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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476화 (476/573)

근육조선 476화

2부 25장 2화 조선에 돌아와서(2)

나를 비롯하여 매독에 걸리지 않은 이들은 허준이 아예 진맥까지 해주며 몸을 진찰해 주었다.

어의까지 직접 보내신 은혜에 감사하려는 찰나 허준은 내 팔뚝을 보더니 혀를 차며 말하였다.

“대체 뭔 일을 겪으셨기에 화농이 이렇게 크게 올라오셨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간 염증이 벌집 모양으로 들어차는 화농(봉와직염)으로 번져 팔을 절단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렇게나 화농이 심하였소?”

“입신체비로 다져진 몸은 화농을 받아내는 살가죽이 얇아지니 근육으로 염증이 빠르게 스미는 법입니다. 상처를 가르고 물과 주정으로 소독하였기에 망정이지 아니 하였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때 정말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아팠는데 팔을 절단할 위기였단 말인가.

하지만 허준은 내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지금까지의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평가를 내렸다.

“조금 더 잘 꿰맬 수 있었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제로니모 그 친구와 의서를 편찬하면서 창상(創傷)을 비롯한 외과 의술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았고 치료도 많이 행하였지요.”

“지금 뭐라 하였소? 창상을 비롯한 외과 의술?”

“제로니모라는 서반아 무관이 입신체비에 기반을 두어 분석한 인체 근육의 구성 방식을 확인하더니 이를 각종 외상과 결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이들을 치료하며 더욱 많은 지식을 축적하였습니다.”

나는 그저 스페인에서 건너온 무술 교관인 줄 알았는데 웬 의술 지식이 있나?

하지만 칼로 먹고사는 사람이 칼로 인해 발생한 상처의 치료법을 찾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당장 근골이 틀어졌을 때 재활의를 찾지만 재활의들도 입신체비를 어느 정도 익혀 근육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자신의 몸으로 확인한다 하던가.

허준은 다른 관원들이 입은 사소한 부상도 모두 확인한 뒤 인사를 올리고 말하였다.

“제가 수집한 의학 지식과 제로니모가 저술한 외과 지식 그리고 대감께서 서역을 다녀오시며 들여올 약재를 결합하여 조만간 새 의서를 저술할 방침입니다. 제 부족한 지식을 더욱 넓힐 방법을 마련해 주셨으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닥치는 대로 이문을 찾아 움직인 것에 불과하니 모든 것은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명에 의한 일이오. 그러니 훗날 의서가 완성되면 판본 하나를 나에게 전해주시구려.”

이 세상에서 동의보감은 단순한 한의학 저서가 아닌 종합 의학 서적이 될 것이 분명하였다. 현대에는 그저 한의학 참고서에 불과하지만 이 시대에는 계속 개량되며 발전하지 않을까.

도성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매독 환자들은 따로 분류되어 맨 뒤에서 어디론가 이송되었다. 아마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허준이 데려온 의사들에게 강제로 치료를 당하겠지만 우리는 아니다.

사대문 앞으로 행렬이 향하자 의흥위 소속 병사들이 맞이하였다.

“서애 대감께서 참으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주상전하께서는 한 달마다 서애 대감께서 보내는 장계를 확인하시며 대소신료들과 논의를 하셨으니 도성 천지에 서애대감의 위명이 퍼진지 오래가 아니겠습니까.”

“정녕 사실이오? 주상전하께서 신의 미욱한 행동을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기쁘기가 이를 데 없구려. 한시라도 빨리 주상전하께 다가가고 싶으니 어서 안내해 주시오.”

의흥위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임차손이 나를 맞이하였고 도성의 백성들이 상원군 대신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가슴이 뿌듯해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요상한 생각이 치솟아 올랐다.

나를 이렇게 띄워준다면 앞으로 60살, 70살이 되어서도 은퇴는 물 건너간 일이 아닐까. 주상전하께 사직을 요청하여도 백성들을 앞세워 나를 관직에 붙여놓으리라.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니 일단 도성에 들어가야겠다.

“신 상원군, 유성룡과 함께 서반아를 시작으로 서역의 각 국가를 탐방하고 왔사오니 주상전하의 성려(聖慮: 임금의 염려)에 보답할 길을 마련하고자 하옵나이다.”

“서행사의 노력은 익히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삼 년 가까이 고국을 떠난지라 모두 근육이 쇠하여 보기가 딱할 뿐이구나. 이미 장계는 받았지만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어서 행사를 마치고 입신체비로 몸을 다스리도록 하라.”

