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09화
2부 27장 5화 영토 확정
장엄한 이야기를 다 듣자 거의 밤이 되어 밖이 어두워질 지경이었다.
목이 아파서 잠시 쉬고 있는데 궁금증이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스페인의 개척이 가속화된 이유이다.
분명 세스페데스가 머물러 있던 티무쿠아 부족은 세스페데스가 도착했을 1588년 무렵에는 스페인의 세력권이 아니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스페인의 영역이 급격히 늘어났으니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였다.
“하지만 궁금한 점이 있소.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착착 맞아떨어지지만 첫 일이 가장 큰 문제이니 왜 하필 서반아의 미주 개척이 가속화되었는지가 궁금하구려.”
“저도 명확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칼레 해전으로 잉글랜드에 심대한 타격을 입혀 놈들의 해적 행위가 줄어든 덕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강한 해적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열병으로 미쳐서 주님의 종을 자처할 지경이라 하더군요.”
“프랜시스 드레이크? 그 친구가 주님의 종을 자처하기는커녕…….”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진상은 다릅니까? 여하튼 카리브 해 일대와 지팡구 제도(서인도 제도)에서 날뛰던 잉글랜드 해적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으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안전히 오갈 수 있게 되었지요.”
권율의 보고에 의하면, 잉글랜드 해적들은 지금 주로 날뛰던 해역이었던 카리브 해에서 벗어나 호주와 인도양을 오가며 바르바리 해적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고 아라비아 반도를 약탈하여 호주에 노예와 각종 물자를 팔아댄다 했었다.
그 돈으로 면직물을 사들여 유럽에 팔아댄다던가. 결국 조선이 호주를 개척한 나비효과가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개척을 가속한 꼴이 되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오는지 궁금해 물어보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개척에 참가하였는지 궁금하구려.”
“오추세에만 한 해에 오천여 명이 넘는 인원이 건너오고 있습니다. 애초에 잉글랜드 해적들 때문에 한가락 하는 자들만 넘어와야 하는데 이들이 거의 다 사라진 덕분에 어중이떠중이도 넘어올 지경이지요.”
한 해에 오천 명이라 했지만 플로리다 일대에만 오천 명이고 실제로는 더욱 많으리라.
아마 미국 동해안 일대에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심지어 네덜란드까지 수많은 개척자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영토를 확충하고 있으리라.
상대적으로 안전한 땅이 되었으니 군인 출신도 아니고 농부 출신을 비롯해 다양한 직업군이 넘어온다는 소리이고 이로 인해 인구가 폭발하듯 늘어나리라.
세스페데스의 말대로 수십 년이 지나면 여기까지 스페인의 영향이 닿을 것이 분명했다.
이걸 되돌린다고 면직물 무역을 중단하면 조선의 동맹인 솔로몬 제국과의 사이가 틀어진다. 솔로몬 제국은 지금 잉글랜드 해적을 면직물로 휘두르며 자신들의 원수를 신나게 죽이고 있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니 세스페데스도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펠리페 2세 전하와 협정을 맺은 서류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원본은 아니더라도 내용을 고스란히 베낀 서류가 분명하니 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겠습니다.”
당연히 협정 서류 원본은 주상전하께서 가지고 계시지만 복사본은 나에게 있었다.
혹시나 스페인 사람들과 만날까 염려하여 원본과 흡사하게 양피지로 만든 서류를 건네주자 세스페데스는 한참을 고민하고 답하였다.
“참 애매한 협정서로군요. 아시다시피 강을 경계로 삼으면 유역이 자주 변하며 강을 우회하여 이동할 경우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양 국가의 의견이 대립할 수 있는 협정을 맺으셨으니 저도 판가름하기 애매합니다.”
“그 애매함을 원했소. 아시다시피 대다수의 국경을 험준한 산맥으로 정하는 이유가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어서가 아니요?”
“첫 협정에서는 콜로라도 산맥을 기준으로 삼았으니 이 경계가 분쟁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방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상황이니 저도 속단할 수 없을 지경이군요.”
산맥을 기준으로 영토를 정하면 산맥을 넘거나 멀리서 뻔히 보이는 거대한 산을 기준으로 국경선을 만든다.
이 경우에 산을 넘어가면 ‘실수로’ 넘어오거나 보지 못했다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 명백한 침략행위가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강의 유역을 영토로 삼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겨울철에 강을 건너 아예 말라 버리거나 실개천이라 강으로 보지도 않았다는 변명이 통한다.
당장 조선과 명나라의 경계인 북변도 대충 100리쯤 나아가면 명나라 땅이라고 인식하니까.
이럴 경우에는 양국이 확실하게 영토를 정하여 특정한 강에 둑을 쌓거나 요새를 축조하여 국경선을 확정 짓는 방식이 답인데 지금 미주에서 제대로 개척을 실시하는 사람은 나 외에는 없다.
세스페데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서류를 돌려주고는 말하였다.
