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45화
2부 23장 2화 근자구주행(2)
어차피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일종의 지침서이다. 이 서신에 적힌 내용을 기준으로 판단하되 여의치 않다면 어느 정도 대응을 바꾸라는 뜻이지 않겠는가.
“주상전하께서 그리 꽉 막힌 분도 아니고 현장의 일은 현장 담당자에게 일임하는 분이니 별문제는 없겠지. 현장의 사소한 일까지 간섭하는 사람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걸.”
그런 왕이 있기는 할까. 아주 사소한 일까지 직접 처리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우고 끙끙 앓으며 아래 신료들을 닦달하는 철두철미한 왕이.
하긴 조선에서는 그런 왕이 있어도 입신체비가 필수이니 적당히 열심히 하는 선에서 넘어가겠지.
선실에는 입신체비를 위한 소역기는 물론이요, 신성로마제국 사절단과 세스페데스가 번역해 준 라틴어 교재와 스페인어 교재가 있었다.
라틴어는 초보자 딱지는 떼었지만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스페인어는 반드시 익혀야 할 서적이다.
세스페데스가 주석을 달아놓은 스페인어 교재를 읽으니 어느새 배가 대만을 넘어서서 베트남으로 향하였다.
바다가 점점 거세지는 와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는데 확인해 보니 이윤범이었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소역기를 가리키며 한소리를 하였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풍랑이 거세지기 시작했으니 개인의 역기는 배 아래에 두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서른 근(19.2㎏)의 소역기를 사용하면 작아 보이지만 이 배에서 입신체비를 익힌 자만 일백여 명이 넘습니다. 잘못하면 배의 무게가 어그러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하면 입신체비는 어디서 해야 하오.”
“갑판 아래에 대역기와 소역기를 모아 두었으니 거기를 입신체비장으로 쓰시면 될 것입니다. 조금 좁고 숨을 쉬기 힘들겠지만 방도가 있겠습니까.”
이윤범 입장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이 파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이 배에 타고 있는 자는 왕의 조카에 충신 중의 충신을 시작으로 각계각층의 인재가 모인 곳이니 나라도 안전을 택해야겠지.
“알겠소이다. 다만 소역기는 내가 직접 자루에 넣어 따로 두겠소.”
평상시에 즐기던 행동도 못 한다면 맨몸으로 공좌(스쿼트)를 하며 책을 읽으면 되겠지. 아니면 패도(플랭크) 자세로 책을 읽어도 되니 몸을 단련할 방법은 넘쳐난다.
조금이라도 중량을 즐기려고 갑판 아래로 내려가니 형님이 바삐 움직이고 계셨다. 형님은 이번 사절단에 스스로 나서길 자처하여 섭생을 담당하고 계셨다.
하지만 왜 이 시점에 창고에서 물건을 찾으시는지 궁금했다.
“형님이 이번 사절단을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하였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실 아래에 왜 직접 들어오셨는지 궁금하군요.”
“네가 사절단의 실질적 대표가 아니더냐. 이역만리를 오가며 중요한 섭생을 그르칠 수 있는데 이 형이 부족한 솜씨라도 발휘해 보아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준비했다.”
이런저런 물건이라 했는데 형님이 꺼낸 것은 웬 가죽 조각 같은 녀석이었다. 얼핏 보면 소가죽을 얇게 잘라낸 것 같은데 이걸 자루에 왜 담아 두었나.
하지만 형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본래 선상에서는 근어(황태)를 잘게 잘라 보푸라기를 만들어 국물을 우려내 탕국을 만드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에 준비한 식사는 곰탕이다.”
“형님, 다른 장소도 아니고 선상에서 곰탕을 어찌 끓이신단 말입니까. 상원군 대감과 저를 비롯한 관리들이야 먹을 수 있겠지만 다른 누구라도 곰탕을 먹고 싶을 겁니다.”
