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05화
2부 27장 1화 옥토(沃土)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이동을 시작하니 뒤에서 우리의 대열을 몰래 쫓아오는 이들이 생겨났다. 저녁이 되어 만나보니 코만치 전사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몇 명이 우리 대열을 따라와 합류하기를 청하였다.
“자네들이 우리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하니 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궁금하네. 앞으로 전투는 가급적 피할 것이며 그저 나아가 새로운 땅을 얻는 것이 목적일 뿐인데.”
“그리하여도 충분합니다. 구름 낀 산은 거대한 곰을 잡아 명성을 떨친 전쟁추장입니다. 그런 사람을 완력 대결로 무너뜨렸으니 힘을 키우는 비법을 알고 계시리라 믿겠습니다.”
“더군다나 대전사님의 연세가 쉰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겉보기로는 연세가 마흔이 넘지 않은 것 같지만 이렇게 젊어 보이고 힘이 강하시다니요. 그러니 저희에게 젊음을 유지하는 법과 힘을 키우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내가 젊어서부터 노안(老顔)이긴 했지만 나이를 먹고는 평범한 속도로 늙어갔다. 지금 조선에서 아무나 잡아놓고 내 나이를 물어보면 40대 후반 정도로 인식하리라. 처음에는 이들이 나를 놀리는 줄 알았지만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조선 기준으로 50은 노인 초입이기는 하지만 평균수명이 훨씬 짧고 의술이 부족한 인디언 기준으로는 늙은이나 마찬가지겠지. 이 전사들의 손을 맞잡아주며 백상선 위로 올려주고는 엄숙하게 말하였다.
“자네들은 아직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과 힘을 키우는 법을 배울 준비가 아니 되었다네. 하지만 내가 머물고 있는 금주까지 돌아간다면 수많은 이들이 이를 가르쳐 줄 것이네.”
“참으로 감사합니다! 비록 대전사의 직위는 얻을 수 없겠지만 힘을 키워 전쟁추장이 될 기회를 만들어주셨으니 모든 이들이 스승으로 모실 것입니다.”
스승으로 모신다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분쟁을 금지했는데 전쟁추장이 되어봤자 뭘 하는가? 이 친구들을 잘 가르쳐서 입신체비 추장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만들어볼까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스페인이 정한 이름대로라면 리오그란데강. 조선이 정한 이름으로는 심곡(深谷)강이라는 제법 커다란 강가에 도착한 개척단은 제법 불어난 물줄기에 직면해 도하를 준비하였다.
“하주도에서 만들었던 대로 밧줄로 내렸다 올릴 수 있는 교량을 만들게. 덮어놓고 부교를 만든다면 가라앉을지도 모르고 강을 메우면 인근 부족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네.”
“관찰사께서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시니 기지기직이라 불리는 부족들도 은혜에 감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멀리에서 우리의 대열을 확인하고 있군요.”
“아마 우리를 보고 겁에 질려있겠지. 저들에게도 코만치 전사들을 필두로 한 사절단을 보내 아국에 복속하라 전하게.”
처음에는 길을 뚫으려 하였지만 코만치 대전사의 직위를 얻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의 명성이 만천하에 퍼져 있으니 모조리 복속시키는 방법으로 선회하였지.
물론 복속한 부족들을 통솔하고 이들에게 직위를 내리며 관원을 파견해야 할 조정에서는 수많은 관료들이 피를 토하겠지만 나도 업무가 막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강을 건너니 백성들이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사막배가 처음에는 바람이 잘 들어와 더위에도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점점 습한 바람이 몰아치니 더위를 먹는 백성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하루에 이백 리(80㎞)조차 불가하고 일백 리를 나아가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황무지가 끝나고 점점 수풀이 우거지니 이걸 헤치고 나아가다 배가 상할 지경입니다.”
좀 더 나아가 텍사스까지 찍고 싶었지만 앞으로 한 달 하고 보름 뒤에는 하주도에서 이주한 백성 일만 명이 또 몰려올 예정이었다. 첫 개척에서 제반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다음 개척단을 텍사스로 보내기로 하고 여기를 첫 개척지로 삼기로 했다.
