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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493화 (493/573)

근육조선 493화

2부 26장 4화 원주민과 함께 춤을(1)

현대에서 건축기사 시험을 봤었고 각종 자격시험과 관련하여 지식도 제법 쌓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필요한 실무 능력과 현대의 시험이 요구하는 능력에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각 고시(考試)의 종류는 십조(十曹: 육조를 개량한 관청) 휘하의 속아문들이 담당하는 업무에 맞춰서 세부 시험까지 만들어야 하지만 여기는 변방이니 그런 분류는 힘들 거요.”

내 말을 듣자 필요한 서적들을 분류하며 기초 과정을 맞춰 나가던 송한필의 표정이 차츰 펴졌다.

그는 태연하게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하였다.

“애초에 십조라 하여도 인사권을 거머쥔 이조와 경(卿)조가 있지 않습니까. 또한 군문과 관련된 시험은 각 군현에 배속된 장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 병조의 시험도 빠질 겁니다.”

“중복되는 업무이거나 반드시 조정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는 제외하였네. 하지만 다른 이가 경험한 바로는 최소한 여섯 종류의 시험은 만들어야 일이 수월해지겠지.”

“여섯 종류라 하셨습니까? 그 분류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습니까?”

“일전에 호주를 개척하던 만취당(권율의 호)이 필요한 사람을 선발할 때 필요한 사람이 부족하다 장계를 자주 올렸으니 이를 조금 개선해 보았네.”

개척에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권율이 호주를 개척하면서 증명하였다. 일단 최소한의 군사력은 휘하 군관들이 담당하고 각종 인재 배정과 원주민의 토관 임명은 관찰사가 처리한다.

하지만 나머지 실무와 관련된 이들은 뽑을 기준도 없었고 간혹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자리에 올라와 개척이 지연되는 사례가 빗발쳤다.

하지만 그 경험은 나에게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가장 먼저 거처를 마련할 건축을 시작으로 농토를 정비할 토목, 각종 물량을 산출하고 이를 보고할 산학, 병리를 판단하고 약재를 다룰 수 있는 의학, 인근의 변고를 확인할 수 있는 탐검(探檢) 그리고 전체적인 농업 지식을 요구하는 농학(農學)이네.”

“하지만 대감께서 이를 시험으로 정하시면 지나치게 난해한 시험이 될지도 모릅니다.”

“익히 알고 있다네. 우리는 육방관속과 같이 각 개척지에 나아가 실무를 담당할 이를 선발하는 것이지 조정의 관원을 뽑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멋대로 시험 문제를 만들었다가는 난이도 조절에 실패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였다. 그러니 난이도도 조절하고 내 업무를 도울 사람들을 소집하였다.

“금주 인근의 각 군현에서 육방관속 중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이들이 도착하였습니다.”

“드디어 왔는가. 이런 좋은 시기에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참으로 반가운 일일세. 자네들은 지금부터 내가 정하는 항목에 대하여 시험 문제를 만들도록 하게.”

그래서 택한 방식이 문제은행이었다. 현장 실무자인 육방관속이 낸 문제를 응시자가 풀 수 있다면 그만큼의 경험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육방관속들은 시험 문제를 내라는 말에 난색을 보였다.

“관찰사 대감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가 새 시험의 문제를 내면 곧 부정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저희가 문제를 기억해 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알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상관없다네. 사실 자네들이 낸 문제는 여기서 가장 먼 회주(밴쿠버)에서 시험을 치를 때 사용하게 할 것이니 문제의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게.”

처음에는 손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시험 문제 백 개당 은자 한 냥을 지급하기로 하자 필사적으로 책을 확인하고 대조하며 문제를 내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당장은 문제도 많이 쌓이지 않고 조정의 허가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일 년 정도 지나면 각 시험당 문제가 천 개 이상 쌓일 것이고 허가한 즉시 실무자를 선별할 수 있는 시험을 실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문제의 검증이 필요하였다.

“결국 또 서책에 매달려야 하는군요. 서책과 비교하여 차이가 있는 문제를 걸러내는 과정도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관찰사로서 반드시 실시해야 하는 업무요. 지금 고생하면 훗날에 고시를 실시할 이들이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니 우리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구려.”

