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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485화 (485/573)

근육조선 485화

2부 25장 11화 급변

장남 유여는 호주 원주민들의 말로는 큰 스승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온갖 부족과 접촉하여 조선말을 익히고 문화를 가르치는데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유여는 간혹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내두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신구나 악기 같은 사소한 녀석이었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부피가 점점 거대해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고. 용도도 모르겠고 집에 둘 장소도 없는데 쌓여만 가는구나.”

일본 전쟁이 끝나가고 선박 동원에 여유가 생기면서 점점 거대한 물건들이 도착했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작은 카누는 물론이요, 원시적 회화가 그려진 거대한 돌까지 도착했다.

문화재 약탈은 아니고 원주민들이 선물의 의미로 제공한 물건이니 박물관이라도 만들고 잘 보관해서 훗날 돌려주면 되리라.

하지만 개중 흉물이 있었으니 유여도 용도를 몰라 나에게 서신과 함께 보낸 물건이다.

-호주의 머나먼 남방까지 아국의 소식이 닿게 되어 골기(骨器)도 석기(石器)도 아닌 나무를 깎아 사는 이들과 접촉하였습니다. 이들은 탐험대와 만나자 자신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던 물건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이들은 탐험대가 가진 철물을 보자 환호성을 질렀고, 보급 경로가 길어져 해안에 정박한 선박을 확인하자 모든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니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 물건을 받았습니다.

“신줏단지처럼 모셨다 하는데 뭐 이런 물건이 다 있어. 그냥 녹슨 쇳덩어리 아닌가?”

“진성이(유여의 아명)가 보낸 서신에 의하면 호인들이 이를 섬기고 모셨다는데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흉물이 아닙니까. 세상이 넓다지만 이런 흉물을 모신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아내의 감상은 흉물이라 하였지만 애초에 이 물건은 원주민에게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청동은커녕 돌과 뼈도 모자라 나무를 깎아 쓰는 약소부족이 이런 쇳덩어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렇다고 호주에 있던 고대 문명의 유산이라고 하기도 힘든 것이 이런 거대한 쇠가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다면 천 년을 버틸 방법이 없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오늘 초대한 손님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여해 왔는가! 자네가 얼마나 많은 공훈을 세웠는지 구주에서도 소식을 들었는데 이제야 만나다니. 자네가 구주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아는가? 들으면 놀랄 걸세!”

“내가 공훈을 세우긴 뭘 세웠다 하는가. 나는 그저 기본을 잡아놓았을 뿐이요 손과 발을 움직인 이들은 따로 있지. 더군다나 학봉(鶴峯: 김성일의 호)이 뭍에서 적을 유린할 방책을 세웠으니 내 공은 극히 한미하다네.”

이순신과 김성일 둘이 마침내 기나긴 일본 원정을 끝내고 귀국하여 잠시 짬을 내어 나를 맞이하였다. 이순신은 도원수(都元帥)를 담당하여 이이의 지시에 응해 일본 남부를 말 그대로 분해해 버렸다더라.

지난 침공으로 대부분의 함선과 해군이 소멸해 조선의 앞잡이가 된 구키 요시타카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일본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해전을 벌이지 못할 지경이라 아예 상륙전을 벌여 해안에서 100리(40㎞) 안에 있는 모든 일본군과 거점을 초토화시켰다.

김성일도 외교력을 발휘하여 우에스기 가문을 비롯한 영주 세력에 항복한 왜장 도도 다카도라가 지휘하는 일본군 포로와 조선 지원군을 뭉쳐서 북쪽을 공격했다.

이 공이 제법 큰데도 김성일은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였다.

“여해 덕에 도움을 많이 보았으니 실질적인 공훈은 모두 여해에게 있다네. 상세한 이야기는 술을 마시면서 하면 되겠고 이 기물은 대체 무엇이기에 마당에 천막을 치고 두었는지 궁금하군. 녹물이 새어 나와 마당이 더러워지는데 이런 흉물을 왜 두었는가?”

“학봉 자네도 모르겠나? 이거 자네처럼 박식한 이도 모른다면 호주에서 사방을 오가는 송강(정철)이라도 데려와야겠군. 그 친구는 세상을 헤매니 갖은 물건의 정체를 알 걸세.”