다들 배 위에서 시달리느라 군살이 조금 늘어났을 뿐이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일단 수레에 실린 짐을 모두 덜어내니 근정전 앞마당을 메울 지경이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가축 가운데 가장 튼튼한 스무 마리를 근정전에 들여놓았다.

당장 소개해야 할 녀석들은 가축이다. 가축을 멋대로 기르기 시작하면 서로 교배를 하고 품종이 섞이게 마련이니 주상전하께 확실히 각인시켜서 전담 부서를 편성해야 하리라.

그리고 처음으로 소개된 녀석은 군마(軍馬)였다.

“불란서의 페르슈라는 지방의 거대한 말이옵니다. 불란서의 새 왕인 앙리 4세는 거세하지 않은 수말 오십 마리와 암말 삼백 마리를 제공하기로 하였사옵니다.”

거대한 말이 콧김을 뿜으며 도열해 있자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을 늘어놓았다. 체중을 대충 측정해 보니 무거운 녀석은 1,300근(830㎏)에 달하였고 등 높이 또한 어중간한 사람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였다.

주상전하께서는 군관들의 호위를 받아 페르슈 말에게 접근하였지만 녀석들은 이미 앙리 4세 휘하 사람들이 철저히 훈련시킨 군마이며 성격 또한 온순한 품종이다.

잠시 눈을 마주치며 가늠하던 주상전하께서는 말의 온몸에 꿈틀거리는 근육을 보며 평가하였다.

“참으로 늠름한 말이로구나. 간혹 군관들이 영길리와 불란서의 거마(巨馬)를 들여오지만 대부분 거세한 수컷을 보내는 터라 번식시키지 못하는 형편이라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옛적에 세조대왕(홍위)께서 한혈마를 늘리시듯 거마를 늘릴 수 있겠구나.”

“하오나 말의 수가 적은지라 품종을 유지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니 차후 불란서와 계속 거래하여 새 말을 들여와야 할 것이옵니다.”

“익히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도록 하라. 세조대왕께서도 한혈마의 종마를 들여온 이후 이십여 년 동안 꾸준히 종마를 들여와 아국의 말을 탈바꿈시키지 않았더냐. 이 거마 또한 철저히 관리하여 똑같이 할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문제이다. 지금이야 앙리 4세가 실책을 무마하려고 종마로 쓰일 말을 제공했지만 이제는 거세하지 않은 수말을 어마어마한 가격을 제시하며 팔 것이다.

대충 거세한 군마가 한 마리당 은자 50냥에 달했으니 그 몇 배의 값을 부르지 않을까. 하지만 나 또한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넘어가기로 하였다.

다음은 프랑스의 말을 소개했으니 스페인의 양을 소개할 차례이다.

“다음으로 보여 드릴 물건은 서반아에서 선물로 보낸 면양(綿羊)이옵니다. 서반아의 군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어보니 조선은 추운 고장이지만 면양이 보잘것없어 백성들이 추위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하옵니다.”

양은 동아시아 전체에서 기르는 녀석이지만 스페인에서 들여온 양은 온몸이 하얗고 뿔이 크며 전체적인 체격 또한 거대한 품종이다. 듣자 하니 메리노 품종이라 하던가.

주상전하께서도 국서를 미리 받아보셨기에 근정전 한구석에 뭉쳐 있는 양들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주상전하의 시선은 양이 아닌 옆에 쌓아둔 양털로 향하였다.

“아국이 소개한 상품을 독점으로 납품한다는 조건으로 진귀한 면양을 제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깎은 양털이 풍성히 쌓여 있으니 혹여나 털이 가득 들어찬 양을 보냈더냐.”

“아니옵나이다. 서반아에서 받을 적에 저 면양들의 털은 모두 바짝 깎여 있었사옵니다.”

“지금 뭐라 하였는가? 그럼 고작 아홉 달 만에 저런 많은 양모를 산출하는 양이 있다니?”

본래 풍성한 양털을 자랑하려 했지만 배 위에 올려 고된 항해를 이어가는데도 양털이 계속 자라나서 계속 깎을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의 습기와 더위에 시달리면서도 꿋꿋이 털을 뿜어내니 깎지 않으면 배 안에서 스스로의 털에 쪄 죽었을 녀석들이다.

양모가 자라기도 전에 깎아댔으니 상품성이 없는 양모가 되었지만 양 하나만큼은 어마무시해서 일 년에 두 근(1.28㎏)가량의 양모를 채취할 수 있다던가.

심지어 사축서의 관리들이 양털을 만지더니 질감에 감탄하기 시작하였다.

“아국의 북방에서 기르는 양모와 천양지차이옵나이다. 비록 길이가 짧아 모든 것을 판단하기에는 이르나 거칠지 않고 결이 온화하여 한 가닥마다 탄력이 넘칠 지경이옵니다.”

