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77화
2부 25장 3화 나라의 곳간을 채우자(1)
마침 운을 띄우기 적당한 것이 연회가 시작될 무렵 주상전하께서 말하시길 ‘술을 마시기 힘들어진다’고 하였다. 단순히 금주령을 내리거나 아예 변방으로 발령한다면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겠지.
잠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은 하나다. 다른 관원들이야 이 시대 사람들이니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현대에는 일반화가 되다 못해 국가 수입원 중 하나인 세금이 있으니까.
주상전하의 잔에 술을 따르며 슬쩍 물어보았다.
“술은 마시면 마시는 대로 흥이 올라오지만 절제하지 아니하면 속이 망가지고 살이 찌며 근골이 쇠하기까지 하옵니다. 그러하니 우왕(禹王)과 주무왕(周武王: 주나라의 왕)도 이를 경계하였으나 결국 후세에 이어지는 물건이옵니다.”
“술을 절제할 줄 알아야 마음이 평온해지고 화가 일어나지 않는 법이 아닌가. 사대부들이야 입신체비를 행하며 절제하지만 그렇지 아니한 이들이 많은지라 참으로 고되구나.”
내 예상대로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풍조를 내세우며 주세(酒稅)를 부과할 예정이 분명했다.
하긴 요즘 여송(필리핀) 일대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점점 커지며 부산물인 당밀을 가공한 당밀주(럼)가 싼값에 들어오기 시작해 세금을 부과하기 가장 적합한 시점이다.
물론 당상관쯤 되면 술값이 수백 배로 뛰어도 마실 수 있지만 돈 문제가 아니다. 세금 창설의 당위성을 위해 당분간 사대부들도 술을 자제해야 하니 당분간 술을 마시기 힘들어지는 세상이 되리라.
주상전하는 술잔을 비우더니 다시 말을 시작하였다.
“본디 술은 농사를 짓는 이들이 기력을 돋우기 위한 탁주로 시작하는 법이며 이를 맑게 걸러 청주를, 다시 증류하여 소주를 만들지 않더냐. 결국 술 한 잔에는 쌀 한 되가 뭉쳐져 있으니 이는 곳간을 축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하면 술 가운데 증류주에만 세금을 부과하실 뜻을 품으시면 될 것이옵니다.”
조심스럽게 따른 술을 단번에 들이켠 주상전하가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로 슬쩍 웃으며 이이를 바라보았다. 내 예상대로 현재 영의정인 이이가 주상전하와 함께 주세를 창안하여 언젠가 이를 법으로 제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리라.
연회를 즐기던 다른 이들도 내 말을 듣자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상전하를 바라보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주상전하께서는 술잔을 건네시며 잔을 채워주시더니 덤덤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 뜻도 그러하였다. 왜와의 협정도 온전히 막을 내릴 것이며 호주의 개척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라의 강역이 계속 늘어나는 와중에 새로운 강역에 일어날 기근과 재해에 관한 대책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지 않더냐.”
“실로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특히 아국과 호주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여송 일대는 폭우로 인해 작황이 불안정한 경우가 잦고 곡식을 오래 보관할 방법도 없사옵니다.”
“본래 여송 일대에 환곡(還穀)제도를 도입하려 하였지만 여송은 겨울이 없어서 쌀을 오래 보관할 수 없더구나. 그러하니 아예 증류주에 세금을 매겨 자금을 만들고 인근의 대월(베트남)에서 미곡을 구입하는 방안을 택하였다.”
다들 주세 제정을 반대하려 하였지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 법안을 창설하니 할 말이 없었다. 조선 소속 함선이 많아도 운송 거리가 길어지면 운반하는 양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결국 필리핀이나 호주에 자연재해가 발생해 기근이 시작된다면 조선에서 보내는 곡물 대신 필리핀에 축적한 주세를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으리라.
하지만 주상전하께서는 세금이 왜 창설되는지에 대한 당위성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근래에 들어 삼남 일대의 부농들이 겨울이 되면 탁주나 청주 대신 여송에서 들여온 당밀주를 항아리 가득 사들여 매일같이 술판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겨울에 아랫목에 모여 술을 즐기는 풍속은 농촌의 미풍양속이옵니다. 하오나 이를 자제하지 않고 계속 마신다면 간이 상하고 속이 뒤집어져 크게 상하는 이들이 속출할 것이옵니다.”
“그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밖에서 잠이 들어 얼어 죽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는 장계를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더구나.”
아예 술 권하는 사회를 넘어서서 술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가 되었다. 부농들이 저렇게 술을 퍼마시다 죽는다면 나라의 손실이나 마찬가지이다.
다른 신료들은 주상전하의 뜻을 이제야 알아차리고 질문을 퍼부었다.