나보다 기억력은 부족해도 경험은 더 많은 김성일도 모른다면 그냥 정철에게 알아보라고 굴리면 되겠지.

하지만 이순신은 이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부지깽이를 들어 올리며 말하였다.

“이건 공령으로 만든 비상용 닻일세. 보통 파도라면 닻을 연결하는 쇠사슬이 끊어지는 일이 없지만 간혹 파도가 아주 거센 지역에서는 쇠사슬이 끊어지는 경우가 생기지.”

이게 닻이라니 말이 안 된다 답하려 하였지만 이순신이 부지깽이로 이 녹 덩어리를 두들겨 녹을 조금 벗겨냈다.

그러자 녹이 벗겨진 사이로 공령 특유의 주철(鑄鐵)이 보였다.

“비상용 닻이라고? 내가 바다에 나가 본 적은 있지만 닻이 끊길 적에는 대포를 밧줄에 엮어서 사용하던데 왜 대포를 사용하지 않고 저런 이상한 수단을 동원한단 말인가.”

“이 기물이 발견된 곳이 호주라 하였는데 짚이는 것이 있다네. 예전 창해군 한명회가 호주를 탐사할 적에 휘하의 항해사가 작성한 일지를 구한 적이 있었지. 파도가 너무 거세서 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려고 모든 대포를 집어 던졌다 하더군.”

그럼 말이 된다. 대포를 모두 집어 던지고 호주 남부의 험한 바다를 나아가다 닻이 끊어졌으면 이 대신 잇몸이라고 대역기봉과 공령으로 임시 닻을 만들어 사용했으리라.

하지만 한명회 휘하 항해사의 기록을 어떻게 찾았지?

“뭐? 내가 한명회의 대양유람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기록은 없었다네. 자네는 대체 어떻게 그런 희귀한 기록을 찾아보았단 말인가?”

“내가 만에 하나라도 거센 풍랑을 만날 적에 살아나갈 방책을 찾으려고 수많은 항해일지를 탐독하여 많은 지식을 배웠다네. 덕분에 이런 기물의 정체도 알아낼 수 있어서 자네에게 도움을 주었군.”

순간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서적이 떠올랐다. 오지에 있는 원주민들이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접촉하면서 문명의 이기를 이해하지 못하여 신의 선물로 인식했다 하였지.

백 년이 지났지만 구전을 통해 당시의 기록을 대대로 물려왔다가 마침내 기적이 재현되어 기뻐했으리라.

어찌 보면 호주 남부 원주민들은 조선에 단숨에 복속할 테니 한명회의 희생이 백 년 뒤에 이득을 불러왔다 보면 되겠지.

술자리가 시작되었지만 간소한 안주에 탁주나 마시는 조촐한 자리였다.

서로 술을 걸치자 김성일은 내가 가장 기다리고 있던 전쟁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제 모든 전후처리가 끝났다네. 왜변에 가담한 이들은 물론이요 아국을 배반한 대내씨(오우치)와 이십여 명가량의 왜국 영주들과 주동자를 사로잡았지. 여기에는 왜추(倭酋)의 아들인 족리의심(아시카가 기진)도 끼어 있다네.”

결국은 모든 목표를 달성했으니 다행이다. 전쟁이 질질 끌리면 만력제의 황은도 모두 사라질 것이요, 조선은 전비(戰費)를 질질 흘려대며 재정난으로 신음했으리라.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면 새 지도자를 조선의 입맛에 맞게 옹립해야 하는 법이다. 비록 일본의 인구가 많아 집어삼키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의 이득을 택해야 하니까.

김성일이 사로잡은 왜장들의 면면모를 모두 이야기한 뒤 질문을 시작하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내가 알기로 전쟁을 일으키라 허락했던 전 대군인 족리의소(아시카가 요시야키)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하였는데 후계자의 처우는 어떻게 하였는가.”

