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63화
2부 23장 20화 수확(3)
프랑스에서 스페인은 다시 육로를 통해 움직였지만 이제 다들 조선의 풍경을 그리워하니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본래 해로를 통해 이동하려 하였지만 지금 스페인과 잉글랜드는 한창 해전을 벌일 시기라 하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일은 바라지도 않으니 육로로 움직일 수밖에 없소이다. 애초에 이 많은 말과 소를 옮기려면 배 열 척은 필요할 것인데 죄다 징발되었으니 방법이 없구려.”
“한 달 이내에 닿을 곳이니 문제는 없지만 소들이 참으로 호강하고 있습니다.”
“본래 소달구지 위에 사람이 올라타야 하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구려. 하지만 새끼를 밴 암소가 이 먼 거리를 움직이면 몸이 쉽사리 축나는 법이 아니겠소.”
앙리 4세가 전해준 선물 중 하나인 말이야 힘과 체격 모두가 대단한 품종이니 당연히 마차를 끌고 짐을 운송하는 데 쓰였다.
문제는 700마리에 달하는 소들이었다.
수가 워낙 많으니 임신한 소도 있었고 이런 소들은 기나긴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유산하거나 몸이 축나기 마련이었다.
결국 이 귀중한 소는 수레에 실렸고 그 수레는 사람이 끌었다.
“아이고 하체 단련하기 좋구먼. 소 한 마리면 양친(兩親) 두 분과 고구(姑舅: 시부모) 두 분을 합친 무게와 흡사하니 도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훈련하기에 딱 좋다네.”
“거 입신체비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니 나도 끌고 다니겠네.”
“차라리 순번을 정해야 하지 않겠나. 자고로 장유유서라 하였으니 내가 먼저 끌고 다니겠네.”
엄연히 수소도 있고 아직 짐을 다 올리지 않은 말도 있었지만 사람이 수레를 끌고 다닌답시고 서로 으르렁거리다 숙소에 들어가자 아예 입신체비 대결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서양 기준으로 기괴하고 조선 기준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목격한 프랑스 병사들은 입신체비를 몰라도 조선 관원들을 응원하며 이 대결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귀중하게 다뤄진 소는 목초를 뜯고 돌아와 우유를 생산해 주었다.
“제가 알기로 아국의 소가 새끼에게 먹이는 우유의 양은 기껏해야 마흔 되(240리터)가 조금 넘는다 하더군요. 하지만 영길리의 소는 뿜어져 나오는 우유 줄기부터 다릅니다.”
“하긴 소가 쌍둥이를 낳으면 우유가 부족해서 콩을 갈아 죽을 쑤어 먹여야 했지. 대충 얼마 정도의 우유를 뽑아낼 것 같나?”
“네 배는 족히 될 겁니다. 그나저나 우유가 좀 색이 노르스름한 것이 왜 이러지. 여름날이라 꼴(소에게 먹이는 풀)을 잘못 베어다 여물을 만들었나?”
사절단에 북인 출신도 여럿 있었다.
개중에 동연식이라는 관원이 어린 시절 소를 좀 쳐봤다는 명목으로 노련하게 손을 놀려 우유를 짜내고 한 모금을 들이켰는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우유 한 잔을 가져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우유입니까? 제가 북인 출신이라 우유는 많이 마셔보았는데 이런 맛이 날 줄은 몰랐습니다. 서애 대감께서도 한번 드셔보시지요.”
나도 현대에서 우유는 많이 마셔 보았고 조선시대에는 좋은 스승을 둬서 입신체비가 끝나고 우유 한 잔을 마시며 속을 달래고 단백질을 보충했었지.
하지만 이 우유의 맛은 너무 느끼하다. 버터를 섞은 우유의 맛과 흡사하다!
“우유가 뭐 이리 지질(지방)이 많은가! 지나치게 지질이 많아 노르스름한 우유일세!”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亞麻) 기름을 한 술 넣어 섞은 맛이 나지 않습니까?”
“당장 적당한 나무통을 가져오게. 이 우유에서 얼마나 많은 수유(酥油: 버터)가 생산되는지 보고 싶다네!”
버터를 만드는 가장 무식한 방법은 갓 짜낸 우유에서 웃물(생크림)을 따로 모아 통에 넣고 흔드는 방식이다.
나도 이황에게 처음 입신체비를 배울 때 지질을 먹으려면 그만큼 입신체비를 행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몇 번 했었지.
팔이 뻐근해질 때까지 나무통을 흔들어대니 안에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줄어들고 뭔가 덩어리가 생기는 소리가 들렸다. 통을 열어보니 갓 만들어진 버터가 있었는데 그 양이 보통 수준이 아니다.
