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08화
2부 27장 4화 오추세 탈출
순식간에 재단된 신부복으로 갈아입고 입신체비를 할 때 사용하는 튼튼한 가죽 신발로 갈아입은 세스페데스는 다시 성호를 그리며 지금까지 일어난 행적에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지난 사 년 동안 문명과 접촉하지 못한 분을 풀기라도 하듯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서애 유께서는 조선의 권신이니 여러 사항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원주민들을 인솔하여 머나먼 피난길에 나서기 전에 조선의 사절단이 유럽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간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할 이야기가 많으니 잠시 차라도 마시지 않겠소?”
어차피 할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플로리다로 건너온 세스페데스와 간발의 차이로 만나지 못하였고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려줄 의무도 있으니까.
거의 한나절 넘게 지난 육 년 동안 있었던 일을 알려주니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천주교의 포교가 허가되었다는 소식에서 웃었으며, 협정의 결과로 필리핀의 일부를 할양하고 대신 누에바 에스파냐의 영토를 얻었다는 대목에서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와 아는 사람이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물어보면 협정의 명확한 내용을 알고 있기에 속일 수 없이 펠리페 2세와의 추가 협상 내용, 콜로라도 산맥에서 동쪽으로 있는 강 유역까지 조선의 영토라 말하자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대놓고 협정을 어기셨군요. 협정이 틀림없다면 리오그란데 강(조선 명칭 심곡강) 인근의 동요현이라는 고을이 조선이 확보할 수 있는 한계선이 아닙니까?”
“하지만 사람들을 보내야 하는데 도리가 있겠는가. 사실 겨울이 되면 말라붙는 강이라 어찌 변명을 하여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이후에 건넌 강이 여덟 개가 넘기는 했다네.”
“그게 문제입니다. 저야 서애 유와 친하고 신앙의 형제가 된 조선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묵인하겠지만 조만간 이 땅에 도달할 스페인 사람들이 문제로군요. 대략 수십 년 이내에 스페인의 영토가 이 지역까지 다다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탐험대만 보내놓은 스페인이 여기까지 수십 년 이내에 도착한다고? 생각해 보니 세스페데스가 수많은 사람들과 여기까지 피난한 이유가 스페인이 퍼트린 질병 때문이라 하였다.
내 표정을 읽은 세스페데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 육 년 동안 참으로 고생이 많았지요.”
세스페데스의 장엄한 이야기를 듣자니 나도 입안이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이 머나먼 고행을 자처해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 * *
플로리다 북부에 거주 중인 티무쿠아 부족의 일원이 된 세스페데스는 이들의 생활을 하나씩 개선하며 문명을 전해주기 시작하였다.
평상시에는 자신을 핍박하던 이들이 오히려 생활을 돕는 모습에 티무쿠아 부족 사람들의 경계심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우리도 농사를 짓는데 왜 여기에 끼어들려 하십니까?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농사 방식이니 함부로 손을 대면 흉작이 들까 걱정되는군요. 왜 분변을 모아다 저렇게 썩히십니까?”
“이게 두엄이라는 물건일세. 일 년 가까이 지푸라기와 분변을 모아 썩히고 여기에 짐승의 뼈를 갈아 넣고 밭에 뿌리면 작황이 좋아지니 염려하지는 말게나.”
세스페데스는 자신이 십 년 동안 보아온 조선의 풍습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아직 선교를 시작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세스페데스를 이상하게 보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커다란 절구로 옥수수를 빻아대는데 왜 연자방아를 만들라 하는지 모르겠네. 신부님께서는 교회도 만들지 아니하시고 왜 이런 사소한 업무에 몰두하라 하시는 건가?”
“내가 알 방법이 있겠는가. 펠리페 2세 전하께서 선교활동을 도우라 하셨으니 묵묵히 일할 뿐이지. 거기는 물골을 내서 배수를 편하게 하면 될 거라 하였으니 삽이나 내어주게.”
