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72화
2부 24장 9화 의외의 해결책
마사이족이 지나치게 호주 환경에 적응한 목화에 골머리를 썩일 무렵인 1588년 11월 무렵. 카리브 해 인근에서도 변모한 해전(海戰)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 생겨났다.
방패 형상의 해적기(海賊旗)를 흩날리는 여섯 척의 해적선과 스페인 국기를 흩날리는 일곱 척의 상선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교전은 사방을 에워싼 해적들이 상선들을 두들기면서 이미 승패가 갈리기 시작하였다.
“놈들이 항복할 것 같습니다! 이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쏘아라. 놈들의 배가 침몰하건 말건 완벽히 무력화를 시키고 백기가 올라온 뒤에 등선하도록. 저 배는 대체 뭘 하나! 저 배 멈추라 해!”
상선들의 저항이 줄어들었지만 지휘관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계속 공격 명령을 내리고 갑판의 상황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두 척의 선박이 명령을 무시하고 접근하였다.
이미 펠리페 2세의 명령을 받아 양산된 비격진천뢰가 무턱대고 백병전을 시도한 해적선을 향해 날아갔고, 개중 한 척의 해적선에 비격진천뢰가 명중하였다.
그리고 불운한 해적선 한 척이 화약의 유폭에 휩쓸려 불기둥을 솟구치며 침몰해 버렸다.
“스패로우 호가 유폭 당했습니다! 잭 선장이 있는 갑판이 불길에 휩쓸렸습니다!”
“적이 항복할 때까지 폭발탄 사거리 바깥에서 사격전을 이어가라고 그렇게 강조했잖아! 이 머저리 새끼들아!”
평상시처럼 백병전을 실시하려던 해적들은 어쩔 수 없이 지루한 포격전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두 척의 배가 침몰하자 상선들이 백기를 올리며 항복하였고 약탈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해 놓고 얻은 소득이라 해보았자 설탕과 향신료를 비롯한 헐값의 –상대적으로– 물품들이었다.
한 선장은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항변 아닌 항변을 하였다.
“그놈의 폭발탄 때문에 뭣도 못 해먹겠습니다. 당장 포탄도 돈이고 화약도 돈 아닙니까? 이래서야 무역선을 털어도 수익이 안 나니 화끈하게 금 수송선을 털어버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금 수송선을 노리자고? 호킨스가 살아 있었으면 모를까, 지금 우리 힘으로 금 수송선을 노리는 건 불가능하다. 놈들은 최소 스무 척이 뭉쳐 다니는데 이걸 어떻게 감당하겠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오늘 전투의 수익을 계산하였다. 십 년 이상 해적질을 해온 경험으로 보건대 전투 손실과 약탈로 얻어내는 이득이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선원 급료나 사략행위 이후 왕실에 내놓아야 할 세금을 감안하면 해적질을 할 때마다 손해를 보아 파산할지도 몰랐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칼레 해전에서 폭사한 육촌 존 호킨스에게 원망을 털어놓았다.
“형님만 살아 있었다면 일이 순탄할 텐데 왜 그리 욕심을 내셨소. 조급해하지 말고 놈들의 수를 정탐해 보자고 그리 이야기했는데.”
칼레 해전에서 영국이 입은 손해는 군선 17척에 불과하지만 비율로 따지면 40%에 육박하였다. 더군다나 명성이 자자한 존 호킨스가 비명횡사한 덕분에 해군에 자원하는 이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바다 위에 돌고래 떼가 선단을 스쳐 지나가며 물살을 가로지르자 선원들이 행운의 상징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렸다.
항해사 한 명도 성호를 올리더니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다가와 말을 늘어놓았다.
“이거 잘만 하면 운수가 트이겠습니다. 저렇게 거대한 돌고래 떼는 보기 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장님, 다음 기회도 있으니 어서 항로를 정합시다.”
“고래라. 그래 고래가 제법 값진 물건이지? 고래 기름 한 통에 은 이십 파운드(이 시대 기준 1파운드 = 은 3냥)에 달하는 고가품이라고. 고래수염도 없어서 못 구할 물건들이고.”
“아예 업종을 포경으로 전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려면 작살도 필요하고 이런 먼 곳까지 나와서 고래를 잡아봤자 얻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잉글랜드로 돌아가심이…….”
이 시대의 고래 기름은 요긴하게 쓰이는 수준을 넘어서서 바다에 떠다니는 보물이었다. 이빨고래에서 얻어낼 수 있는 고급 기름은 등잔에 넣어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없이 환하게 빛나며 최고급 윤활유로 널리 쓰였다.
또한 수염고래의 기름은 품질이 조금 부족하지만 고래수염은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최고급 섬유였다.