선상에서는 아니다. 선원들의 불만이 쌓일 일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곰탕은 이 불만을 폭증시킬 수 있는 녀석이다.
불을 사용하기 힘든 선상에서 땔감을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여기다 뼈와 고기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계속 끓이며 물을 보충하니 아마 곰탕 한 대접이라도 만들려면 선원 세 명이 마시고 남을 물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형님은 천연덕스럽게 답하였다.
“녀석도, 네가 이역만리로 떠날 줄 알고 주상전하께 청하여 선원들의 섭생을 도울 수 있으며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음식을 마련해 두었다. 훗날 호주와 미주로 사람을 보낼 때에 요긴히 쓰일 수 있는 녀석이라 하셨지.”
“호주와 미주로 사람을 보낼 때에 요긴히 쓰일 수 있는 녀석이라 하셨습니까?”
“내가 설명하기는 힘들고 직접 보는 것이 좋겠구나. 수양대군께서 섭생을 중요시하라 하였는데 바다 위에서도 뭍과 같이 온전한 섭생을 즐기는 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다.”
또 내 이전에 빙의한 사람인 수양대군의 이야기가 나왔지만 수양대군의 저런 면모는 존경할 만하였고 내 방침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단순히 보디빌딩만 퍼트리지 않고 더욱 중요한 식습관의 방향을 틀었다.
비타민에 대한 원시적 고찰을 남겨서 이를 조선에서 경험적으로 입증하게 만들었으며 필수 영양소에 대한 고찰도 실시하였다.
식품 영양학으로 어느 정도 두각을 드러내니 불현듯 생각나는 놈이 있었지만 그 근육덩어리는 수양대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
형님이 한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 가죽조각 같은 녀석을 크게 세 줌 정도 가마솥에 넣고 소금이 묻어나오는 두툼한 육포를 두 배 정도 투입하고 무말랭이를 넣은 다음 불을 올렸다.
뭔 인스턴트 음식인가?
“형님? 이래서야 곰탕이 아니고 육포탕이 될 것 같습니다. 씹는 맛은 있겠지만 소금 국물이 아닙니까?”
“바로 보았구나. 소금이 잔뜩 들어간 육포를 따듯한 물에 불리면 간이 잘 맞는 고기가 되는 법이지 않더냐. 그리고 방금 전에 넣은 물건은 한육탕(暵肉湯)이라는 녀석이다. 어떻게 만든 물건인지 알겠느냐.”
가마솥의 물이 점점 달궈지며 국물의 색이 곰탕의 뽀얀 색은 아니지만 고기를 대충 우려낸 듯이 점점 갈색에 가까운 뿌연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구수한 고깃국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한(暵: 말리다)육이라 하시면 설마 고깃국물을 죄다 말렸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보았구나. 사태와 소뼈를 우려낸 탕을 곱게 걸러 가마솥에 넣고 아주 약한 불로 사흘 내내 말리면 가죽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비록 뽀얀 국물은 아니지만 섭생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지.”
형님이 만든 것은 원시적인 비프 스톡이다. 각종 요리 프로그램에서 서양 요리를 할 때마다 ‘비프스톡을 하나’라면서 엄지손가락 크기의 갈색 덩어리를 넣지 않는가.
이게 왜 이 시대에 등장하나 했는데 생각해 보면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끈기를 가지고 육수를 계속 졸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국물의 간을 보는 형님은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형님 이건 희대의 발견입니다. 이걸 곰탕이 아니고 돼지 국물이나 닭 육수 혹은 채소 육수를 우려내서 쓴다면 세상 어디서라도 따스한 물만 있으면 맛좋은 탕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생각하여 보니 사람이 어디 곰탕만 먹고 싶겠느냐. 뜨끈한 돼지육수에 들깨와 방아 잎을 넣으면 등뼈탕이요, 말린 닭가슴살을 넣으면 어설픈 삼계탕이 되는 법이지. 채소 육수야 세견물(비타민)이 빠져나가겠지만 맛은 있을 거다.”
