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79화
2부 25장 5화 나라의 곳간을 채우자(3)
장인들은 갑자기 시대를 초월한 개념이 튀어나오자 이해를 하지 못하고 멀뚱히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일단 생각보다는 행동이니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먼저 움직였다.
“일단 틀에 넣어 굳히는데 너무 오래 걸릴 테니 다른 방식으로 습기를 제거해야겠군. 섣불리 가열했다가는 수분이 끓어올라서 구멍이 송송 뚫리고 반죽이 밀려 나오겠지.”
그렇다고 수분을 틀에 넣은 채로 증발시키자니 너무 오래 걸릴 거고. 반대로 반죽의 물기만 흡수시켜 보면 어떨까? 여기는 아직 굽지 않은 자기도 초벌구이한 자기도 넘쳐나는 곳이다.
초벌구이가 완료되어 수분을 잘 흡수할 수 있는 백자 안에 반죽을 부어 넣으니 내 예상대로 어느 정도 수분이 빠져나가며 반죽이 순식간에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떼어내려 하니 손가락 힘에 형태가 뭉그러졌다.
“이거 참 곤란한 녀석일세. 손으로 살짝 움켜쥐려 하여도 대번에 일그러지니 대체 형태를 어떻게 잡은 거요?”
“볕에 내놓아 이것보다 조금 더 굳게 만든 다음에 형태를 잡아나갔지요. 대감께서 말씀하신 대로 형태를 잡기가 여간 까다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수분을 잘 흡수할 수 있는 초벌구이가 끝난 백자지만 반죽의 수분을 모조리 빨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일단 장인들은 내가 뭘 하려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고 동의하기 시작했다.
“대감께서 뜻하신 바를 머리가 아둔하여 이제야 깨우쳤습니다. 성형(成形) 과정이 힘든 반죽이니 아예 틀에 넣어 굳혀버려 성형 작업을 완료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러하면 저희 모두의 머리를 맞대어 온전한 틀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해하여 주니 참으로 고맙소. 일단 초벌구이가 끝난 백자로는 물기를 온전히 빨아들일 수 없으니 더욱 물기를 잘 빨아들이는 재료를 만들어 보면 좋겠구려.”
다시 열흘 가까이 이놈의 본차이나 반죽을 굳히는 틀을 만들며 씨름하였다. 나도 건축과를 다녀봤으니 건축 모형은 수도 없이 만들었고 손재주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니라 어느 정도 성과는 낼 수 있었다.
“일단 내가 만든 틀은 모래를 굳혀 만든 녀석이오. 입신체비장에서 늘 쓰이는 공령(플레이트)을 이런 틀에 넣고 주물을 떠서 만들고 있지 않겠소.”
“저희는 그냥 옹기를 만드는 점토를 두껍게 구워내어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틀을 사용하니 소뼈를 섞은 반죽을 다루는 법 또한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요.”
“소뼈를 섞은 반죽을 다루는 법이라? 혹여나 성형 작업을 진척시킬 방안을 모색한 거요?”
“설명을 하기보다는 눈으로 보여드리는 편이 빠를 것입니다.”
장인들이 가져온 틀은 그저 구멍 하나만 깊게 파인 형상이었다. 이걸로 어떻게 반죽의 형태를 잡나 싶었는데 장인들은 구멍 가득 반죽을 채우고 다시 흘려보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무슨 행동인지 몰랐는데 틀 표면에 수분이 빠져나간 반죽이 달라붙으며 차츰차츰 두께가 커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반죽이 두꺼워지자 더 이상 반죽을 채우지 않더니 틀을 이리저리 흔들며 반죽을 표면에 달라붙게 만들어 두께를 계속 키워나갔다.
틀을 분해하여 반으로 나누자 아직 표면이 완전히 굳지 않아 손가락 자국이 남는 정도로 연약한 반죽이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물레에서 조금만 다듬을 수 있는 강도니 어느 정도 실용성이 있으리라.
