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56화
2부 23장 13화 망국(亡國)(2)
앙리 3세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 그의 총신(寵臣: 총애를 받는 신하)들은 물론이고, 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보낸 신하들이 한 몸이 되어 그를 수도에서 빼내었으리라.
“모후께서 친히 이 자리에 오셨으니 인사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서 블루아 성으로 모시게.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인사를 올리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기나긴 길을 직접 오신 분이 바로 마차를 타고 돌아가신다면 몸이 더욱 상하실 것입니다. 어서 인사를 올리시고 편히 쉬게 하시어 혹여나 일어날 비극을 막으십시오.”
앙리 3세를 여기까지 이끈 이들은 어머니가 보낸 신하가 분명하다. 아마 기습 작전이 실패하여 왕권이 무너질 경우를 예측하고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미리 수를 써뒀겠지.
천천히 정지한 행렬이 좌우로 열리고 늠름한 백마 여섯 마리가 몰고 다니는 마차가 앞으로 나서더니 멈췄다.
궁궐에서 탈출한 프랑스인들이 모두 무릎을 꿇어 예의를 표시하자 마차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여인이 부축을 받으며 내려왔다.
“왕의 어머니이자 국가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듣자 하니 학살자나 악녀라는 평가를 듣는 앙리 3세의 어머니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인이다.
의복이야 화려함 그 자체이지만 눈빛은 깊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이고 앙리 3세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전하께서 참으로 비극적인 일을 당하셨으니 이 어찌 어미로서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앙리 드 기즈와 화친을 맺고 왕위를 보전하시며 나바르의 앙리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시지요. 그동안 벌어질 일은 제가 수습해 보겠습니다.”
“어머니께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제가 어떻게든 수습해, 아니! 일단 블루아 성으로 돌아가시지요. 공기가 찬데 이렇게 밖에 오래 계시면 곤란합니다.”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35세쯤 먹고도 방구석에서 배나 북북 긁으며 백수생활을 하는 아들이 60세가 다 되어서 직장에서 퇴직한 어머니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모습 같았다.
사실 칠순이 다 된 여인이 정무(政務)에 참여하는 일 자체가 조선에서도 받아들이기 불편한 상황이지만 서로 대화하는 말투 자체가 저런 식이니 사절단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이는 명명백백한 불효가 아닌가.
“저런 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 걸왕 조차도 사발(姒發: 걸왕의 아버지)에게는 홀대하였다는 기록이 없는데 칠순에 가까운 노모를 저리 대접하다니.”
“저게 다 근육이 없어서라네. 나라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담아 등에 업고 돌아다녔을 텐데 저 빈약한 몸으로 어머니의 몸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모자(母子)간의 대화가 저리 삭막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권력 앞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인연도 사라진다 하지만 이쯤 되면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동정할 지경이었다.
둘의 의미 없는 대화가 끝나자 그녀는 우리 앞에 와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머나먼 동방에서 오신 여정도 고되었겠지만 이런 불민한 모습을 보여드려 모후로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책임지고 사절단 여러분을 로마로 안내할 기회를 주시지요.”
“기회라 하시니 저희에게 있어서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저 저희가 편안히 항구로 나아갈 발판만 마련해 주셔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야 프랑스에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솔직히 말해 동양식으로 깊게 절을 올리고 싶었지만 지나친 예의는 상대에게 불편함을 끼칠 뿐이다.
천만다행으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이 세력이 제법 강했는지 주변에서 속속들이 병사가 합류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만 명이 넘는 대군이 우리 주변을 호위하였고 가까스로 블루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낭트 시장이 연락을 받아 우리를 위해 배를 준비했다 하더군요. 왔던 곳으로 돌아가니 아쉬울 뿐이지만 육로와 해로를 번갈아가며 로마까지 다녀오면 충분할 겁니다.”
스페인 군관 우고가 사력을 다해 움직여서 로마로 향하는 배편을 마련해 주어 다행이다.
내가 언제나 준비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파리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앙리 드 기즈라는 작자의 반란군에게 휘말려 곤욕 아닌 곤욕을 치렀으리라.
앙리 3세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숙소도 제공해 주고 호위 병력도 붙여준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작별 인사라도 올리려 찾아가는 와중에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서둘러 달려가니 기사들이 앞을 막았고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네 모든 것을 무너트려 폐허로 만들고 있구나!
-당장 사람을 불러와라!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던 찰나였는데 옆에 있는 수도사의 눈을 보고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며 왕실 인원들이 머물고 있을 안뜰을 노려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겠소. 혹여나 앙리 드 기즈라는 자가 암살당했소?”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종이 본래 있을 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지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암살 철회 명령이 늦게 전달되어 암살이 실행된 것이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물론이요, 앙리 3세의 세력은 모조리 천주교인데 이 천주교 세력의 핵심축인 앙리 드 기즈 공작이 암살당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나라에서 앙리 3세를 좋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꼴이 되었다. 지금이야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저런 노령에 충격으로 쓰러졌다면 며칠 이내에 병사하리라.