“조선의 의견을 존중할 경우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가 영토이며 스페인의 의견을 존중할 경우 리오그란데 강 유역까지가 영토가 되겠군요. 결국 이런 애매한 협정을 맺은 펠리페 2세 전하를 탓할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닙니다.”
“나쁜 일이 아니라 하였소? 세스페데스 당신은 외방에서 보낸 세월이 길어도 엄연한 구주 사람이며 서반아인인데 아국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시오?”
“아닙니다. 저는 스페인도 조선도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하여 조선의 편을 들어줄 뿐입니다. 제 아래에 딸린 신도들이 없었다면 서애 대감과 진작 척을 지었을 겁니다.”
아래에 딸린 신도는 보통 신도가 아니고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으로 일만 명이 좀 넘지 않나?
왜 신도들의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세스페데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에게 조언을 하였다.
“하지만 더 나아가시면 아니 됩니다. 감히 말씀드리겠는데 미시시피 강 유역을 개발하였다가는 범람에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전답이 소실될 겁니다. 한 번 경험한 범람이지만 지독하기 짝이 없더군요.”
“예전에 보낸 탐험대가 말하기를 장강(長江)과 견줄 수 있지만 작은 강이라 하였는데 그렇게나 거대하단 말인가? 자네는 이미 장강도 보았고 한강도 보았는데 어느 정도의 강인가?”
“병인년(1580년) 무렵에 한강이 범람하여 제법 많은 피해가 있었지요. 그 당시의 한강과 대등한 것이 평상시의 미시시피 강입니다. 여기에 범람하면 물이 적어도 세 배는 불어나더군요.”
“범람한 한강의 세 배라 하였소? 그런 범람이 매번 일어난단 말이오?”
미주대하라 불리는 미시시피 강이 거대하지만 장강보다는 작다는 소리를 들어서 안심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규모로 범람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현대에도 한강이 제대로 범람하면 현대의 토목기술이 결집된 대한민국도 감당하지 못하고 수재민이 발생하는데 이 시대에는 저런 강을 치수(治水)할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리라.
최소한 소양강댐 수준의 거대 댐을 여러 개 설치하고 지류에도 최소 팔당댐에 준하는 댐 여러 개를 박아야 안심할 수 있는데 그럴 국력이 있으면 세계 정복이 몇 배는 쉬우리라.
제법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한숨을 내쉬며 세스페데스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아무리 나라 하여도 미주대하를 건너서 도시를 만들어도 감당하기 힘들 거요. 그러니 서반아의 강역이 늘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이 강과 미주대하 사이를 일종의 완충(緩衝) 지역으로 삼으면 충분하겠군. 실질적으로 아국의 강역을 여기까지로 정해두겠소.”
“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조정에도 미리 연락하여 미시시피 강과 이 강 사이의 땅을 넘겨줄 것으로 미리 정하고 스페인에서 항의를 보낼 때에 양보하시면 서로 만족할 것입니다.”
세스페데스도 현장 감각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스페인이 땅을 양도받고 미시시피 강 유역을 차지했다 해서 모든 일이 끝나지는 않는다.
한강의 몇 배나 범람하는 미시시피 강의 범람에 휩쓸리며 계속 고난을 겪으리라.
철근콘크리트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20세기까지는 조선 측에 총공세를 가할 방법이 없으니 안심이다.
세스페데스가 성호를 올리며 기도를 드렸고 그사이 막사 안으로 이회가 달려와 다시 보고를 올렸다.
“강 너머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미주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자신들의 힘 추장을 돌려달라 청하고 있습니다. 당장 쫓아내야 합니까?”
“신도들이 벌써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서애 대감께 청할 것이 있으니 저를 잠시 보내주시어 이들에게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배려해 주십시오.”
“아닐세. 내가 같이 나아가 이들의 면모를 확인할 것이니 무백(이회의 자) 자네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호위병을 줄이도록 하게.”
세스페데스와 함께 강을 건너자마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자 강 너머에 있는 벌판에 사람들이 빼곡히 도열해 있었고 이들 모두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
이회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뭉쳐 있으면서 어떠한 분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보통 사태가 아니니 이들을 엄히 다스려…….”
“엄히 다스릴 필요는 없으니 염려하지 말게. 다들 내 자식 같은 사람들이니 그저 주변의 들짐승을 막아내 주면 족할 뿐이네.”
얼마나 신실한 이들인지 허허벌판에 제단도 없이 그루터기 하나를 두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 시대의 미사는 현대와 달리 트리엔트식 장엄미사라 하여 최소 2시간이 걸리는 라틴어 미사였다.
예수회 출신인 세스페데스는 원주민의 언어로 이를 풀어서 집전하였지만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지 이 복잡한 과정을 모두 따라오며 성가를 부르기까지 하였다.
미사가 끝나자 세스페데스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였다.
“서애 대감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미주인들을 조선의 품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을 같은 사람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은 아니지요.”
“지나가는 풍문으로 듣기는 하였소. 서반아에서 미주인들의 권리를 존중하여 여러 법을 제정하였지만 실상은 노예라는 단어를 자발적인 복속자로 풀어 말할 뿐이고 실상은 노예 대우라 하였지.”