“아국에서 널리 쓰이는 소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가 넘는 수유가 나왔습니다.”
“네 배의 우유를 산출하고 두 배가 넘는 수유가 나온다면 이 소 한 마리가 아국 소 여덟 마리와 견줄 수 있는 수유를 뽑아낼 수 있다네. 이건 반드시 모두 살려서 가져가야 한다네!”
앙리 4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씌워진 오명을 걷어내려고 짚이는 대로 가축을 사들여 전해줬으리라. 하지만 이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양의 기름진 우유가 쏟아지는 소가 튀어나왔다. 심지어 버터의 맛조차 좋았다.
“본래 입신체비를 행할 때에는 양생(벌크 업) 과정을 제외하면 지질을 줄여야 하지만 참으로 비단같이 곱고 혓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수유로구나. 이런 수유는 구주 일대에서도 진귀하게 취급하는 녀석이다.”
형님은 지난 시일동안 유럽의 음식을 맛보았으니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형님조차도 버터를 조금 맛보더니 한술을 떠서 빵 위에 바르려다 가까스로 절제하고 반 술만 떠서 먹었다.
이런 소를 조선 곳곳에서 기른다면 백성들도 버터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내려갈 것이며 잘만 하면 명절날 버터 비빔밥을 먹을지도 모른다.
다음 무역을 실시할 때에는 프랑스에 혜택을 잔뜩 주어야 하리라.
* * *
1588년 9월 1일, 스페인으로 귀환하자마자 잉글랜드 원정에서 스페인의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와 다시 합류한 스페인 군관 우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리를 마드리드로 안내하면서 전쟁 경과를 말하였다.
“이번 잉글랜드 정벌은 실패하였습니다. 산타크루즈 후작 알바로 데 바잔이 원정 여섯 달 전에 병사하고 후임자를 선정할 수 없어 시도니아 공작이 모든 전쟁을 지휘하였지요.”
우고는 펠리페 2세의 명령을 들었는지 전쟁 과정을 명확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놈의 전쟁 계획서를 고스란히 따른 전쟁 진행 과정을 듣자마자 분통이 치밀어 오를 수준이었다.
“8월 8일 원정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와 일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잉글랜드는 세 배가 넘는 우리 군함을 상대로 원거리에서 포격을 쏟아댔지만 숫자 차이 덕분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지요. 다만 몇 척의 군함이 야간에 기습한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나포되었습니다.”
“그야 어린아이와 어른의 싸움이니 당연한 결과요. 하지만 펠리페 2세 전하께서 작전 계획을 미리 유포하여 큰 손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원거리에서 포격을 당해 함선이 조금 손상을 입은 것이 전부였지요. 하지만 지상군의 진격이 저지대 반란군(네덜란드)에게 가로막혀서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칼레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화공이 시작되었지요.”
작전 계획을 미리 퍼트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성공할 원정이었다. 해군은 그냥 수를 앞세워 밀고 들어가면 잉글랜드는 이 거대한 스페인 함대의 진로를 예측하지 못해 화공은커녕 저항조차 못 했으리라.
지상군을 가로막는 네덜란드도 작전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니 진격 경로를 가로막지 못했을 것이라 지상군도 성공적으로 합류했으리라. 하지만 우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하였다.
“그놈의 화공이 문제였습니다. 갑자기 북풍이 불며 수많은 화공선이 함대를 향해 물밀듯 내려왔고 조선에서 보내온 비격진천뢰를 적중시킬 수 없었습니다. 큰 손실은 없었지만 함대가 혼란에 빠지며 분열하였지요.”
“본래 비격진천뢰는 급격히 움직이는 목표물에 적중시키기가 극히 어렵소. 내 벗도 젊은 시절부터 포술에 눈을 떠 병사들을 조련하여 가까스로 명중시킨다 하더군.”
우고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왔는데, 있으니까 사실인 걸 뭐 어쩌라고.
이순신 휘하 포병들은 적의 속도를 가늠해 자발적으로 각도를 수정하는 괴물들이니 가능한 일이다.
우고는 내 떳떳한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쉬고 전쟁의 결말을 말했다.
“분열한 함대를 집결하여 잉글랜드를 크게 한 바퀴 돌아 귀환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를 크게 돌아가며 두 번의 폭풍이 함대를 덮쳤습니다. 귀환하니 질병으로 죽은 이를 합쳐 사망자만 이만 명 이상에 달하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오. 아국의 병기를 지참하였음에도 그렇게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비극적인 일이로군.”
작전이 유포된 시점에서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폭풍까지 겹치는 불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 폭풍으로 갈기갈기 찢긴 함대가 요격당하며 손실을 더욱 많이 당했으리라.
