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49화
2부 23장 6화 국제 협상(1)
로베르토는 담담히 소식만 전하고 돌아가려 하였지만 내가 그를 펠리페 2세의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평상시에도 일에 몰두하는 사람인지 펠리페 2세는 한밤중에 벌어진 일인데도 담담하게 로베르토를 맞이하고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과연, 내가 전쟁 준비로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군. 애초에 정직당한 주교인 모스구즈만이니 그 이상의 처분은 내릴 가치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어.”
“숙부는 이미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목 아래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니 침대 위에서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의 처분을 내릴 필요는 없겠군. 그나저나 오추세(플로리다)라. 멀고 험한 곳이지만 햇볕이 따스하여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였지. 이미 수많은 개척자가 오추세에 머물고 있다네.”
역사에 대해 모르니 답답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동네인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선교 활동을 벌여도 되는 지역인가 궁금하긴 한데 펠리페 2세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이미 오추세에는 카롤리네(Caroline) 요새를 비롯하여 수많은 병사들과 개척민 그리고 선교사가 머물고 있다네. 다만 세스페데스에게 힘을 북돋워 줘야 하니 서신 하나는 보내야겠군.”
“하지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미주 원주민과 서반아 사람 간에 마찰이 잦다 하였는데 이를 세스페데스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대처는 간단하다네. 우리를 보고 환영하면 주님의 곁으로 보내야 할 사람이요,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거부하는 자이니 공격해야 할 대상이오. 지금까지는 자주 분쟁이 벌어졌지만 큰 문제는 없었지.”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이 원주민을 다 죽여서 분쟁의 싹을 말렸는지 정말 친절하게 대응해서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펠리페 2세는 세스페데스의 선교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생각을 하였는지 서류를 착실히 작성하여 시종장에게 전해주었다.
“내 세스페데스 신부의 선교 방법에 대해서 들어보았으니 필요한 사람을 선발하였소. 각종 농사에 능한 젊은 농부 스무 명과 물자를 만들기 위한 목공을 비롯한 장인 열 명을 선발하였지. 여기에 필요한 물품을 각출할 수 있게 하였지.”
“참으로 세심히 세상을 돌아보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니 조선의 신하인 제가 그 은덕에 감사할 지경입니다. 서반아의 치세가 조만간 전 구주를 진동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치세가 전 구주를 진동시킨다 하였는가. 그러고 보니 열흘 뒤에 재차 연회를 열어 조선의 사신들에게 내 치적에 대해 전할 바가 있으니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주시오.”
치적이 구주를 진동시키는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업무를 담당한 관료들은 피를 토하며 펠리페 2세에 대한 저주를 쏟아놓으리라.
일에 몰두해도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몰두했으니 어지간한 조선 관료들도 버티기 힘들 수준이다.
조선에서는 야근을 해도 입신체비를 할 시간과 몸을 휴식시킬 시간은 남겨 주고 야근을 시킨다. 현대로 따지만 숙식도 회사에서 하고 의무적으로 2시간 보디빌딩을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정신은 피폐해져도 몸은 피폐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펠리페 2세가 한밤중에 전해준 명령장은 다음 날 아침 바로 일 처리에 대해 보고를 받아야 하니 모든 관료들이 죽어 나가는 꼴이다.
이들에 대한 위로를 하며 다음 연회를 시작하였다.
우리가 방문한 지 50일 가까이 지난 양력 1587년 4월 28일의 일이었다.
* * *
“오늘은 머나먼 동방의 사람들에게 내 치적과 위업을 전할 뜻깊은 날이오. 지난 연회에서는 조선에서 가져온 술로 모두를 즐겁게 하였으니 이번에는 카스티야의 음식이 나설 차례요.”
펠리페 2세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궁중이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높은 실세인 나에게 포도주잔이 오갔고 이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한 잔을 걸치며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코레(coree)라 불렀는데 이제는 조선이라 부르는군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당신들이 코레라 부르는 단어는 옛 고려(고구려)의 지명이 전해진 흔적이요. 그러니 나라의 명칭은 조선이되 지역의 명칭은 코레 혹은 고려라 부르시면 되겠지요.”
“그렇습니까? 그러하면 저희는 지금까지 지역의 이름을 나라의 이름이라 알고 있었군요.”
귀족들에게 조선의 실상에 대해 느슨하게 알려주는 것도 외교 수단이다.