다시 짐을 꾸리고 있으니 앙리 3세의 신하는 아니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보낸 사람이 도착하여 우리를 낭트로 안내하였다.
아마 이 나라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앙리 3세가 목숨을 보전하는 길은 거의 없으리라.
* * *
스페인으로 돌아와 중간보고를 들으니 이미 앙리 3세의 목을 따내기 위해 스페인에서도 원정대를 보내기 직전의 형편이었다. 당연히 펠리페 2세를 다시 만날 이유가 없으니 세비야에 들렀다 바로 로마로 향하였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가까스로 양력 11월 28일에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 사절단 일정에서 로마 방문은 석 달 내외의 짧은 기간만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조선 사절단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친히 찾아와 주시니 저희 모두 백 년 전의 전통을 되새기는 마음을 품을 뿐입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구려. 교황 성하(聖下)께서 직접 보낸 사람이시오?”
“그렇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질서를 바로잡고 제도를 정비하는 분이시니 이번 일을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듯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미 조선 분들이 호화로운 식단을 원치 않는다 하시니 저희도 많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제야 좀 제정신인 사람으로 돌아와 마음이 놓이는군.
우리를 접견한 주교의 말대로 배정된 숙소도 평범하지만 정갈한 장소였고 대체적인 식사도 기름기가 적었다.
물론 화려함은 숨겨져 있었다.
“이거 유과(油菓)나 정강 혹은 과편 같은 것만 먹을 줄 알았는데 이리 호화로운 후식이 나올 줄은 몰랐군. 한입 크기로 작게 나왔으니 안 먹을 수도 없고.”
화려한 디저트가 적당한 식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손가락만 한 과자인 카놀리(cannoli)가 나왔는데, 튜브 모양의 빵에 크림이나 이 시대에는 제법 귀한 설탕에 절인 과일을 끼워 넣는 녀석이다.
조선 관원들은 이 앙증맞은 과자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한 입씩 먹었다.
“당질이나 곡분이 지나치면 결국 몸속에서 기름으로 변하는 법이지. 하지만 한 입 정도 먹으면 가볍게 몸을 놀려서 걷어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저도 간혹 입신체비에 지친 몸을 달콤한 팥죽을 먹으며 다스리는 데 지나치게 과하여 뱃살이 늘어날까 염려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손가락 크기라면 걸릴 것이 없군요.”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 하나는 잘 써서 조선 관원들의 평가도 아주 좋았다. 화려함을 아무리 담아도 손가락 하나 분량만 먹으면 칼로리 폭탄을 맞을 염려도 없지 않은가.
주방장은 우리의 반응을 보고 인사를 올리며 기뻐하였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제가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전해진 소식을 들은 바가 있어 재주를 많이 써보았습니다. 앞으로 후식을 즐기시며 저희의 풍요로운 식탁을 체험하시지요.”
“이 과자를 만든 사람은 누구요? 대체 어느 분이기에 이런 귀중한 요리를 만든 거요?”
“프랑스 궁정에서 호화로운 만찬을 만드신 분이시군요. 십 년 전에 별세한 바르톨로메오 스카피(Bartolomeo Scappi)의 제자로서 힘을 쓴 것이 전부입니다. 사실 아직도 스승님을 따라갈 수 없어서 그분의 저서를 정리하는 중에 만들어보았습니다.”
형님과 손을 맞잡은 요리사는 요리사끼리 통하는 바가 있었는지 손의 굳은살을 확인하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다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요리는 조선 식생활에 어느 정도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요소겠지.
배정된 숙소에서 회의를 재개하였다.
우리가 여기에 방문한 목적은 이제 천주교 전파 과정에서 벌어질 교리와 성리학적 관점 사이의 차이점을 좁히는 일이 되었지만 얻어낼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본래 라마국(신성로마제국)은 문물을 전하며 교류를 표하고 옛적에 안평대군께서 기록한 건물과 회화를 다시 갱신할 예정이었소. 하지만 이제는 논의를 실시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소.”
“서반아의 왕 펠리페 2세가 물꼬를 틔워주었으니 그에 응함은 마땅한 일이지요. 서방의 종교인 천주교를 아국의 예식과 결합하여 전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하다 하였습니다.”
결국 몇 달간의 토론은 필수 요소이다. 세스페데스가 아무리 성균관에서 유학의 정수를 배웠다 하여도 부족한 점은 있을 것이며 이는 진정한 전문가들이 나서서 바로잡아야 하리라.
하지만 관원들은 시큰둥한 눈초리였다.
