조선과 솔로몬 제국에서도 사람을 보내 관리하였으나 비위생적인 스페인 선원 덕분에 황열과 말라리아가 퍼지면서 딱히 관리하지 않는 섬이 되어버린 곳이었다.
상대의 위치를 알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제법 큰 섬이고 항구가 두 개나 있기에 단숨에 포위할 수 없으며 상당수의 적이 도주할 것이 분명하였다.
이순신은 모리셔스 섬의 해안선과 해류가 기록된 상세 지도를 펼쳤고 다시 질문이 시작되었다.
“놈들의 함대는 어느 정도 규모인가?”
“세 선장이 연합한 예순 척 규모 함대입니다. 각자의 기함은 조선 기준으로 칠백 돈(630톤)급 레이스 빌트 갤리온이고 이외에 중형 이상 갤리온 스무 척과 소형 갤리온 스무 척 나머지는 캐러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국의 함대와 비견하자면 대략 이 정도 규모가 나오겠군. 놈들이 머무를 장소가 항구 두 곳이니 대략 이런 구도로 최소한의 경계를 구축했을 것이며…….”
칼레 해전까지 참전했던 시어도어 겁스도 뭐라 반박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겠지만, 이순신은 머나먼 모리셔스 섬과 거기에 머무르는 캐번디시의 함대가 손에 보이는 듯이 지도 위에 압정을 박아 위치를 표시하였다.
두 곳의 항구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함선들과 주변에 정박한 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보낼 준비를 마친 캐러벨을 표시한 압정까지 박아 넣으니 완벽한 진형이 완성되었다.
심지어 시어도어조차 이 진형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철두철미한 경계를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놈들도 대승을 거두었으니 방심할 겁니다.”
“상대가 방심하였을 때를 기준으로 작전을 세운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가다듬었을 때에는 위기에 처하는 법이지. 차라리 상대가 철저히 경계하는 상황을 기준으로 싸워야 한다네.”
기습이라는 단어는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이다.
아예 경계한 상대를 대상으로 기습을 한다는 성립조차 되지 않는 말을 들은 시어도어 겁스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순신은 음력 달력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하현달이 그믐달로 넘어가는 시기이니 기습을 하기 아주 좋겠군. 극락도는 그리 큰 한밤중이 되면 수위가 낮아지니 기습에 대응하려고 배를 출항시킬 때 난항을 겪을 것이네.”
“아예 기습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시기가 아닙니까. 훤한 보름달이면 모를까 초승달 시기에 항해하면서 횃불을 켠다면 바로 들킬 것이고 켜지 않으면 선단이 모조리 분열될 것입니다.”
시어도어의 선장 드레이크도 야간에 횃불을 끄고 몰래 접근하여 일제히 기습하는 방식으로 제법 많은 전과를 거둔 선장이었지만, 최소한 반달을 넘은 훤한 달빛 아래에서 기습을 하였다.
모든 선박이 한 몸을 이루면서 움직일 숙련도와 지휘체계라면 기습이 성공하겠지만 이론상의 이야기에 불과하였다.
자살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시어도어 겁스의 눈빛이 떨렸지만 이순신은 무덤덤하게 부관 이억기에게 지시사항을 하달하였다.
“적도들은 극락도에 머물고 있지만 언제나 경계의 끈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초승달이 뜨는 어두운 밤을 틈타 기습할 것이네. 함대를 분열할 예정이니 자네가 분견대를 이끌게.”
“통제사께서 명하신 바를 충실히 시행하겠습니다.”
“이놈들은 미쳤어! 미쳤다고! 제정신이십니까? 함대를 분열해서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기습을 성사시키겠다면 세상 어디에 이기지 못할 적이 있겠습니까?”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미친 짓을 당당히 실행하는 이순신과 이를 아무 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억기를 보고 모조리 미친 사람이라 여긴 시어도어는 아예 뒷걸음질을 치며 배에서 달아나려 하였다.
그런 시어도어를 바라본 이순신은 손짓을 하며 말하였다.
“이미 충분한 정보는 얻었으니 돌아가도 좋다네. 혹여나 자네들의 함선에서 밝혀둔 횃불이 내 함대의 등화관제(燈火管制)를 어지럽힐지도 모르니 적당히 멀리 떨어져 있게나.”