귀국 직전에 펠리페 2세와 접견이 시작되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에게 비싼 값에 사들인 비격진천뢰를 써보지도 못한 펠리페 2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고민하였는데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접견하였다.
“주님께서 바람을 내리시어 프로테스탄트의 손을 들어주시니 감내할 수 있는 싸움이었소. 물론 이번 싸움에서 우리가 손실만 입지는 않았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잉글랜드 원정에 참가한 스페인 함대의 규모는 130척이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조선으로 따져도 함대의 6할 이상을 동원한 초대규모 원정인데 이 원정이 실패하여도 소득이 있다고?
사망자는 물론이고 파손된 함선만 44척에 달한다. 이런 피해를 입으면 조선도 10년 가까이 예산을 끌어모아야 하는데 저렇게 떳떳한 이유가 뭘까. 혹시 아Q처럼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을 동원하기라도 했나?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더욱 떳떳하게 나섰다.
“물론 내가 너무 방만하여 일을 그르친 것도 있소. 작전 계획을 미리 유포하지 않고 진중하게 나섰다면, 조선이 보내온 병기인 비격진천뢰만 믿고 화공 대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는 지나간 이야기요.”
“본래 사람은 역경을 딛고 일어나야 더욱 발전하는 법입니다. 비록 머나먼 타국의 사람이지만 전하께서 이렇게 생각하시니 스페인의 앞길이 더욱 환히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비격진천뢰의 단점을 알게 되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번 칼레 해전은 비격진천뢰의 단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전쟁이다. 비격진천뢰가 정말 모든 면에서 좋은 병기였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비격진천뢰로 도배하고 쏘아댔으리라.
하지만 비격진천뢰는 자폭 위험성 때문에 200보(320m)의 사정거리를 가진다. 이 정도면 운총도 적중시킬 수만 있다면 맨몸의 사람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히는 거리니 해전 기준으로 초 근접전이다.
당연히 상식적인 교전거리인 300보(480m) 내외에서는 그저 갑판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이지.
펠리페 2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옳은 말이오. 더군다나 포를 곧게 쏘지 않고 각도를 치켜 올려 포물선으로 쏘는 방식이니 전력으로 돌진하는 화공선을 맞추기가 힘들고 대부분 적중하지 못했다 하더군.”
“그러하면 화공선을 회피하기 위해 대열이 흐트러졌을 것이고. 가뜩이나 갑판 위에 올린 대완구이니 더욱 크게 흔들려 제대로 쏠 방법도 없었음이 분명하군요.”
이쯤 되면 단점 덩어리에 장점은 화력 하나인 병기를 비싼 값에 팔았다고 역으로 화를 낼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당장 비격진천뢰의 사용법을 가르친 이윤범의 입에서 이를 깨무는 소리가 들렸지만 펠리페 2세는 오히려 반색하며 말하였다.
“하지만 조신이 전해준 병기는 마지막 전투에서 빛을 발하였소. 알다시피 잉글랜드의 해군 총사령관은 찰스 하워드 백작이며 재능이 뛰어난 자이지만 엄연한 정치인이지. 하지만 휘하 사령관은 죄다 해적 출신이오.”
“해적 출신이라 하셨습니까? 그러하면 패퇴한 서반아 함대의 뒤를 집요히 추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겠군요.”
“주님께서 폭풍을 일으켜 우리의 함대를 패퇴시켰으니 이는 감내할 수 있는 일이오. 하지만 주님께서 내리신 시련을 버틴 함대를 해적 출신인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함대가 추격하여 약탈하려 하였소.”
해군은 명백히 적을 물리치는 것이 주 업무이다. 그러니 포격전을 시작으로 적을 침몰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전리품은 모든 적을 격멸한 뒤 운이 좋으면 챙기는 부수입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적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가급적 많은 노획물을 챙기는 것이 주 업무이니 모두를 침몰시키기보다 어느 정도 포격을 벌이고 적이 무력화될 시점에 약탈로 전환한다.
그런데 이 짓거리를 해군사령관이 둘 다 실시했다고? 정신이 나갔나?
“지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라 머리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둘 다 해군 사령관인데 죄다 약탈을 실시하다니요? 아무리 해적이라도 법도가 있지 않습니까?”
스페인 상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있었다. ‘바다 위에서 만나는 영국 놈들은 죄다 해적이다’라는 소리였지만 정작 조선의 영역인 태평양에 드나드는 놈들이 별로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찰스 하워드 백작이 핏대를 세우고 추격전에 나서는 두 사령관의 목을 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눈에 선할 지경이었다.