“더욱 멀리 나아가고 싶었지만 첫술에 모두 취하려 하면 훗날의 일이 번거로워지는 법이네. 조금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백성들도 피로를 호소하고 있으니 이 땅을 얻어내도록 하겠네.”
리오그란데강을 건너가고 거의 사백 리(160㎞)를 나아가자 음력 5월이자 양력 6월이 되었고 조선에서도 불볕더위라 생각할 수준의 폭염이 시작되었다. 더위야 익숙하지만 습도가 점차 높아지니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탐사한 군관들의 말로는 제법 커다란 호수가 여럿 있고 농사를 지을 때 수원(水源)으로 사용하기 좋은 지류가 어우러졌다 하였다. 이런 땅이면 농사를 지어도 적당하니 배에서 내려 미리 준비한 망원경을 설치하였다.
“그나저나 이 땅이 마음에 드는데 미주인들은 어떻게 나설지를 모르겠군. 우선 지도에 경도와 위도를 나타내야 하니 잠시 천문을 보아 측정하도록 하게.”
조선은 천문이 발달한 국가이니 지도를 만들기도 쉬웠다. 낮의 정오에 태양의 각도를 측정하여 경도(經度)를 측정하고 밤에는 자정의 시간을 기준으로 목성의 위성 형태를 관찰하여 위도(緯度)를 측정하였다.
측량을 마치고 대열을 분산시켜 백성들을 쉬게 하니 주변에 여기에 거주 중인 부족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도착을 알고 있었지만 지극히 경계하여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서로를 지켜보기만 하자 군관들도 혹시나 모를 습격에 대비하며 양 진영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이런 때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 코만치 대전사의 상징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약간의 호위 병력과 각 부족에서 견한 대표를 포함한 무리를 만들어 나아가자 내 깃털 모자를 확인한 추장이 나서서 크게 인사를 올렸다.
“대전사의 상징을 쓰셨지만 복식이 다르니 어떠한 분이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저희는 파야야(payaya)라 스스로 칭하는 사람들이며 여기서 자연의 은혜를 받아 살고 있습니다.”
“대전사의 상징을 알고 있다니 다행일세. 우리는 머나먼 서쪽에서 건너온 조선이라는 나라의 개척단이지.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새로운 땅을 개척할 목적으로 여기에 왔으니 우리와 만난 부족은 모두 복속하여 내 명령에 따르기로 하였다네.”
“서쪽의 아파치는 물론이요 코만치를 복속시켰으니 저희가 저항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디 자비를 내리시어 동쪽의 여행자처럼 저희를 몰살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스페인 놈들이 대체 뭔 짓을 저질렀는지 추장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크게 숙이며 겁을 먹었다. 심지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이는 복속으로 받아들여야겠지.
나는 고개를 숙인 추장을 일으켜 세우고 목적을 말해주었다.
“많은 것은 필요가 없다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땅을 가꾸어 농사를 짓고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 살리는 것이고 자네들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는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네. 우리가 쓸 땅을 내어준다면 자네들을 보호해 줄 것이고.”
“그러하면 야나구아나(yanaguana : 샌 안토니오 강) 유역을 드리겠습니다. 다만 저희가 사냥을 하고 땅을 가꾸는 장소를 제외한 다른 곳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거래는 성사되었네. 우리는 야나구아나라는 강 일대를 가꾸어 농사를 지을 것이며 여기서 나온 작물의 일 할을 자네들을 위하여 제공할 것이네. 자네들의 마을에 비석을 두어 이 내용을 대대손손 남길 준비를 하게나.”
리오그란데강을 넘어왔으니 스페인이 괜히 시비를 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증거를 미리 남겨둬야만 했다. 펠리페 2세건 그의 후계자건 함부로 전쟁을 벌일 수 없게 만들어야지.
파야야 사람들은 마을 주변에 있던 선돌을 옮겨와 한복판에 세웠고 여기에 강철 정으로 한문과 훈민정음으로 글귀를 새겨두고 마지막으로 한양을 기준점으로 삼은 위도와 경도까지 새겨두었다.