“참으로 옳으신 뜻이오나 대체 얼마나 막중한 세금을 거두시려 하시나이까. 자칫 잘못하면 백성들이 불만을 품을지도 모르옵나이다.”
“오 할의 세금을 부과한 뒤 상황을 보아 삼 할의 세금으로 낮추려 한다. 이미 매년 아국에 풀리는 당밀주가 적게 잡아도 오십만 말(300만 리터)에 달하지만 한 말에 고작 은자 한 냥에 미치지 못한다. 값이 오르면 조금이라도 술을 자제하지 않겠더냐.”
당밀주의 단가가 싸도 너무 싸다.
나도 소줏고리를 빌려서 아내와 함께 집안 전통으로 내려오는 소주를 만들어 본 입장에서 하는 소리인데 소주 한 말(6ℓ)은 최소 은자 석 냥 값어치는 하는 술이다.
소주 한 말에 소모되는 청주는 넉 말(24ℓ)이며 쌀을 최소한 반 석(45㎏)은 소모한다. 노임과 땔감 그리고 누룩을 포함한 각종 덧대는 재료가 화려해질수록 가격도 폭증하니 최소한 은자 석 냥이지.
다들 돈 계산은 빠른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상전하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참으로 옳으신 뜻이옵나이다. 신 이윤범, 앞으로 삼 년 동안 주상전하의 뜻에 동참하며 제사상에 올릴 소주를 제외하면 탁주만 들이켤 것이옵나이다.”
“그러하니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비록 스스로 만드는 가양주(家釀酒)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지만 상회에 나와 거래되는 모든 증류주는 세금을 부과할 것이니 이를 필히 명심하라.”
기왕 세금을 만들 바에는 형평성을 부과하여 조선 전체에도 세금을 매겨야 하는 법이지. 대충 조선에서 마시는 술을 감안하면 증류주에 한정된 주세 수입만 따져도 일 년에 은자 일백만 냥에 달하리라.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부족하다. 유럽에서 돌아오며 수많은 생각을 거듭하여 계획한 국가 전속 상단. 일단 대양 무역 회사(會士)라 칭한 녀석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니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리라.
연회가 끝나자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내 듣기로는 이이는 속일 마음 자체가 들지 않고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속이지 못하겠다 하였다. 하지만 유성룡 자네는 속일 방법이 없다 하였으니 그 말이 실로 옳구나. 내 잠시 운을 띄웠는데 이렇게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주상전하께서 신을 이리 어여삐 보아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하오나 주상전하께서 계획하신 대계(大計)를 신 또한 염두에 두었으니 조만간 입궐할 것이옵나이다.”
“젊어서도 일 생각만 하더니 나이가 먹어서도 일 생각인가. 하지만 상소를 지참하여 입궐을 하여도 그저 논의만 행하고 돌아가도록 하라. 자네는 대업을 이뤄야 하는 사람이니 휴가를 맞이하여 푹 쉬게나.”
“하해와 같은 은덕에 감읍할 뿐이오며 신의 상소를 눈여겨보시기를 바랄 뿐이옵나이다.”
거의 3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니 마음이 홀가분했지만 앞으로 미주에 가기 전까지 대양 무역 회사의 기초를 작성해야 하니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선발로 대문 앞에 나온 아내를 보자 그 모든 마음이 풀렸다.
“여보! 돌아왔소!”
“낭군께서 돌아오실 날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자수를 놓다 풀어헤치기를 거듭하였습니다.”
삼 년 만에 다시 본 가족들을 얼싸안고 마당에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현대의 기억이 생생하다 해도 이들도 내 가족이고 엄연히 나와 함께 고난을 같이한 이들이 아닌가.
아내와 의무방어전을 치를 나이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으니 하루를 내리 곯아떨어져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일어났다.
마루로 나오자 막둥이인 유진이 서신 뭉텅이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엄친께 서신이 수십 통이나 도착하여 있었지만 모두 엄친께서 직접 확인하실 물건이라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온 가족이 함께 보아야 하는 물건이 있으니 다른 무엇도 아닌 큰형님의 서신입니다.”
“내가 없을 적에는 차남인 단이가 집안의 웃어른이 아니더냐. 이 좋은 물건을 나 혼자서만 볼 수 있겠더냐? 어서 모여서 서신을 함께 확인하여 보자꾸나.”
장남인 유여, 나는 아직도 진성이라 부르지만 아무튼 권율 휘하에서 호주 개척에 전념하고 있을 진성이의 편지를 받아들자 가슴이 뿌듯해지며 눈물이 맺혔다.
이 녀석이 호주의 험악한 땅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까.