“하지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아국이 천주교를 받아들인다 하면 얻을 이득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금과 은이야 넘쳐나고 구주 일대의 물산은 서반아에서 보내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굳이 라마국까지 와서 오랜 시일을 보낼 필요가 없이 기본적인 협의만 본 이후 라마국 사람이 다시 아국에 방문하라 하면 아니 되겠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냥 기본 협의만 마치고 삼 개월 정도 서적을 모으고 미술품의 도면을 만들며 예술 작품 가운데 소실된 물건을 조선으로 가져가고 싶었지만 이젠 아니다.
그동안 서양에 와서 얻어낸 정보가 많다. 지금 서양에 조선의 대외 진출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명확한 답을 얻어내려는 것이다.
결국 기밀 유출 방지를 위해 나 혼자만 고려하고 있었던 말을 시작하였다.
“서반아에서는 얻어내려 하여도 지나친 값을 부를까 봐 일부러 논의에서 배제한 작물이 있소이다. 솔직히 말해 인삼보다 더욱 가치 있는 명약이 구주에 잠들어 있으며 정확히는 남미주(남아메리카) 일대에서 소출되는 명약이오.”
이 시대의 명약은 인삼이 으뜸이다. 일단 죽어가는 사람도 인삼을 먹으면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으니 당연히 인삼이 으뜸이라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내 확신에 선 눈빛을 보자 관원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서반아에서 연회를 할 적에 귀족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안 사실이오. 친촌(Chinchón) 이라는 고장의 귀족의 아내가 학질을 심하게 앓았는데 라마국 수도사가 준 나무껍질을 달여 먹고 학질이 나아 친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더군.”
“학질이라, 본래 학질은 삼 일에 걸러 한 번씩 열이 치솟고 사지가 후들거리는 증상을 보이다 치유되지 않습니까. 나무껍질을 달여 마신 것과 열이 가시는 증상이 일치한 것이겠지요.”
“구주의 학질은 열이 한번 오르면 닷새건 이레건 열이 올라오다 다시 열흘 동안 열이 가라앉기에 사람이 속절없이 죽어나간다 하였소. 하지만 이 학질이 나무껍질을 열흘간 달여 먹자 씻은 듯이 치유되었소.”
“참말입니까? 그러하면 그 나무의 종자를 반드시 얻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극락도(모리셔스)에 학질이 번지듯이 아국의 여송도에도 학질이 번질까 염려하였는데 약재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사절단원 대다수가 표정이 변하며 나를 우러러보았다.
나야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지만 간혹 산을 타고 돌아다니는 관원들은 말라리아로 곤욕을 치른 사람이 제법 되고 간혹 솔로몬 제국을 들렀다가 배 위에서 말라리아에 죽는 사람도 있었다.
친촌이라는 나무껍질은 현대에도 말라리아 약재로 쓰이는 물건이리라.
내가 왜 이걸 알고 있냐고? 사촌 동생이 군대에서 전방에 배치될 적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점호 때마다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는다 했었다.
먹자마자 속이 뒤집어지고 머리가 아파서 약을 먹지 않으려 하였는데 중대장이 정강이를 후려치면서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명약이라 몸에 해롭지 않으니 꼭 먹으라 했었다던가.
분위기가 달아올랐으니 쐐기를 박았다.
“처음에는 서반아의 왕에게 약을 내어달라 하려는 마음이 있었소. 하지만 남미주 일대에서 가장 활동을 많이 하는 이들은 천주교 신부이자 아국에 방문하였던 세스페데스와 같은 예수회 회원들이라 하였소.”
“과연. 서반아의 왕과 협상하여 친촌나무의 열매를 거둬들이려 하면 천금과 같은 값을 지불해야 하겠지만 천주교의 선교를 허가하는 조건으로 열매를 달라 하면 내어줄 것이 분명하군요.”
“옳은 말이오. 서반아 일대의 귀족들이야 약효를 인지하고 있으니 쉽사리 내어주지 않으려 하겠지만 선교사들은 종교에 목말라 하는 이들이 아니겠소. 더군다나 시일이 더 지난다 생각해 보시오. 소문이 퍼지면 어찌 되겠소?”
다들 바보는 아니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상대가 펠리페 2세였다면 손익계산이 나름 철저하니 약효를 명확히 설명하고 이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하겠지. 최소한 여송도 상당수를 내어주는 수준이 아니라면 이 약재를 절대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상대는 종교가 세상 모든 것의 으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친촌나무의 가치가 아직 낮을 때이며 그 가치를 명확히 인지할 수 없는 예수회 수도사가 상대이니 헐값에 후려치고 남아돌고 여력이 남으리라.
#작가의 말
성룡이가 알고 있는 말라리아 치료제 정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영어로 키나나무에서 추출된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계통은 현대에서 주요 치료제가 통하지 않을 경우에 쓰이는 합성 약품입니다.
근데 저런 잘못된 정보가 간혹 전방에서 근무한 군인들에게 전해지는 경우가 있더군요. 퀴닌 계통이 천연 추출물이라 하여도 몸에 지독히 해로운 약이니 복용에 주의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