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52화
2부 23장 9화 문화 공격(1)
불행히도 내가 배운 서양 언어가 라틴어와 스페인어밖에 없어서 주변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딱딱 소리를 내며 도토리가 바스러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는지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농포(農圃: 정문부의 호) 자네는 외조에 근무하며 불란서 말을 어느 정도 익혔다 했었지. 저들이 대체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가?”
“도토리를 손가락 두 개로 바스러트리는 사람들이니 동전을 휘어버릴 수 있는 괴력이라며 겁에 질려 있습니다. 가능한 일이지만 그게 가능한 사람이 많습니까?”
“옳은 말일세. 무관으로 손꼽히는 입지(立之: 신립의 호)이나 내 벗인 승우라면 모를까 평범한 입신체비사는 불가능한 일이지.”
손으로 찍어내는 금화나 은화는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다. 임차손 녀석이 장기자랑이라면서 술자리에 가면 동화를 엄지와 검지로 휘어버리고 신립은 아예 양손을 동원해 찢어버릴 수 있다 하더라고.
다들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까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금이 간 도토리라면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지지만 금이 가지 않은 도토리면 나도 제법 힘을 주어 쪼개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많고 힘쓸 사람은 더욱 많다.
“아이고 도토리 알 한번 토실토실 하구나. 더군다나 잘 말려서 까기도 쉽고.”
“그러고 보니 제 스승께서도 악력을 단련하라면서 도토리를 직접 까내라 하셨지요. 나중에는 호두를 맨손으로 깨트리라 하셨는데 제가 꾀를 낸 적이 있습니다.”
“나도 꾀를 낸 적이 있소이다. 호두 두 알을 세게 잡아 깨트리지 않고 하나를 개암으로 두면 훨씬 쉽게 깨어지는 법이 아니겠소. 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일이 그립구려.”
어느새 도토리 알맹이가 바구니에 가득 들어찼고 다들 손을 털면서 도토리묵을 기대하는 눈길을 보냈다.
형님은 이 도토리 알맹이를 절구에 넣더니만 순식간에 갈아내고 물에 불리며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도토리묵에 곁들일 간장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호두를 짓이겨 장(醬)을 만들 것이오. 그러니 호두를 한 바구니 까서 내어주시구려.”
“이거 손 한번 제대로 푸는군요. 유 제조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저희가 돕겠습니다.”
다시 딱딱 소리가 들리며 호두를 손으로 까내기 시작하자 시종들은 아예 호두를 까내기 위한 집게를 가져오다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게 손아귀에 힘을 조금 주면 호두가 아예 으스러져서 떨어지니 도구를 사용하는 것보다 빠르다.
형님은 주변을 살펴보다 아예 창고로 들어가서 손짓하였다. 내가 따라 들어가니 형님은 커다란 물동이 안에 담긴 우유를 가져 나왔는데 조금 묽고 시큼한 향이 올라왔다.
이걸 어디선가 본 것 같았는데 형님의 말을 듣자 답이 나왔다.
“이건 수유(酥油: 버터)를 만들고 남은 우유가 아닌가. 이걸 왜 물동이에 담아둔단 말인가.”
“죄송합니다만 이건 낭트성에서 일하는 이들이 가져가는 버터밀크입니다. 이 성에는 어제 짜낸 우유가 넘쳐나니 요리에 사용하시려면 우유를 쓰시지요.”
“그 우유는 자네들이 가져가게나. 수유를 만들어 기름기를 쏙 뺀 우유야말로 내가 필요한 재료일세.”
비싼 우유를 두고 값싼 버터밀크를 쓸 것이라 말하자 시종들은 아예 포기한 눈치였다.
조선도 치즈를 비롯한 유제품을 만들어 먹긴 하지만 한우는 우유가 잘 나오지 않는 품종이라 한계가 있으니 여러 번에 걸쳐서 나눠 쓴다.
우유를 얻으면 우선 버터를 걸러내고 다시 단백질만 남은 우유, 여기서 말하는 버터밀크 안의 유청을 모아서 유청분말을 만들거나 치즈를 만든다.
형님은 여기서 치즈를 만들려 했는지 치즈를 응고시키는 데 필요한 송아지의 위액을 넣고 땀을 흘려가며 저어댔다.
“본래 염소나 양의 내장을 사용하지만 도리가 없지. 불란서는 참으로 대단한 나라가 아니더냐. 이런 지방 관아의 곳간에도 궁궐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식재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지역이 유럽이다 보니 치즈를 만드는 방법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콩비지처럼 부슬부슬한 단백질만 굳어져 나오자 다들 맛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그들이 생각하는 치즈는 기름진 음식이지만 이건 질감이 비지와 흡사하다.
