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504화
2부 26장 15화 대전사
배흥립에게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도망친 리판의 피난민을 찾아 사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서쪽에 있는 모든 부족을 몰아서 코만치의 영토로 밀어 넣으라는 말이었고 아마 충실히 이행하리라 여겼다.
나바호족의 안내를 받아 출발한 우리는 배흥립에게 미리 전해둔 대로 코만치 부족이 일전을 벌이기에 적당한 평원으로 향하였다.
열흘 가까이 움직이자 마침내 아파치 부족과 코만치 부족이 연합한 장소가 우리에게 포착되었다.
“관찰사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적도(敵徒)들은 남쪽으로 팔십여 리 거리의 언덕 위에 진영을 차렸는데 경계가 삼엄하고 수효가 대략 오천여 명이나 됩니다. 더군다나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서쪽 외에는 봉쇄되어 있습니다.”
“아직 싸우지도 않은 이들에게 적도라는 말은 하지 말게. 그나저나 오천여 명이 결집하여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다니 상대가 힘을 단단히 썼군. 혹여나 다른 특이사항은 없는가?”
“나바호 사람들의 말로는 상대의 진형 안의 천막의 형태를 보니 대전사라 하여 모든 군권을 통솔하는 이가 있다 합니다. 모든 전쟁추장이 힘을 합쳐 선출한 위대한 전사라 하더군요.”
“모든 전쟁추장이 힘을 합쳐 선출한 전사라. 우리의 상대로서 가장 적합한 자가 아닌가.”
아파치 부족에서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도주한 전사들과 코만치 부족이 연합하니 숫자가 제법 되었다. 더군다나 적진의 지도를 살펴보니 상대는 기본적인 싸움을 할 줄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마속처럼 보급이 끊기는 높은 산에 진영을 차리면 바보 같은 짓이지만 어느 정도 유리함을 얻을 수 있는 고지를 선점함은 당연한 일이며 상대는 우리의 동쪽에 있으니 전투에서 유리한 방향을 차지했다.
보통 전투는 어스름이 걷힐 새벽에 시작하니 서쪽에서 공격하는 부대는 항상 역광(逆光)을 받아 화살을 쏘기 힘들어진다.
이런 선택을 하려면 전쟁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서 경험을 얻었는지가 궁금하긴 했다.
“혹여나 서반아에서 코만치를 공격하여 이들이 전쟁에 능숙해졌을지도 모르지. 일단 대화를 나눌 것이니 이틀 뒤 새벽, 어스름이 걷힐 무렵 방문할 것이라 하게.”
“하지만 점점 많은 전사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차라리 지금 몰아치심이…….”
“놈들을 단숨에 붕괴시키면 모를까 혼전(混戰)이 벌어진다면 백성들에게도 피해가 미칠 것이네. 대화를 나누어 모든 일을 해결해 보고 아니 된다면 돌아갈 것이니 염려하지는 말게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성품과 태도 그리고 이들의 생활방식을 종합한 거대한 기만전술이니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 했다.
상대가 내 계략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지도 모르니 내가 철저히 연기에 나서야지.
다음 날 자정이 될 무렵 배흥립의 분견대도 이 근처에 닿았다는 소식을 전했고 배흥립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배흥립도 실책을 저질렀으니 내가 내린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하리라.
배흥립에게 명령을 내린 다음 나도 진군을 시작하였다.
“천천히 적에게 나아가며 악기를 연주하라. 가급적 크게 연주하여 굉음이 적에게 퍼져 기를 꺾게 만들도록 하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적에게 백상선의 위치를 드러내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이 거대한 배를 숨길 방법도 없으니 만천하에 드러내는 방법을 택해야지. 다른 사막배도 모두 이 리(800m) 뒤에서 천천히 대열을 따라오게 만들도록. 다만 사막배는 동이 트기 전까지 침묵하게 하여라.”
아직 어스름이 한창이라 언덕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코만치 부족의 대열 안에 있는 횃불이 사람들과 함께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기껏해야 작은 악기만 다루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음파병기가 작동하는 격이 아닌가.
이것이 문화공격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싶었지만 체통을 지켜야 하는 자리이니 점잖게 위에 앉아 있어야지.
내가 손짓을 하자 백상선이 속도를 줄여 언덕 근처까지 다가가 멈추었고 언덕 아래에 진을 치고 있던 상대는 뒤로 한참을 물러났다.