주상전하를 비롯한 조선 관원들은 그놈의 고려의 이름을 쓰는 꼴을 못마땅해하다 다른 대응수단을 마련했다.
고구려의 영토 가운데 요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획득한 조선이니 아예 지역의 이름 자체를 고구려 지역이라 주장하고 서방에 고구려의 역사를 가르치자고.
귀족들 대다수는 우리의 작전에 제대로 휘말렸다.
“명나라는 인구가 일억이 넘는 거대한 제국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 제국의 이전 왕조와 예전에 몇 번이고 전쟁을 치른 나라라니.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도 지역의 이름이 고스란히 남은 이유가 있군요.”
“실은 오백여 년 전에 세워진 나라인 고려가 그의 후예를 자처하였지만 영토의 절반만 회복하였소. 이제는 조선이 영토를 대다수 회복하였으니 고려 지방이라 불러도 될 것이오. 다만 공식 외교 석상에서는 조선이라 불러주시오.”
연회장의 인기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상원군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조선에서 뽑힌 수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상원군의 나이는 배 위에서 한 살을 더 먹어 16세로 가장 어린 사람이다.
“대공께서는 체격이 참으로 담대하신 분이시니 제 딸과 면담을 추진해 보고 싶습니다.”
“나도 조선에 아내를 두고 먼 길을 다녀온 사람이니 마음만 받아둘 것이오. 하지만 면담이라면 나쁘지 않군.”
정무수(鄭茂壽)라는 내금위 출신 군관이 슬쩍 눈치를 주니 상원군도 자제하는 척을 하며 말을 흐렸으니 스페인 출신 아내를 맞이할 일은 없으니 다행이지.
상원군은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어 호감을 표시하는 상황인데 정작 스물 내외의 젊은 관원들 대다수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실정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체격이 참으로 담대하시군요. 혹시나 장수이십니까?”
“장수라니. 내 장수는 아니지만 몸은 충분히 단련하였소. 내 효심을 담은 이두박근을 보시오.”
사절단 관원인 권협이 소매를 걷고 팔뚝에 힘을 주자 이두박근을 시작으로 팔 근육이 불뚝 튀어나왔고 대화를 나누던 귀족은 그 거대한 팔뚝을 손으로 쿡쿡 찔러보더니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거대한 체격 때문에 오히려 인기가 없더라.
그나마 이이의 제자인 정엽(鄭曄)은 소룡식 입신체비를 배워서 젊은 나이에 얄팍한(조선 기준으로) 체격을 가졌고 어느 정도 인기는 있었다.
문제는 정엽 이 친구도 어마어마한 노력을 해서 저런 체격을 만들었으니 근육량은 평범한 사람의 두 배에 달한다.
“활터가 있으면 좋겠는데 궁궐 밖에 있으니 아쉬울 뿐이군요.”
“활을 엘 에스코리알 인근에서 마음대로 쏠 수 있는 기회도 없지 않겠습니까. 머나먼 조선은 혹여나 활이나 총을 왕이 마음대로 쏘는 풍습이라도 있습니까?”
“활은 몸을 단련하기 위해 며칠마다 한 번 열 순(50발)은 쏘십니다. 총이야 예전 문종대왕 시절에는 군기시까지 나아가 직접 쏘셨다는데 지금은 그런 경우가 드물지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술에 거하게 취한 이들이 시종장에게 눈치를 주고 밖으로 나섰는데 나도 활이나 쏘면서 몸을 풀고 싶었다.
조선 사람 대다수가 궁술에 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펠리페 2세는 궁궐 밖에 거대한 활터를 마련해 두었다.
다만 문제가 있으니 우리가 준비한 각궁이 아프리카의 열대 기후에 시달리며 아교가 풀어져 대부분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든 사소한 문제에 관여하는 펠리페 2세이니 다른 활을 준비해 두었다.
“이 활은 참으로 거대하구려. 아국에서 이런 장궁은 왜궁 외에는 없는데.”
“잉글랜드 놈들이 사용하던 장궁입니다. 장력이 조선 단위로 일백이십 근(76.8㎏)에 달한다 하니 어중간한…….”
“이거 참 쏘는 맛이 있구려. 어서 화살을 가져와 주시오.”
그 거대한 장궁을 집어 든 정엽은 겉보기엔 평범한 체격임에도 꼿꼿이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당연한 말이지만 스페인 귀족들은 물론이요, 군관들까지 경악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걸 꼿꼿이 서서 당긴다니 말이나 됩니까! 잉글랜드 놈들도 몸을 구부리고 억지로 낑낑거리며 쏘는데 몸이 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허, 마흔이 넘어 쉰을 향해 다가가는 나도 이런 활은 마음대로 쏠 수 있소.”