각지에서 소집된 육방관속이 제시한 문제를 수정하기를 두어 달.

마침내 신주랑에게서 각 부족의 대표를 소집하여 한 자리에 모아두겠다는 연락이 도착하였다.

* * *

부족들이 소집된 장소는 금주 남쪽으로 오십 리(20㎞) 떨어진 장소였다.

각 부족의 경계에 있는 강가이며 제법 너른 평원이니 부족민들이 머무를 천막이야 차고 넘치게 지어두었다.

각 부족에서 소집된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렸다.

마이두족이나 호파족을 비롯하여 금주와 강주 인근의 부족들. 현대의 관점으로 분류하면 미국 서해안에 밀착해 사는 사람들이었다.

“저는 야나 부족의 외교 추장이며 이쪽은 니세난 부족의 외교 추장입니다. 이 친구는 조선의 말을 잘 모르고 있어서 친한 제가 말을 받아서 전달하겠습니다.”

“저는 노미아키 부족의 외교추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선의 영향을 받고 백 년 가까이 지난 덕분에 이들의 생활방식도 많이 변하였다.

흔히 서부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과 흡사하지만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말을 타고 조선에서 수입한 것이 분명한 면직물로 된 옷을 입었다.

흰옷이 태반인 조선 사람들과 다르게 갈색이나 진한 붉은색 염료로 의복을 휘황찬란하게 염색하였으며 갈대로 만든 웃옷을 껴입어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려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있었다.

“이 친구는 말이 없군. 더군다나 나를 비롯하여 아국의 관원들을 이상하게 노려보고 있는데.”

조선과 친한 부족들은 조선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군관들과 물물교환까지 하였는데 다른 부족은 아니었다.

이들의 복식조차 나무껍질을 다듬거나 짐승의 가죽을 입었으며 간혹 면직물로 보이는 옷을 입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심지어 조선 군관들을 명백히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대체 왜 이러는지 궁금하였다.

그러자 신주랑은 자신을 따라온 마이두족 사람을 통해 이들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는 북 파이우토(Paiute) 부족에 속한 제사 추장입니다. 외교 추장이라는 개념이 없다 하여 대신 왔지요. 그리고 이 부족은 조선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신주랑은 싫어한다 말했지만 명백한 적개심을 가지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그런 이들이 파이우토 부족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손이(Shoshone)라 소개된 부족 사람들도 비슷한 형편이었다.

전체적으로 대사산맥(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선 거대 부족 4개인 북 파이우토, 소손이, 남 파이우토, 그리고 유토 부족은 조선과 매우 적대적이었다.

심지어 이 자리에 모인 이들 가운데 죄수처럼 포승줄에 묶인 이들도 있었다.

“이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왜 이 좋은 자리에 죄인을 끌고 왔느냔 말이야.”

“아파치 부족입니다. 평소에도 다른 부족을 약탈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관찰사께서 소집한 나바호 족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그들을 모조리 죽였지 뭡니까.”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나바호족 사람들을 죽이고 뻔뻔하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뒤늦게 출발하던 사람들이 나바호족 사절들의 시신을 발견하여 이들을 추적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아니하였으면 적발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현대에도 아파치라는 이름이 강력한 미국 원주민으로 전해지는데 실상은 이런 도적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마주치자 나름 항변하려 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저 친구들 대체 뭐라 변명하는 건가?”

“흔히 하는 변명입니다. 자신들은 아파치이긴 하지만 소속된 계파(系派)가 다르기에 나바호 족과 적대적이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저 나바호족이 먼저 공격하여 반격했다 하더군요.”

“듣기도 싫은 변명이니 어서 하옥하게나. 반격을 하였으면 상대를 사로잡거나 내쫓아야지 모조리 죽이고 입을 씻으려 하다 발각되지 않았는가.”