“양모의 소출은 아국에서 기르던 양의 세 배가 넘는 데다가 질 또한 매우 좋으니 이는 천금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답례를 함이 마땅하니 아국에서 자랑하는 소와 닭 그리고 돼지를 조만간 서반아로 보낼 준비를 하라.”

“참으로 합당한 명이오니 충실히 따르겠사옵나이다.”

유럽의 돼지는 다소 난폭한 편이 있어서 돼지에 물려 죽은 사람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 조선에서 품종이 온순하게 변한 중국 돼지를 가져간다면 나름 잘 팔릴 수도 있겠지.

닭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닭이니 두말할 것도 없고 고기는 맛이 없지만 일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하는 녀석이 한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한 녀석은 프랑스에서 들여온 소였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짐승은 소이옵니다. 불란서에서 들여온 소인데 한 품종은 우유의 양이 아국의 소보다 네 배가 많으며 다른 품종은 고기의 맛이 일품이라 하옵니다.”

“고기의 맛이 일품이라 하였으니 두 말은 하지 않겠다. 연회에서 육질을 평가하기 가장 좋은 당수육(조선식 바비큐)을 만들어 내놓도록 하여라. 다들 고생이 많았으니 일 년 동안 휴가를 줄 것이다. 서역에서 배운 학문과 물산을 세상에 퍼트릴 기회를 마련하도록 하라.”

우리에게 일 년 휴가를 주겠지만 그동안 계속 쉬지 말고 배운 것을 관원들과 토의하며 조선을 더욱 발전시킬 방법을 마련하라는 소리이다. 사실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으니 잘되었지.

저녁이 되어 시작된 연회장에는 형님이 힘을 써서 만든 각종 요리가 펼쳐져 있었다.

개중에 좌중의 눈길을 끈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살레르 지방에서 들여온 육우로 만든 바비큐, 아니, 당수육이다.

“불란서의 살레르 지방의 소는 처음 잡아 봅니다만 기름이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 하오나 한나절 가까이 고기를 구워 지질(지방)을 걷어냈으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육질을 보여주려는 듯이 커다란 칼로 한 면을 썰어내자 조선에서 기르는 한우와 비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살결이 떨어지며 육즙이 질질 흘러나왔다.

주상전하께서는 한입 크기로 썰어낸 당수육을 맛보더니 감탄하며 말하였다.

“일전에 북인 중 한 명이 상왕전하의 은덕을 칭송하며 보리와 귀리만 먹여 기른 소를 보낸 적이 있었다. 참으로 사치스러운 물건이라 벌도 상도 내리지 않았지만 그 고기의 맛과 견줄 수 있으니 입이 호강할 뿐이구나.”

주상전하의 평가가 정확했다. 현대에서 먹은 육우와 비교해도 큰 차이는 없으니 이 시대의 한우와 비교할 수 없이 맛이 좋은 고기이지.

하지만 연회장에는 공석이 있었고 그 공석에도 바비큐 한 조각이 놓였다. 주상전하는 그 자리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정철은 지금 호주에 있으나 이 자리에 굳이 정철이 앉을 공석을 마련해 둔 이유는 이 서신과 회화 덕분이다. 그가 한석봉과 함께 편찬한 요람(要覽: 백과사전)이 마음에 들어 호주로 보내 기이한 물산들을 조사하게 만들었지.”

정철 그 암 덩어리를 한석봉과 엮어 호주로 보냈다고? 순간 정철에 대해 불쌍한 마음이 들려 했는데 훗날 수험생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니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상전하께서는 한석봉이 그린 것이 분명한 회화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셨다.

“내 세상에 그런 짐승이 있을 줄은 몰랐다. 주둥이는 오리와 같고 몸은 너구리와 같으며 팔다리에는 물갈퀴가 나 있는 녀석이다. 다들 회화를 보고 크게 웃어보거라.”

“푸하하하하! 이게 정녕 세상에 있는 짐승이란 말이옵니까? 새의 부리를 가지고 너구리와 흡사한 몸을 지녔으니 혹시나 알을 낳고 젖을 먹이지는 않사옵니까?”

“이이 자네의 말이 맞으니 참으로 기묘한 일일세. 정철의 보고가 틀림없다면 이 짐승은 모든 짐승의 특징을 고루 갖춘 녀석이라 하더군.”

회화를 돌려볼 때마다 웃음이 터지는데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회화를 바라보았다. 정철이 발견한 녀석은 현대 매체에도 기묘한 생물로 자주 나오는 오리너구리가 아닌가.

