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51화
2부 23장 8화 국제 협상(3)
다음 날부터 이윤범은 매우 바빠졌다.
본래 호위 업무를 제외하면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무관들과 교류하며 적당히 그들의 군사 기술을 습득하면 될 사람이 이제는 화포를 임대하여 가르칠 입장에 놓인 상황이었다.
“조선 사절단에서 이런 결단을 내릴 줄은 몰랐군. 이번 일은 반드시 보답할 것이네.”
협상 과정은 즉각 펠리페 2세에게 보고되었다. 지금까지 현장 지휘관 알바로 데 바잔의 판단을 존중하여 관망하던 그도 신형 화포 시험이라는 말을 듣자 직접 참관하기를 원하였다.
짤똑한 대완구를 살펴본 펠리페 2세는 궁금하였는지 이윤범에게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였다.
“이게 조선의 화포란 말인가? 내 아주 예전에 사용한 화포들을 확인한 적이 있는데 사석포(射石砲)라 하여 거의 이백 년 전에 사용한 무기라 하더군.”
“개념은 같지만 쓰이는 포탄이 다릅니다. 이미 산타크루즈 후작께서 몇 번에 걸쳐 시험하셨다시피 내부에서 터지는 포탄은 일반 화포에 넣고 쏘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자폭합니다.”
펠리페 2세는 군사적 관심이 많았지만 이 관심이 이론까지 이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이 포탄들이 어떤 위력을 보여줄지 궁금하였는지 다짜고짜 사격을 개시하라 하였다.
“화포는 자고로 직접 쏘아봐야 아는 법일세. 조선에서 화포로 사용할 대완구 서른여섯 문과 포탄 이백 개를 제공하였으니 우선 실탄을 쏘기 전에 같은 무게의 철환을 쏘아보게나.”
대장선 1척과 순주선 4척 순방선 5척으로 구성된 선단에서 36문의 대완구가 나왔다면 엄연한 보조 화포이다.
비격진천뢰가 개량되어 부활하였어도 실전 사용에는 문제점이 산재해 있었으니 조선도 주력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방포하라!”
이윤범 휘하의 포수들이 화약을 욱여넣고 비격진천뢰 대신 동일한 무게의 철환을 쏘았는데 목표는 화포 기준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니 200보(320m) 거리에 있었다.
대완구에 비격진천뢰를 넣으면 화약량이 극도로 제한된다. 아무리 구조를 보완해도 충격이 심하면 자폭하니 방법이 없었고 안정성을 추구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니 탄환의 속도 또한 극도로 느리다.
저 멀리 던져진 농구공처럼 하늘 높게 치솟은 비격진천뢰가 한참 뒤에 목표에 명중하니 스페인 화포장들은 혀를 내두르며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대형 갈레온을 세 발에 격파한다 하였는데 이래서야 명중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런 곡사포는 후스파(15세기 초 얀 후스의 추종자) 놈들처럼 제대로 된 화포를 쓰지 못하는 군대가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제대로 된 직사포만 쏘았으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군요.”
“하지만 이 화포에 능숙해지면 적선을 일격에 격침시킬 수 있는 포탄을 마음대로 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선의 장수는 전력으로 도주하는 배를 추격하며 이 녀석을 마음대로 명중시켰다 하였네.”
펠리페가 말하는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라서 문제지. 삼각함수를 본인은 물론 휘하 병사들까지 마음대로 외우고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니 기반 자체가 튼튼해서 가능한 일이다.
이순신처럼 포병에게 글을 가르치고 삼각함수를 익히게 하며 충분한 실전 경험까지 쌓게 하면 그게 포병으로 불리겠는가?
하지만 비격진천뢰 실탄 사격이 이어지자 그 평가는 급격히 반전되었다.
똑같이 허공으로 치솟은 탄환이지만 이번 탄환은 불이 붙여진 비격진천뢰였다.
땅 깊숙이 박힌 비격진천뢰 스무 발 가운데 열일곱 발이 굉음을 내며 터져 나갔고 그 굉음에 펠리페 2세는 물론이요, 알바로 데 바잔도 귀를 감싸 쥐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잘만 명중하면…….”