심지어 이 알력다툼은 각 원주민 사이에도 벌어지고 있었다. 당장 북 파이우토와 남 파이우토 부족은 서로 사는 땅이 달랐지만 소손이 부족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자 허리로 손이 가며 도끼를 뽑아 휘두를 기세였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강대한 적을 두고 있으니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회의를 위해 마련한 거대한 천막의 가장 구석에 앉자 다른 부족민들도 방석 위에 앉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북 파이우토에 속한 스물일곱 계파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 실지로는 남 파이우토 부족의 열일곱 계파와 한 몸이니 마흔네 계파이지요.”

“그 명목으로 양 파이우토 놈들이 우리 소손이를 못살게 굴고 있지 않은가! 이 자리가 조선의 사람을 맞이하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당장 도끼를 뽑았어!”

하지만 모든 부족이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지 서로 방석을 두고 기세 싸움을 벌이더니 서로 주먹을 틀어쥐고 폭력을 휘두르려 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회의가 시작하기도 전에 파행될까 두려워 이들을 억지로 틀어막으려 경고를 하였다.

“도끼를 뽑고 신나게 싸워보시오. 두 부족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내가 군사를 몰고 모조리 점령해 버리는 것이 이득이겠구려.”

내가 대놓고 도발하자 회의장에서도 서로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려던 두 부족의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물론 급변한 내 태도에 친조선 부족민들조차 경악하며 나를 말렸다.

“아니 됩니다! 아무리 조선이 강하다 하여도 파이우토와 소손이의 영토를 합치면 금주 일대의 스무 배에 달합니다. 조선은 개척을 공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지 정벌의 목적이 아닙니다!”

“두 부족이 전쟁을 벌이면 농사와 사냥을 할 수 없으니 약탈을 실시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개척에 나서는 이들을 약탈할 것이 분명한데 차라리 공격을 퍼부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면 될 것이네.”

최악의 수단이긴 하지만 합당한 말이었기에 치열하게 싸우던 세 부족, 아니, 저들의 주장에 따르면 두 부족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나를 적대하였다.

그리고 이 명백한 적대심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질병으로 우리를 몰살시키더니 그 피해를 극복한 지금에 와서는 아예 군사를 보내려 하십니까?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부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소손이는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질병으로 몰살시켰다 하였는가? 혹여나 삼십여 년 전에 질병이 퍼졌는가?”

“바로 보셨습니다. 삼십여 년 전쯤에 산맥 서쪽에서부터 시작된 질병이 모두에게 퍼져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온몸에 부스럼이 생겨나 끔찍하게 죽거나 열이 끓어올라 죽어 나갔지요. 심하면 마을 하나가 소실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윤원형 이 개자식이 끝까지 말썽을 피울 줄은 몰랐다. 사금을 캐내겠다고 마이두 부족을 시작으로 천연두와 홍역을 퍼트렸지만 눈이 달리지 않은 질병은 사람을 거쳐 끝없이 퍼져 나간 것이다.

더군다나 몇 년이 지나도 전염 능력을 유지하는 천연두 바이러스이니 퍼져 나갈 이유도 충분하였다.

아마 마이두 부족 사람들이 버리고 간 마을에 파이우토나 소손이의 사람이 와서 머물다 간 이후 병이 퍼져 나갔으리라.

당시 조선에서는 나름 알고 있는 부족들을 치료하고 최대한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하였으며 윤원형까지 잡아다 거열형을 하였다.

하지만 행정력이 닿지 못하는 산맥 동쪽 원주민들의 피해는 알 방법이 없었다.

“이런 조선이 개척을 목적으로 나선다 하면 얼마나 많은 질병이 퍼지겠습니까? 병으로 비참하게 죽느니 조금이라도 더 저항하다 죽겠습니다!”

“일단 조선을 대표하여 사과하겠네. 역적 윤가놈의 행적이 훗날 머나먼 동쪽으로 퍼져 나갈지 몰랐지만 정말 피해를 입은 이들이 생겨났으니 자네들을 위해 충분한 보상을 할 것이네.”

어쩐지 산맥 너머의 원주민들이 조선 사람들만 보면 죽어라 피해 다니거나 대화도 없이 습격한다 하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아마 소문이 퍼지고 퍼져 조선이 질병을 퍼트린다고 왜곡된 소문만을 입수했겠지.