그런데 원주민들의 마을을 보니 이상한 물건이 있었다. 흙으로 만든 움집 처마에 옥수수가 잔뜩 매달려 있는데 얼핏 보아도 조선에서 기르던 옥수수보다 거대한 녀석이었다.
“옥수수의 씨알이 아주 굵군. 자네들은 혹여나 농사를 자주 짓는 사람들인가?”
“농사를 잘 몰라서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주변에서 얻어온 곡식이 싹이 틀 때에만 적당한 땅에 뿌리지요. 그런데 왜 이리 이상하게 보십니까?”
“주변에 적당히 뿌리는데 왜 이리 크고 듬직하단 말인가. 혹여나 품종이 다른가 하였는데 품종도 아국에서 기르는 옥수수와 큰 차이가 없군.”
옥수수는 조선에서도 기르지만 그리 많이 기르는 곡식은 아니다. 품종 개량이 덜 되어 기본적인 크기가 작은 데다 지력을 많이 소모하여 두엄을 아무리 줘도 몇 년이 지나면 크기가 반 뼘으로 줄어들고 쭉정이가 가득 차서 못 먹을 녀석이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파야야 부족이 농사를 몰라서 적당한 땅에 뿌린 옥수수는 한 뼘이 넘어갈 수준으로 거대한 데다 쭉정이도 거의 없고 모든 알이 터질 것같이 들어차 있었다. 일단 거래를 성사하였으니 악수를 나누고 땅을 분배받았다.
“지금 보이시는 서쪽의 호수부터 동쪽의 호수 사이의 땅은 다른 부족이 들어오지 않는 저희 파야야 부족의 땅입니다. 이 땅 가운데 전사들이 나서서 깃대를 꽃은 땅은 모두 드릴 것이나 주변의 숲은 피해 주십시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을 담아둘 숲이 무엇보다 절실하니 염려하지 말게나. 다만 아국의 경작지를 노리는 맹수들이나 들소는 모조리 쫓아낼 것이니 이는 염두에 두게.”
자연은 어느 정도 선에서는 보호해야 하는 법이니 이들도 큰 문제로 여기지는 않겠지.
협상을 마치고 돌아와 우거진 수풀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사막배들을 분해하라는 명령을 가장 먼저 내렸다.
“사막배의 대부분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이제 쉬게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예비용으로 가져온 축도 모조리 휘었으며 늑철이 모두 닳아서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할걸세.”
사막배는 할 일을 다 하였다. 여러 번 사용할 백상선은 버티고 있지만 나머지는 2,800㎞에 달하는 거리를 달렸으니 멀쩡한 형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역기봉으로 축을 삼고 판스프링으로 보강했다 하여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휴식을 취할 때마다 미리 준비한 나무 축으로 교체해 가며 억지로 버티기만 했으니 이제는 쉬게 할 때가 되었다.
“관찰사께서 명하신 대로 사막배를 분해하겠습니다. 이후 계획대로 사막배를 재목(材木)으로 삼아 집의 기초를 만들면 됩니까?”
“물론이라네. 또한 모든 철물을 녹이고 가공해 못과 농기구로 탈바꿈시키며 통나무집을 임시로 지어두도록 하게. 후일이 되어 개척지의 모든 물산이 소통할 때가 되면 경목조로 교체해 나가면 될 것이네.”
사막배의 돛과 예비용 돛은 천막이 되어 개척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임시 주거지가 되었고 몸체를 구성하는 철죽(과두아 대나무)들은 분해되어 이 천막의 살대가 되었다.
사막배에서 버릴 물건은 단 하나도 없게 만들었으니 일종의 재활용 정책이라 보아야겠지. 또한 사막배에 사용한 돛대는 거친 황무지와 사막을 통과하며 바짝 말라 있었으니 그 자체가 좋은 땔감으로 쓸 수 있었다.