“유폭이 아니어도 이 위력이면 배 하나 정도는 가라앉힐 수 있을 겁니다.”
위력 하나는 대단하지. 조선 수군에서도 화력을 모조리 투사할 수 있는 근접전 상황일 때 쐐기를 박으라며 쏘는 녀석이니 오죽하겠는가.
펠리페 2세는 이 모습을 보더니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화포와 포탄을 복제하여 모든 배에 올리도록. 큰 선박에는 네 문을 올리고 작은 선박에는 두 문을 올려 놈들이 마지막 발악을 할 때에 예봉을 꺾을 수 있게 만들면 되겠군.”
“하지만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화포를 추가한다면 다른 화포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작전이 잘 이루어지면 상륙이 성공할 것이네. 상륙이 성공한다면 이 작은 화포를 옮겨 잉글랜드의 요새를 타격하는 데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제발 떡 줄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들이켜지는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이걸 산 사람이니 참는다.
알바로 데 바잔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한 펠리페는 며칠 뒤 이번 사절단 방문의 핵심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를 호출하였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동방의 선물을 받아들인 보답이요, 패배하여도 동방의 선물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한 우리의 탓이니 오로지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지. 그러면 선물에는 보답이 있어야겠지.”
“선물의 보답이라 하시면 무얼 전해주실지 참으로 궁금할 뿐입니다.”
“영토일세. 이미 누에바 에스파냐(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와 조선이 미주라 불리는 땅의 경계에서 서로 기세 싸움을 벌이는 중이 아닌가. 일전에 보낸 사절단이 첫 경계를 만들었지만 지금 보니 조선이 너무 좋은 선물을 주었군.”
그랬었지. 큐슈 전쟁 직후에 도착한 사절단이 말하기를 스페인 식민지에서 조선의 영토를 허가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엄연히 영토 분쟁에서 불리한 측은 조선이다.
이미 플로리다까지 진출하고 여력이 남은 스페인과 달리 조선은 태평양을 넘어 사람을 보내야 하기에 미국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다.
펠리페 2세는 큰 선심을 쓰듯이 먼저 제안하였다.
“본래 영토의 경계를 나눌 때에는 산이 제일인 법이지. 이번 선물을 비롯해 조선이 제공한 선물을 감안할 것이니 콜로라도(Colorado: 스페인 어로 붉은 강)의 산을 경계로 삼으면 어떻겠나?”
지도에 손가락을 짚어가며 크게 한턱내어 준다 말하고는 있지만 이 동네는 이미 알고 있는 지역이다. 미국에 다녀온 적은 없지만 서부 개척시대 영화는 많이 봐오지 않았는가.
콜로라도 산맥을 넘으면 캘리포니아까지 모두 사막과 산만 있다.
유타, 네바다, 라스베이거스를 비롯하여 아메리카 원주민과 사막 그리고 황무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땅이다.
“잠시 생각을 하여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하지만 더 많이 내어주길 원한다면 조선에서도 더 많은 선물을 줘야 할 것이네.”
솔직히 말해 금광도 넘쳐나고 각종 광맥이 풍부한 지역이라 여기서 끝내고 싶었지만 주상전하가 보내온 쪽지 가운데 아직 네 개가 남았다.
개중 토지(土地)라 적혀진 쪽지를 살펴보니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미주 영토 분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면 여송(필리핀)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더 많은 땅을 받아내면 좋다. 아국이 필요한 땅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이다.]
머리가 핑핑 돌아가며 계산을 거듭하였다. 가급적 더욱 동쪽에 있는 미시시피 강을 먹어치우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되면 현대의 텍사스 주에 있는 석유는 물론이요, 비옥한 농토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
물론 미주 관찰사로 부임할 내가 개고생할 일이지만 그건 내가 훗날 고생할 일이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욕을 하건 말건 주상전하가 명한 대로 운을 띄웠다.