윤원형의 잘못이지만 눈앞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근시안적으로 사태를 수습한 당시 조정의 책임이기도 하다.

당연히 보상 이야기가 나왔지만 상대는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보상이라 하셨습니까? 보상이 아무리 많아봐야 질병 하나에 목숨을 잃는데 무슨 보상이 필요합니까? 그리고 조선 사람들이 언제 질병을 퍼트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 질병 가운데 아국에서 두창이라 불리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을 영원히 막아내는 약을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겠네.”

내 지시에 응해서 허임이 미리 가져온 우두 고름이 담긴 나무상자를 꺼냈고 부족민들은 이 안에 명약이 들어있다는 말에 놀라서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정작 나온 물건은 고름이 굳은 희끄무레한 딱지에 불과하였다.

“이게 대체 무슨 약입니까? 아무리 보아도 살점에서 뜯겨 나온 딱지가 아닙니까.”

“영길리라는 머나먼 나라의 두창일세. 이를 영창이라 부르는데 대부분의 짐승에게 전염되고 증상 또한 두창과 흡사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네. 환후가 지극히 양호해 여기에 걸려 죽은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점이지.”

본래 역사에서는 소의 병이라 하여 욕을 먹었지만 지금은 허준의 의견으로 ‘사람과 각종 짐승에게 감염되는 영국산 천연두’라 정의된 우두 고름이었다.

허임은 이 고름에 물을 타서 막자사발에 넣어 으깨기 시작하였고 나는 팔뚝을 걷으며 말하였다.

“이 병에 걸리게 되면 닷새 정도 열이 나고 사지가 쑤시며 이후에는 몸에 부스럼이 생겨나고 열흘이 지나면 완전히 치유된다네. 또한 이 병에 걸린 이는 두창에도 걸리지 않지.”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 끔찍한 병을 막을 수 있다면 당신이 직접 시험해 보십시오!”

“의심한다니 잘되었군. 지금 내가 꺼낸 녀석이 두창을 퍼트릴 수 있는 고름이니 내 몸으로 직접 시험해 볼 것이네. 하지만 두창이 퍼지지 않으려면 대조할 사람도 필요하겠지. 여기 두창 환자에게서 채취한 고름이라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그 흉물 당장 치우십시오!”

일본에서 채취한 천연두 환자의 고름은 다행히도 잘 밀봉되어 있었다.

밀랍을 발라 꽁꽁 싸맨 병을 내려놓자 수묘법을 받거나 천연두에 걸리고 목숨을 건진 이들을 제외한 모두가 겁에 질렸지만 나는 팔뚝에 허임의 침을 맞으며 편안하게 말하였다.

“모두 영창 고름을 맞아 혹여나 두창이 퍼져 나가도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게. 내가 걸린 병이니 자네들 모두가 걸려도 큰 문제는 없을 걸세.”

의심 반 기대 반으로 함께 접종을 받았지만 기본적인 면역력 차이 덕분에 증상이 달랐다. 나야 몸이 좀 뻐근하고 열이 오르며 부스럼이 다섯 개 정도 생겼지만 부족민들은 몇 배는 격렬한 증상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열흘이 지나자 모두 완치되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네. 자네들과 나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창에 걸렸다 치유되었으니 이제 두창에도 걸리지 않을 걸세.”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 말이 옳다면 여기에 두창을 퍼트려도 아무 효과가 없을 텐데요.”

“지금 이 자리에 소집된 이들 가운데 영창에 걸리지 않은 이가 있지 않은가. 아파치 부족에서 사람을 죽이고 이 자리에 뻔뻔하게 나온 사람들이 아직 갇혀 있다네.”

아직도 범죄자 신세로 갇혀 있는 아파치 부족 범죄자들은 우두 접종을 받지도 않았고 격리되어 있으니 우두 증상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원주민들은 아파치 부족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말하였다.

“애초에 도둑놈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한 놈들이니 죽어도 쌉니다. 차라리 두창이라는 병에 걸려서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살아날 길이 열리는 셈이지요.”