본래라면 한나절 내내 끓여야 할 곰탕이지만 물이 끓어오를 때쯤 가마솥 가득 어설픈 곰탕이 완성되었고 형님은 이를 아래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배식하라 하였다.
커다란 사발에 갓 지은 밥도 아니고 배 위에서 널리 쓰이는 찐 쌀이 담기고 위에 국물이 부어지자 타닥거리는 소리가 나며 밥알이 모조리 소고기 국물을 머금었다.
어느덧 멀미에 시달리던 상원군은 곰탕을 보더니 표정부터 변하였다.
“세상에! 부친께서 사옹원의 유 제조(提調: 종2품 관직)께서 음식을 만들면 절육 중인 사람은 일백 보 근처에도 가지 말라 하였는데 이 험난한 배 위에서 곰탕을 만들어내시다니요!”
“올바른 방법으로 만든 곰탕은 아니지만 드셔 보니 어떠합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조금 삭은 냄새가 나고 부족한 점이 있지만 이건 처음 만든 물건이니 어쩔 수 없지. 다들 맛도 없는 선상 음식을 즐기다가 그럭저럭 맛 좋은 곰탕을 먹으니 기력이 넘쳐났으며 선원들은 아예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이런 음식을 험난한 환경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초기 개척민들이 먹는다면 크게 환영받으리라. 심지어 군문에 납품하기 위해 개인업자가 대량으로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물건이다.
다들 식사를 마치고 형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였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앞으로 다섯 달 동안 서반아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유 제조께서 저희 모두의 입을 즐겁게 하였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주상전하께서는 형님이 나서는 것을 만류할 수 있었지만 이를 내버려 두었다. 형님은 남이 지시하면 이를 억지로 수행할 뿐이지만 풀어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발전하는 사람임을 염두에 둔 것이지.
항해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여송에 들러 신선식품의 보급과 며칠간의 휴식을, 다시 조선이 투자하여 이제 더 이상 이용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말란가(말라카)에 들러 보급을 실시한 뒤 함대가 향한 곳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총독부가 위치한 인도 고아 항구였다.
* * *
고아 항구에는 이미 소식을 들은 스페인의 함선이 7척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항해에는 대양도 수영에서 사용하던 대장선과 휘하 순주선 4척, 그리고 순방선 5척으로 경진만란 당시 스페인 원정대와 필적하는 규모의 함선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턱대고 필리핀까지 쳐들어온 경진만란과 달리 이번 항해에 대해 명나라에는 단순한 교역 업무로 보고하였고, 스페인에는 공식 사절단 방문 일정을 보내놓은 상태이다.
“반갑습니다. 머나먼 조선에서 이 고아까지 방문하신 귀빈들을 다시 세상 저 머나먼 곳에 있는 스페인까지 안내하기 위해 방문한 알론소 데 바잔(Alonso de Bazán)입니다.”
“참으로 반갑소. 나는 이번 사절단의 대표이자 종친의 일원인 상원군 이청이라 하오.”
어설픈 스페인어로 답한 이청과 악수를 나눈 알론소 데 바잔이라는 자는 상원군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끊었다.
이런 풋내기 왕족이야 적당히 대공(prince)이라는 직위만 붙여서 대접하면 충분하니 실질적 대표를 나라 인식한 것이다.
명백히 군사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해 포구 대다수를 합판으로 막아 두었고 -어차피 못 두어 개만 뽑으면 화포를 쏠 수 있다- 천천히 접근하였으니 우리의 뜻을 분명히 파악하였으리라.
그는 나에게도 인사를 하더니 정중히 말했다.
“드디어 펠리페 2세 전하께서 기뻐하실 일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나저나 열 척의 배라니 저희 입장에서는 조금 걸리는 수군요.”
“배의 총수가 짝수가 되어서 불안하오? 하지만 당신들의 함선과 같이 움직이면 홀수가 되는 법이 아니겠소. 이를 다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거요.”