“바로 가마를 만들어 돛대를 목탄으로 구워내게. 인근에 흑토(석탄) 광맥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당장 캐내려면 곡괭이부터 만들어야 할 것이네. 바삐 움직이도록 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대역기봉을 다시 벼려냈다 하더라도 철물의 질이 떨어지는 녀석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철물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파야야 부족과는 협상을 마쳤지만 다른 부족은 아닐세. 우리가 농사를 지으러 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하니 가급적 호미와 쟁기를 만들어 인근의 미주인에게 선물하도록 하게나.”
조선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같이 흑연을 섞은 고령토 벽돌로 만든 내화벽돌 가마와 연료로 쓰이는 구워낸 역청탄은 아직까지 필요 없었다.
그저 대역기봉과 판스프링을 적당히 녹여내면 충분하니 비교적 간단한 대장간 설비가 우선 완성되었다.
이 사이 일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이전의 평원을 정비하고 숲을 밀어내며 농지를 만들어냈다.
물론 함부로 숲을 벌목하면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내가 달라붙어 하나씩 지시를 내렸다.
“그쪽 언덕은 그대로 내버려 두게나. 그리고 북쪽의 물골이 생길 수 있는 곳은 밭으로 개간하며 뽑아낸 돌을 끼워 석축을 만들게. 아예 제대로 된 측량을 하여 계획을 하고 싶지만 당장의 일이 급하니 어쩔 수 없군.”
“관찰사님께서는 참으로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십니다. 지금 확인하여 보니 잘못하면 산사태가 날지도 모르는 곳이었는데 이를 한눈에 보고 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아는 이유는 경험 외에는 없지 않은가. 자네들 모두 일대를 개척하며 수많은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을 것이니 더욱 정진하도록 하게.”
더욱 정진하라는 말을 듣자 공무원들은 이를 꽉 깨물고 농부들의 앞에 서서 이런저런 지시를 하며 지형을 확인하였다. 이 땅이 얼마나 비옥할지는 모르지만 자고로 땅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으니까 인력의 한계까지 개발해야지.
하지만 황소의 힘을 빌려 그루터기를 뽑아낼 때마다 시커먼 흙이 솟구쳤다. 처음에는 이 땅이 이상한 물질로 오염되었나 싶었는데 농부들은 흙을 매만지더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하였다.
“관찰사님! 이 시커먼 흙을 보십시오! 제가 한 평생 흙만 매만지며 살아왔는데 이런 비옥한 땅은 처음 봅니다! 아예 두엄을 주지 않아도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날 것 같습니다!”
“두엄을 주지 않아도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자네는 하주도 출신이라 하주도에 수없이 많은 일등전(一等田) 농토를 가꾸었을 것인데 이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제가 본래 일구었던 땅을 이 땅과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간혹 이렇게 비옥한 땅이 있었지만 기껏해야 세 치(약 10㎝) 두께로 흙이 있어서 몇 년이 지나면 지력이 쇠해져 평범한 땅이 되었지요. 하지만 이 땅은…….”
“당장 이 땅을 헤집어 보게. 대체 얼마나 비옥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
지나치게 비옥한 땅이라 두엄을 줄 필요도 없이 그냥 심기만 해도 알아서 풍년이 되는 땅이라는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농부들이 곡괭이를 놀려 흙을 걷어낼 때마다 계속 시커먼 흙이 튀어나왔다.
세 치 두께의 시커먼 옥토(沃土)라면 몇 년 정도 지나서 지력이 쇠해진다 했다.
하지만 거의 세 자(1m)를 파 내려가자 평범한 흙이 보이기 시작하니 농부들도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며 흙을 얼굴에 비벼대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 땅에서 금이 나온다 하여도 금을 캐는 대신 농사를 지어도 될 땅입니다! 심지어 두엄을 주면 땅이 너무 비옥해 뿌리가 썩어버릴까 두려워질 지경입니다!”