비록 해적질보다 수익이 부족해도 얻어낼 거리가 많았으니 선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포경도 나쁘지는 않지요. 배를 많이 개조해야겠지만 상선 따위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며 푼돈을 건지느니 바다에 떠다니는 보배를 노리겠습니다.”
“그 바다에 떠다니는 보배를 모조리 수집하는 놈들이 있는데 왜 포경을 하나? 신농도인(폴리네시아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수많은 섬을 오가며 고래를 잡아 기름과 수염을 뽑아내는데 그놈들을 약탈하면 충분하지 않겠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십여 년 전에 세계를 일주할 때 고래 기름을 한가득 올리고 항해하는 폴리네시아의 포경선단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보급을 위해 머물렀던 곳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가장 만만한 목표물이 바로 포경선단이었다.
“이제부터 신대륙 남부의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향한다. 항로를 따라 움직이다 신농도인의 무역선을 만나면 약탈하여 고래 기름을 얻어내고 인도 근처에서 스페인 선단을 약탈하면 금보다는 못해도 선창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거다.”
“신농도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조선의 동맹입니다. 스페인처럼 폭발탄을 쏘아대면 우리가 약탈은커녕 접근하다가 배가 박살 날 겁니다. 그렇다고 배를 침몰시키면 짐을 건질 수 없지요.”
“고래 기름은 엄연히 기름인데 배가 침몰하고 통과 함께 물 위에 떠오르지 않겠나? 다들 어떠한가. 한번 도전해 보지 않겠나? 대서양을 넘어 태평양까지 우리의 명성을 떨쳐보자!”
선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동의하고 간부들도 이에 응했다. 이미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본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함께하는 모험이니 그들의 앞길이 순탄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젤란 해협의 강한 해류와 접한 다섯 척의 해적선 가운데 두 척이 붕괴하고 나머지 선박들도 선체가 뒤틀려 속도가 저하되었다.
그리고 속도가 저하된 상황에서 더욱 큰 악재가 선단을 덮쳤다.
“선장님! 이질(痢疾)이 발생하였습니다! 지금 확인하여 보니 항해가 길어져 물통 안에…….”
“으아아악! 젠장! 요강 가져와! 내가 이질 환자란 말이다!”
지나치게 많아진 선원과 길어진 항해로 식수가 오염되어 이질이 창궐하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비롯한 간부들도 이질에 시달리니 항로를 잃고 망망대해를 떠다니기를 열흘.
모든 해적들이 이질에 시달리는 와중에 그토록 바라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저 거지 놈들은 대체 뭔 생각으로 여기서 떠다니나. 어이 댁들 뉘쇼? 괜찮소?”
얄궂게도 영국 해적을 지원한 이들은 근처를 지나던 신농도인 선단이었다. 조선 관원 출신인 노이네를 선장으로 한 대규모 선단은 이들을 스페인 무역선인 줄 알고 지원하려 하였다.
하지만 노이네와 선원들이 배를 조사하자 증거가 속속들이 파악되었고 이들의 정체마저도 파악되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직인이 찍힌 사략허가증을 살펴보면서 결론을 내렸다.
“이 친구들 영길리 출신 해적들이로군. 해적들이라 하지만 주변 섬에서 약탈한 흔적도 없으니 해적질을 하려고 여기까지 억지로 항해하다 전멸하기 직전까지 몰린 건가?”
“아무리 봐도 그런 녀석들이겠지요. 참 무모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는 놈들입니다.”
지나친 탈수증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피부가 쪼글쪼글해지고 열이 치솟아 오르는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노이네는 생각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탈수로 쪼글쪼글해진 손을 내밀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살…… 레…… 주게…….”
해적행위를 하면 즉결처분이 가능하지만 이들은 해적일 뿐 아직 조선에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노이네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결정하고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부축하여 침대에 옮겨주었다.
“내가 판단하기 힘든 일이니까 이들을 관찰사께 데려가면 어떻겠나? 호주라는 땅에 조선의 개척단이 머물고 있는데 이들을 전해주면 최소한 몸값과 치료비는 받을 수 있을 거라네.”
“네? 이 많은 이들이 이질에 시달리는데 어떻게 치료하시려 합니까? 의원이나 약재야 있지만 삼백 명이 넘는 해적이라 약이 부족합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먹물 좀 먹어본 사람이라 치료법을 찾아냈다네. 거기 자네! 선창에서 고래 기름과 이현전에서 만든 증류기를 꺼내게. 기름을 태워서 바닷물을 맹물로 바꿔오게나.”
노이네는 이현전에서 업무에 종사한 사람이며 나름 많은 지식을 축적하였기에 과학적 사고를 거듭하며 이질의 치료법을 찾아냈다.