“표면이 아주 깔끔하게 나오니 내가 만든 모래 틀과 비교할 수 없는 물건이오. 아마 내가 만든 틀은 겉에 모래가 달라붙어 나오니 추가 가공이 필요하겠군.”
“하지만 다 좋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하나는 완성했으니 다음 녀석을 만들어 보지요.”
하지만 다음 작업을 진행하니 작업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거의 세 배에 달하는 시간을 소모하며 팔을 돌리는 장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나에게 설명하였다.
“물을 잘 빨아들이는 재질이라 하여도 한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반죽을 삽시간에 굳히지만 두 번째는 거의 두 각(30분)을 굴려야 하고 세 번째부터는 반죽을 만들 수 없지요.”
“그렇게 되면 틀에 스민 물기를 날려 보내기 전까지는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오. 아예 틀에 스민 물기를 열을 가해 날려버리면 어떻겠소?”
“틀이 물을 머금고 다시 열을 받아 물이 날아가길 반복하면 쉽사리 깨어지더군요. 이래저래 고달픈 녀석이지만 머리를 굴리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수가 나겠지요.”
유약을 바르지 않은 옹기는 현대에도 건축 내장재로 쓰이는 테라코타(terracotta) 타일과 흡사한 녀석이다. 현대 기술이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전근대의 기술력으로는 망가지기 쉬운 연약한 물건이니까 함부로 열을 가하면 단숨에 깨어지리라.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내가 만들려 하였던 본차이나가 장인들의 마음에 불을 붙인 것이 분명하였다. 장인들은 틀에서 굳혀져 나온 반죽을 매만지며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일단 소뼈를 섞은 백자는 일을 쉴 때에 매만져 보겠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거듭하면 언젠가 해주에서 처음으로 소뼈를 섞은 백자를 만들 수 있겠지요.”
결국 당장에는 못 만들지만 언젠가는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제 정해진 여행 기간도 보름밖에 남지 않아서 더 이상 일을 진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임대한 저택으로 돌아오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본차이나의 계기만 만든 것이 전부인가. 하긴 첫 술에 배부른 것을 바랄 것도 아니고 장인들이 계속 이 계기를 끌고 나가기를 빌 뿐이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예상한 저택 안에는 하인들만 잡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순간 다른 가족들을 보름 가까이 백정촌에 머무르게 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아내의 분노한 표정을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당장 말을 준비하라! 당장 안사람이 있는 백정촌으로…….”
“그럴 필요 없다네. 자네는 언제나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일을 빼먹게 마련이 아닌가.”
어느 새 가족들이 돌아왔는데 함께 온 사람은 누구도 아닌 내 친구 임차손이었다. 오위 소속 무장으로 부임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 왜 있나 생각했는데 지금 조정에 휴가는 엄연히 존재한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자 임차손도 손을 흔들며 나를 환영하였다.
“이거 참 반가운 일일세. 서애 자네가 해주에 휴가를 나왔다 하였는데 처음에는 믿지 않고 있었다네. 자네 손에서 붓이 떨어지는 꼴을 보다니, 세상 참 오래 살아봐야 하는 법일세.”
“승우(임차손의 자) 자네도 별말을 다 하는군. 자고로 사람이 쉴 때는 쉬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안사람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어떻게 만나기는. 내가 아무리 의흥위에 속했다 하여도 엄연히 선친(先親)께서 해주 일대에서 기거하시지 아니하였나. 선친의 묘소는 물론 우애가 돈독하였던 서림 어르신의 묘소에 인사를 올리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네.”
아내는 가장 큰 백정촌에서 체험학습을 하기로 하였고 일대에서 가장 큰 백정촌이면 당연히 임꺽정을 비롯한 백정들의 우상이 머물렀던 마을이리라. 우연이 아니고 필연에 가까운 일이라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집안으로 안내하였다.
“내가 도성에서는 번잡한 일은 싫어하여 집을 작게 사용하였지만 휴가를 나오니 아니더군. 쉴 곳도 많고 마구간도 널찍하니 자네의 말을 모조리 들여올 수 있다네.”