그러나 주상전하께서는 아쉬운 듯이 정철의 빈자리를 손짓하며 말하였다.

“하지만 사갈(蛇蝎: 뱀과 전갈, 독충)도 이 짐승의 몸에 붙어 있으니 정철이 뒷발에 난 가시에 찔리고 두 달 동안 사지를 가누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하더구나. 그러니 이 자리에 있을 공이 차고 넘치지 않겠더냐.”

“두 달 동안 사지를 가누지 못하고 누워 있다면 참으로 끔찍한 독이옵니다. 사지의 근육이 쇠하여 온몸이 군살로 변하고도 남을 기간이옵니다.”

“정철 그 친구는 입신체비를 게을리 행하여 온몸에 군살이 넘쳐나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 오히려 술을 마실 수 없으니 군살이 쏙 빠져서 돌아올지도 모르옵니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이 많았다. 홍문관에 다녀올 때마다 정철의 몸을 보면서 입신체비장에 넣어 굴리고 싶은 생각이 매번 치솟았지. 어서 주연을 즐기자꾸나!”

형님이 만든 요리는 당수육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 안에서 분석한 요리 노트를 계속 개량하고 조선식으로 변용하여 만들어낸 수많은 요리가 계속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김치이다.

다들 고추가 약간 들어가 알싸한 맛이 도는 김치를 입에 넣으며 술을 마셨고 주상전하께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에게 어사주를 내렸다.

“이번 서행사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모두 유성룡 자네의 공이라네. 그러니 주는 술은 거절하지 말고 어서 받게나. 앞으로 술을 마시기가 영 힘들어질 것이네.”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어사주이니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겠사옵니다.”

서양의 증류주는 아직 제조법이 완성되지 않아 내 미각에는 맞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진귀한 약주(藥酒)가 목을 넘어가자 알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주상전하의 말이 걸리기는 한다.

술을 마시기 힘들어진다?

다들 어사주를 한 잔씩 받아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고 서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중에 모두가 박장대소했던 이야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앙리 3세의 이야기였다.

“적게 잡아도 절반 이상이 기름인 음식을 그렇게 꾸역꾸역 먹는 모습은 처음 보았사옵니다. 하지만 모든 관원들이 헛구역질을 하는 와중에 단 한 명만큼은 점잖게 보고 있으니 모두가 혀를 내둘렀사옵니다.”

“그 기름을 받아들인 위장 속을 상상해 보니 술맛이 떨어질 것 같지만 점잖게 보고 있던 관원을 상상해 보니 술맛이 다시 올라오는구나. 그 관원은 어서 나와 어사주를 받으라.”

내가 술잔을 내밀자 주상전하께서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어사주를 잔뜩 따라주셨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명목상 입신체비의 석학 셋에게 가르침을 받은 몸이 아닌가.

앙리 3세의 이야기도 끝나고 다음 이야기는 상원군이 베껴온 회화와 조각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수많은 회화와 조각을 상세하게 묘사한 목록을 훑어본 주상전하께서는 다비드 상을 묘사한 회화를 보며 사뭇 감탄하셨다.

“아국에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 연유는 조각에 지나치게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하는 이유도 있지만 이런 비싼 조각을 마련하는 풍토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실로 좋은 작품이지만 아국에는 고스란히 적용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더냐.”

“고되다 하여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법이옵니다. 영동지방에서 캐낼 수 있는 석회석으로 연습하며 훗날 기술이 늘어나면 강화도에서 산출되는 대리석을 활용하면 될 것이옵니다.”

“실로 옳은 말이다. 자고로 많이 만들어 보아야 기술이 늘어나는 법이 아니더냐. 모두 서예를 배울 적에 실력을 늘리기 위해 수많은 붓놀림을 반복한 것과 마찬가지이지.”

슬슬 사치에 눈을 뜨는 풍조도 마음에 들기는 한다. 지나친 사치는 망국의 지름길이지만 그 지나친 사치를 막을 언관들도 조선에 많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이쯤 되면 내가 배 위에서 고민하던 새로운 상품을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겠지.

주상전하께서 손짓하니 내가 직접 주상전하께 술을 올리며 운을 띄우려 하였다.

#작가의 말

본래 펠리페 2세는 국외 반출이 금지된 메리노 품종 대신 아프리카산 면양을 보내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비격진천뢰를 온 상선에 퍼트리게 되자 양심에 걸려서 메리노 품종을 최초로 국외 반출하였지요.

16세기의 메리노 품종은 스페인 원산종이라 개량이 덜 되었지만 현대에서 사용하는 대다수 품종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면양입니다. 즉 개량하기에 따라 현대에도 쓰일 수 있는 품종이라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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