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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443화 (443/573)

근육조선 443화

2부 22장 5화 다시 업무로

권율이 다시 어사주를 한 잔 받으니 주상전하께서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업무가 지나치게 많이 남아 있다 하였다.

생각해 보니 조정에 쌓여 있는 업무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래, 호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니 조정에 산적한 업무가 있는데 이를 고려하지 아니하였군. 당장 서반아에도 사절단을 보내야 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어.”

“시급한 일은 아닙니다. 조선이 막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니 조만간 일본에 보복을 실시할 것이 아닙니까. 보복전을 치른 이후 영토에 대한 협상을 하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보복이라 하였는가? 왜국이 아국에 무릎을 꿇고 향후 백 년, 아니, 수백 년 이상을 고개도 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당장 공격을 실시할 이유가 없네.”

“수백 년이라 하셨습니까?”

제로니모도 놀라고 이이도 눈썹을 꿈틀거리며 주상전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수백 년을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하나 궁금했는데 주상전하는 정말 냉정한 답을 내놓았다.

“왜국에 재차 내란을 일으켜 아국의 괴뢰(傀儡)나 마찬가지인 이를 대군(大君: 쇼군)으로 발탁할 것이네. 힘으로건 다른 수단으로건 목덜미를 휘어잡으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조선의 힘은 강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레콘키스타를 실시하며 이슬람을 축출하였듯이 일본인을 밀어내고 땅을 점거하면 될 것입니다.”

“왜국의 인구는 적게 잡아도 칠백만 명 이상, 많게 잡으면 일천만 명이 넘어간다네. 아국의 장수 모두가 백기(白起)나 항적(項籍: 항우)이 된다면 왜국의 모든 사람을 죽여 점거할지도 모르겠군.”

백기라는 말이 나오자 정걸을 시작으로 장수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며 나도 속이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백기는 항우와 함께 학살의 달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런 미치광이들이 여럿 모인 나라가 아니고서는 무력으로 점거해 반항의 싹을 꺾는다는 발상 자체를 하면 안 된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항우나 백기를 스페인 사람인 제로니모가 알 길이 없기에 주상전하는 설명을 추가하였다.

“왜인들이 자신들의 고집을 꺾고 후대가 온전히 아국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만들려면 모든 장정을 죽여야 하니 최소 이백만 명을 죽여야 한다네. 하지만 그런 학살을 실시해도 훗날이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통치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조선의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이 반란을 일으키겠지.

제로니모는 잠시 상상해 보더니 술이 올라와 붉어진 얼굴을 마룻바닥에 박아대며 사과를 하였다.

“제가 경험이 일천하여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머나먼 동방의 인구가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으니 부디 저의 미숙한 답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앞으로 조선에 머물 예정이라 하였으니 많이 배워두게. 일단 왜국에 대한 정벌은 실시하되 정벌이 끝난 왜국을 지배할 세력을 만들어둘 것이네. 그리된다면 이 세력 하나만 숨통을 틀어막아서 왜국을 온전히 조종할 수 있겠지.”

“그러하면 일종의 종속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보았다네. 이미 상삼씨(우에스기)와 연합하여 왜국의 내부를 뒤흔들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지는 말게.”

아마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고란과 제자인 타치바나는 지금쯤 우에스기 가문과 협력해 착실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겠지.

주상전하께서는 나와 이순신을 향해 눈을 마주치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유성룡의 제자 입화종무(立花宗茂: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이순신 휘하에서 군문에 발을 들였던 고란에게 얼마 전에 서신을 받았네. 어느 정도 성과를 보여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다 하더군.”

“그들이 왜국으로 건너간 지 여섯 달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성과가 있다니. 대체 왜국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옵니다.”

“아국의 함대가 휘말린 지진이 왜국의 대군은 물론이요, 원정을 나간 이들이 하늘의 뜻을 거슬러 일어난 일이라 여기고 있다더군. 지금이야 아국의 침략을 염려해 뭉쳐 있지만 조만간 다시 내분을 일으킬 것이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믿을 구석이 없다면 세상 모든 게 무서운 법인데 아주 잘된 일이지.

하지만 주상전하는 못내 아쉬운 듯이 말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으니 상삼씨의 평판이 올라갈 기세가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이군. 본래 상삼씨를 왜국의 새로운 대군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아국의 세력으로 여겨지니 대군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일세.”

대체 누가 일본의 새 쇼군이 될지 궁금하였지만 최소한 무재(武才)는 없어야 하리라. 쓸데없이 조선에 대한 반항심을 키우지 말고 전쟁 이후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지.

이후 어떠한 수단이건 조선에 계속 이익을 전해주는 전령이자 일본을 조선의 시장으로 만드는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리라.