“이거 참 고마운 일이로군. 자네가 평상시 검약하고 절제하며 업무에 매진하니 가끔 이렇게 커다란 저택에 머물며 마음을 풀어야 하지 않겠나.”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손님이 오셨으니 제가 다과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내가 사뿐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와서 나에게 뭔가 덩어리를 건넸다.
처음에는 단이가 만든 물건이 뭔지 알아볼 수 없었는데 이건 갓 만든 치즈가 아닌가. 그리고 장녀인 국(椈)이는 더욱 커다란 치즈를 건네주었다.
“승우 어르신께서 직접 유락(乳酪: 치즈)을 만드는 과정을 알려주셨기에 저 또한 열심히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누님께서 만든 유락은 엄친께서 다녀오신 라마국의 유락입니다.”
“단이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시집을 갈 준비를 하느라 각종 음식을 만드는 법을 익혔지만 이 유락은 만들기가 너무나 험난하여 기진하기를 반복하였지요.”
“차…… 참으로 거대한 유락이로구나.”
국이가 내민 물건은 이미 로마에서 먹어봐서 알고 있다. 현대에서 맛본 기억이 있어서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흔히 파마산 치즈라 불리는 거대한 경성치즈이고 이탈리아 일대에서는 갓 만들어진 치즈 제조법이라고 호평을 받는 녀석이다.
아마 제조법은 형님이 지난 두 달 동안 유럽에서의 경험을 되살리고 요리 수첩을 보고 연구하며 재현했으리라.
잘만 하면 조선에서 정통 유럽식 치즈를 맛볼 수 있는 기회라 여겼지만 이 치즈는 서른 근(19.2㎏)에 달하는 거대한 녀석이다.
그런 거대한 덩어리를 쉽사리 들어서 보여주는 장녀 국이를 보자 결혼할 사람의 훗날이 두려워질 지경이다. 하지만 국이는 다소곳하게 치즈를 내려놓고 인사를 올렸다.
“백부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면 이 유락은 최소 일 년 이상을 숙성하여야 올바른 맛이 올라온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유락을 올바로 보관할 장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느냐. 이 유락을 올바르게 숙성하여 네가 혼사를 치를 적에 요리를 만들게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잘만 하면 신혼 풍속이 거대한 치즈를 만들어 잔치에 쓰는 방식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지난 보름 동안 백정촌에서 머무른 이야기를 듣자 내 얼굴도 차츰 풀어지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불란서에서 들여온 소는 젖이 하염없이 나와 아예 젖을 짜는 사람을 따로 붙여주어야 할 정도로 소출이 탁월하였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이 소를 요물이라 여기기에 이르더군요.”
“아무렴, 그 소는 엄밀히 따지면 영길리에서 가져온 소를 불란서에서 제공한 것이다. 그나저나 배 위에서도 그 소의 우유를 얻어 마시던 기억이 나는구나.”
벌써 품종 유지를 위해 백정촌에 소를 분리해 두었으니 다행이군. 조정 전체가 쏟아지는 업무로 비명을 지르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니 진짜 휴가나 즐겨야겠다.
어느새 아내가 만든 차와 다과가 나오고 임차손과 함께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임차손은 차를 거칠게 들이켜더니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에게 귀띔하였다.
“자네는 휴가를 나와도 업무를 찾아서 하니 내가 속이 타들어 갔다네. 안사람과 아이들을 따로 두고 보름 동안 얼굴도 비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해 보니 아내와 가족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잠시 짬을 내어 백정촌에 다녀오려 했지만 일이 다급하게 돌아가며 시간을 낼 수 없었지. 하지만 임차손은 표정을 풀며 그나마 좋은 말을 하였다.
“보다 못한 내가 백정촌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네 가족들에게 유락을 만들게 하는 식으로 다른 일에 몰두하게 하였다네.”
“하긴 내가 한 달 넘게 도요에 머물며 도자기에 미쳐서 살기는 했지.”