스페인의 법 가운데 인디아스 신법이라는 법률이 있다.
자신들의 식민지 개척을 도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준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규정이었는데 이 법이 제대로 적용되면 모를까 제대로 적용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결국 노예라는 단어를 ‘거주이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권리도 없고 착취의 대상인 예속민’이라는 기나긴 문장으로 풀어놓은 것이 이 법률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 법이 그나마 제대로 적용되는 장소가 있기는 했다.
조선의 영향력이 퍼지는 중미국과 접한 스페인 식민지서는 원주민들을 사람답게 대접하지만 조선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노예로 대우한다더라.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세스페데스를 바라보니 그도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저 또한 순수한 신앙을 품게 된 이들과 함께하니 많은 것이 변하였기에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다른 땅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대접 또한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모두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이겠지요.”
“맞는 말이오. 머나먼 조선으로 탈출하여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봇짐을 짊어지고 탈출할 것이니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접을 좋게 하겠지.”
“그러니 이 땅을 조선이 소유하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저는 물론이요, 제 신도들 모두가 조선을 도울 것이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성당을 지어달라는 말이구려. 사실 관찰사의 업무인 수령칠사(守令七事) 중 하나가 서원과 향교를 건립하는 학교흥(學校興)인데 이 업무에 해당되는 말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서원과 향교를 지을 것이라는 말에 세스페데스의 표정이 좀 일그러졌지만 서원이 무엇인가? 원리원칙을 따르면 옛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한 교육기관이다.
천주교식으로 따지면 일종의 수도원이라 할 수 있으며 천주교도 엄연히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가하는 종교가 되었다.
나는 강 건너의 우리 개척단이 머물러 있는 북쪽의 너른 벌판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자리에 서원을 세울 것을 주상전하에게 청할 생각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서원이긴 하지만 가운데를 서원으로 두고 서쪽에는 아국에서 건너온 불자들이 머무를 사찰을, 동쪽에는 동방에서 건너온 신부들이 머무를 성당을 지을 것이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본디 서원이라 하면 옛 성현을 모시는 장소가 아닙니까?”
“명분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입신체비를 행하는 장소가 아니겠소? 제사야 간혹 올리는 예식일 뿐이고 처음으로 세워진 백운동 서원도 지금은 제사가 오 푼(5%) 나머지가 입신체비라 하였소. 승려도 신부도 입신체비를 아는 형편이니 어찌 되겠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런 배치를 택한 거다. 오히려 지금의 유생들이라면 서원의 양쪽에 있는 사찰과 성당을 보며 입신체비를 더욱 맹렬히 할 것이다.
입신체비를 익히는 유학자들이 다른 종교를 억누르기 위해 근육을 앞세우지 행패를 부리겠는가.
사찰에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스님들도 당연히 입신체비를 한다.
더군다나 삼대운동 일천 근을 달성하는 세스페데스는 물론이요, 조선에서 머무르고 있는 신부들도 입신체비를 반강제적으로 하는 형편이다.
이런 환경이라면 유교, 불교 그리고 천주교의 세 종교가 모조리 입신체비로 뭉쳐 말 그대로 근육의 성전으로 탈바꿈하리라.
세스페데스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세 종교가 모두 입신체비 하나로 어우러질 것이니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북쪽에는 이 땅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모셔두면 수많은 이들이 새로운 서원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명칭을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만천서원(滿天書院)이라 하면 어떻겠소? 온 하늘의 믿음을 한 장소에 모았으니 이보다 합당한 이름은 없을 거요. 그리고 여기 세울 성전은 옛 양식을 본뜬 옛 베드로 성당의 도면을 사용할 것이오.”
“지금은 로마에서 사라진 옛 베드로 성당의 도면이라니 서애 대감만을 믿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애가 끝나도 이 서원의 완성을 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우선 목업(나무 모형)부터 만들어 설계를 확인하며 이를 주상전하에게 보낼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기왕이면 목업을 여러 개 만들어 교황에게도 보내야 할 것이오.”
내가 그거 하나만 세울 생각은 아니다.
서원을 세웠다고 전부인가? 혹시 모르는 스페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 하구에 삼중 성형요새 정도는 세우고 만 전체에 돈대와 망루도 세워서 침략에 대비해야지.
일만 명이나 되는 세스페데스의 신자들을 살펴보니 하나같이 체격이 우람하고 입신체비로 인해 단련되어 있었다. 이들의 노동력을 감안하면 아마 관찰사 임기 이내에 요새가 완성되리라.
#작가의 말
영토는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 점거하고 이후 스페인이 반발할 경우 시간을 질질 끌며 협상하다 현재의 휴스턴을 최전선으로 삼는 트리니티 강까지는 내어주기로 하였습니다.
미시시피 강을 넘어가면 좋겠지만 내실이 없이 영토만 확보하면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 세력과의 경쟁에서 밀려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