악공들이 쉴 새 없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지만 내가 미리 전달한 대로 한 손을 크게 올리니 악기의 연주가 일제히 멈추고 허공으로 신호탄이 발사되었다.
아직 어두운 하늘을 수놓은 불꽃이 선명히 보였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 백상선 아래로 내려왔다.
“우리의 앞길을 막은 전사들인가. 참으로 대범한 이들이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네.”
“관찰사님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신다! 모시도록 하라!”
조선군에서는 제식을 배우지만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이유는 명령 전달과 대형 유지를 위해서이며 이외에는 주상전하 앞에서 각종 훈련을 할 때에나 쓰인다.
하지만 이회는 이순신의 아들 아니랄까 봐 모든 병사들에게 제식훈련을 시작으로 완벽한 군인을 만들기 위한 훈련을 아끼지 않았다.
훈련의 결과물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오백여 명의 군인이 한 몸이 된 것 같이 동작을 맞추어 나를 에워쌌다.
병사들이 발소리마저 일치하며 흐트러지지 않는 대열을 유지해 나를 에워싸자 사람이 아닌 기계 같은 모습을 보며 상대의 대열이 더욱 혼란스러워져 아예 무기를 떨어트리는 자들까지 있었다.
때가 되었으니 역관 하나와 호위병 열 명과 함께 상대방에게 나아갔다.
“참으로 좋은 날이로군. 자네와 같은 전사들이 한 자리에 집결하였다니 이보다 좋은 풍경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잠깐 대화를 나누려 하니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는가.”
코만치를 필두로 한 부족 연합군에서도 우리와 똑같이 열두 명의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가장 앞의 사람은 얼굴에 새하얀 분가루를 바르고 독수리 깃털로 만든 거대한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 아마 대전사라 불리는 직책이리라.
그는 나를 노려보며 통성명을 하였다.
“느므느(코만치의 자칭)의 서른일곱 계파에서 대전사로 추대된 구름 낀 산이네. 거대한 산을 움직여 여기까지 다가온 당신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조선의 관찰사이며 주상전하의 대리자이자 남과 북의 파이우토, 소손이, 유토 그리고 나바호족의 대추장 대리를 역임하고 있는 유성룡이라고 하네.”
어스름 아래에서 밝힌 횃불로 고스란히 보이는 백상선의 모습과 질서정연한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기가 꺾이려 하였지만 나름 대전사라 추대된 사람인지 어떻게든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러니 내 목적부터 전하였다.
“나는 주상전하의 대리자로서 이 머나먼 땅의 동쪽을 개척하러 당도하였다네. 자네들이 사용하지 않는 숲을 옥토로 바꾸고 물골을 트며 농사를 지으려 하니 길을 내어주게나.”
“거짓말하지 마라! 우리는 모조리 죽더라도 마지막 한 명까지 저항할 것이다. 머나먼 동쪽에서 온 여행자들은 우리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끌고 갔으니 당신들도 그리 할 것이 아닌가. 이미 당신들이 저지른 악행이 모두 퍼져 있다!”
머나먼 동쪽에서 온 여행자면 스페인 탐험대 외에는 더 있겠는가.
아파치는 아니더라도 더욱 동쪽에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스페인에게 호되게 시달린 경험이 있어 저렇게 결집했으리라.
차라리 잘된 일이기에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너희가 선물을 주며 환대를 요구하였으면 손님으로 대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놈들은 우리의 아파치를 먼저 공격하여 내쫓아 버렸으니 동쪽에서 온 여행자와 같은 부류가 아닌가?”
“내가 듣기로는 아파치가 먼저 잘못했다 하였는데 그 이야기는 듣지 않았나 보군. 백기! 당장 나와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고변하도록!”
내 외침이 평원을 가로지르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배흥립이 다가와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본래 이러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훨씬 높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법은 이거 외에 또 있겠는가.
다른 병사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고 이들을 따라온 조선의 협력자 치리카후아 부족도 엉겁결에 이들을 따라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이미 이야기를 해두었기에 배흥립을 매몰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한심한 녀석! 내가 명령하기로는 아파치 부족을 순회하며 동맹을 만들고 간혹 저항하는 이를 제압하라 하였는데 이 꼴이 무슨 꼴인가! 입이 뚫려 있다면 변명이라도 해보아라!”
“저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음을 틈타 기습한 이들이…….”