“후계자인 족리의심을 어르고 달래 막부를 폐하기로 하였으니 명국 황상께 나아가 죄를 고변하고 온건히 새 막부에 양위하는 방식을 택하였다네. 애초에 약관(20세 무렵)의 젊은이가 전쟁에 관여할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만력제에게 인증을 받는다면 충분하다 못해 성과 초과달성이다. 일본이 동아시아 정치역학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형태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빠져나올 구석을 두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도 정치관도 가지지 않은 섬나라 놈들이 아예 자신들의 막부를 폐하는 과정과 후계자의 책봉과정까지 명나라에 인증을 받게 생겼으니 앞으로 더 이상은 날뛰지 못하리라.

그런데 새 막부는 누가 세울지 궁금하였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럼 다음 대군의 자리에 오를 사람은 누구인가? 아국의 영향을 받은 상삼씨(우에스기 가문)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자인가?”

“상삼씨는 아니 된다네. 애초에 일백 년 이상 아국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으니 대군의 자리에 오르면 다른 이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더군.”

아무리 조선과의 전쟁에 패배했다 하더라도 조선 끄나풀인 우에스기 가문이 막부를 개창하고 쇼군 자리에 오른다면 변란이 속출하리라.

하지만 김성일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하였다.

“자네 지금 누가 왜국의 대군이 되었는지 궁금해하는군. 여해와 서애 둘 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니 여해 자네가 직접 말해보게나. 이게 다 만도(滿都) 덕분이 아닌가.”

만도면 고란 그 무식한 녀석에게 지어준 별호인데 그게 왜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이순신은 머나먼 동쪽을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왜국의 다음 대군자리는 이립(30세)에도 미치지 못한 이달정종(伊達政宗: 다테 마사무네)이 차지하게 되었다네. 그 과정이 참으로 기괴하지만 어떻게든 이루어지더군.”

“과정이 기괴하다 하였는가? 왜국에 아예 목줄을 채울 수 있었고 무재(武才)가 한미한 허수아비를 왜국 대군으로 옹립할 수 있었으니 아국에 얼마나 큰 번영이 생기겠는가?”

“이달정종이라? 그 친구는 들어본 바가 있기는 한데 그냥 머저리라 하였는데?”

예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소문을 들었었다. 머저리에 사람 되다 만 놈이라고 다테 마사무네라는 새 가주가 등극했는데 어린 나이인 데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어서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고 가문의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는 촌극을 벌인다 하였다.

내가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런 머저리보다는 조선의 끄나풀인 우에스기 막부가 세워지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성일은 내 표정을 읽더니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고란 그 친구가 상삼씨와 연계하여 왜국을 뒤흔들려 할 적에 좋은 제안을 하였네. 능력도 없는 녀석을 띄워주고 실세를 상삼씨가 담당하면 좋을 거라 하더군. 공격을 당하는 왜인들이 이달정종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지 않은가.”

“좋은 생각이긴 하군. 하지만 아무런 치적도 능력도 없는 녀석이 결국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말인데 어떻게 감당했는가? 혹여나 아국의 정병인 오위를 빌려주었는가?”

“아비인 이달휘종(다테 테루무네)의 장기가 기병이라 하여 북인 기병을 이만 명 정도 고용하여 알아서 싸우게 하였지. 그리고 인건비는 모두 이달정종이 지불하기로 하였네.”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다 가까스로 갈피를 잡았다. 이만 명의 북인 기병이면 주상전하도 함부로 못 굴리는 병력이다. 이번 왜변에서 급료를 지불하다 만력제의 성은 덕분에 재정 고갈을 막을 수준이었으니까.

연간 고용비만 따져도 1인당 은자 20냥이요, 여기에 출장비가 붙고 기본적으로 말을 5마리는 끌고 다니는 이들이니 말 먹이 값만 따져도 1인당 은자 20냥이다. 추가로 달라붙는 보조병력을 계산하면 연간 급료만 100만 냥에 달한다.

하지만 김성일은 쐐기를 박아버렸다.

“전쟁이야 일 년이 조금 넘게 걸렸지만 북인들의 고용 기간은 최소 오 년으로 정했네. 여기에 지난 변란의 배상금과 명국에 사죄의 의미로 올려야 하는 조공을 합치면 도합 일천만 냥에 달한다네. 이달정종은 이십 년 이내에 갚는다 하였지만 이걸 감당할 수 있겠는가?”