주상전하는 마지막으로 잔을 올리며 연회의 끝을 내었다.

“앞으로 수많은 업무가 산적하여 있다네. 군문에 있는 이들은 전공(戰功)에 심취하지 말고 아국이 개선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군사를 조련하게. 또한 좌상인 이이와 유성룡은 전화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도록 하게.”

“전하의 명을 따를 것이옵나이다.”

“왜변으로 인한 피해를 모두 복구한 이후에도 업무가 넘쳐나니 언제나 힘을 들이되 여력을 남겨두게나. 앞으로 십여 년 동안 세상의 정세도 조정의 내부도 급격히 변해야 하네.”

전후 처리가 끝나도 업무가 산적해 있다니 제로니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스페인과 지속적으로 미주 영토 분쟁을 하다 경진만란으로 가까스로 봉합된 양국 관계이다.

당연히 사절단은 보내야 하는데 그 대표는 내가 되리라.

앞으로 쌓인 업무는 닷새 뒤에 조정에 출근해서 처리하면 되겠고 먼저 권율이 뭔 생각을 하였는지가 궁금했다.

* * *

다음 날, 권율의 집에 도착하니 권율도 술에 절어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였고 가까스로 사위인 이항복이 내어준 꿀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뒤에야 거의 기어 나오듯 나를 맞이하였다.

“자네도 이제 지천명(知天命: 50세)이 되었는데 너무 무리하지 않았나. 슬슬 근손실이 심해지니 더욱 몸조리를 잘하여야 하네.”

“기나긴 전쟁이 끝나서 너무 마음이 풀려있었군. 송강(정철의 호)이 그렇게나 술을 마셔대는데 나도 기분이 풀려서 술을 계속 마셨다네. 그나마 술주정을 부리지 않아 다행이지.”

“자네가 호주 관찰사로 부임하겠다는 말이 술주정이 아니겠는가. 왜 그런 말을 하였는가.”

“그나마 그 일이 편해서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공신(功臣) 목록에 올랐으면 그 공을 앞세워 다른 업무에 종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가 호주로 가면 나는 어디로 가겠는가?”

권율이 갈 곳은 일본 원정 아니면 스페인 사절단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일본 원정의 주장(主將)은 누가 뭐라 해도 이순신 외에는 없다.

권율은 보급과 내란으로 엉망이 된 육로를 진격하는 지루한 작업만 남아 있겠지.

그렇다면 스페인 사절단에 가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는데 스페인 사절단의 주요 업무가 떠올랐다.

미주 영토분쟁을 정리하고 조선이 자신의 영토로 삼을 땅을 얻어내야 하리라.

당연히 답이 나왔다.

“자네 설마 외교(外交)와 관련된 일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가?”

“이미 오십이 넘은 나이인데 자신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무얼 알겠는가. 나야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측하고 이에 대응하는 것이 전부라네.”

권율은 전쟁이나 통치에 있어서는 재능이 충분하지만 외교적 자리에 있어서는 조금 부족하긴 하다. 외교는 평범한 대화로 천 리 땅을 얻어내고 상대를 격동시키지 않으면서 후려치는 완급 조절이 필요하니까.

아마 권율이 스페인까지 가서 협상을 한다면 서로 정해진 땅만 얻어내고 서로 간에 이득이 없이 돌아오는 결과가 나오겠지.

이를 알고는 있었는지 권율은 다시 꿀물을 마시며 말하였다.

“하지만 자네는 아닐세. 자네가 명국에 나아가 역적 장가 놈(장거정)을 모질게 꾸짖은 일을 들었을 때에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아직도 내 마음을 격동시키고 있다네. 자네가 조만간 미주에 나아갈 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먼저 호주로 나가는 것일세.”

“나야 증좌를 잡아내고 광인처럼 달려든 것이 전부이네만.”

“하지만 이번 왜변에서 왜국의 실세와 줄이 닿아 있는 등길랑(히데요시)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혜안을 서반아와의 협상에서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권율은 육체적으로 부담되지만 정신적으로는 별 부담이 없다.

어차피 호주 이주 계획은 먼 거리에 사람들을 이주시킬 때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이나 효과를 시험하는 자리이다.

전염병이 일어나거나 기후 변동으로 사람이 떼죽음을 당한다면 권율의 책임이 되겠지만 수없이 일어나는 문제는 조정의 지원으로 해결하면 충분하니까. 일종의 시범 사업이라 정신적 부담은 매우 적다.

반면 나는 졸지에 스페인 사절단의 대표가 되었으니 몸은 편해도 양어깨에 걸린 책임감은 막중하다 못해 말 한마디가 향후 조선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도 권율의 마음을 이해하고 꿀물을 비우고 답하였다.