그는 계속 모이는 맑은 증류수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 예전에 서애 대감과 같이 업무를 행해본 적이 있다네. 당시에 서애 대감께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감자를 먹고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지.”
“저도 비슷한 일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독극물을 먹어 장으로 내려가 탈을 일으키면 소금물 한 말(6리터)을 먹여서 내장을 씻어낸다 하였지요. 그런데 그걸 왜 준비하라 하십니까?”
“이질도 장에 독이 쌓여서 일어나는 병이니 소금물을 잔뜩 먹여서 장에 쌓인 모든 독을 밀어내면 병이 치유되겠지. 안 되더라도 물을 마시는 것이니 목숨은 부지하지 않겠나?”
비록 잘못된 논리에서 출발하였지만 현대에 개발된 경구수액 요법이 폴리네시아 출신 관원에 의해 16세기 말에 최초로 시도되었다.
물론 거대한 됫박에 담긴 소금물을 퍼먹은 영국인들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우리를 죽! 웁! 으아아악!”
“거 힘도 약한 양반들이 반항 한번 거세구만. 아무 말도 마시고 하루에 한 말씩 마시구려. 자네들! 고래 기름도 충분하고 설탕도 충분하니 계속 내가 정한대로 물을 만들어서 먹이도록!”
경구수액은 이질을 치료하지는 못하여도 탈수증상에 시달리던 영국 해적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약재였다.
매일같이 설사를 하고 설사를 한 양의 곱절에 가까운 경구수액을 강제 섭취한 해적들은 1589년 1월 호주에 도착하였다.
* * *
권율도 폭주하는 업무에 골머리를 썩였다. 이주 당시 오천 명에 불과한 이주민들은 계속 늘어나 벌써 세 배가 넘는 일만 팔천여 명에 달하였다.
더군다나 1589년 2월이 되어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하였다. 여송도 관찰사 황정욱(黃廷彧)이 이천여 명의 사람을 보낸다 하여 권율이 직접 맞이하였는데 배에서 내린 이들은 권율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저들은 왜병이 아닌가?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데 일도 잘 못 하는 왜병들이 오다니.”
“내 말이 그 말일세. 호주에 인력이 부족하다 하여 사람을 보내려 하였는데 왜병 외에는 인력이 남지 않더군.”
왜병들은 싸우기를 즐기니 용병으로 삼으면 그럭저럭 괜찮지만 농사가 서툴고 힘도 부족하여 그리 좋은 노동력은 아니었다.
황정욱은 권율의 시선을 받아넘기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아국은 왜국을 정벌하여 새로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쇼군)을 옹립하고 이권을 얻어내기 직전의 상황이 아닌가. 당연히 포로가 넘쳐날 수밖에 없지.”
황정욱의 말을 듣자 권율도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파악하였다.
자신이 호주를 개척하는 동안 조선군은 이미 일본에 대한 역공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친구인 이순신이 보내온 서신으로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영의정 이이가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담당하고 야전 지휘관은 도원수(都元帥) 이순신이 담당한 역공인 데다 조선 침공 당시 대부분의 군대가 붕괴한 일본이니 더 이상 저항할 방법조차 없었다.
권율은 결과물인 더 많은 포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해가 왜인들을 철저히 짓밟는다는 소식을 보내왔을 때에는 속이 다 후련했지만 여기까지 영향을 끼칠지는 몰랐군. 여송을 넘어 호주까지 이렇게 많은 포로를 보낸다면 아국의 상황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군.”
“이미 지난 전쟁에서 왜인 포로를 너무 많이 잡아들여 아국에서 골머리를 썩이는 상황이었다네. 하지만 도원수 여해가 진군할 때마다 포로가 생겨나니 감당할 수 없어서 왜인 포로들을 여기까지 보내게 되었다네.”
“주상전하께서 내려주신 성은이니 이를 마땅히 받들고 잘 활용해야지. 저들이 농사에 능숙하지 않아도 체격이 작아 요긴하게 쓸 방법이 넘쳐나니 염려하지 말게.”
“주상전하께서는 여의치 않다면 왜인들을 다른 지역에 팔아 물건을 사들여도 좋다고 명을 내리셨네. 나도 대월(베트남) 일대에 포로들을 팔기로 했으니 여의치 않다면 그렇게 하게나.”
여의치 않다 하여도 왜인 포로들을 쓸 방법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곳곳에 개발된 광산으로 보내서 역청탄과 철광석을 캐내게 해도 충분하고 솔로몬 제국 개척단에게 보내서 목화를 따내게 해도 좋으리라.