뱃사람 특유의 미신은 종교적으로 굉장히 편협한 나라인 스페인도 피할 수 없었나 보다.
아무튼 해석이 좋았으니 알론소 데 바잔은 크게 웃으며 답하였다.
“앞으로 석 달은 걸릴 항해에 기항지는 충분히 마련해 두었을 것이라 믿겠습니다. 하긴 조선이 세웠던 탄주항이나 한명회라는 항해자가 이름을 정한 희망봉도 있으니 이후에는 저희가 지정한 장소에 방문하시면 될 겁니다.”
“다른 물건은 되었고 세견물이 풍부한 음식을 미리 준비해 두었길 바라오. 값이야 충분히 치를 수 있게 은자는 충분히 마련해 두었소.”
“물론입니다! 펠리페 2세께서 친히 서명하였으니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순간 당혹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기항하는 항구는 보름 간격으로 기항하니 대충 6곳에 달하는데 여기에 보급품을 전하는 일을 왕이 직접 서명했다고?
그의 말 대로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보급이 이루어지고 바로 배의 청소와 휴식이 반복되었다. 일 처리 하나는 신속해서 좋지만 이걸 왕이 일일이 지시하였다면 최소 며칠 동안은 야근을 반복했으리라.
이윤범도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이거 주상전하의 방식과 완전 정 반대가 아닌가. 주상전하께서는 대계(大系)를 세우시고 상세한 일을 아래에 일임하시는 분인데 펠리페라는 왕은 영 딴판이로군.”
“이 수사께서 올바로 보셨습니다. 부친께서도 건물을 세울 적에 크나큰 도본만 작성하시고 상세한 도본은 모조리 세부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임하는 법이라 하였지요.”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지만 항해 하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마침내 음력 1587년 2월 11일, 조선의 함대는 기항을 허락받은 장소에 도착하였다.
항구는 거대한 만이었는데 입구부터 빼곡하게 배가 도열해 있고 대다수가 군선이었다.
군선들은 우리를 에워싸더니 예포를 쏘며 맞이하였고 환호성마저 들리고 있었다.
“우리의 기를 꺾으려는 심보인지 아니면 단순한 환영회인지 알 길이 없군요.”
“기를 꺾으려 하였다면 아마 저 머나먼 원양부터 수많은 함선으로 호위한답시고 포위하여 움직였을 거요. 저 수많은 함선이 모인 이유를 생각하여 보니 짐작이 가는 바가 있구려. 안평대군이 남긴 라마국연행기를 생각해 보시오.”
“백여 년 전 오사만국의 행적을 본받아 저렇게 많은 함선을 자랑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기 모인 선박 상당수가 무장상선입니다. 만 안쪽을 보십시오.”
만 바깥에 나와 있는 서른 척의 함선은 명백히 우리의 도착을 환영하며 예포를 쏘아댔지만 만 안쪽에 있는 함선들은 대부분 크기가 거대한 무장상선이었다.
이를 아는지 알론소 데 바잔은 배의 반대편에서 크게 외쳤다.
“저희 펠리페 2세 전하께서는 저지대의 반군과 그들을 후원하는 잉글랜드의 여왕을 징벌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카디스(Cádiz)에 모인 함대는 몇 달 뒤 징벌에 나설 용맹스러운 함대이지요.”
지금 뭐라 했지? 조선 함대를 조만간 총공세를 실시할 군함들이 모인 항구에 정박시킨다고? 그럼 역공을 당할 염려도 있지 않나?
물론 카티스라는 지역 자체의 방비는 상당히 우수하니 함부로 공격할 수 없다.
해안과 만을 빼곡하게 에워싸고 망루와 포대를 배치하였으니 어중간한 해적은 접근하지 못하리라.
설령 정규군이라 해도 포대를 무력화시키고 상륙전을 벌이려면 이순신쯤 되어야 가능하겠지.