“내가 없었다면 자네는 분노한 부인에게 호되게 시달렸을 것이네. 휴가를 나와서 계속 놀 것이지 업무를 찾아서 하다니 참 대단한 사람일세.”
눈치가 부족한 임차손이 이러니 아내도 내가 휴가를 나와서 업무를 찾아서 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 참고 있으리라.
괜히 휴가를 왔다가 부부싸움을 하느니 이제 제대로 놀아보려 하였고 임차손도 내 눈치를 보고 좋은 장소를 알려주었다.
“인근에 있는 백령도는 작은 섬이지만 신비한 장소가 많다네. 특히 내가 젊은 시절에 백령도에 머물며 세상에 둘도 없을 해안에서 훈영제식법을 익혔지.”
“세상에 둘도 없을 해안이라 하였는가? 그것 참 궁금하니 안사람과 배를 타고 한번 다녀와야겠군. 아예 며칠 동안 백령도에서 머물며 시구나 지어볼까.”
아내도 진짜 휴가를 즐기기로 하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내 의견에 동의하였다. 나룻배를 빌려 백령도에 도착하고 이틀 정도 백령도의 기암괴석을 보며 눈을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임차손은 썰물이 심해지는 날이 되자 우리를 해안으로 안내하였다.
“내가 젊은 시절에 이 해안을 알고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였던 장소라네. 서애 자네 마음에도 들는지 모르겠군.”
안내받은 해안은 참 이상한 해안이었다. 멀리서 볼 때에는 평범하게 회백색의 모래가 깔려 있는 모래사장이라 생각했는데 발자국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이쯤 되면 수레가 지나가도 자국이 남지 않겠는데?”
“수레가 무언가. 공령을 떨구어도 약간의 흠집만 날 정도로 단단한 모래사장이지. 심지어 모래가 얼마나 견고한지 확인해 보면 더욱 놀랄 걸세. 점토조차 없이 말끔한 모래라네.”
임차손의 말이 맞았다. 모래를 힘주어 조금씩 긁어내어 물에 풀어내자 진흙은커녕 잡티도 별로 나오지 않는 신비한 모래였다. 심지어 임차손은 물이 빠져 말라붙은 장소로 가더니 더욱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이 신묘한 모래는 물을 끝없이 빨아들인다네. 여기에 물 한 말을 부어보게나.”
“이 친구야. 물을 한 말이나 부으면 당연히 질질 흘러서 물골이 생기는 법이 아닌… 세상에! 물을 이렇게 잘 흡수한다고? 부인! 이리 와 보시오! 참으로 신묘한 모래가 아니겠소!”
아내도 내 말을 듣자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이 신비한 현상을 확인하였다. 보통 모래와 달리 이 해안의 모래는 끝없이 물을 흡수하며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이들과 합세해 계속 물을 길어와 거의 다섯 말의 물을 내리 부어대자 더 이상 흡수하지 못 하고 물골이 생긴 것이 전부이다.
이 신비한 현상을 목격한 아내는 마른 모래를 매만지더니 황홀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이 모래를 조금 가져오면 몸을 씻을 때 좋겠군요. 끝없이 물을 빨아들이는 데다 단단하기까지 하니 발에 묻은 물을 더 이상 수건으로 닦아낼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렇구려. 잠깐! 발에 묻은 물을 더 이상 수건으로 닦아낼 필요가 없다고?”
순간 현대의 아내에게 타박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한창 습기가 차오르는 여름에 욕실 매트를 말리기 힘들다고 규조토 매트를 사와서 욕실 앞에 깔아두었다.
문제는 내 체중이 당시 120㎏을 넘어갔다는 점이고 규조토를 단단하게 뭉쳐서 만든 매트는 내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버렸지. 가만히 떠올려 보니 이 모래의 질감은 당시 규조토 매트와 매우 흡사하다. 즉 이 해변 전체가 규조토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물을 잘 흡수하는 물건이 이런 흙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 잠시 이 섬에 있는 기암괴석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
“이봐, 자네! 대체 어디를 가는가!”