세스페데스의 명령을 받고 티무쿠아 부족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인부들의 불만이 차츰차츰 쌓여갔다.
하지만 세스페데스를 보좌하라는 펠리페 2세의 왕명이 내려진지라 이들은 주문대로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대충 세운 목책은 튼튼한 나무 목책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어설프게 세워둔 움집은 그럭저럭 쓸 만한 나무집으로 하나씩 변화되었다.
딱히 질서가 없이 세워진 마을은 배수로가 파이고 커다란 화장실이 만들어지며 점차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변의 삼림을 벌채하여 나무를 얻었기에 그루터기만 남은 공터가 된 숲은 세스페데스를 포함한 인부들이 밭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하였다.
“소 두 마리로도 부족하군! 나도 힘을 보탤 것이니 힘을 합쳐보세!”
“아이고 신부님! 아무리 체격이 좋다지만 이러시다 몸이 상하실지도 모릅니다!”
세스페데스가 온 힘을 다하여 소 두 마리와 함께 그루터기를 잡아당기자 뿌리가 끊어지며 거대한 그루터기가 뒤엎어졌다.
세스페데스의 힘에 티무쿠아 부족의 사람들과 농부들이 감탄하는 것도 잠시, 세스페데스는 재차 명령을 내렸다.
“여기는 잘 다듬어서 밀밭을 만들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이 친구들이 옥수수와 콩을 길러 먹는다지만 부족한 점이 많으니 어서 밀밭을 만들도록 하게.”
“이 거대한 땅을 모조리 개간하여 밀밭으로 만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닌 데다 저희가 먹고도 남아 이 동네 사람들이 모조리 빵을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밀가루까지 빻아서 먹이시려 하십니까?”
“내 기준으로는 아직 부족한 점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잠자코 일을 하게나. 훗날 이들이 주님의 종으로 귀의하면 이 땅이 고스란히 스페인의 소유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기 전에 부족 자체가 멸망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세스페데스였지만 이런 걱정을 숨기고 태연하게 명분을 제시하였다.
농부들이 투덜거리며 밀밭을 만드는 모습을 본 세스페데스는 한숨을 쉬며 해안으로 향하였다.
“조선이 그토록 강성한 나라가 되었으며 백성들 모두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는데 입신체비를 퍼트릴 준비를 하니 알겠군. 입신체비에 필요한 모든 물산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필요하다니.”
세스페데스가 해안선에서 배를 기다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주장한 ‘육체적 단련을 통한 선교’를 실시하려면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았기에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다.
입신체비는 결국 여유분의 식량을 기반으로 몸을 단련하는 가르침이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이들은 입신체비를 할 방법도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단백질이 부족하였다.
티무쿠아 부족도 수렵 활동이나 어업으로도 단백질을 보충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하였다.
지속적이고 확실한 공급원을 찾기 위해서 세스페데스는 새로운 문물을 들여오기로 하였고 그 답은 가축이었다.
“신부님께서 왜 닭과 돼지를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튼실한 놈으로 골라왔습니다. 이걸 대체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씨암탉을 기르다니 이는…….”
“자고로 사람을 배불리 먹여야 신앙심이 싹트는 법이 아니겠는가.”
점점 확장되는 마을 안에는 닭장과 돼지우리가 만들어졌고 여유분의 곡식이 가축의 먹이가 되었다.
이윽고 밀밭에서 첫 밀을 수확하자 세스페데스는 이를 연자방아에 넣어 갈아내면서 호기롭게 말하였다.
“판관 삼손이 블리셋 사람에게 잡혀 고난을 겪을 적에 연자방아를 돌리는 노동을 하였다네. 그 성인의 행적을 내 몸으로 재현하는 것이니 자네들 마음 깊이 이를 새겨두게나.”
“신부님! 소가 있는데 왜 몸으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연자방아는 소가 돌리는 겁니다!”
“판관 삼손도 그러한 생각을 하며 고난을 감내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자네들도 힘이 남는다면 나와 같이 연자방아를 돌려보지 않겠는가?”