듣기만 해도 숨통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이순신이야 가만히 탁주를 들이켜며 코웃음을 치지만 지금 조선조차 20년 동안 은자 1,000만 냥을 갚으라 하면 변상 대신 전쟁을 생각할 수준이다.

일본의 경제규모는 조선의 절반 이하이니 실질적으로 두 배 이상이다. 그렇다고 전쟁을 벌이면 우에스기 가문이 전쟁에 미쳤다는 명분으로 다테 마사무네의 목을 치니 묵묵히 갚아야 하리라.

하지만 이순신은 끔찍한 말을 무덤덤하게 하였다.

“학봉 자네는 주상전하께서 왜국 대군을 압박하여 맺은 협정은 생각하지도 않는군. 대내씨가 배신한 것을 지목하자 석견은광(石見: 이와미)이 아국의 것이 되지 않았는가.”

“석견은광이라 하면 아국의 강역이 된 좌도도(사도가시마)보다 몇 배는 많은 은이 소출되는 곳이 아닌가! 그러하면 채무는 어떻게 갚으라는 말인가.”

“나는 복잡한 정치는 잘 모른다네. 쌀이든 구리든 금이든 뭐든지 팔아치울 생각이라도 하겠지. 자고로 쥐어짜 내면 나올 구석이 있다 하였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군.”

내가 다테 마사무네라면 다 때려치우고 어디 한적한 섬에 틀어박혀 허송세월이나 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다.

돈 나올 구석을 빼앗긴 채로 살인적인 채무를 짊어진 상황인데 이걸 변상하지 못하면 목숨이 달아날 상황이다.

김성일의 웃음과 함께 다시 잔이 오갔다. 나도 유럽에 다녀오면서 이들이 조선을 어떻게 보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가장 오류가 많은 인물이 여기 있는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하였다.

“여해 자네가 구주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아는가? 자네의 무공(武功)을 담은 기록을 확인한 구주 사람들은 자네가 두 명의 장수인 줄 알고 있다네. 자네의 호를 따서 이여해라는 장수가 있고 자네의 명(名)을 따서 이순신이라는 장수가 있다 기록하더군.”

“그것참 황당한 일이로군. 조만간 전훈을 바탕으로 한 수군의 개편이 완전히 끝나면 머나먼 원양으로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 줄 것이네.”

“혹여나 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는가? 구주의 사람들이 소문을 이상하게 듣는다 하였는데 나는 아예 명과 자와 호를 따로따로 사용해 세 명이라 부를지 궁금하다네.”

김성일의 실없는 소리와 함께 잔이 오갔다.

앞으로 휴가가 석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제 연금제도나 좀 정리하고 미국 개척을 시작해야 하리라.

* * *

나도 휴가 기간 동안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내의 화가 풀리자마자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경험한 기록을 저서로 정리해 놓았으며 이 경험 가운데 상당수는 의술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 라틴어로 정리된 로마제국 시절의 의료 기술이었는데 조선에도 적용할 것이 제법 많았다.

이를 면담할 수 있는 이는 허준이니 그의 자택에서 잠시 토의를 하였다.

“서애대감께서는 의술을 익히지는 못하여도 필요한 지식은 모두 가져오시는 분이시니 참으로 마음이 평안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역의 승려들이 가져온 학질 치료제의 효력을 확인하던 찰나였지요.”

“어떻소? 효과가 있었소? 혹여나 부작용이 심하다면 아니 되는데.”

“염려하지 마십시오. 친촌이라 불리는 나무껍질을 학질을 앓는 이에게 처방하자 열 명 중 아홉 명이 완치되었습니다. 비록 독성이 많은 약이지만 학질보다는 덜 위험하더군요.”

생각이 맞을까 틀릴까 많은 고민을 하였는데 단번에 학질 치료제를 찾아내다니 운이 따라주지 않는가.

이후 허준과 함께 의술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궁궐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내의원 도제조께 불민한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방금 전 호주에서 전해온 서신을 받으셨는데 호주 일대에 두창이 전파되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두창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묵직한 납덩어리가 뱃속에 박힌 것 같았다. 내 장남인 진성이는 천연두에 걸린 적도 없고 천연두 예방을 위해 인두법으로 약한 천연두를 앓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당황한 사이 허준은 의복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가며 말하였다.