하지만 형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치즈를 뭉쳐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가져온 번철(프라이팬)의 먼지를 닦아대며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번가의 맛이 좋지만 번가 하나만 내어준다면 연회 음식이라 할 수 없겠지. 여기에 유락(치즈)으로 부침을 만들어 곁들이면 그럭저럭 구색을 맞출 수 있겠구나.”
“형님, 불란서 사람들은 지천에 널린 음식을 그대로 먹기만 할 뿐 활용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락과 번가를 합쳐서 좋은 요리를 만들어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마토와 갓 만든 치즈의 조합이면 내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먹고 감동받았던 카프레제 샐러드가 있지.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교대로 쌓고 위에 와인식초를 뿌려 간을 맞추는 샐러드이다.
형님에게 간단히 설명하니 바로 알아듣고 작업에 들어갔다.
“노란 번가와 새하얀 유락을 교대로 썰어낸다면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겠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간장이나 된장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위에는 소금만 올리게 되었군.”
“위에는 졸인 식초를 올리면 될 겁니다. 제가 알기로 불란서는 포도주가 천하제일이라 자부한다 합니다. 그러니 쉬어버린 포도주를 삭혀 만드는 식초 또한 천하제일이 아니겠습니까. 막걸리를 잘 만드는 집이 식초도 잘 만드는 법이지요.”
“생각해 보니 신맛과 졸인 식초의 단맛, 그리고 유락의 고소한 맛이 더해지면 궁중에서도 통할 요리이지. 네 재주가 대단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손재주까지 있으면 내 자리가 위험해지겠구나.”
모든 재료가 준비되자 요리가 삽시간에 끝났다. 물에 불린 도토리 가루는 도토리묵이 되었고 토마토와 치즈는 잘 정돈되어 세계 최초의 카프레제 샐러드가 되었다.
하지만 연회에는 고기가 빠질 수 없으니 형님은 닭가슴살과 다리를 석쇠에 구워서 마지막 요리를 만들려 하였다.
“나름 입을 호강하는 자리이니 닭가슴살과 다리를 구워 이 위에 느글거리는 기름 대신 유락을 얹고 다시 구워내면 흡족한 맛이 나오겠지. 안평대군께서 향채(香菜: 허브)의 씨앗을 가져와 번성하게 만들었는데 이걸 얹으면 되겠구나.”
“죄송하지만 연회에는 수프가 나와야 하는데 이 수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프라 함은 탕국이 아니오. 가뜩이나 더위가 거세지고 있으니 뜨겁고 기름진 탕국을 왜 먹는단 말이오. 탕국 재료는 바로 여기에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뭔가 했는데 형님이 집어 든 물건은 아직 숙성이 덜 된 오이 피클이었다.
아삭거리는 맛이 남은 피클을 잘게 썰어서 고춧가루와 소금을 좀 넣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탕국이 되었다. 물론 요리사는 아예 경악을 하였고.
낭트 시장은 우리가 만든 연회 음식을 보고 공포와 흥분이 뒤섞인 표정으로 가만히 식탁을 보았다. 식탁 위의 식재료는 이 시대의 유럽사람 기준으로 보통 식재료가 아니다.
“도토리로 이런 음식을 만들 줄은 몰랐는데…….”
“이게 아국의 음식이오. 몸을 생각하여 단맛과 기름을 줄이고 정갈한 식단으로 몸을 보호하면 오래오래 건강한 몸으로 식사를 즐길 수 있지 않겠소.”
머나먼 동방의 화려한 음식을 기대했겠지만 식탁 위는 풀밭이다. 사실 풀밭이라 하여도 엄연히 닭가슴살 한 쪽과 닭다리 하나가 잘 구워져서 치즈를 얹어 나왔지만 기름기가 부족하겠지.
시장은 포크를 들어 도토리묵을 먼저 한 입 먹었는데 쌉싸름한 맛에 질렸는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지 아니면 우리 앞에서 체면을 중시하는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한 입을 더 먹고는 말하였다.