“그러하면 저희가 선물로 여송도 남대주(민다나오 섬)의 일부를 할양하겠습니다. 서반아 원정대가 처음 상륙한 지역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 빈 땅이 되지 않았습니까.”
“과연. 여송도에 우리의 영토가 생긴다면 더는 바랄 이유가 없지. 그러하면 영토의 경계는 어디로 정하겠는가.”
“저희에겐 농토가 필요하니 유역을 하나 더 끼어야겠지요. 콜로라도에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 명확히 경계를 나눌 수 있는 강으로 정하겠습니다. 거기까지라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명확히 경계를 나눌 수 있는 강이라 하면 말장난이다. 이 시대의 강은 크게 범람하면 유역이 뒤집히는 일이 자주 있으니 적당히 엉덩이를 뭉갤 도시 하나만 만들어 두면 훗날 다시 벌어질 영토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겠지.
하지만 펠리페 2세는 현장 경험이 부족한 책상물림이었는지 흡족하게 생각하며 국서를 작성하라 하였다.
이윽고 금박으로 장식된 양피지에 펠리페 2세의 인장이 찍혔다.
“이것으로 국서의 첫 판본이 작성되었네. 조선에서 국서를 그대로 복사하여 조선 왕의 인장을 찍고 돌려보내면 모든 협정은 끝날 것이네.”
“이런 은혜를 내려주시니 전하의 은덕이 대대손손 천지사방에 진동할 것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국서를 품에 넣었다.
기껏해야 한 조각에 불과한 필리핀 땅을 받아먹고 잘만 하면 텍사스를 모조리 집어삼킬 기반을 마련하지 않았는가!
첫 사절단 일정은 여기서 종료되었다.
다시 이어진 연회와 환대, 그리고 남사당패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1년 이상 스페인을 떠나 유럽 다른 국가를 순방할 차례가 되었으니까.
* * *
다음 방문지는 펠리페가 권유한 프랑스지만 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이라 적잖이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가 붙여준 장교인 우고(Hugo)는 내 염려를 알아차렸는지 태연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앙리 드 기즈가 바보라 하여도 엄연히 조선의 사절단이 방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프랑스만큼 체면을 중시하는 국가도 없으니 자신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내전을 중단할 겁니다.”
“정말 그럴 것 같소? 체면을 중시한다 하였는데 오히려 지금 국왕인 앙리 3세의 체면을 뭉개버리기 위해 암습을 저지를 것 같소이다.”
“서로 체면을 중시하는데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머나먼 동방의 사절단이 방문했는데 암습을 실시하면 이 기록이 어디에 남겠습니까? 그러니 잠시 전쟁을 중단하겠지요.”
서로 체면을 중시하는 상황이니 반란군이 함부로 손을 댈 일이 없다 이거구나.
그나저나 내전이 벌어지는 국가에 방문해 내전을 중단시켰으니 우리가 평화의 사절로 인식되지 않을까.
거대한 마차 행렬이 마드리드에서 시작되어 피레네 산맥을 우회해 육로로 프랑스에 도착하였다.
나야 현대에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으니 유레일(Eurail)로 프랑스의 풍경을 보아왔지만 다른 사절단은 프랑스의 풍경에 압도당하였다.
“서반아 사람들이 아국에 방문했을 적에 산이 많다는 감상을 하였소. 내 명국을 다녀온 사절단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만 이런 땅이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저도 명국을 다녀온 적이 있으며 남경 일대의 농토를 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평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상원군은 입을 헤벌쭉 벌리고 드넓은 벌판을 바라보았으나 다른 관원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 압도적인 평야와 어마어마한 생산량이 프랑스의 무기니까.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하여도 입신체비의 기반인 농업인데 이 농업이 어디보다 융성한 장소가 프랑스이니 다들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형님은 간간이 보이는 밀밭을 뚫어져라 살펴보며 평가하였다.
“내가 알기로 불란서(佛蘭西)는 여름에는 아국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더운 고장이지만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않고 싸늘한 정도로 끝난다 하더구나. 이런 곳이라면 어지간한 작물을 모두 기를 수 있지 않겠느냐.”