하지만 이윤범은 이를 신랄하게 비평하였다.
“이렇게 한 장소에 모든 함선을 둔다면 화공에 상당히 취약하겠군요. 입구는 좁고 무장상선들이 하나같이 비대한 데다 화물을 다수 적재하였으니 손해가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그런 일은 염두에 두었습니다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엘리자베스는 얼마나 인복(人福)이 없는지 해적 놈을 해군 장성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한 자가 약탈을 실시하지 화공을 실시하겠습니까?”
해적 출신 해군 장성이라는 말을 듣자 누군가 떠오르기는 했다. 유럽 여행을 하며 영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고 당시 템스 강에 떠 있던 해적선의 복제품을 보았던 기억이.
내가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보았던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데 선장 이름이 프랜시스 드레이크이며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더라.
이걸 염두에 두니 소름이 돋아 올라왔다.
포대와 스페인 군함들의 보호를 받아 유유히 정박하고 있던 조선 함대가 화공에 휩쓸려 모조리 불타 버리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대놓고 드러낼 순 없으니 천연덕스럽게 이윤범에게 지시를 내렸다.
“듣고 보니 합당한 말이구려. 하지만 아국의 함선이 거대한 데다 다루는 방식도 상이하니 급할 때에는 움직이기 힘들지 않겠소. 그러니 다른 항구에 정박하면 아니 되겠소?”
“조선에서 이렇게 저희를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조만간 세비야에 자리를 내어 조선 함대를 편안히 정박시킬 수 있게 배려하겠습니다.”
다섯 달 이상을 바다 위에서 시달렸지만 대부분 건강은 멀쩡했다. 몇몇 선원들이 괴혈병 초기 증세를 보였지만 어차피 괴혈병은 신선한 채소를 먹으면 금방 치료되는 법이다.
카티스라는 항구에 도착하자 수많은 환영 인파들이 나왔다. 대부분 인근에서 소집된 백성들 같은데 중세나 대항해시대를 표현한 다큐멘터리에서 보아왔던 장면보다 뭔가 조금 생동감이 적고 약간의 악취가 풍겨왔다.
“하여튼 분변을 그대로 땅바닥에 버리는 풍습을 유지하다니. 어찌하여 분변을 수거하는 이가 없는지 궁금하구려.”
상원군은 깔끔한 한양 도성을 생각하며 불평하였지만 다른 이들도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 대다수는 서양에 직접 도착한 적은 없고 오로지 안평대군의 저서인 라마국연행기를 보고 서양에 대한 정보를 취득했을 뿐이다.
“이거 왜 이리 작지?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작구려.”
“우리 집 머슴들보다 큰 사람이 없는데. 분명 안평대군께서 남기신 서적에는 라마국을 비롯한 서방 사람들이 아국의 사람보다 키가 두 치는 크고 어깨가 세 치는 넓다 하였는데.”
“거 우리가 보아왔던 선원들이 평균보다 큰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데.”
안평대군은 아직 조선이 근육으로 완전히 물들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며 그 시대는 조선이 아직 발전하는 중이라 식습관도 불안정해 백성들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왜소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백 년이 지나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먹는 이들이 조선 백성들이다.
결국 평범한 스페인 사람들은 조선 백성과 견주어도 체격이 작은 편이고 입신체비를 익힌 양반들 기준으로는 성에 차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 머리 위에 쇠로 만든 시커먼 투구를 쓰고 활을 수백 야드나 날릴 수 있다던데 덩치를 보니 참말 같군.
-세상에 어찌 저리 담대한 이들이 많은가. 조선에서 사절단을 보내왔다 하던데 사절단이 아니고 다 장수 아니야? 프랑스 기사들을 데려와도 저들보다는 작겠어.
사절단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한 걸음 움직이니 꽃을 던지며 환영 인사를 올려야 할 스페인 백성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 버렸다.
앞으로 벌어질 근육적 충격을 생각하니 저절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