“처음에는 돼지나 먹는 도토리라 생각했는데 나쁘지는 않군요. 쓴맛이 올라오니 많이 먹을 필요는 없고 입맛을 돋우기 위해서 약간만 내어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수프라 보아야 할지 그냥 물이라 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큰둥하게 먹고는 있지만 못 먹은 물건은 아니라는 평가였다. 그냥 음식의 간이 잘 맞고 기름이 적어 계속 먹을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이 나왔지만 시장의 포크가 카프레제 샐러드에 가서 멈추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황금사과(토마토)는 저희가 먹기 꺼려 하는 음식입니다. 저야 만드는 과정을 보고 받아서 믿을 수 있지만 벨라도나라는 극약과 열매의 모습이 똑같아서 입에 넣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요.”
“편견은 버리시구려. 사실 번가에도 독이 있지만 대부분 잎이나 줄기 혹은 아예 익지 않은 과육에만 있소이다. 그러니 잘 익은 번가를 즐기시길 바랄 뿐이오.”
“이거 참으로 괜찮군요. 치즈가 조금 부스러져서 먹기 불편하지만 짠맛과 신맛 그리고 상큼한 맛이 조화롭게 입안에서 머무릅니다.”
조선 관원들은 정신없이 먹고 정작 대접을 받는 낭트 사람들이 깨작거리는 모습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잠시 뒤 드러났다.
어느새 요리를 모조리 먹은 낭트 시장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자신이 먹은 요리의 양을 가늠하고는 놀란 눈치로 되물었다.
“보통 연회에 나서면 요리를 남기거나 과하게 먹어서 배앓이를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요리는 제 배를 온전히 부르게 하면서 속을 더부룩하지 않게 만드는군요.”
“그게 아국의 요리의 정수요. 연회에서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어보았자 군살만 늘어나고 다음 날 변으로 쏟아지는 법이 아니겠소. 그러니 이러한 음식을 즐기고 있소이다.”
“과연. 매일같이 연회를 즐겨도 속병이 나지 않는다면 이런 음식을 자주 즐겨도 괜찮겠습니다. 물론 연회에 모두 이런 음식을 내어놓는다면 화려함이 부족하니 조금만 섞어서 내놓아야겠지요.”
요리 방법은 받아들이겠지만 이런 음식만 사용해 연회를 열지는 않겠다. 형님이 생각한 식단은 애초에 연회용이 아닌 평범한 양반 가문에서 즐길 수 있는 식단이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후 다음 도시에서도 형님은 비슷한 식단을 알려주며 문화를 전파하려 애썼다.
스페인을 떠나 40일 가까운 여정이 끝나고 파리에 도착하자 이미 늦여름에 접어 들은 양력 1587년 8월 8일이 되었다.
* * *
파리의 모습이야 내 상상과 흡사하였다. 조선에서도 가뜩이나 씻지 않는 유럽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파리는 말 그대로 파리가 들끓는 도시가 아닌가.
인구는 넘쳐나고 위생개념은 없다.
처음 머무른 마드리드야 새로 만들어진 도시라 인구도 적은 편이며 펠리페 2세가 세심하게 지시하여 분변을 수거하라 하였지만 앙리 3세는 그냥 온전한 파리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 결과물은 구름같이 몰려든 파리들이다. 구한말 한양에 방문한 외국인들이 파리에 학을 떼었다 하는데 이 꼴을 우리가 경험할 줄은 몰랐다.
물론 한양에도 파리가 있지만 여기가 열 배는 많다!
“숨을 쉴 수가 없소이다! 불란서 백성들 앞에서 복면을 쓰거나 인상을 찌푸릴 수도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파리가 눈과 코를 메우는데 도시의 이름도 파리라니 참 우습구려.”
“이게 다 분변을 치우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나마 길가에 있는 도랑을 치운 것 같은데 물을 뿌려 찌꺼기를 걷어내지 않았으니 분변이 그대로 남아 있군요.”
한양이야 화약을 만드는 재료를 수집하는 취토꾼들이 나서서 분변을 수거하고 청계천을 비롯한 하천도 사람을 동원해 분변을 걷어내니 나름 청결하지만 이 시대의 유럽은 아니었다.
흔히 유럽 여행을 가면 옛 길거리에 종아리 깊이의 도랑이 파여 있고 여기에 물이 흐르는데 중세 시대에는 분변을 버리던 도랑이라 하던가.
악취가 진동하지만 궁궐까지 다가가자 아예 코가 마비되며 다들 체념할 지경이었다.
파리에서 파리에 시달리며 만난 앙리 3세는 내 상상과 상당히 동떨어진 외모를 자랑하였다.
30대 후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희고 거의 창백한 수준이며 체중 또한 정상적이지 않고 조금 마른 편이다.
이렇게 화려한 식사를 즐긴다면 당연히 살이 뒤룩뒤룩 쪘을 거라 예상하였지만 몸을 제법 놀리는지 사지의 근육이 어느 정도 도드라진 체격이 아닌가.