“작물만 기르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펠리페 2세 전하께서도 호화로운 만찬을 준비하였지만 앙리 3세의 만찬과 비교하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만찬? 내란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서반아보다 호화로운 만찬을 준비한다 하였소? 앙리 3세라는 왕은 대체 정신이 있는 왕이오? 걸주(桀紂)라 하여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요.”
형님이 신랄하게 평가했지만 우고는 이런 대답을 바랐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어댔다. 일종의 차도살인지계라 해야 하나?
그러더니 저 멀리 밀밭에서 추수에 여념이 없는 농부를 가리키고는 말하였다.
“프랑스의 내전은 모두 앙리 3세의 탓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충신들만 받아들이고 기행을 저지르며 사치에 여념이 없지요. 왕위에 오르고 단 열흘 만에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왕이 우리를 제대로 접대할 마음이나 있겠소? 반군이야 사절단을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하여도 정녕 제정신이란 말이오?”
“사치에 여념이 없는 자이니 오히려 안심하여도 좋을 겁니다. 오히려 더욱 사치를 부리며 화려하게 접대할수록 자신의 지위가 굳건해진다고 여기겠지요.”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사절단이 방문한 도시마다 시민들이 나서서 환호하며 우리를 맞이하였다.
기나긴 내란에도 식량 생산량이 압도적이라 피폐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정작 피폐한 이들은 도시의 관료들이었다.
앙리 3세는 사치를 즐겼고 이 사치에 대한 명령을 자신의 휘하에 있는 도시에 강권한 모습이 분명하였다.
하나같이 버터와 기름을 잔뜩 사용한 화려한 요리만 나오니 조선 관원들도 눈살을 찌푸리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래서야 속병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머나먼 이국에 와서 군살만 잔뜩 생기겠구려.”
“적당히 먹고 몸을 바삐 움직이면 모를까 이렇게 과한 식사는 영…….”
음식이 나오면 절반 이상이 손도 대지 않고 돌아가니 도시의 관료들도 요리사를 닦달해 댔지만 결과는 더욱 화려하고 기름진 음식이었다.
더군다나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물맛이 왜 이러지요? 음식도 기름진데 물에도 기름이 섞여 있단 말입니까?”
“이걸 보게. 찻주전자 아래에 하얀 가루가 잔뜩 끼었으니 물이 죄다 영동지방의 골짜기처럼 석회가 섞여 나오는 것이 분명해. 내 이현전에서 일할 때 영동을 다녀와서 잘 알고 있다네.”
처음 머무른 마드리드야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 덕분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에 오자 심각한 수준의 석회수를 접하게 되었고 관원들 대다수가 곤욕을 치렀다. 그나마 내가 지시를 내려 속병은 나지 않게 하였지만 그게 한계였다.
“지금부터 모든 물은 참숯을 넣은 항아리에 거르고 다시 끓여서 섭취하시오. 인근 농가에서 식초를 구해 물에 조금 섞어 목욕을 하면 피부가 크게 상하진 않을 거요.”
하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였다. 여전히 기름진 식사가 다수이니 일행 대다수가 몸을 제대로 씻지 못하고 기름진 음식에 속병이 나서 설사에 시달리게 되었다.
관원들은 밖에서는 이 상황을 참아내고 있었지만 숙소 안에서는 근손실은 물론 아예 골격이 쇠약해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결국 낭트에 도착했을 때 형님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국을 떠나오고 일 년 가까이 지나 정갈한 음식과 아국의 풍토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요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세상 저 너머에 있는 조선의 요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듣자 하니 운룡 유께서는 조선 왕실의 전담 요리사라 하셨는데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
“일단 화려한 식사는 필요가 없소이다. 자고로 모든 음식의 기본은 푸성귀를 비롯한 채소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소. 잠시 주변을 거닐어 보며 식재료를 찾아보겠소.”