“이런 땅이라면 한 결에 오백 두, 아니, 육백 두는 거둬들이겠군요! 덮어놓고 옥수수 농사만 지어도 제 손자까지 옥수수만 먹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결에 육백 두? 그게 말이나 되는가? 분명 아국에서 옥토라 여기는 일등전 한 결에서 오백 두를 거둬들이면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한 결에 육백 두라 하였는데 이걸 석으로 바꾸면 쌀 기준 40석이다. 더군다나 파야야 부족과 협상하여 얻어낸 거대한 농토가 대충 3만 결에 불필요한 숲을 쳐내고 개간을 완료하면 10만 결의 거대한 땅을 거느릴 수 있다.
즉 이 땅의 가치는 풍년도 아닌 평년(平年) 기준 100만 명의 식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흥분한 농부들이 곳곳을 헤집었지만 더욱 비옥한 땅임이 증명되었다.
“관찰사님! 지금까지 열 곳의 땅을 파헤쳐 속을 확인하였는데 모두 석 자 이상의 비옥한 흙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역시 관찰사님을 믿기를 잘하였습니다!”
“물을 부어보니 끝없이 물을 빨아들이며 손으로 주무르면 바로 물이 튀어나오니 홍수에도 강하고 가뭄에도 강한 땅입니다. 화전(火佃)으로 새로 경작한 땅과 같이 물을 빨아들이며 비옥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이역만리로 넘어온 보람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댐도 없고 기껏해야 저수지가 전부이니 자연재해에 대한 내구성 또한 비옥한 땅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런 좋은 땅을 방치할 이유가 없으니 즉석에서 명령을 내렸다.
“개간한 땅에 즉시 옥수수를 심으며 시범 삼아 만든 논에만 논농사를 짓도록 하게. 이런 염천(炎天)하에서 옥수수를 심으면 순식간에 자라 한 해를 버티고도 남을 식량을 소출할 수 있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옥수수를 풀어라! 한자리에 한 알을 심고 가급적 빽빽하게 심자고!”
혹시나 해서 며칠 동안 지켜보았는데 파종된 옥수수는 닷새가 지나자 싹이 트고 비옥한 토양과 지독한 더위를 양분 삼아 삽시간에 줄기가 굵어지고 이파리가 생겨났다.
지나치게 빠르게 자라 수분이 부족한 것 같았지만 갓 만들어진 밭에 물골이 들어왔다.
“옥수수야 물 받아라! 관찰사님. 이제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뿌리도 썩지 않고 줄기가 제가 길러왔던 옥수수보다 두 배는 굵으니 한 줄기에서 옥수수 세 개는 소출할 수 있을 겁니다!”
“옥수수를 솎아내지 않고 세 개를 온전히 기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크기가 조금 작아지겠지만 이 기세를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하주도에서는 옥수수를 기르는 데 팔십 일 이상이 걸리지만 여기서는 칠십 일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조만간 식량이 떨어지겠지만 옥수수로 한 해를 버티고도 남을 수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식량 공급을 위해 다음 개척단의 인원을 줄일 필요조차 없었다.
바로 금주로 돌아가 다음 개척단 일만 명을 동쪽으로 보내며 고니시를 통해 필요한 물자를 더욱 많이 보내게 하면 충분하리라.
고니시를 포함한 율도상회 사람들에게 미리 서신을 보낸 뒤 수리가 끝난 백상선에 오르며 백성들에게 선언하였다.
“넉 달 뒤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한다네! 그때까지 여기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어 인근 부족을 배불리 먹이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관찰사님의 은혜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불만을 가지고 있는 소규모 부족이 있어도 어마어마한 옥수수 선물을 받으면 그 불만조차 단숨에 사라지리라.
아직 텍사스에 닿지는 못했지만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텍사스를 개척한다!
#작가의 말
성룡이가 개척한 땅은 텍사스주의 서쪽인 현재의 샌 안토니오 북부입니다. 이 일대의 농경지는 전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비옥도를 자랑합니다.
지력 갉아먹는 작물의 정점인 목화를 19세기 초부터 현대까지 거의 200년 동안 기르고 문제가 없습니다. 그 외의 모든 작물도 지력과 기후로 세계 정점의 수확량을 거두고 있지요.
텍사스에서 가장 안 좋은 땅은 조선 기준 충청도 수준의 비옥도이며 아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는 석유와 석탄이 잠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