권율이 포로의 처우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니 다른 불청객이 차례로 옮겨지는 왜인 포로들을 보고 군침을 삼켰다.
얼마 전에 노이네의 선단에 의해 끌려온 영국 해적들이지만 이들은 천연덕스럽게 자신들을 소개하였다.
그저 상인일 뿐이고 무력을 동원해 상품을 획득한다는 소개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기에 권율은 몸값만 받고 방면하기로 하였으며 가급적 비싼 약재를 동원해 정성스럽게 치료하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비롯한 간부들의 이질은 거의 다 치료되었고 선원들이 몸을 추스르고 있으니 조만간 사라질 사람이리라.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미소를 억누르던 드레이크와 눈이 마주친 권율은 귀찮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대체 뭘 그렇게 쳐다보나. 세상을 한 바퀴 돌았다 하면서 왜인을 본 적 없다니 세상을 다시 한번 돌아야 경험이 쌓이지 않겠나. 이질(痢疾)이 완쾌되었으면 어서 출항할 준비나 하게.”
“실은 저도 장사꾼인지라 장사 생각이 절로 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을 카리브 해에 있는 설탕 농장에 팔아치우고 설탕을 사들이면 무역 수익이 껑충 뛰겠지요.”
“정녕 장사꾼이라면 그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기갈수(飢渴水: 경구수액)와 약재 가격이나 변상하도록 하게나. 자네들을 치료한 약재가 은자 오천 냥에 달하는 것을 잊었나?”
“물론입니다. 저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이름과 여왕 전하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뭐라도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당장 구해오도록 하지요.”
여전히 눈을 굴리는 드레이크를 보며 권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해적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영국에 공식 외교서한을 보내 은자 오천 냥을 받아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리라.
지금이야 스페인보다 강력한 조선의 함대에 위축되어 있지만 언제라도 해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놈들이었다.
권율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자 드레이크는 미간을 찌푸리며 왜인 포로들을 평가하였다.
“스페인 사략선단을 통해 소문을 들었지만 체격이 저렇게 작을 줄은 몰랐군. 체격이 작으니 선창에 가득가득 담을 수도 있고 밥도 덜 먹을 테니 얼마나 좋아. 저 포로만 사서 카리브 해에 풀어놓아도 소득이 짭짤할 텐데.”
“댁들이 영길리의 상인들인가? 듣자 하니 무력이 출중하고 해적에 가깝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갑자기 스페인어가 들려오자 드레이크가 바짝 긴장하며 몸을 돌렸다.
자신의 육촌 존 호킨스가 닥치는 대로 팔아치웠던 흑인이 아닌 체격이 건장하고 키가 자신보다 한 뼘은 거대한 마사이족 출신 관원이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저희는 해적이 아닙니다. 그저 무력을 동원해…….”
“영길리의 악명은 아주 잘 알고 있지. 우리야 피해를 입은 적은 없지만 머나먼 서쪽의 키가 작은 이들(서아프리카 흑인들은 상대적으로 키가 작다) 수만 명을 납치해서 팔아넘겼다더군.”
상대가 근육이 불룩거리고 체격이 훤칠하여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사이족 관원은 움츠린 그를 보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였다.
“조선 사람들이야 체면을 차리느라 함부로 제안할 수 없었겠지만 우리는 아닐세. 만약 바르바리 해적 놈들을 잡아 와 우리에게 팔면 한 놈당 은자 쉰 냥을 지급하겠네.”
“뭐라 하셨습니까? 바르바리 해적? 그딴 약골들을 잡는 데 이런 거금을 주실 작정입니까?”
“선금으로 은자 일천 냥을 주겠네. 해보겠나?”
드레이크는 노예무역을 잘 하지 않았지만 존 호킨스에게 시세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보통 시세는 서아프리카에서 3파운드, 대서양 너머로 운반하면 운반비 덕분에 20파운드로 뛴다.
바르바리 해적의 주요 구성원인 아랍인이라면 시세가 약간 뛰지만 인도양에서 호주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한 명당 18파운드라면 당장에라도 잡아 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쳐야 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권율에게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톨가도 한 손을 거들었다.
“거기 자네 상인이라 했나? 낙타를 구할 수 있다면 몇 마리든 상관이 없네. 낙타 한 마리에 은자 이백 냥을 줄 테니 마음대로 사 오게나.”
“낙타 한 마리에 칠십 파운드라니요! 이런 세상에!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호주는 노천 광산이 넘쳐나 자원을 캐내기 쉬운 땅이기에 톨가도 마사이족 관원도 그가 휘청거릴 정도로 막대한 은과 금을 건네주었다.
이번 원정으로 인한 손해를 벌충할 길을 마련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눈에 불을 켜고 항해 준비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