우리가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리니 그는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정중히 우리를 맞이하였다.
“참으로 반갑소. 머나먼 동방의 사절단이 스페인을 거쳐 우리를 찾아왔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사절단이 방문한 덕분에 위그노 놈들도 꿈쩍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으니 이는 기회가 아니겠소.”
“기회라 하시다니요. 혹여나 아국의 사절단을 앞세워 군사를 재편성할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이는 프랑스의 군주께서 행할 수 있는 일이니…….”
“무슨 소리요! 화려한 파리의 모습과 프랑스의 위대한 문화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일 뿐이니 괜한 염려는 하지 마시오. 군사와 관련된 일이야 조아이유즈(Anne de Joyeuse) 공작이 알아서 할 거요.”
뭔가 묵직한 물건으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인솔한 스페인 장교 우고가 앙리 3세를 사람 덜된 인물이라 평가하였는데 이쯤 되면 우고가 좋은 평가를 내린 게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다.
사절단 방문은 치열한 내전에 현재 왕이 내세울 수 있는 휴전 명분 중 가장 큰 명분이다. 정치적으로 사절단을 앞세워 압박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군사 행동을 추진할 수 있는 법이지.
하지만 앙리 3세는 그저 사치를 즐기고 싶다 말하니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다. 만력제는 태업을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앙리 3세의 태업과 사치에는 그런 노력이 없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뼉을 치면서 말하였다.
“당장 해결해야 할 급한 일이 있으니 내 잠시 숨을 돌릴 틈이 필요하오. 시종장! 이들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을 시작으로 파리의 문물을 돌아볼 기회를 마련해 주시구려.”
시종장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우리를 인솔하였고 아예 왕궁 밖으로 나오자 한숨을 깊게 쉬어댔다.
아마 신하로서의 책무와 프랑스의 귀족으로서의 책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겠지.
보름 동안 파리 시내를 유람하면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비롯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진 건물들을 실측하여 도면을 남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도면들은 홍문관에 남아 대대손손 전해지리라.
그리고 보름 만에 다시 만난 앙리 3세는 놀랍게도 연회가 아닌 접견을 실시하였다.
조선에서 가져온 도자기와 찻잎 그리고 점취를 비롯한 각종 선물이 전해지자 앙리 3세는 흡족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다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조선은 우리가 기르는 말인 페르슈(Perche) 지방의 거대한 말을 매년 수백 마리씩 구매할 정도로 승마를 즐기는 국가라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제 벗도 불란서와 영길리에서 들여온 거마(巨馬) 네 마리를 번갈아가며 타고 다니지요. 한 마리에 은자 이백 냥에 달하는 거금을 들이지만 그만큼 좋은 말입니다.”
“영길리? 잉글랜드라 하였소? 잉글랜드산 말 따위와 견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말이오.”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구나.
사치를 즐겨도 나름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아마 말 거래와 관련해서 제안을 할 것이라 여겨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 상상을 가뿐히 초월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사냥을 즐기지는 않지만 샤쇠르(Chasseurs: 사냥꾼)들을 소집하고 군사를 준비하여 인근에서 사냥에 나서면 합당한 대접이 아니겠소.”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사냥이라 하였소. 조선 사람들은 몸을 놀리기를 좋아한다던데 사냥을 거부하지는 않겠지.”
이 미친놈이 제정신인가?
상원군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멍하니 앙리 3세를 쳐다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아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가렸다. 동양에서 폭군의 상징인 주왕(紂王)의 행적과 닮아도 너무 닮아 있었다.
외모가 빼어나고 머리가 총명하지만 명성에 집착하고 과도한 수탈을 자행한다. 더군다나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만 어여삐 여기고 나머지 신하는 죽건 말건 관심이 없지 않은가.
일단 제안을 받았으니 사냥터로 나왔지만 최소 이천 명의 병사가 몰이꾼으로 달라붙었다.
“참으로 장관이로구나. 이 드넓은 평원에서 사냥감을 찾겠다고 수천 명의 병사를 동원할 줄은 몰랐는데. 거기다 저 사람들은 주변에서 소집된 몰이꾼이 아닌가.”
조선과 견줄 수 있는 프랑스의 무더운 여름날에 소집된 수천 명의 병사와 수천 명의 백성들을 보자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우리가 있는데도 시가전이 벌어져서 사절단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
앙리 3세의 행동은 고증에 기반한 행동입니다. 저도 자료 찾아보면서 이 인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