“거……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보고를 들은 드레이크조차 기겁하며 만류하려 하였지만 이순신은 함대를 분열하여 이 시대 기준으로 절대 불가능한 기습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열흘이 지나고 모리셔스 섬 인근에 이순신의 함대가 도착하였다.
* * *
모리셔스 섬에 정박한 캐번디시와 해적들은 모닥불을 피워둔 채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서 거둔 수익만 따져도 파운드 은으로 450만 파운드, 조선 냥으로는 1,350만 냥에 달하는 거액을 챙겼으니 모두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이 게에 손가락이 잘렸는데 맛 하나는 죽여주는군! 게 좀 더 삶아 와!”
“평생 이런 섬에 머물며 살면 좋겠어. 조선 놈들은 이런 섬을 점거해 놓고 왜 도망쳤지?”
한때 한명회와 구성군이 머물며 즐겼던 모리셔스 섬의 자연은 제법 퇴색되었지만 아직까지는 풍부한 자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관원들이 황열과 말라리아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옛 관청은 해적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모기가 들끓었지만 해적들은 몸을 대충 두드려 모기를 쫓아내고 야자집게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며 술을 들이켰다.
이윽고 거하게 취한 캐번디시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금목걸이를 내밀며 말하였다.
“지금부터 이 금목걸이를 상품으로 대회를 시작하겠다! Kick the dodo!”
“캐번디시 선장님 참 대단하십니다! 그럼 제가 먼저 걷어차 보지요! Kick the dodo!”
해적들의 발길질이 도도를 걷어찰 때마다 도도는 한참을 날아가 사지를 비틀며 숨을 거뒀고 해적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며 도도를 마구 걷어찬 뒤 캐번디시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캐번디시는 하늘로 날아가는 도도를 보며 해적들에게 선언하였다.
“돌아가면 모두에게 배당금으로 은 칠십 파운드를 배당할 것이니까 마음대로 먹고 마시자! 드레이크조차도 방구석 늙은이가 되어서 날품팔이나 하고 있는데 이 늙은이나 불러볼까?”
“하지만 전성기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 아무도 겨룰 수 없다 하였는데요.”
“드레이크 따위가? 여왕전하에게 굽실거려서 성과나 좀 거둔 놈이? 내가 조금만 더 많은 배가 있었다면 수익이 더 생겼을 텐데 내 아래에서 머물러야지! 마이클 기어와 윌리엄 파커 자네들은 항구나 털고 있었지? 술이나 받게.”
“그 말이 맞는 것 같으니 한 잔씩 받겠네.”
럼주를 한 잔씩 받은 나머지 두 선장도 분위기를 즐기며 캐번디시에게 아첨하였고 캐번디시는 무굴 제국에서 사용하는 금화를 잔뜩 쥐여주면서 당시의 일을 털어놓았다.
“자네들이 가장 커다란 그 뭐더라…… 제다였나? 여하튼 거기를 터는 사이 다짜고짜 내륙으로 진격했다네. 내륙으로 진격하자마자 돈 덩어리들이 있었지! 대체 뭔 일인지 몰랐지만 수많은 인파가 한 도시를 향해 나아갔네.”
“수많은 인파라 하였나? 대체 어떠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몰려 있었나?”
“알 필요도 없어서 그냥 약탈했지. 반항하는 놈들을 죽이니 바로 항복하였는데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옷을 시작으로 가지고 있던 화폐와 장신구를 모조리 약탈했다네. 한 놈당 대충 일백 파운드는 얻어냈지.”
모든 무슬림의 성지인 메카를 방문하는 이들은 이 시대 기준으로 부호나 은퇴한 권신들이 대다수였다.
메카에 입장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하며 아직 근본주의 무슬림의 시대가 아니기에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도 어느 정도는 허용하는 시기였다.
몸에 휘감긴 금은보화만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는 시대였다.
드레이크조차 상황을 파악하고 약탈 중단 명령을 내렸겠지만 캐번디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자이기에 더욱 자랑을 늘어놓았다.
“늙은 놈은 대충 두들겨 패서 버려두고 젊은 놈들만 잡으며 계속 진격하니 거대한 도시가 보이더군. 다 털어버리려 했지만 성문을 점거하자마자 금은보화가 쌓인 창고를 발견했다네.”
“금은보화가 잔뜩 쌓인 창고라? 그놈들 제정신인가? 무슨 생각으로 금은보화를 성문에 잔뜩 쌓아둔단 말인가? 거기에 도적들이 잔뜩 몰려들면 어쩌라고?”