[부친께서 험난한 뱃길을 다녀오는 동안 소자(小子)는 문안 인사조차 드리지 못하여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호주에 거주하던 호인(호주 원주민)에게 글을 가르치고 몸을 단련하며 하루가 한 시진보다 짧은 것 같을 뿐입니다. 근래에는 삼대운동 820근(525㎏)을 돌파하였습니다.]
삼대 운동이 또 늘었다고? 나이를 생각하면 늘어날 수 있고 아내는 언제나 진성이의 입신체비를 보조하며 삼대운동을 한 달마다 검증하였지.
아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칭찬 일색이다.
“녀석도 참 대견하기도 하지. 진성이가 태어날 당시에는 힘이 없어 보였는데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이렇게 당당한 모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소. 비록 소룡식 입신체비의 정수를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내가 상체를, 당신이 하체를 도맡아 단련하였기에 어디 가서 입신체비로 뒤떨어지지 않는 법이오.”
녀석의 나이도 올해 스물아홉이고 손자가 올해 세 살이다. 조만간 근육 성장이 줄어들겠지만 그 이후는 경험과 정화(征和: 현대 용어로 피킹)라 불리는 근육 간의 화합으로 삼대운동 무게를 끌어올릴 수 있으니 크게 놀랄 거리는 아니지.
그리고 훈훈한 이야기도 나왔다.
[호인들은 아국의 언어를 익히며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돌을 쓰던 이들이 날붙이를 제련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하여 참으로 뿌듯합니다. 이미 제가 가르친 사람이 이천 명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친께서 저를 가르치신 방법을 적용한 덕분입니다.]
녀석의 말을 듣자 체험학습으로 내 장남을 가르친 보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사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다 하여 경기도에 있는 과수원까지 가족 여행을 다녀와 어린 사과를 직접 따게 해봤으니까.
이를 고스란히 접목하여 원주민들이 사과를 이해하지 못하자 직접 사과를 구해 만지게 하고 한 조각씩 먹였고 원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사과 씨앗을 심으며 나무를 가꾸기 시작했다 하더라.
하지만 그다음 대목을 보자 뒷골이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타조라 불리는 사특한 새들이 밭을 습격하고 백성들을 죽이기에 이르러 제 근육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유생들과 함께 녹타조를 우리에 가두고 철저히 근육 하였으니 이는 벗들과 내수린을 철저히 익힌 덕분입니다.]
“녹타조? 근육? 철저히 근육? 우리에 가둬?”
“우리 진성이 보세요. 회화도 따로 보내왔는데 참으로 거대한 새가 아닙니까. 우리 아이가 언제 이렇게 대견하게 자랐지. 이 거대한 새를 수십 마리나 근육하니 믿기지 않습니다.”
“저도 큰형님처럼 녹타조들을 근육 하겠습니다! 아직 입신체비를 막 배운 몸이지만 부족함은 없습니다.”
누구 솜씨인지는 몰라도 당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회화가 첨부되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공포에 질린 거대한 녹…… 아니, 아마 에뮤라 불리는 호주 토착 조류이다.
여하튼 갑옷을 입은 유생들이 에뮤들을 집어 던지고 짓뭉개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순간 서양에서 근육적으로 변질된 예술 작품을 보았던 기억과 역사를 뒤틀어 버리는 근육이 떠오르며 수양대군에 대한 막대한 적개심이 솟구쳐 올랐다.
아무리 근육이 좋다 하여도 이건 너무하다!
하지만 아내는 내 표정을 다르게 알아차렸나 보다.
“이제 연세가 연세신데 호주로 다녀와 녹타조들을 근육하면 아니 됩니다. 아무리 호승심을 가지셔도 몸조리를 하실 시기가 아닙니까.”
“물론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앞으로 일 년 동안은 아이들과 함께 아국의 사방을 주유하며 사소한 일을 행할 작정이오. 그나저나 수양대군의 저서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군.”
희대의 역작이 근육으로 뒤틀린 것도 모자라 조선시대에 생긴 내 아들이 새를 레슬링으로 두들겨 패는 몰골을 볼 줄은 몰랐다.
수양대군을 어떤 형태로 만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이지함처럼 영혼이 되어서 만날 수 있다면 모든 힘을 동원해 에뮤처럼 두들겨 패리라!
* * *
진성이가 녹타조를 근육하건 말건 열흘 동안 상소문을 작성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유럽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동양 문물의 열풍과 지금까지 조선에 부족한 점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이 내 손을 통해 조정에 퍼지기만을 기대하였다.
삼 년을 내리 일하고 고작 열흘 만에 다시 십조 거리를 통과하자 내 얼굴을 알아본 관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인사를 올렸다.
다들 내가 열흘조차 쉬지 않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나 보다.
“이거 서애 대감 아니십니까? 세상에 제 부친께서는 내내 입신체비를 하시며 몸을 다스렸는데 이 어찌 된 일입니까!”