조금 뻐근하고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각궁과 비교하면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활이 지나치게 커서 힘이 집중되지 않아서 문제이지.
처음 사용해 보는 활이니 과녁에 명중할 가망성도 없지만 내가 날린 화살이 너무 멀리 날아갔다.
“조금 살살 쏘십시오! 아니! 더 뒤로 물러나서 쏘십시오! 이 활터가 이백 바라(스페인 길이 단위, 약 168m)인데 여기를 그냥 지나치시네!”
“우리가 마음대로 쏜다면 일백오십 보를 쏘는 일은 기본이지. 신립이라는 장수는 이백 보 거리의 과녁을 쏠 때도 사지를 나누어서 적중시킬 수 있소이다.”
화살이 풍풍거리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워낙 완력이 대단한 이들이니 처음 사용하는 잉글랜드 장궁도 점점 과녁에 근접할 정도로 쏘아댔다. 문제는 관리가 부실했는지 우직 소리를 내며 장궁이 부서져 버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잉글랜드에서 수입한 녀석이라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죄송합니다. 그러니 장궁 대신 석궁을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여기 이 염소발(장전장치)을 당기시면…….”
“이런 작은 쇠뇌를 왜 당긴단 말이오.”
천을 덧대 손가락이 잘리지 않게 방지하며 쇠뇌의 활줄을 손으로 장전한 이들은 방아쇠를 당기며 둔탁한 손맛에 감탄하였고 스페인 군관들은 이 모습을 보더니 식은땀을 흘려댔다.
석궁 과녁으로 내놓은 물건은 다 깨지고 망가진 판금 갑옷인데 이걸 관통할 석궁을 손으로 당긴 것이다. 나도 한번 당겨보았지만 대충 삼대운동 800근을 달성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쇠뇌를 몸을 단련하는 데 쓴다면 참 좋았겠는데.”
“진주성 전투에서 이런 쇠뇌를 일백여 개 정도 준비했다면 효과가 대단했겠군요.”
인간 공성병기 같은 면모를 본 군관들이 식은땀을 흘리건 말건 펠리페의 호출이 들려와 활터를 정리하고 돌아갔다. 활터에는 박살 난 잉글랜드 장궁과 손으로 발사했던 쇠뇌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는데 이 또한 문화 충격으로 다가오려나.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오니 펠리페 2세는 흡족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잔뜩 쌓인 양장본 서적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보아도 얼마 전에 인쇄한 물건인데 말을 듣자 머리가 멍해졌다.
“잘 오셨소. 얼마 전에 번역을 시작한 잉글랜드 원정 작전 계획서를 조선의 사절단에게 배포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지. 부디 이 서적을 확인하고 내 치적을 머나먼 동방에도 알려주시오.”
내가 군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에서 일하면서 군대에 대한 상식은 알고 있다.
본래 군사 작전은 아주 큰 계획이라면 모를까 상세한 계획은 알려줄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상식을 거부하는 모습이라니 아주 보기가 좋구나.”
펠리페 2세는 작전 계획서를 출판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서적을 훑어보니 출판을 허락한 사람은 당연히 펠리페 2세이지만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메디나 사도니아 공작이라는 자이다. 전쟁 준비에 바빠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자이지.
연회가 끝나고 우리 모두 말없이 조선어로 번역된 책을 살펴보며 눈을 뗄 수 없었다.
비록 무게나 길이 단위가 명확하지 않아 서로 혼동된다 하여도 인원과 보급품 수량만 따져도 추산은 가능하니까.
이윤범은 놀란 눈으로 평가를 내렸다.
“아국의 함대보다 질적으로는 불리해도 양적으로는 우수하군요. 전함 일백삼십 척에 총 병력 삼만 명 이상에 보급 함대는 그 두 배에 달합니다.”
“작금에 이르러 아국의 함대 총합이 이백이십 척에 달하지 않소.”
“전선에 투입하는 함대와 거의 대등한 함대를 예비 함대로 비축해 두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를 보니 서반아의 수군은 아국과 대등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계획이 모조리 새어나간 것도 아니고 상세히 출간된 이 서적 자체가 문제 아니겠소.”