배흥립은 내가 정해둔 대로 억지로 쩔쩔매는 시늉을 하며 내가 고함을 칠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미리 정해둔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평상시에 편하게 대했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작전이라도 자존심이 상했으리라.
하지만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역관들을 통해 이 내용이 전달되었고 구름 낀 산이라는 대전사와 전쟁추장들도 이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상대가 설득되었다 생각하여 결론을 도출하기 시작했다.
“리판이라는 족속들이 아국을 기만하여 멀쩡한 부족을 기습하게 만들었고. 리판을 모조리 쓸어버린 다음에도 잔당이 남아 있을까 염려하여 다른 부족을 압박하였다는 것이냐!”
“관찰사께서 하신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발본색원이라 하여 모든 원흉을 뿌리째 뽑아야 하는 법인데 아직 원흉이 남아 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라면 다르게 나섰을 것이다. 리판이라는 족속들을 한 명씩 내놓을 때마다 금품과 곡식을 주겠다고 하면 어느 누가 마다하겠느냐! 네 실책이 사람들을 이렇게 겁먹게 만들었으니 이는 싸우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어서 물러가서 처분을 기다리도록!”
일부러 분노를 참는 척 씩씩거리고 눈을 부라리며 배흥립을 노려보았지만 배흥립은 현장에서 좀 잘못된 판단을 하였을 뿐 어느 정도 참작할 수 있는 실책을 저질렀다.
기껏해야 조선으로 돌아가 백의종군을 몇 년 정도 한 뒤에 원래 자리를 회복하리라.
우리의 대화를 모두 들은 구름 낀 산은 분노를 어느 정도 사그라트린 눈빛을 보이다 입을 열었다.
“리판 놈들이 이웃을 팔아먹는 짓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조선의 분노는 정당하네. 하지만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들불처럼 번져나가게 한 것은 잘못이 아닌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으니 수습하는 것은 윗사람인 나의 몫이지. 지금부터 자네들도 합당하다 여길 수 있는 판결을 내릴 것이니 대열 안에 있는 리판 놈들을 앞으로 끌고 나오게.”
동료를 팔아먹은 배신자 신세가 된 리판 피난민들은 삽시간에 코만치 부족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온몸에 멍을 달고 절룩거리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는 리판 부족을 거뒀다는 죄목으로 쫓겨난 메스칼레로 지파도 분노를 억누르며 내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이제이의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완전치 못한 보상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두 부족이 서로 싸우고 싶지 않더라도 욕심을 부릴 수 있는 보상이 가장 좋은 법이 아닌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리판 피난민들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치리카후아 지파이다. 이들은 아국 병사들에게 목숨을 잃고 리판에게 복수하기 위해 또 다른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이들이 지금까지 취한 전리품을 그대로 두며 보상으로 리판의 마을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다.”
“마을까지라 하시면 대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을 정중앙의 언덕이나 샘물을 기준으로 하여 영토를 정한다. 그리고 아국에게 밀려 터전을 잃어버리고 리판에게 속은 메스칼레로 지파도 피해를 입었으니 치리카후아 지파가 거느리지 않은 리판의 땅을 소유하도록. 여기에 선물을 하나 더 주겠다.”
내가 손짓을 하자 조선에서 가져온 100마리의 소가 병사들에게 순순히 끌려와 머리를 털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이번 개척단에서도 200마리만 가져온 소인데 참 아까운 녀석이지만 방법이 있겠는가.
하지만 순한 황소의 모습을 본 원주민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들소잖아! 우리 모두 짓밟히고 찢겨 죽을 거야!”
“들소와 흡사하지만 덩치가 매우 작고 유순한 아국의 소이다. 메스칼레로 지파는 이 소를 마음대로 번성시켜 그동안 입은 손해를 벌충할 수 있을 것이니 알아서 키우도록 하여라.”
이 지방의 들소인 버펄로는 소가 아니고 맹수다.
1톤이 넘는 거대한 체격은 물론이요, 성격 또한 흉포해서 떼로 몰려들어 보이는 모든 물건을 들이받아 날려 버리고 짓밟아 죽이니 기록에 의하면 곰보다 위험하다 하였다.
반면 조선에서 가져온 황소는 성격 하나만큼은 세상 어느 소보다 순하다.
앙리 4세가 선물한 소가 유럽 기준으로 성품이 순하다 하지만 조선 기준으로는 날강도나 마찬가지라던가.