“어찌 되기는. 주상전하께 올릴 따끈따끈한 상소문일세. 너무 따듯하여 이 십조 거리를 모조리 불살라 버릴지도 모르는 상소문이니 서둘러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이들이 기겁하였지만 이건 조선의 체질을 대폭 개선할 처방전이다. 비록 잘 다뤄야 하지만 나는 미주 관찰사로 부임할 예정이니 남은 관원들이 알아서 다루겠지.
이윽고 상참(常參)이 끝나며 편전에서 관원들이 쏟아 나왔지만 보고가 들어왔는지 이이를 비롯한 주요 관원들은 안에 머물러 있었다.
김명원을 비롯하여 주상전하께서 애지중지하는 신하들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절을 올리며 인사를 하였다.
“신 유성룡. 상소를 올릴 것이 있어 주상전하를 뵙고자 하였나이다. 하오나 신을 편전에 들이시니 감읍할 뿐이옵니다.”
“내 보고를 듣고 처음에는 내치려 하였으나 고작 상소문 한 장에 겁을 먹어서야 되겠는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예사롭지 않다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봐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 시대에 먹힐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진짜 내 뜻대로 운용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상소문을 내밀며 말하였다.
“신이 주상전하께서 정하신 바를 들었을 적에 머리에서 불꽃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사옵니다. 그리하여 지난 열흘 동안 구주를 다녀오며 깨달은 바와 아국이 새로이 나아갈 길을 접목하였사옵니다.”
“불꽃이 치밀어 오른다 하였으니 예사로운 상소가 아니로구나. 어서 상소를 읽어봐야겠다.”
내 상소문은 세필로 기록하지도 않았고 내용이 그리 길지도 않다. 하지만 주상전하의 눈이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푹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상소 내용을 정리한 주상전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교역 체계가 아닌 아국의 물산을 집합하는 대양 교역 회사라. 그리고 이 자금원은 각 관원들의 녹봉에서 일정 수준을 각출(各出)하여 삼는다 하였는가.”
“그러하옵나이다. 신이 아국의 제도를 고스란히 살펴본 결과, 아국의 교역은 양은 많고 이문이 크지만 이를 각 관원들의 녹봉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이문이 창출되지 않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관원들의 녹봉 가운데 일 할을 각출하여 교역의 자금으로 사용하며, 이 자금을 은퇴한 이후이나 관직에 있더라도 쉰다섯 살이 넘어가면 기로소(耆老所)와 봉조하(奉朝賀)에서 더 많은 자금으로 되돌려 준다니.”
내가 제시한 방식은 국가가 운영하는 무역회사이다. 그 자금원은 국민연금과 마찬가지로 각 신료들의 봉급에서 일정 부분을 각출하여 운영하는 것이지.
국민연금을 운영하듯 녹봉이라는 고정된 자금원을 합법적으로 징수하여 교역 기본 자금으로 삼는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이득은 은퇴한 관리들의 노후 생활을 보장하는 자금으로 쓰이고.
하지만 진짜 꿍꿍이는 따로 있으니 주상전하께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교역이 늘어나면 사특한 이들이 생겨나는 법이옵니다. 교역에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이문을 챙기려 난행을 벌이는 이들이 생기기에 마련이며 국가의 해악이나 다름없사옵니다.”
“그러하니 이런 방책을 꾀하였군. 뇌물을 받거나 각종 비리를 저질러 사사로운 이득을 취한 자는 연금(年金)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되돌려 받지 못한다니. 하지만 녹봉이 들어간 교역이 실패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리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이 아닌가.”
“아국의 수많은 물산을 구주에서 오매불망 바라고 있사오니 아국이 손해를 볼 연유는 없사옵니다. 설령 손해를 본들 다음 해의 녹봉이 쌓이면 손해를 벌충할 수 있는 법이옵나이다.”
주식에 맛을 들인 적은 없지만 격언 같은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개미는 기관을 절대 이기지 못하며 기관은 판 자체를 주도하기에 손해를 볼 일 또한 없다고.
조선은 아직 판을 주도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런 막대한 자금을 기반으로 삼아 인삼을 시작으로 각종 물산을 대량으로 서양에 팔아치울 수 있는 조선이 교역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얼마 전 들었던 주상전하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만에 하나 아국에 재난이 닥치면 교역을 중단해야 할지도 모르옵니다. 하오나 교역을 중단하고 곡식을 사들여 위기를 극복한다면 그 또한 아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주세 따위와는 비교조차 하지 못할 거대한 자금을 상시 운용한다면 경신대기근도 버틸 수 있겠지.
주상전하는 내 상소문을 계속 살펴보며 침을 삼키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