“내 미주에 아국이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는 강역을 얻어낸 이후 개척할 것이니 부디 호주를 개척하며 많은 것을 얻어내게. 혹여나 두창(천연두)을 막을 방법을 마련하면 더욱 좋겠군.”

“그러한 방법이 있다면 내가 두창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네. 여하튼 앞으로 몇 년 동안 볼 방법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군.”

아마 권율은 내년부터 개척을 시작할 것이니 향후 삼 년 이상 호주에 머물며 초기 개척을 진행해야 하리라.

내가 스페인에서 돌아오고 바로 미주로 향한다 치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권율을 만날 방법은 없다.

* * *

예상대로 조정에서 나와 이이에게 지시한 사항은 전후처리였다. 우선 전후처리를 하고 모든 업무가 끝날 시점에 다음 일에 대해 논의하자는 이야기였다.

전후처리는 만력제가 보내온 성은으로 손쉽게 마무리했다. 본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재정을 쥐어짜 내 억지로 누더기를 기워내는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장 먼저 백성들을 마을로 돌려보낼 차례였다. 칠곡부터 시작된 이 백성 귀환 작업은 너무 쉽게 진행되었고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김해까지 내려왔다.

해가 지나 1586년이 되었는데 아마 올해 6월이면 이번 일도 마무리되리라.

“다음! 용덕마을 박 서방은 호패를 가져오라 하였는데 왜 아내의 호패를 가져왔나!”

“산성에서 분실하였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의 호패를 대신 가져왔습니다.”

“호패를 분실한 직후 신고하지 않으면 치도곤을 내려야 하지만 변란이 일어난 이후이니 감안하겠네. 하지만 신분을 명확히 증명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낼 것일세.”

사방으로 파견된 관원들이 보고를 올렸고 나는 소모할 물자를 현장 상황을 보고 얼마나 올려야 할지 파악하는 일이 전부였다.

이윽고 한 관원이 중간 집계를 합산하여 보고를 올렸다.

“가옥 칠천오백 채가 파손되고 이천여 채가 아예 소실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커다란 피해는 없으며 기껏해야 유생들의 집에 있던 제기(祭器)나 금품이 도난당한 것이 전부입니다.”

“유생들이야 주상전하께서 이번 전쟁에 사용한 자금을 감안하여 은혜를 내린다 하였으니 아예 은으로 제기를 만들지도 모르겠군. 그나저나 장부는 모두 챙겼는가?”

“간혹 군적(軍籍)이 손실된 경우도 있지만 산성에서 물에 젖어 손실된 일이 전부라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합니다. 대부분의 장부가 멀쩡히 남아 있으니 아예 호조에서 전쟁 이후 호구조사를 실시한다 하더군요.”

영직이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임진왜란 이후 토지대장은 물론 노비대장과 각종 서류가 모조리 불타 세금을 거둬들일 방법이 없어 조선 재정이 아예 엉망이 되었다고.

그나마 선조가 인성과 책임감은 없어도 능력이 있는 왕이기에 이를 억지로 복구했다 하던데 여기서는 아니다. 백성 대다수에게 호패가 있고 장부도 불타지 않았다.

백성들은 호패로 신분을 증명하고 관원의 안내를 받아 수레에 쌀을 가득 올리고 옷을 만들 수 있는 옷감마저 챙겨갔다.

물론 피해자가 있으니 집이 아예 헐려 버린 사람들이다.

“이놈의 왜구새끼들! 내 집을 통째로 날려먹었네! 돌아가도 뭘 어찌하지를 못하겠습니다!”

한 가족이 기껏 수레를 끌고 마을로 들어갔다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 나왔다. 일본군이 큰 집은 머물며 휴식을 취했지만 작은 집은 뗏목을 만들거나 마방책에 쓸 목재를 얻어내기 위해 부숴 버렸다.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한 일이기에 내가 손짓을 하자 관원이 재차 곡식을 가져오고 아예 임시로 쓸 수 있는 천막도 전달해 주었다. 사실 이건 다른 집에 더부살이하라는 돈이기도 하다.

“자네에게 쌀 석 섬을 더 지급하겠네. 가급적 집이 멀쩡한 이에게 한 해만 세를 들어 살거나 여의치 않다면 천막을 짓고 살도록 하게.”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슬쩍 눈치를 주자 지역 유지였던 유생이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다가갔으니 아마 남는 방에 살게 어느 정도 배려를 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다른 유생은 눈을 부라리며 산에서 내려왔다.

“왜변이 끝났으니 선산에 올라가 조상께 인사를 올리려 하였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놈들이 얼마나 패악을 부렸는지 묘소를 모조리 헤집어놓았습니다!”