이게 문제다. 작전이 미리 새어나간 것도 모자라 아예 출간까지 하였으니 스페인 입장에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이렇게까지 하면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작전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영국이 아무리 바보 천치들만 있어도 이런 서적을 입수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금쯤 작전에 대응하기 위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거나 아예 한 방이 날아올지도 모르지.
이윤범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마지못해 평가하였다.
“서반아는 아국이 왜변을 진압할 때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무마할 수 있으리라 여기겠지만 육전과 수전(水戰)은 다릅니다. 적장이 여해 같은 자라면 물고기 밥이 되겠지요.”
“설령 서반아에 여해가 있다 하여도 이 작전을 한사코 반대할 거요.”
이순신이라면 당연히 반대하겠지. 삼 일 내내 서적을 읽었는데 요약하면 간단했다.
카티스를 시작으로 각 항구에서 배를 보내서 해전을 벌이는 사이 육군을 상륙시키고 싸우고 이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질 기습이나 보급 두절 혹은 천재지변에 대한 고려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이윤범도 할 말이 없어서 아예 펠리페가 지급한 임시 지도 위에 함대를 마련해 두고 가상 전투를 벌이려는데 급보가 전해졌다.
“급보입니다. 아국의 함선이 머물다 자리를 옮겼던 카티스라는 항구가 영길리의 기습으로 모조리 불타올랐습니다! 일흔 척에 달하는 선박 가운데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이윤범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보름 전에 카티스에서 세비야로 기항지를 옮겼는데 잘못하면 이역만리에서 몇 년을 기다려야 할 사고를 넘겼다.
당연히 펠리페를 접견하였는데 그는 보고를 듣고도 태연하게, 하지만 손을 파르르 떨며 분노를 삭이고는 태연하게 말을 하였다.
“역시 영국 해적 놈들은 무언가를 망치는데 도가 터 있소이다. 어차피 원정에 큰 타격을 주지도 못할 상선 서른 척을 불태웠다고 자만하고 있겠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하면 원정 계획을 취소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오. 다만 부탁할 것이 있는데 조선에서는 토기를 구워 물을 보관한다 하더군. 내 조선으로 돌아갈 때 이를 질 좋은 나무 물통으로 돌려줄 것이니 토기를 팔아주시구려.”
촉이 왔다.
카티스 항구에 있다 불타오른 물건 가운데 나무 물통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잘 말린 목재가 있었겠지. 영국 원정 용도로 사용할 나무 물통 재료가 모조리 불타 버린 것이다.
장거리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은 물이다. 식량이야 잘 말려서 보관할 수 있지만 물은 철저히 밀폐된 용기에 보관해야 각종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조선은 항해 중에 파손되지 않도록 두껍게 만든 항아리 안에 살균을 위해 은을 바르고 숯을 깔아 두어 물을 보존한다.
하지만 서양 함선들이 사용하는 물건은 3년 이상 잘 말린 튼튼한 참나무로 만든 나무 물통이다. 그러니 급한 김에 우리의 손을 빌리려는 의도였다.
“물론입니다. 다만 나무 물통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손상되면 수리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장인 여럿은 아니고 배 하나를 관리할 장인을 한 명씩만 붙여주시지요.”
“아예 조선에 머물며 기술을 전달할 장인들을 붙여주겠소이다.”
펠리페 2세가 철저히 표정을 관리하지만 지금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겠지.
나무 물통에 쓰일 재목을 구하기도 힘들 것이요, 억지로 만들면 틈이 벌어진 물통 때문에 물이 순식간에 상해 버린다.
원정에 참가한 3만이 넘는 병사들이 배앓이를 시작하면 전투는커녕 배를 움직이는 속도조차 느려지리라. 하지만 고작 열 척의 배에서 사용할 항아리를 빌려보았자 누구 코에 붙이겠는가.
그나마 아쉬운 마음에 빌려온 것이지만 그걸로 보급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일단 할 일은 다 했는데 펠리페 2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진중하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선의 함대가 이주 전까지 카티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자칫하면 드레이크 그놈에게 함대가 불태워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구려.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말은 줄였지만 참전 의사를 물어보는 거다. 만약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잉글랜드 전쟁에 조선이 참가하게 되지만 내가 이걸 그대로 들어갈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다.
잠시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답했다.
“저는 군문의 일을 정할 수 없는 사람이니 잠시 상의를 하겠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이럴 때를 대비해 서신을 남겨두었는데 대체 뭔 내용인지 뜯어나 보자.
난 참전 결사반대이지만 주상전하는 아닐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