100마리의 소를 메스칼레로 지파가 받게 되니 치리카후아의 전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소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충분한 보상을 얻었으니 욕심을 참지만 사람 욕심이 한 번 생기면 어디까지 가는지는 이미 수많은 사례가 증명하였다.
아마 훗날이 되어 소의 수가 불어나면 영토를 명분 삼아 두 부족 사이의 분쟁이 시작될 것이고 그때쯤 되면 조선은 양면에서 이들을 억눌러 복속시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코만치와 기타 아파치 분파에게도 선물이 제공되었다.
“자네들 또한 이 자리에 전사들을 집결시켜 고생이 많았으니 아국에게 길을 내어준다면 키울 수 있는 작물을 내어주겠네. 훗날이 되어 관계가 더욱 개선되면 소와 말을 사들여서 자네들의 부족을 번성시키게 배려해 줄 것이네.”
“내린 판결은 마음에 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 자네처럼 작은 사람이 어디서 전사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전사도 아닌 사람이 대전사처럼 행동하니 손바닥처럼 말을 뒤집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내 몸이 작다 하였는가? 생각해 보니 자네보다는 작군.”
아마 구름 낀 산은 판결을 받아들였음에도 대전사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숙이길 거부하고 있으리라.
덩치가 작다는 말이 이해는 가는 게 이들은 수렵민족이고 인구는 적지만 단백질을 풍부히 먹을 수 있으니 정주민족보다 체격이 큰 편이었다.
대표로 나선 이들의 평균 신장은 180㎝쯤 될 것이고 사냥으로 다져진 근육과 절제하지 않은 지방으로 어중간한 입신체비사와 대등한 덩치를 자랑했다.
오히려 이런 도발을 원하고 있기에 코웃음을 치면서 상대를 역으로 도발했다.
“하지만 자네의 말에 틀린 점이 있는데. 내가 힘을 주면 자네를 손바닥처럼 뒤집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내 말이 먼저 뒤집힌단 말인가. 자네는 내 앞에서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야.”
“손바닥처럼 뒤집는다고? 내가 고깃덩이라고?”
구름 낀 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칼을 뽑으며 달려들려 하였고 나는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이 자리에서 내수린을 하고 싶지만 방법도 모르는 상대방이 주먹을 휘두르면 내가 불리하리라.
그러니 남자라면 거부할 수 없는 싸움을 제시하였다.
“팔씨름이라도 해보면 어떻겠는가? 만약 팔씨름에서 이긴다면 나는 주상전하의 대리인 이자 다섯 부족의 대추장 대리로서 결과에 승복하여 여기서 물러날 것이네.”
“팔씨름이라 하면 손등이 땅에 닿으면 패배하는 그 싸움을 말하겠지! 어서 탁자를 준비하라!”
전 세계의 인종과 문화를 불문하고 팔씨름은 힘겨루기의 한 부류로 전해지고 있었다. 비록 각 문화권마다 방식이 달랐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팔씨름은 존재하고 있었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상대의 팔을 맞잡자 구름 낀 산은 히죽거리며 나의 얄팍한 팔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팔 두께 차이가 한 배 반은 나지만 입신체비에 능숙한 내 입장에서는 상대의 근육량조차 예측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근육량을 능가하는 힘이 있다.
“시작!”
“우오오오오오옷!”
구름 낀 산이 괴성을 내며 온몸의 핏줄을 세우고 힘을 주었지만 내 팔뚝은 미동도 하지 않고 힘을 받아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떠한 입신체비를 하였는지 내 근육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팔씨름에서 중요한 근육은 전완근일세. 하지만 손목을 돌리는 회전근도 중요한 법이니 자네는 이미 패배하였다네. 볼썽사나운 꼴을 당하기 싫으면 힘을 빼고 조용히 패배하게나.”
율곡 이이에게 가르침을 받은 소룡식 입신체비의 정수는 아직도 내 몸에 깃들어 있었다. 가혹한 절육은 물론이요, 조금이라도 무거운 무게를 들기 위해 세부 근육발달을 목적으로 한 지독한 고립운동까지 모조리 했다.
내가 근육을 배신하지 않았듯이 근육 또한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구름 낀 산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잇몸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턱에 힘을 주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은 팔근육은 드디어 내 명령을 받고 본격적인 힘을 내었다.
“지금부터 힘을 주겠네!”