어린 시절 농사도 지은 적이 있으니 농작물의 선별과 수확에도 큰 문제는 없다. 형님은 어떻게 쓸지 모르지만 현대의 양배추보다 훨씬 작은, 대충 배구공보다 작은 크기의 양배추를 수레 가득 담았다.
잡다한 재료를 사들이니 형님의 표정도 풀어지고 어느새 이 식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사이 주변을 둘러보니 놀라운 녀석이 있었다.
“형님, 번가(番茄: 토마토)가 있습니다. 아국에서는 잘 자라지 않아 삼남 가운데 따스한 지역에서만 수확해 말려 보관하는 녀석인데 여기에는 지천에 널려 있군요.”
“참말이구나. 불란서의 왕이 사치를 일삼는다 하였는데 사치를 일삼아도 좋은 일을 가끔 하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겠느냐. 어서 요리를 만드는 데 쓰자꾸나.”
우리가 머무는 낭트 성의 해자 인근에는 노랗게 잘 여물은 토마토가 널려 있었다.
품종개량이 아직 안 되어 크기가 작은 토마토지만 맛 하나는 아주 좋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를 돕던 시종은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였다.
“황금사과(토마토)에는 독이 있습니다! 당장 게워내시지요!”
“지금 뭐라 하였소? 번가에 독이 있다고? 그럼 이건 왜 심은 거요?”
“노란빛이 아름답기도 하고 독이 있으니, 해자에서 생겨나는 모기를 죽이기 위해 기르는 것인데 그 독이 얼마나 세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토하시라니까요!”
예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감자와 토마토는 유럽으로 전래될 때 독이 있다는 편견을 수백 년 동안 걷어내지 못했다는데 이걸 체험할 줄은 몰랐지.
시종이 더욱 화나도록 아예 스무 개 정도의 토마토를 우적우적 먹은 뒤 입가심까지 하였다.
“난 몰라! 저건 독을 자기가 먹은 거라고!”
“저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그나저나 서역의 배추(양배추)는 쓴맛이 은근히 올라오는 것이 그대로 먹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어서 손을 조금 써야겠다. 네가 도와보겠느냐.”
당연히 도와야지요. 토마토를 연회에 사용하는 역사적인 순간인데 이 자리에 끼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형님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니 첫 작업은 양배추를 썰어내는 작업이었다.
“아삭거리는 녀석이니 생으로 먹으면 더욱 좋겠지만 은은한 쓴맛이 올라오니 소금에 절여야겠구나. 시일만 충분하다면 김치처럼 삭혀낼 수 있겠지만 시일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불란서에서 자주 만드는 오이 절임(피클)은 지나치게 시고 짜니 입에 어울리지 않는 법이지요. 아국으로 돌아가면 잘 익은 배추김치를 한입 가득 먹을 생각에 군침이 고입니다.”
지금 나오는 요리를 굳이 따지자면 식초에 절이고 고추로 매운맛을 첨가한 양배추 샐러드겠지.
소금에 절여 쓴맛이 나는 즙을 빼내고 식초로 빠져나간 즙을 보충하니 제법 먹을 만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나온 물건은 바구니 하나 가득 쌓인 도토리였다.
“그건 돼지 사료가 아닙니까! 왜 드십니까!”
“도토리는 돼지 사료로도 쓰이지만 입신체비에도 충분한 효능이 있는데 뭘 그러시오. 가뜩이나 속에 기름진 음식만 먹어왔으니 도토리묵이 몸속의 잡것들을 모조리 몰아낼 거요.”
나도 형님도 도토리의 껍질을 벗겼고 어느새 사절단 사람들도 이 작업을 도왔다.
다른 이들이 조선에서는 돼지 사료를 먹는다며 놀랄 때 우리는 절육(커팅)의 추억을 논하고 있었다.
“절육을 실시할 때 귀리와 현미를 섞은 밥을 먹고 기름이 하나도 없는 음식만 먹으니 속이 긁히는 것 같지요. 그럴 때에 도토리묵 한 사발이면 세상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본래 도구를 사용해 까냈어야 할 도토리 껍질은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딱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어느새 다가온 청설모에게 도토리를 던져주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