그러자 펠리페 2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게 놈들의 패착이었소. 눈치가 빠른 프랜시스는 부하를 먼저 보내 화를 모면했지만 존 호킨스의 함선은 섣불리 접근하다 비격진천뢰 네 발을 얻어맞고 화약이 유폭하며 침몰하였소이다. 모두 합치니 잉글랜드 군함 열일곱 척을 침몰시킬 수 있었지.”
“불운 중의 행운이 이런 때에 쓰이는 말이겠군요. 퇴각하는 와중에 적의 군함을 절반가량 격퇴하고 해군 장성을 폭사(爆死)시켰다면 이는 패전이지만 손실을 감내할 수 있는 패전입니다.”
“바로 보았소이다. 더군다나 존 호킨스는 지팡구 제도(서인도 제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에서 불법으로 수많은 노예를 거래하는 놈이요. 이런 자를 죽였으니 온전한 패전이겠소?”
스페인의 피해도 만만치 않겠지만 잉글랜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엄청나게 위축되리라. 운 좋게 태풍을 만나 이겼지만 패배한 스페인 군함이 근접전에서 끔찍한 위력의 병기를 쏘아대지 않는가.
특히 해군이 아닌 해적을 고용해 해군으로 사용하는 입장이니 더욱 문제다. 전쟁 이후 노략질을 원해 전쟁에 참가하는 놈들이 노략질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내 표정을 보고 펠리페 2세는 흥에 겨워 말하였다.
“조선에서 전해준 병기인 비격진천뢰의 단점은 극명하지만 장점을 발견하였소. 다른 무엇도 아닌 해적을 상대할 때 놈들의 전략을 정면으로 받아칠 수 있는 녀석이더군.”
생각해 보니 비격진천뢰도 두고두고 쓸데가 있었다. 분명 사거리가 짧은 무기이지만 한 대를 제대로 얻어맞으면 어중간한 배는 유폭당할 수준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이는 해적들에게 치명적인 문제이다.
해적이 물건을 약탈하려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 하지만 배를 침몰시키지 않으면 갑판 위에 있는 비격진천뢰가 두려워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
결국 대규모 함대를 운용하는 해적이 아닌 이상 함부로 상선을 털어댈 수 없으리라.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비격진천뢰의 가격은 비싸지만 상선에 대완구 한 두 문과 비격진천뢰 대여섯 발을 넣어두면 해적들은 얼씬도 하지 못하겠군요.”
물론 해전에서 점점 큰 함선을 사용하고 화포도 커지며 사거리가 길어지니 무역선의 보호용도로 쓰다가 차츰 도태될 병기이지만 최소한 오십 년 이상은 쓰이리라.
펠리페 2세는 나와 이윤범의 손을 맞잡아 악수를 나누더니 답하였다.
“비록 내가 거만하고 재주가 부족하여 일을 그르쳤지만 앞으로 시대가 변하여 비격진천뢰가 무용지물이 되기 이전까지 해적들은 대서양에서 기를 펴지 못할 거요.”
“이제 태평양으로 넘어오는 해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비격진천뢰를 상선에 지참해야겠군요. 앞으로 은퇴하는 수군 병사들이 취직할 자리가 늘어나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윤범도 엄연한 수군 장수이기에 펠리페 2세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잉글랜드 해적이 태평양에서 날뛸지도 모르지만 그놈들도 조선의 화약 맛을 볼 날이 오겠지. 어차피 대규모 함대를 이끈다 해도 이순신이 적당히 몰살시키면 끝이다.
“이번 조선 사절단의 방문은 스페인에게도 충분한 이득이었소. 아마 조선 사절단이 없었다면 존 호킨스를 죽이지도 못했을 것이며 일방적인 패전으로 끝을 내렸겠지. 내 비록 부족하지만 다른 선물도 조만간 조선으로 보낼 것이니 어서 돌아가시구려.”
비록 비격진천뢰는 모두 스페인에 팔아 없어졌지만 다른 짐으로 더욱 무거워진 조선 함대가 세비야를 출항하였다. 다시 여섯 달 동안 조선으로 항해하면 이 년이 넘게 걸린 서행사 일정도 마무리된다.
앞으로 일 년 정도 휴식하며 미주 개척을 준비해야겠다.
그나저나 권율은 지금쯤 뭘 할지 궁금하군.
#작가의 말
역사가 틀어지며 칼레 해전은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공멸 구도로 돌아갔습니다. 총 피해는 스페인이 많지만 잉글랜드는 돈 벌 거리가 줄어들게 되었지요.
첨부파일은 칼레 해전에서 추격전을 벌이다 폭사한 존 호킨스 가문의 문장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흑인 노예가 보이는데 이 가문 자체가 뭘 하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r_john_hawkins_early_arms_colour.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