섬에 있는 수많은 절벽을 확인하였다. 아내도 어느새 눈이 돌아간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지만 나는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백령도의 사방을 뛰어다니며 암반을 캐내고 물을 흡수시키길 반복하였다.
마침내 한 절벽에서 물을 엄청나게 빨아들이는 돌덩어리를 찾아냈다. 규조토가 아닌 빻아내지 않은 원석(原石)인데도 물을 계속 흡수하고 강도 또한 손톱으로 긁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연약하였다.
“드디어 찾았어! 드디어 찾았단 말이다! 이걸 거푸집으로 사용하면 완벽해!”
“아이고, 이 친구야! 그렇게 대놓고 외치면 어떻게 하나!”
드디어 본차이나의 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발견해 기쁜 마음에 소리쳤는데 내 옆에는 가족들과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임차손은 머리를 감싸 쥐고 사태를 수습할 수 없으니 어서 아내의 마음을 돌리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마에 힘줄이 솟구쳐 오를 정도로 분노한 와중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였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도성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휴가를 시작하게 제가 힘을 써보겠으니 낭군께서는 전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내의 싸늘한 말을 듣자 소름이 돋아 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해주로 돌아가 다시 장인들을 소집하고 내가 가져온 규조토 원석을 내밀며 말하였다.
“물을 많이 빨아들이는 돌을 구하였소. 이 원석을 깎아내어 도자기를 만들 틀에 사용한다면 어떻겠소?”
“그런 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 정말이군요! 크기의 절반에 달하는 물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가공하기도 아주 쉬우니 복잡한 문양도 마음대로 만들 수 있겠군요.”
장인들은 간단한 틀을 만들어 본차이나 반죽을 부었고 규조토 틀은 여섯 개의 도자기를 찍어낸 뒤에야 수분을 흡수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암석 자체를 깎은 틀이니 불에 올려서 급히 수분을 빼내도 잘 갈라지지 않는다.
장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말하였다.
“이거면 됩니다! 앞으로 가마도 조절해야 하고 제조법도 완성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지만 틀 자체가 완성되어 있다면 계속 시험해 볼 수 있겠군요! 그러면 이 자기의 명칭은 서애 대감님의 호를 붙여 서애자기라 불러야 하겠습니까?”
“중요한 틀을 만들 돌을 찾아낸 계기가 내 친구 승우 덕택이니 자의 앞을 따서 승자기라 부르면 어떻겠소? 그리고 이 자기를 이현전에서도 연구해 볼 것이니 몇 명은 나를 따라 도성으로 오시오.”
지금쯤 서역에서 들여온 서적을 분석하며 피를 토하고 있을 이현전에 더 많은 짐을 얹는 것 같지만 뭐 어떤가.
본차이나, 이 시대에는 승자기라 부를 녀석을 양산할 기술이 생기면 나라의 곳간을 그득하게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휴가, 아니, 엄연히 업무가 끝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와중에 임차손이 골라준 각종 선물로 아내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아예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였다.
“낭군께서 이리도 업무에 매진하시니 반드시 휴식을 취하게 만들 것입니다. 자고로 입신체비의 극한을 추구하는 분이 하성군 대감이시니 미리 서신을 보냈습니다.”
분노한 아내가 나에게 뭔 짓을 저지를지는 모르겠고 진짜 입신체비를 하다 피를 토할지도 모르지. 아무튼 본차이나의 기틀 하나만큼은 제대로 닦아서 두 달이 아깝지 않다!
#작가의 말
현대에도 본차이나의 명가로 불리는 글래드스톤에서 사용하던 본차이나 틀입니다. 안에 반죽을 붓고 수분이 흡수된 표면을 남긴 채 나머지 반죽을 제외하여 사용하죠.
꽤 정밀한 석고를 사용하는 틀이라 만들 수 없을 줄 알았지만 백령도와 황해도 일대에는 규조토의 원석인 규암이 제법 많이 분포합니다. 아예 규암을 깎아서 틀을 만들어 이 시대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림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ladstone_mould_making_tea_pot_383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