연자방아에서 갈려 나가는 밀알을 멍하니 쳐다보던 티무쿠아 부족의 젊은이들도 연자방아의 자루를 잡았고 점차 많은 곡식들이 갈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부족 전체가 먹고도 남을 통밀가루가 나오자 세스페데스는 땀범벅이 된 원주민들을 일으켜 세우며 선언하였다.
“이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성인의 행적일세. 앞으로 수많은 방법으로 자네들을 가르칠 것이니 나와 함께 몸을 단련하며 신앙심을 키우도록 하세나.”
“신앙심이 대체 뭡니까?”
“아주 좋은 것이니 몸과 마음을 같이 단련하면 스스로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네.”
원주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세스페데스는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고 생활을 하나씩 개선하며 이들을 도왔다.
주먹구구로 고기를 잡던 이들은 거대한 그물로 물고기를 한 아름씩 잡아들이게 되었으며 닭과 돼지는 요긴한 식량이 되었다.
6개월이면 완전히 자라 번식하는 닭은 계란을 얻지 않고 계속해서 씨를 불리게 하였고 2년이 지나자 서른 마리의 닭이 수백 마리가 되어 사람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다들 연한 닭고기의 맛에 반해 있지만 세스페데스는 오로지 닭가슴살의 맛만을 즐기고 있었다.
“제가 먹어보니 이 새의 다리 고기가 맛있던데 신부님은 어찌하여 퍽퍽한 가슴살만 드십니까? 자고로 훌륭한 분이 좋은 부위를 먹어야 하는 법입니다.”
“나는 닭가슴살을 가장 훌륭하게 여기니 염려하지 말게. 그나저나 고기를 많이 먹고 힘을 쓰면 근육이 더욱 많이 생겨나 몸이 튼튼해지는데 몸이 점차 튼튼해지고 있지 않은가?”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제가 농사를 짓고 수확한 옥수수를 네 번에 걸쳐 창고로 옮겼는데, 이제는 세 번이면 창고를 가득 채우고 남을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이 퍼트린 질병에 가족이 희생된 사람들마저 세스페데스만큼은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그에게 힘 추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마련해주었다.
2년이 흘러 1590년이 될 무렵, 드디어 세스페데스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가르침을 퍼트리기 시작하였다.
“나도 가르침이 깊지는 않아 입신체비의 기본 정도만 완벽히 알고 있다네. 하지만 이 기본만큼은 충실히 가르칠 수 있으니 나를 따라 입신체비의 기본을 배우게.”
티무쿠아 부족의 종교는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이 토테미즘에 가까운 신앙 체계였지만 그들에게는 무당과 모든 종교 행사를 함께 하는 독특한 관습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신앙 체계를 세스페데스는 입신체비를 가르치는 데 활용하기로 하였다.
생석회로 만든 회(灰)역기 수십 개가 공터에 쌓였고 일과를 마치고 여유가 생긴 티무쿠아 부족의 젊은이들은 입신체비의 기본인 삼대운동을 배우며 근력을 쌓아나갔다.
여기에 저절로 신앙심이 생긴 이들은 밤이 되기가 무섭게 세스페데스의 집으로 찾아왔다.
“일전에 마을 구석에 있는 거대한 선돌을 밧줄로 엮어 옮기는 일을 하셨는데 애급 땅에서 금자탑을 쌓던 사람들의 고난을 경험하여 즐겁다 하셨습니다. 금자탑이 무엇입니까?”
궁금증으로 자연스럽게 생긴 신앙심은 성경의 내용으로 이어졌고 성경의 내용을 들은 티무쿠아 부족의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교리를 깨우쳤다.
하지만 세스페데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질문 또한 들려왔다.
“예수라는 분은 모두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 스페인 사람들은 저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전쟁도 다툼도 없었겠지만 사람의 욕심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 부족 모두를 사랑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하나둘씩 세례를 받아들이고 신도로 탈바꿈한 티무쿠아 부족 사람들은 세스페데스에게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순식간에 천 명이 넘는 신자들이 생겨나자 스페인에서 건너온 지원단도 만족하였지만 비극이 찾아왔다.