“내 배를 불리자는 정신이겠지. 다 털고 보니 선원들이 보물에 짓눌려 쓰러질 지경이 되었고 새로 만든 노예들까지 동원하여 배로 돌아왔다네. 추적하는 놈들을 막기 위해 불을 지르니 놈들은 불을 끄기 위해 추격을 중단하더군. 세상 살기 참 쉽지 않은가?”
메카에 입장한 순례자들이 내는 세금조차 털어버렸으니 앞으로 고난이 넘쳐나겠지만 첫 항해에서 아무 생각 없이 험난한 마젤란 해협을 돌파한 캐번디시이니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없는 두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도도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고 가장 멀리 도도를 걷어찬 선원이 손을 벌리자 캐번디시는 금목걸이를 전해주고 웃어대다 머나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바다 한복판에서는 이순신의 예상대로 횃불을 밝힌 캐러벨 여러 척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마이클 자네 부하들도 고생이 많군. 모두 데려오라고 신호를 보내게. 초승달 밤에 기습하는 놈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왜 경계를 하나?”
“혹여나 추격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자네 실력이야 알고 있지만 새벽 동이 틀 무렵 기습하면 우리도 제법 타격을 입을 걸세.”
“추격자고 뭐고 아직까지 놈들이 갈피도 못 잡는데 어쩌라고. 잘해야 솔로몬인지 뭔지 하는 껌둥이 놈들과 시비가 붙거나 잘만 하면 조선 놈들과 싸우고 있겠지. 나중엔 조선의 여송인지 뭔지를 털어볼까?”
화포를 쏘며 귀환 신호를 보냈지만 그들은 여전히 횃불을 밝힌 채 제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캐번디시가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함선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발길질을 하며 외쳤다.
“내 명령이 명령같이 들리지 않아? 저 머저리 새끼들 대체 뭔 생각으로! 어서 돌아…….”
캐러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밝혀놓은 횃불이 무언가에 가려진 듯 어두워졌다 밝아졌고 변화를 감지한 캐번디시는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아 오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희미한 초승달 빛 아래에서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항구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당장 배 타고 나가! 뭔가 접근 중이다!”
“이 초승달 밤에 기습하는 놈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닥쳐! 기습이라니까! 어떻게 기습했는지 몰라도 배의 수가 몇 척 안…….”
“적의 배가 열 척이 넘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순신의 함선을 시작으로 열다섯 척의 배가 일제히 포화를 쏟아냈다.
정확한 사격술로 부두에 정박된 배를 순차적으로 박살 내는 모습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지금 막 등화관제가 해제되었다는 점이다.
“저딴 새끼들이 어디 있어! 이 희미한 초승달의 빛에 의지해서! 심지어 횃불 하나를 목표로 삼아서 초탄을 명중시켜? 당장 전투 준비해! 배로 달려가!”
해적들이 정신없이 배로 달려드는 모습은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이순신은 캐러벨에서 포로로 잡힌 영국 해적들을 내려 보다 재차 명령을 하달하였다.
“놈들이 궁지에 몰리면 극락도 일대로 달아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을 노려 쏘지 말고 놈들의 함선 중 상대하기 난해한 거선에 계속 포격을 명중시켜라! 상대하기 쉬운 작은 배에 태워 바다 위로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니 계속 몰아쳐라!”
단숨에 제압할 수 있지만 이번 전투의 목적은 모든 해적을 가급적 빨리 죽여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니 제법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였다.
기습이 성사된 시점에서 절반은 성공하였지만 완벽한 성공을 위해서는 아직 거칠 과정이 많았다.
#작가의 말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순신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도 어마어마한 전공을 쌓고 경험이 풍부한 해적이며 야간 기습을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칼레 해전 당시 스페인의 금 수송선을 노려 야간 기습을 감행하였고 단독으로 나포에 성공하였습니다.
대신 부하들 모두 드레이크를 따라오지 못해서 망망대해를 떠돌다 칼레 해전 종료 직전에야 합류했다 하더군요.
기함끼리 싸운다면 승부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함대끼리 싸운다면 결과는 당연할 겁니다.
*시어도어 겁스는 가상인물입니다. 모 해적영화에 나온 조역 두 명의 성과 이름을 섞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