“이 소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게. 그리고 서애 대감께서도 어서 궐로 향하시지요. 휴가고 뭐고 지금 서애대감의 자제가 호주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휴가 기간이 석 달가량 남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장남이 호주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지 호주에 자식이나 가까운 친척을 보낸 고관들이 줄지어 궁궐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송응기라는 관원이었던가. 그는 수염을 파들파들 떨며 인사를 올렸는데 초조함이 엿보였다. 아마 차남인가 장남을 호주에 보내놓은 상황일 거다.

“서애 대감께서도 입궐하시는군요. 제 차남도 호주에 머물러 있는데…….”

“입은 열지 말아주게나. 여기 모인 사람들이 한 명씩 입을 열었다간 도성 전체에서 소란이 벌어질 거라네. 그리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대전 안에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긴급히 소집된 관료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귀엣말을 하였다.

이윽고 대전에 나온 주상전하께서는 서신을 펼치더니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호주에 두창이 창궐하였는데 육로를 타고 들불처럼 번져 지금은 두창에 신음하는 이를 세는 것조차 불가할 지경이라 하더구나. 이미 아국에서 옮긴 두창에 미주인들이 신음하였던 전적이 있는데 이 일이 되풀이될 것 같아 심히 염려스럽다.”

호주 원주민들은 당연히 천연두 내성이 없으리라. 아마 고열을 앓다 픽픽 쓰러져 온몸에 끔찍한 고름집이 생겨나며 하나둘씩 죽어 나가며 혼란이 질병과 함께 퍼지겠지.

주상전하가 차근차근 장계를 읽을 때마다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지경이었다.

“관찰사 권율의 보고에 따르면 지난 삼월 두창에 걸린 이가 백팔십칠 명이라 하였으며 태반이 북원에서 귀부한 탐험대 소속이라 하더구나. 이 가운데 한 명이 사망하였다고?”

“전하, 한 명이 생존하고 백팔십육 명이 사망한 것이 분명하옵니다. 북원 사람들은 물론이고 북인들도 두창이 걸리면 치료를 받아도 오 할 이상이 목숨을 잃는 형국이옵니다.”

“하지만 이 장계에는 세 번이나 강조된 사실이다. 한 번이라면 실수라 하지만 관찰사인 권율이 두창이 처음 퍼진 마을에 나아가 확인한 사실이라 하더구나.”

조선에서 천연두에 187명이 감염되면 관을 40개는 준비해야 하는데 단 한 명이 죽었다는 말에 모든 관원들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주상전하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장계를 세 번이나 훑어보고 확인해 보더니 허준에게 장계를 넘기며 말하였다.

“질병은 어의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이 장계에 있는 증상이 분명 두창이 맞는가? 혹여나 권율이 장계를 잘못 보내 다른 질병을 두창이라 말한 것이 아닌가?”

“오한과 발열, 그리고 사지의 통증은 물론이거니와 열이 오른 뒤 몸에 부스럼이 돋으며 고름이 차오르는 증상이 일치하오니 두창이 맞사옵니다. 하오나 이렇게도 해가 없으며 쉽사리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옵니다.”

“두창과 지극히 유사하면서 해가 없는 질병이라 하였는가. 그러하면 한 명은 왜 명을 다하였는가.”

“딱지가 앉고 열이 내려가자 의원이 만류함에도 음주를 일삼다 화농이 도졌다 하옵니다.”

대소신료들의 긴장은 물론이고 주상전하와 허준의 긴장마저도 풀리며 안도의 한숨 소리가 대전을 메웠다. 심지어 청심환을 괜히 먹었다고 자그마하게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서 다른 관원의 소매에 들어가던 청심환을 낚아채 삼켜 버렸다.

천연두와 지극히 유사하면서 치명적이지 않은 질병은 딱 하나밖에 없다.

우두다! 우두가 갑자기 호주에 나타났다!

#작가의 말

드디어 영국병 우두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성룡이 인생 최대의 사기극도 시작될 예정이지요.

일본 관련 내용은 다테 마사무네를 집중 조명하면서 한 화에 축약해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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