간혹 이런 일도 벌어진다. 마을이 텅텅 비어 약탈할 건수가 없는 일본군이 산기슭에 있는 묘지를 헤집어 부장품을 가져가려는 짓거리를 저질렀고 유골이 땅으로 드러난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부장품이야 작은 감실(龕室)처럼 고인이 사용하던 물건 몇 개나 넣어두는지라 무덤이 손상될 염려는 없다 생각했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아니었나 보다.

결국 분통을 터트리는 유생을 불러서 적당히 어르고 달랬다.

“고인의 무덤을 훼손한 왜적을 용서할 길이 없으나 그 왜인을 찾는 건 도성에서 김 서방 찾기보다 힘든 일일세. 그러니 자네에게 왜노(倭奴) 두 명을 붙여줄 것이니 마음대로 부리게나.”

“저희 집에는 노비가 없습니다.”

“자네의 분이 풀릴 때까지 노비로 삼다가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면천시키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왜인이 자네의 조상을 욕보였으나 이를 원한으로 삼아 엉뚱한 사람을 죽이면 아니 되는 법이지.”

가뭄에 콩 나듯 벌어진 일이라 큰 문제는 아니다. 미리 대기시킨 일본 출신 보인 두 명을 받은 유생은 가슴근육을 씰룩거리며 한 대 후려치려 하다가 꾹 눌러 참고 첫 명령을 내렸다.

“네놈들의 동료가 어지럽힌 무덤을 보수하는 것이 너희들의 첫 일이다.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내가 질식투(초크슬램)를 날릴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라!”

자신보다 키가 한 자(30㎝ 이상) 넘게 크고 어깨 둘레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거구의 유생이 성을 내자 보인 출신의 노비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산으로 올라갔다.

설령 이상한 마음을 먹어도 저런 놈 두 명을 유생이 제압하지 못하겠는가.

만력제의 은혜는 차고 넘쳐서 본래 전쟁 이후 피폐해진 논밭을 관리해야 할 백성들을 오히려 일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백성들을 다 돌려보낸 뒤 건물을 지을 이들에게 장비를 들려주고 지시를 하달하였다.

“가옥 서른두 채를 보수하고 열한 채를 세워야 하니 어서 산기슭에서 나무를 가져오게.”

“저희는 강원도에서 온 사람들이라 그저 든든하게 집을 만들 뿐입니다.”

“든든하건 뭐건 강원도의 집은 집이 아니던가? 큰 문제는 없으니 염려하지 말게나.”

왜변이 일어나기 전 승병(僧兵)들이 미리 소집되어 내 제안을 듣고 각 산성에 방화구획을 설정했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방화구획이 아니라 산기슭에 불이 번질 수 있는 곳의 나무를 잘라내고 적당히 거적으로 덮어둔 것이 전부이다.

결국 지금 산속에는 벌채하고 일 년이 지나 습기가 빠진 나무가 넘쳐나니 바로 가지를 쳐내고 껍질을 벗겨내 건물에 사용하면 되겠지.

마르지 않은 생나무를 다루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일 년 넘게 마른 나무는 손쉽게 나를 수 있는 법이다.

고작 다섯 달이 지난 1586년 5월 말, 동래까지 모든 전후처리 과정이 끝났다.

이 과정에서 왜인 포로들은 북경을 넘어 북원까지 팔려나가거나 여송으로 끌려가 탄광에 투입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이만 명에 대한 처우도 정해졌다.

“너희들은 북방으로 나아가 도로 건설에 투입된다. 십 년 이내에 도로를 만든다면 고향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나 그 기한을 넘긴다면 영영 돌아갈 수 없으리라.”

말이 10년이지 일한 만큼 빨리 돌아간다는 말에 다들 희망을 가졌지만 희망은 올해 겨울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리라.

이전에 큐슈에 침략했다 사로잡힌 일본 포로 3만 명 가운데 3,000명이 북방에서 도로를 건설하다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다.

모든 포로를 수군이 북방으로 옮기자 나를 필두로 한 스페인 사절단이 편성될 시기가 되었다.

대양도 수영을 담당하던 이윤범의 함대가 나와 함께 스페인으로 향할 예정이다.

내가 스페인에서 뭘 얻어낼 수 있을까.

#작가의 말

다음 에피소드 두 개는 시간 순서가 조금 엇갈릴 예정입니다.

스페인 사절단이 먼저 연재되지만 실제 시간대는 스페인으로 가는 시간이 있으니 순서가 뒤입니다.

권율의 호주 개척은 나중에 연재되지만 호주로 방문하는 시간이 있으니 앞이지요.

두 에피소드 중간에 일본 관련 에피소드를 3~4화 내외로 짤막하게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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