“남쪽의 부족에 천연두가 퍼졌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신음하며 죽어 나가고 있어서 저희 가족만 가까스로 몸을 피했습니다!”
“서쪽의 부족에는 보름 내내 열에 시달리다 죽어 나가는 병이 퍼졌는데 기이하게도 같은 방에서 자는 사람은 걸리지 않다가 며칠 뒤에 갑자기 병에 쓰러진다 합니다!”
잉글랜드 해적이 카리브 해에서 자취를 감춘 덕분에 스페인의 개척은 가속되었다.
이 스페인 개척단으로 인해 다시 병마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천연두를 시작으로 홍역, 성홍열, 풍진, 볼거리 심지어 말라리아까지 다채로운 질병이 티무쿠아 부족을 습격하였다.
질병에 걸린 부족을 제외한 티무쿠아 부족에 속한 모든 지파와 계파가 모여 회의를 시작하였다.
개중 수십 년 전에 질병이 퍼질 때의 생존자들은 입을 모아 분통을 터트렸다.
“자네 계파의 힘 추장과 부하들이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다른 스페인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네. 스페인 놈들이 교역을 하자고 다녀간 이후에는 모조리 병이 퍼지고 있어!”
“이러다가 우리가 떼죽음을 당하게 생겼다네. 옆 마을의 상황을 보니 모든 사람들이 턱이 볼보다 더욱 크게 부풀어 올라서 고열에 시달리다 죽어 나가는 이들이 속출한다네.”
“그 정도면 다행이지! 우리 부족에는 크나큰 병은 아니지만 임산부가 걸리면 아이가 모조리 죽어서 태어나는 끔찍한 병이 돌아다닌다네! 심지어 태어난 아이도 맹인으로 태어나더군!”
티무쿠아 부족은 본래 역사에서 스페인 개척자가 전파한 질병에 시달리며 10만에 달하는 인구가 3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으며 세력이 약해진 이후에는 노예사냥의 대상이 되어 멸망한 부족이었다.
분노를 담은 추장들은 마침내 극단적인 주제를 내뱉기 시작했다.
“힘 추장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는 견딜 수 없으니 무기를 들고 일어서겠네. 이대로 질병에 시달리다 최후를 맞이하느니 스페인 놈들을 싸워서 몰아낼 것이네.”
“그러면 더욱 많은 질병이 퍼져 나갈 겁니다. 사람의 시신이 도처에 널려 있으면 나쁜 공기로 인해 질병이 더욱 많이 퍼져 나가지 않겠습니까? 설령 이긴다 해도 모두 죽을 것입니다.”
세스페데스의 말 또한 합당하였기에 추장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울분을 털어놓았다.
싸워서 이길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설령 이긴다 하여도 질병에 멸망할 테니까.
하지만 세스페데스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애급에서 탈출하여 황무지를 떠돌며 고행을 하였던 모세는 사십 년이 지나고 약속의 땅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하니 우리도 이 땅을 떠나 머나먼 서쪽으로 향합시다.”
“서쪽에는 대체 뭐가 있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받아들이고 대우하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영토가 있습니다. 아주 머나먼 길이지만 저 또한 이 고난을 함께할 것이니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추장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회의가 거세지고 며칠 밤이 지났다.
일단 세스페데스의 의견을 존중하여 부족의 영토를 북쪽으로 옮기기로 하였으며 북쪽에 있는 체로키 부족에게 미리 사람을 보내 자신들을 받아달라고 청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세스페데스에게 세례를 받은 일천여 명의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 도합 이천여 명의 사람들은 체로키의 영토를 떠나 머나먼 방랑길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세스페데스는 커다란 지게를 짊어지며 펠리페 2세가 보낸 지원단을 설득하려 하였다.