“회의가 끝나면 죽여서 황야에 내버릴 생각이었는데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엄연한 법과 질서가 있었으니 사형 대상이라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아파치 부족 사람들도 내 말을 듣더니 오히려 팔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정말 이 병에 걸리면 모든 벌을 면해준다 하셨습니까? 죽느니 병에 걸리고 말지!”

“자네들이 두창에 걸리면 칠 할 이상이 목숨을 잃는데 정말 병에 걸리겠는가?”

“이보십쇼. 목이 잘리고 황야에 버려져서 들짐승의 밥이 되느니 차라리 병에 걸리고 말 겁니다. 우리 열 명 중 세 명은 목숨을 건지지 않겠습니까.”

“자네들도 동의하였으니 이제 영창에 걸린 사람에게도 두창을 접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내가 직접 해보겠네. 내가 책임을 졌으니 내 목숨을 시험대로 삼아야 하는 법일세.”

허임이야 우두가 천연두를 몰아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태연하게 말했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허임의 손으로 물에 풀려난 천연두 고름이 다시 침을 통해 나와 아파치 부족민들에게 접종되었다.

당연히 우두 접종을 받지 않은 아파치 부족민들은 순식간에 열이 오르며 자리에 누웠고 허임조차도 격렬한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밥도 먹고 입신체비도 즐기고 있었다.

“몸이 얼마나 멀쩡한지 훨훨 날아갈 것 같아서 입신체비도 능히 할 수 있다네. 자네들은 이제 두창에 걸리지 않으니 천막 안에 들어와 치료 과정을 지켜보게나.”

부족 대표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천연두에 걸린 아파치 부족민들을 치료하는 천막으로 들어왔다.

이미 온몸에 부스럼이 피어난 아파치 부족민들을 보자 그들은 눈을 돌리며 말하였다.

“이미 늦었습니다. 저렇게 부스럼이 온몸에 피어난 사람은 어떤 방법을 써도 죽더군요.”

“영창이 가진 또 하나의 효능이 이제 빛을 발할 때가 되었다네. 자네들이 포기한 두창 환자라도 영창에 겹쳐 걸리면 순식간에 치유되는 법일세.”

천연두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던 아파치 부족민들에게 우두 환자에게서 채취한 고름을 넣자 증세가 급격히 완화되었다.

열흘이 지나 모두 천연두에 걸렸다 완치되자 서로 적대하던 부족민들조차 한 몸이 되어 이 기적을 칭송하였다.

“천둥새가 이 자리에 강림하여 사악한 기운을 몰아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섭리의 신과 대모신조차도 이를 보시며 마음에 들어 하실 광경이 아닙니까!”

원주민들은 허임과 나에게 찬사를 올리며 환영하였고 나는 아예 원주민에게서 미리 채취해 둔 고름을 넣은 병을 건네주었다.

이제 모든 원주민들이 우두를 한 번씩 앓을 때가 되었다.

“이 병은 사람은 물론이요, 쥐부터 시작하여 고양이와 소, 심지어 말에게도 전파되니 부족으로 돌아가면 다른 이의 상처에 영창의 고름을 발라 퍼트리게.”

“물론입니다! 저희는 들소의 몸에 병을 퍼트려 소의 힘을 받아들여도 되겠군요!”

“우리 부족은 쿠거에 걸린 병을 받아서 쿠거처럼 날렵해질 것입니다.”

“네놈들은 쥐새끼에 걸린 병을 얻어서 쥐처럼 도둑질이나 하겠지!”

서로 욕하고 멱살을 잡기도 하였지만 영원히 천연두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원주민들은 하나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내 이름을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관계가 완화되었으면 슬슬 탐험대의 경로를 산정하고 지원을 받아낼 작업에 들어가도 충분하리라.

미리 준비해 둔 말은 물론이요, 각종 철제 제품도 창고에 가득 쌓아둔 상태다.

#작가의 말

원주민들도 사람이고 서로 전쟁도 벌이고 이간질도 벌이는 식으로 살았다 하더군요. 다만 영토가 지나치게 넓고 말이 부족해서 본격적 전쟁까지 가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아파치처럼 약탈 겸 유목생활을 하거나 파이우트 부족처럼 일방적인 전쟁 개념의 침략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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