“끄아아아아악! 말도 안 돼! 내 손목이!”
철저하게 단련하여 보통 입신체비사를 능가하는 회전근에 힘을 주니 구름 낀 산의 훨씬 굵은 손목이 틀어지며 팔이 젖혀졌다. 하지만 나는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을 틀며 척추부터 팔뚝까지 근육을 부풀리자 구름 낀 산의 거대한 몸은 사력을 다하여 버티려 하였지만 나는 아직도 삼대운동 750근에 달하는 사람이기에 낼 수 있는 힘이 달랐다.
순식간에 패배하며 바닥에 자빠진 구름 낀 산은 팔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네놈이 속임수를 썼구나! 그런 작은 몸에 이런 힘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속임수를 쓰기는 하였는데 자네에게 쓰지는 않았다네. 이제 속임수가 풀릴 때가 되었군.”
내가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흑룡세를 취하고 힘을 주자 광배근이 불룩 솟아오르며 소룡식 입신체비의 정수인 활짝 펼쳐진 광배근을 보여주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질겁한 구름 낀 산이 뒤로 물러나는데 다른 코만치 전사가 손가락으로 평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전사님! 평원이 모두 적입니다! 적의 움직이는 집이 저렇게 많습니다!”
동이 터서 어스름이 완전히 걷히자 저 뒤에 대기시킨 480척의 사막배의 모습이 드러나고 내가 정해둔 명령대로 일만 명의 농부가 지르는 환호성이 사방을 메웠다.
자신들의 대전사가 힘겨루기에서 훨씬 작은 사람에게 패배하여 기가 꺾인 데다 사막배를 무기로 알고 있는 이들이니 사기가 바닥을 치다 못해 아예 무너지기 시작했다.
구름 낀 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머나먼 평원을 가리켰다.
“나에게는 아직 사백팔십 척의 사막배가 있으며 이를 모두 전선에 투입하면 자네들을 격멸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네. 하지만 개척을 위하여 길을 내어주기를 바랄 뿐이니 맞서 싸우지 않았다네.”
이게 진짜 속임수이지. 저기 타고 있는 사람은 대다수가 농사꾼이고 좀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모아봤자 천여 명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걸 알 길이 없는 코만치 전사들은 언덕을 포기하고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구름 낀 산을 포함한 전쟁추장들이 수습할 방법도 없었기에 그들은 망연자실한 몰골로 흩어지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구름 낀 산을 시작으로 모든 추장들이 무릎을 꿇고 나에게 복속을 표시하였다.
“싸우면 쉽게 이길 분이 목숨을 중요히 여겨 싸우지도 않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그 지혜가 자연의 은혜와 같습니다. 또한 그 작은 몸에 거대한 힘을 숨기고 계시니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가 아니겠습니까.”
“알면 되었다네. 사방으로 흩어진 전사들을 다시 결집시켜 생활을 이어가도록 하게나.”
“또 하나 알아차린 사실이 있었습니다. 저희 부족에서 선출된 대전사라는 직책 따위는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위대한 전사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대전사를 선출하지 않을 것이며 이 직위를 진정한 전사에게 양도할 것입니다.”
구름 낀 산이 나에게 깃털 모자를 선물하며 다시 무릎을 꿇었고 나는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모르겠지만 갓을 벗고 머리 위에 착용하였다. 그리고 각 전쟁추장들은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
“저희의 명성은 머나먼 동쪽까지 퍼져있습니다. 저희의 대전사로 선출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모든 이들은 조선에 고개를 숙이고 싸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진짜 큰 선물이다.
다섯 부족의 대추장 대리라 하면 애매한 지위지만 용맹한 코만치의 대전사 직위를 겸한다면 어지간한 부족들은 기에 눌려서 길을 열리라.
#작가의 말
구름 낀 산이 말한 동쪽에서 온 여행자는 작중 시점보다 50년 전인 1542년경 방문한 스페인 탐험대입니다.
처음에는 우호적이었지만 인근 부족에게 겨울을 나기 위해 담요 300장을 내놓으라 하였고 이를 거부하니 마을에 쳐들어와 폭행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합니다.
견디지 못한 부족민들이 말을 죽이며 저항하니 전쟁을 선포하였고 포로는 화형,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잡아 팔아넘겼습니다.
이후 근처에 있던 3개 부족이 똑같은 꼴을 당했으며 길 안내를 했던 사람은 금광이나 거대한 마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