“해안을 따라 움직이면 거친 부족들과 마찰이 생길지도 모르니 체로키의 땅에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함께한다면 이 고행이 더욱 편해질 것이니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저희의 의무는 신부님이 정착하는 것을 도우라는 의무였지 방랑을 함께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의 앞길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빌 뿐이니 아쉽지만 여기서 헤어질 때가 된 것 같군요.”
정중하지만 명백한 거절 의사를 표시한 지원단을 아쉬운 눈빛으로 돌아본 세스페데스와 티무쿠아 부족 신자들은 체로키 부족의 영토로 향하였다.
전쟁과 평화의 부족이라는 별칭이 붙은 체로키 부족은 세스페데스의 설득에 땅을 내어주며 말하였다.
“당신들의 말대로 일 년 만에 농사를 지어 성공할 수 있다면 일리노이 부족이 거주하는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겠소. 실패한다면 당신들은 우리의 땅을 함부로 쓴 대가로 오 년 동안 여기서 머물러 일을 도와야 할 거요.”
세스페데스를 비롯해 더욱 서쪽으로 나아가고 싶은 이들은 생소한 땅에 적응하며 밀과 옥수수로 농사를 지어 가까스로 체로키 부족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비록 가진 기구는 부족하였지만 이들에게는 세스페데스가 가르친 입신체비의 힘이 있었고 부족한 도구는 힘으로 보충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체로키 부족의 전사들도 입신체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제가 당신들의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매번 힘을 기르는 이들이 보이고 예수라는 사람을 찬양하는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신들을 따르면 이런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저희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새로운 땅에서 신앙을 가진 이들이 이토록 많이 모습을 드러내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함께 머나먼 서쪽의 조선 땅까지 나아가 봅시다.”
이천 명의 사람들은 체로키 부족의 합류로 사천 명이 되었고, 다시 일리노이 부족과 접촉하여 칠천여 명이 되었다.
그리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하하며 농사를 짓고 나아갈 무렵, 미시시피 강의 범람에 직면하였다.
강의 범람 때문에 농경지의 4할이 쓸려나가 겨울을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한 세스페데스였지만 저 머나먼 서쪽에서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먹구름이 점차 땅 아래로 내려오자 일리노이 부족 출신들은 기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황충이 온다! 모든 것을 쏠아 먹는 황충이 온단 말이다! 어서 엎드려!”
로키산메뚜기는 일리노이 부족에게 수십 년마다 찾아오는 대재앙이었다. 보이는 모든 풀을 먹어치워 들판을 황무지로 만들어 수렵도 농사도 불가능해지게 만들어 버리는 곤충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머리 위에 앉은 메뚜기를 본 세스페데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저게 다 식량이 아닌가! 다들 옷을 벗어 던져 메뚜기를 때려잡고 손으로 잡아 가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식량을 내려주셨으니 이는 모세가 만난 메추리 떼와 흡사하군!”
“어차피 농사도 망친 형편이니 가마니도 잔뜩 남았습니다! 메뚜기를 계속 잡아 식량으로 만들지요! 거기 자네 뭘 하나! 어서 그물도 휘두르라고!”
기이하게도 평상시의 경로가 아닌 남동쪽으로 향한 메뚜기 떼는 세스페데스 일행의 행렬을 한 달 내내 덮쳐대며 주변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심지어 원주민들이 갈대로 만든 옷마저도 뜯어먹으니 다들 거지꼴이 되었지만 메뚜기를 잡아 말려서 식량을 비축하였다.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굶어 죽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메뚜기를 잡아 배를 불리는 모습을 보자 주변의 부족들도 일제히 이 기적을 찬양하며 세스페데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윽고 일만 명의 사람을 이끌게 된 세스페데스는 미시시피 강을 넘어 마침내 텍사스에 도착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천연두와 홍역 단 두 개의 질병으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냥 모든 질병이 다 치명적으로 다가왔지요.
조선 쪽에서는 나름 위생을 신경 써서 이런 참극을 막았지만 스페인은 그런 걸 신경 쓰는 나라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